오사마 빈라덴

테러리스트, 국제 테러 조직 지도자, 이슬람 근본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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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석유 재벌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로,

국제 테러 조직 알카에다를 설립하고 이끌었습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서방세계, 특히 미국에 대한 폭력 투쟁을 주도했습니다.

2001년 9.11 테러를 포함한 수많은 국제 테러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결국 2011년 미국 네이비실 특수작전에 의해 파키스탄에서 사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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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오사마 빈라덴 출생]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사우디 왕가와 친분이 깊은 부유한 사업가 무함마드 빈라덴과 그의 10번째 아내 하미다 알아타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2m가 넘는 장신이었고, 그 또한 195cm의 장신이었습니다.

오사마 빈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사우디 왕가의 친구이자 부유한 사업가인 무함마드 빈라덴과 그의 10번째 아내 하미다 알아타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998년 인터뷰에서 오사마는 자신의 생일이 1957년 3월 10일이라고 밝혔습니다. 생모인 하미다 알아타스가 2m가 넘는 장신이었고, 오사마 빈 라덴은 그런 어머니를 닮아 195cm의 장신이었습니다.

1967

[아버지 무함마드 빈라덴 사망]

오사마 빈라덴의 아버지 무함마드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사고 원인은 미국인 조종사의 착륙 실수로 밝혀졌습니다.

오사마 빈라덴의 아버지 무함마드는 1967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는데, 이는 미국인 조종사가 착륙 실수를 해서였습니다.

1968

[학창 시절과 종교적 성장]

1976년까지 우수한 학생들을 교육하는 알타게르 시범학교를 다녔으며, 킹 압둘라지즈 종합대학에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공부했습니다. 독실한 와하브바 이슬람교도로 자라났습니다.

오사마는 독실한 와하브바 이슬람교도로 자라났습니다. 1968년부터 1976년까지 그는 우수한 학생들을 교육하는 알타게르 시범학교를 다녔으며, 킹 압둘라지즈 종합대학에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일부 보고에 따르면 그는 1979년 토목 공학, 1981년 행정학 학위를 받았다고도 합니다. 그는 부지런한 학생이었으며, 일부는 그가 3학년 때 학위를 마치지 않고 자퇴하였다고도 합니다. 대학에서 오사마 빈라덴의 관심은 종교였으며, 코란과 같은 이슬람교 관련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1974

[첫 결혼]

18세의 나이로 라타키아에서 나지와 가넴과 결혼했습니다. 나지와의 결혼은 9.11 테러를 앞두고 이혼으로 끝났습니다.

1974년 18세가 된 오사마 빈라덴은 라타키아에서 나지와 가넴과 결혼하였는데, 나지와는 2001년 9.11 테러를 앞두고 그와 이혼하였습니다.

1979

[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활동 시작]

대학을 떠난 후 파키스탄으로 가서 팔레스타인 학자 압둘라 아잠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전쟁 수행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의 사이클론 작전 당시 미국은 파키스탄 정보부를 통해 무자헤딘 지도자들에게 재정 및 무기를 지원했습니다.

1979년 대학을 떠난 빈라덴은 파키스탄에 가서 팔레스타인의 학자이자 지도자인 압둘라 아잠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전쟁 수행을 노렸습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의 사이클론 작전 당시 미국은 파키스탄 정보부를 통해 무자헤딘 지도자들에게 재정 및 무기를 지원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빈라덴은 파키스탄 육군의 3성장군이자 ISI의 수장이었던 하미드 굴과 알게되어 친분을 쌓았습니다. 미군이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였지만 민병들의 군사훈련은 전적으로 파키스탄 육군과 ISI에 의존하였습니다.

1983

[두 번째 결혼]

하디자 샤리프와 두 번째 결혼을 했으며, 이 결혼은 1990년대에 이혼으로 끝났습니다.

1983년 하디자 샤리프와 결혼하였으나 1990년대에 이혼하였습니다.

1984

[마크타브 알키다마트 설립]

빈라덴과 아잠은 아랍권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으로 자금, 무기, 전사들을 지원하는 조직인 '마크타브 알키다마트'를 설립했습니다. 빈라덴은 자신의 가문으로부터 상속받은 자금으로 성전에 참여하는 전사들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1984년 빈라덴과 아잠은 아랍권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으로 자금,무기,전사들을 지원하는 조직인 마크타브 알키다마트를 설립하였다. 알키다마트를 통해 빈라덴은 자신의 가문으로부터 상속받은 자금으로 성전(지하드)에 참여하는 전사들을 위해 파키스탄 정부 문서 작성 비용, 항공료와 숙식 비용을 제공하였다. 그는 파키스탄의 히베르 팍툰흐와에 캠프를 만들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과 소련을 공격할 전투원들을 훈련시켰다.

1985

[세 번째 결혼]

하이리아 사바르와 세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1985년 하이리아 사바르와 세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1987

[네 번째 결혼]

시함 시바르와 네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1987년 시함 시바르와 네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1988

[이복 남매 살렘 빈 라덴 사망]

오사마 빈라덴의 이복 남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살렘 빈 라덴이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오사마 빈라덴의 아버지 무함마드는 1967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였는데, 이는 미국인 조종사가 착륙 실수를 해서였다. 오사마의 이복 남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살렘 빈 라덴이 빈 라덴 가문을 이끌게 되었지만, 그도 1988년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비행중 비행기가 전선줄에 걸려 일어난 사고로 사망하였다.

[알카에다 창설]

미국인 작가 로렌스 라이트에 따르면, 이집트 이슬람 성전(EIJ)과 압둘라 아잠의 여러 상급자들 간의 회의를 통해 알카에다가 창설되었습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이후 성전 전사들, EIJ의 노하우, 빈라덴의 자금을 하나로 모아 조직을 설립했습니다.

미국인 작가이자 영화 극작가인 로렌스 라이트에 의하면, 이 집단의 진짜 이름은 기밀 유지를 위해 공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라이트는 알카에다가 1988년 8월 11일 창설되었으며, 이집트 이슬람 성전(EIJ)과 합둘라 아잠의 여러 상급자들간의 회의를 통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이후 성전 전사들, EIJ의 노하우, 빈라덴의 자금을 하나로 모아 설립한 것이라고 한다.

[알카에다 조직 목표 규정]

빈라덴이 참석한 회의 기록에 따르면 이미 알카에다라는 집단이 생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알카에다는 이슬람 당파 조직으로서 알라의 세계를 실현하고 종교적 승리를 추구한다고 선언했습니다.

1988년 빈라덴은 마크타브 알키다마트를 탈퇴하였다. 아잠은 아프가니스탄 전사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빈라덴 자신은 더욱 군사적인 성격의 역할을 맡기를 원했다. 그가 알카에다를 만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랍권의 전사들이 별개의 조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전투 조직과 통합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1988년 8월 20일 빈라덴이 참석한 회의 기록을 보면 이미 그 당시에 알카에다라는 집단이 생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알카에다가 이슬람 당파 조직으로써, 알라의 세계를 실현하고 종교적 승리를 추구한다고 하고 있다. 알카에다 조직 가입을 위한 조건은 '청각 능력', '올바른 태도', '복종', 그리고 '상급자에 대한 충성'으로 규정하였다.

1989

[소련군 아프가니스탄 철군]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자, 오사마 빈라덴은 1990년 '성전의 영웅'으로 불리며 강력한 소련을 꺾은 아랍 군단을 대동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귀국했습니다.

1989년 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자 오사마 빈라덴은 1990년 '성전의 영웅'으로, 강력한 소련을 꺾은 아랍 군단을 대동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귀국하였다.

1990

[사우디아라비아 귀국]

'성전의 영웅'으로 불리며 강력한 소련을 꺾은 아랍 군단을 대동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귀국했습니다.

1989년 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자 오사마 빈라덴은 1990년 '성전의 영웅'으로, 강력한 소련을 꺾은 아랍 군단을 대동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귀국하였다.

[쿠웨이트 침공과 사우디 왕실 비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 이라크 군대가 주둔하자, 빈라덴은 사우디 왕정을 찾아 미군 주둔에 반대하며 무자헤딘을 이끌고 사우디 방위에 참여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거부되었습니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 이라크 군대가 주둔하자 범아랍주의는 국내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자 제5대 국왕인 파드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방부 장관 술탄 이븐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를 만나 빈라덴은 '미국과 같은 비(非) 무슬림 국가들의 도움에 의지하지 말 것'을 주장하며 무자헤딘을 이끌고 사우디아라비아 방위 활동에 참여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안이 거부되고 사우디아라비아 왕정이 사우디아라비아 영토 내에 미군 주둔을 허용하자 오사마는 사우디의 미군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오사마는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두 개의 모스크의 땅에 외국 군대가 있는 것은 성지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믿었다. 그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를 비난하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그를 침묵시키고자 하였다.

[알카에다 조직원의 랍비 살해]

알카에다 조직원 엘 사이드 노사이르가 뉴욕에서 랍비 메이어 카하네를 살해했습니다. 노사이르는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파 사건에도 연루된 것으로 자백했습니다.

노사이르는 결국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파 사건에 대한 연계를 자백하였고, 1990년 11월 5일 뉴욕에서 랍비인 메이어 카하네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알카에다의 첫 미국 본토 테러 계획 적발]

미국 FBI가 알카에다 조직원 알리 무함마드와 연계된 뉴저지의 엘 사이드 노사이르 자택을 수색하여 노사이르를 체포하고 뉴욕시 고층 건물 파괴 등의 테러 계획 증거들을 압수했습니다. 이는 알카에다가 무슬림 국가 외 지역에 대한 테러를 계획한 첫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군을 받아들인 사건을 계기로 빈라덴은 서방세계에 대한 공격행위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90년 11월 8일 미국 FBI는 알카에다 조직원 알리 무함마드와 연계된 뉴저지의 엘 사이드 노사이르라는 자의 자택을 수색하여 노사이르를 체포하고 뉴욕 시 고층 건물을 파괴하는 등의 테러 계획 증거들을 압수하였다. 이는 알카에다가 무슬림 국가 외 지역에 대한 테러를 계획한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1992

[사우디아라비아 추방 및 수단 망명]

미군을 받아들인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다가 결국 국외 추방 명령을 받고 알리 무함마드의 주선으로 북아프리카 수단으로 건너가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빈라덴은 계속하여 미군을 받아들인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다가 결국 사우디아라비아 국외 추방 명령을 받았다. 그는 1992년 알리 무함마드의 주선으로 북아프리카의 수단으로 건너가서 살았다.

[보스니아 무자헤딘 지원]

보스니아 전쟁 중 버려진 공장에 있던 '엘 무자헤드'라는 이름의 무자헤딘 부대에 수백 명의 지원자들이 가담했으며, 빈라덴은 수단에서의 사업 자금으로 신참들을 수송하는 비용을 조달했습니다.

사라예보 시정부가 오사마 빈라덴과 연계된 자들을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보호하고 있었음이 드러난 이후 전직 미국 고위 당국자는 2001년 10월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가 테러리스트들의 은신처로 이용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1997년 폴란드의 일간신문 <제치포스폴리타>(Rzeczpospolita)는 정보부의 보고를 인용,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내에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위한 훈련장이 있다는 내용을 보도하였다. 1992년 버려진 공장에 있던 '엘 무자헤드'라는 이름의 무자헤딘 부대에 수백명의 지원자들이 가담하였다. 중동의 정보기관에 따르면, 빈라덴은 수단에서의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으로 신참들을 수송하는 비용을 조달하였다. 이 중에는 카림 사이드 아트마니도 있었는데, 미국 내 폭파 사건을 계획한 알제리인 집단의 문서를 다루었던 사람이었다.

[아덴 골드 미호 호텔 폭파 사건]

2명이 희생된 아덴 골드 미호 호텔 폭파 사건에 빈라덴이 개입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사건은 빈라덴이 개입된 최초의 폭파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빈라덴이 개입된 최초의 폭파 사건은 2명이 희생된 1992년 12월 29일의 아덴 골드 미호 호텔 폭파 사건으로 추측된다. 사건 이후 알카에다는 무고한 인명을 살해한 이유를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맘두흐 마무드 살림이 발행한 <종교 칙령 fatwa>에 따르면, 적의 근처에서 희생된 사람은 사후에 정당한 보상을 받게 되며, 만일 그가 좋은 무슬림이었다면 천국에, 비신자이거나 악인이었다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하였다. 이 칙령은 모든 알카에다 조직원들에게 발행되었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다.

1993

[세계 무역 센터 폭파 사건 연루]

알카에다 조직원 엘 사이드 노사이르가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파 사건에 연계되었음을 자백했습니다.

노사이르는 결국 1993년 세계 무역 센터 폭파 사건에 대한 연계를 자백하였고, 1990년 11월 5일 뉴욕에서 랍비인 메이어 카하네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1994

[리비아, 인터폴 수배령 발부]

리비아는 1994년 3월 10일 리비아에서 독일 연방정보부 직원을 포함한 2명의 독일인을 살해한 혐의로 빈라덴과 기타 3명에 대한 첫 인터폴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1998년 3월 16일 리비아는 지난 1994년 3월 10일 리비아에서 독일 연방정보부 직원을 포함한 2명의 독일인을 살해한 혐의로 빈라덴과 기타 3명에 대한 첫 인터폴 수배령을 내렸으며, 빈라덴이 사망하였을 당시에도 리비아 정부는 이 수배령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시민권 말소]

극단적 폭력을 사용하는 이슬람 성전 세력과의 연대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 시민권을 말소당했습니다. 이로써 부유한 가문의 지원도 완전히 끊겼습니다.

극단적 폭력을 사용하는 이슬람 성전(지하드) 세력과 연대한 덕에 오사마 빈라덴은 1994년 사우디아라비아 시민권을 말소당하였으며, 부유한 가문의 지원도 끊겼다. 수단 정부 또한 빈라덴을 추방하고자 애썼다.

[사우디 왕가의 재정 지원 중단]

사우디 왕가에서 수단에 사절을 보내 빈라덴의 여권을 요구하고, 연간 7백만 달러에 달하던 재정 지원을 중단할 것을 설득했습니다. 이로 인해 빈라덴은 사우디 왕실의 지원을 잃게 되었습니다.

빈라덴은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새로운 무자헤딘 작전 기지를 설립하였다. 그는 수단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고, 1994년 3월 5일 국왕인 파드와 수단에 사절을 보내 빈라덴의 여권을 요구하였으며, 그의 집안에는 연간 7백만 달러에 달하는 재정지원을 중단할 것을 설득하였다.

1995

[이집트 대통령 암살 시도 실패]

EIJ(이집트 이슬람 성전)가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를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수단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제 빈라덴은 EIJ 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알카에다의 핵을 구성하게 되었다. 1995년 EIJ는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수단에서 추방되었다.

[리야드 훈련소 폭탄 테러 혐의]

미국이 운영하는 리야드의 사우디 국가경비대 훈련소 앞에서 폭탄 트럭으로 5명의 미국인과 2명의 인도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습니다.

오사마 빈라덴은 1998년 6월 8일 미국에서도 기소되었는데, 1995년 11월 14일 미국이 운영하는 리야드의 사우디아라비아 국가경비대 훈련소 앞에서 폭탄 트럭으로 5명의 미국인과 2명의 인도인을 살해한 혐의였다. 당시 빈라덴의 혐의는 미국의 방어시설을 공격하였다는 것이었으며, 아울러 그가 알카에다라는 테러 조직을 이끌고 있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당시 빈라덴은 자신의 개입 여부는 부정하였지만 공격 자체는 이슬람 교도로서 훌륭한 행위라고 칭송하였다.

1996

[아프가니스탄으로 거점 이전]

수단에 대한 국제 사회의 압력이 거세어지자, 빈라덴은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로 건너가 탈레반의 지도자 무함마드 오마르와 친분을 쌓았습니다.

1996년 5월, 수단에 대한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미국의 압력이 거세어지자 빈라덴은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 (아프가니스탄)|잘랄라바드]]로 건너가 탈레반의 지도자 무함마드 오마르와 친분을 쌓았다. 빈라덴이 수단을 떠나자 그의 야망과 조직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직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빈라덴과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과거 소련에 맞서 싸운 전사들과 ISI의 자금 지원을 받았으며, 무자헤딘 전사들을 위한 훈련 캠프를 더 많이 설립하였다.

[알 호바르 빌딩 폭파 사건 연루 보도]

<뉴욕타임즈>가 1997년 6월 26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발생한 알 호바르 빌딩 폭파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된 이들이 '보스니아 무슬림 군대에서 복무하였다고 자백하였으며, 오사마 빈라덴과의 연계도 시인하였다'는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1997년 6월 26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알 호바르 빌딩 폭파사건에 대하여 <뉴욕타임즈>는 체포된 이들이 '보스니아 무슬림 군대에서 복무하였다고 자백하였다'는 내용을 보도하였다. 이들 또한 오사마 빈라덴과의 연계도 시인하였다.

1997

[거처 이전]

북부 동맹의 위협으로 인해 잘랄라바드에 있던 저택 나짐 지하드를 포기하고 거처를 남부 타르나크 농장지로 옮겼습니다.

1997년 중반 북부 동맹이 잘랄라바드 (아프가니스탄)|잘랄라바드]]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하였기에 빈라덴은 그의 저택 나짐 지하드를 포기하고 거처를 남부 타르나크 농장지로 옮겼다.

[알 호바르 빌딩 폭파 사건 발생]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알 호바르 빌딩 폭파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에 빈라덴의 연계가 드러났습니다.

1997년 6월 26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알 호바르 빌딩 폭파사건에 대하여 <뉴욕타임즈>는 체포된 이들이 '보스니아 무슬림 군대에서 복무하였다고 자백하였다'는 내용을 보도하였다. 이들 또한 오사마 빈라덴과의 연계도 시인하였다.

[룩소르 학살 재정 지원]

이집트에서 발생한 룩소르 학살에 재정을 지원하여 62명의 민간인을 희생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이집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빈라덴은 1997년 11월 17일 룩소르 학살에 재정을 지원하여 62명의 민간인들을 희생시켰으며, 이집트인들을 분노하게 하였다.

1998

[대미(對美) 지하드 칙령 공동 서명]

오사마 빈라덴과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하는 성전을 위한 세계 이슬람전선'의 이름으로 칙령에 공동 서명했습니다. 이 칙령은 북아메리카인과 그 동맹국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이 모든 무슬림의 개인적 의무임을 공포했습니다.

1998년 2월 오사마 빈라덴과 아이만 알자와히리는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하는 성전을 위한 세계 이슬람전선(World Islamic Front for Jihad Against Jews and Crusaders)'의 이름으로 칙령에 공동 서명하여 북아메리카인과 그들이 동맹국 사람들을 살해하고, 예루살렘의 알아크사모스크와 메카의 성스러운 모스크를 해방시키는 것이 모든 무슬림의 개인적 의무임을 공포하였다. 이 칙령을 공포하면서 빈라덴은 북아메리카인들을 매우 쉬운 목표로 표현하면서, 참석한 기자들에게 '그 결과를 빠른 시일 내에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터폴 수배령 발효]

리비아가 1994년 3월 10일 리비아에서 독일 연방정보부 직원을 포함한 2명의 독일인을 살해한 혐의로 빈라덴과 기타 3명에 대한 첫 인터폴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이 수배령은 빈라덴이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1998년 3월 16일 리비아는 지난 1994년 3월 10일 리비아에서 독일 연방정보부 직원을 포함한 2명의 독일인을 살해한 혐의로 빈라덴과 기타 3명에 대한 첫 인터폴 수배령을 내렸으며, 빈라덴이 사망하였을 당시에도 리비아 정부는 이 수배령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 연방정부에 의해 기소]

미국에서 1995년 11월 14일 리야드의 사우디 국가경비대 훈련소 앞에서 폭탄 트럭으로 5명의 미국인과 2명의 인도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혐의에는 미국의 방어시설 공격과 알카에다 테러 조직 운영이 포함되었습니다.

오사마 빈라덴은 1998년 6월 8일 미국에서도 기소되었는데, 1995년 11월 14일 미국이 운영하는 리야드의 사우디아라비아 국가경비대 훈련소 앞에서 폭탄 트럭으로 5명의 미국인과 2명의 인도인을 살해한 혐의였다. 당시 빈라덴의 혐의는 미국의 방어시설을 공격하였다는 것이었으며, 아울러 그가 알카에다라는 테러 조직을 이끌고 있다는 것도 포함되었다. 당시 빈라덴은 자신의 개입 여부는 부정하였지만 공격 자체는 이슬람 교도로서 훌륭한 행위라고 칭송하였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빈라덴 체포/사살 명령]

빌 클린턴 대통령은 CIA에 정예 요원으로 구성된 특별 부서를 만들어 빈라덴을 생포하거나 사살하는 작전에 서명했습니다. 이는 9.11 테러 및 과거 테러 행위의 장본인인 빈라덴을 미국 법정에 세우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오사마 빈라덴을 체포하려는 노력은 빌 클린턴 정부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1998년 8월 빌 클린턴은 CIA에 정예 요원으로 구성된 특별 부서를 만들어 '9.11 및 과거 테러 행위의 장본인인 빈라덴을 미국 법정에 세운다'는 안에 서명하였으며, 만약 생포가 어려운 경우 사살도 용인하였다.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발생]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과 케냐 나이로비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 앞에서 폭탄 트럭을 이용한 대규모 테러가 발생하여 수백 명의 인명이 살상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 FBI는 빈라덴을 지명수배자 상위 10인 안에 올렸습니다.

1998년 8월 7일에 발생한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는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과 케냐의 나이로비와 같은 동아프리카 주요도시에 소재한 미국 대사관 앞에서 폭탄 트럭을 이용해 수백 명의 인명을 살상한 사건이었다. 이 공격은 지역 내 이집트 이슬람 성전 조직원들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오사마 빈라덴과 아이만 알자와히리를 미국 대중에게 알리게 된 사건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 FBI는 지명수배자 상위 10인 안에 빈라덴을 올려놓았다.

[미국의 빈라덴 훈련캠프 미사일 공격]

미국 해군이 아라비아해에서 쏘아 올린 66기의 크루즈 미사일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빈라덴의 훈련캠프를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빈라덴은 미사일 공격 몇 시간 전에 이미 캠프를 떠난 상태였습니다.

1998년 8월 20일에는 미국 해군이 아라비아해에서 쏘아올린 66기의 크루즈 미사일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빈라덴의 훈련캠프를 파괴하였는데, 빈라덴은 몇 시간 전에 캠프를 떠난 후였다.

[미국 대사관 공격 혐의로 추가 기소]

오사마 빈라덴은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국외 미국인 살해 및 연방 시설 공격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이는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의 미국 대사관 공격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1998년 11월 4일 오사마 빈라덴은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국외 미국인을 살해하고, 연방 시설을 공격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의 미국 대사관 공격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빈라덴이 개입되었다는 증거는 전직 알카에다 조직원의 자백과 위성 전화 녹음, 그리고 알카에다의 조달담당자 지야드 할릴이 그에게 사준 휴대전화였다.

1999

[보스니아 여권 취득 사실 폭로]

빈라덴과 튀니지 출신 조수 마레즈 아오두니가 1993년경 사라예보 정부로부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시민권 및 여권을 획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9.11 사태 이후 보스니아 정부는 이 사실을 부인했으나, 터키에서 아오두니가 체포될 당시 보스니아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1999년 빈라덴과 튀니지 출신의 조수 마레즈 아오두니가 1993년경 사라예보 정부에 의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시민권 및 여권을 획득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정보는 9.11 사태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에 의하여 부인되었으나, 터키에서 아오두니가 체포될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사실이 드러나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는 빈라덴이 여권을 직접 수령하지 않았으며, 여권을 발행한 오스트리아 빈 주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사관 또한 당시에는 빈라덴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파키스탄 쿠테타로 빈라덴 체포 계획 취소]

CIA는 파키스탄 군사 정보부와 공조하여 60명의 파키스탄 특공대를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 빈라덴을 생포하거나 사살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파키스탄 쿠테타 발생으로 취소되었습니다.

1999년 CIA는 파키스탄 군사 정보부와 공조하여 60명의 파키스탄 특공대를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 빈라덴을 생포하거나 사살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파키스탄 쿠테타 발생으로 취소되었다.

[FBI 10대 수배자 등재]

FBI 10대 수배자 목록에 456번째 인물로 이름이 올랐습니다.

1998년 11월 4일 오사마 빈라덴은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국외 미국인을 살해하고, 연방 시설을 공격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의 미국 대사관 공격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빈라덴이 개입되었다는 증거는 전직 알카에다 조직원의 자백과 위성 전화 녹음, 그리고 알카에다의 조달담당자 지야드 할릴이 그에게 사준 휴대전화였다. 빈라덴은 이 사건으로 1999년 6월 7일 '10대 수배자'에 이름을 올렸으며, 역대 456번째였다.

2000

[CIA의 빈라덴 암살 시도 실패]

CIA 작전 파견 요원이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서 빈라덴이 탑승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차량 행렬에 로켓 추진식 유탄(RPG)을 발사했지만, 빈라덴이 탑승한 차량이 아니어서 실패했습니다.

2000년 CIA 작전 파견 요원이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서 빈라덴이 탑승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차량 행열에 로켓 추진식 유탄(RPG)을 발사하여 차량 1대를 폭하였지만 빈라덴이 탑승하고 있던 차량이 아니었다.

[알카에다의 2000년 테러 계획 발각]

리처드 클라크가 2000년 1월 3일 빈라덴의 지휘 하에 이슬람 전사들이 여러 테러 공격을 계획했음을 밝혀냈습니다. 이 공격들은 요르단 암만의 호텔, 네보 산, 요르단 강의 여행객들, 예멘에 주둔한 미국 구축함 설리번 호 공격 및 미국 국내 공격을 포함했습니다.

2000년 말 리처드 클라크는 '2000년 1월 3일 빈라덴 지휘하에 이슬람 전사들이 여러 테러 공격을 계획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공격은 요르단 암만의 라디손 SAS 호텔, 네보 산과 요르단 강의 여행객들, 예멘에 주둔한 미국 구축함 설리번 호 공격과 미국 국내 공격을 계획한 것으로, 요르단 내 테러 조직의 조직원들이 체포되고, 폭탄이 들어찬 배를 미국 구축함 가까이 보내려던 아메드 레삼이 체포되어 연행되면서 무산되었다.

[다섯 번째 결혼]

아말 알사다와 다섯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2000년 아말 알사다와 다섯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2001

[9.11 테러 발생]

미국 뉴욕과 워싱턴 D.C.에서 4대의 민간 항공기가 공중 납치되어 세계 무역 센터와 펜타곤에 충돌하는 대규모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2,974명의 무고한 인명과 19명의 공중 납치범이 사망했으며,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빈라덴은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었으나, 초기에는 개입을 부인했습니다.

거듭된 부인 끝에 오사마 빈라덴은 2004년에야 미국에서의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행위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인정하였다. 이 사태는 4대 민간 항공기를 공중납치하여 건물에 충돌시키는 방법으로 세계 무역 센터 (1973년~2001년)|세계 무역 센터]] 건물을 붕괴시키고 버지니아주]]의 펜타곤(미 국방성 건물) 건물을 일부 파괴하였다. 이 사건으로 2974명의 무고한 인명과 19명의 공중납치범들이 사망하였다. 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탈레반 조직을 공격하고 알카에다 조직원들에 대한 체포에 돌입하였으며, 여러 국가들이 향후의 테러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대(對)테러 준비를 강화하였다. CIA에 신설된 특별 부서는 빈라덴을 추적하여 생포하거나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9.11 테러 개입 부정]

9.11 테러 이후, 카타르의 알자지라 위성방송을 통해 9.11 테러 개입설을 다시 한번 부정했습니다.

빈라덴은 사태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였으며, 2001년 9월 16일 카타르의 알자지라 위성방송을 통하여 다시 한번 개입설을 부정하였다.

[미국, 빈라덴 현상금 2500만 달러 책정]

조지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이 9.11 테러 직후 빈라덴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며 그의 제거 또는 체포에 결정적인 제보를 하는 사람에게 2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9.11 참극 직후 미국 정부는 빈라덴과 알카에다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그의 체포나 제거에 결정적인 제보를 하는 사람에게 2500만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핵무기 실험 및 생화학 무기 입수 추정]

미국 정보기관은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밀리에 핵무기 실험을 해왔으며 러시아 마피아로부터 생화학 무기용 부품을 입수한 것으로 보았다고 발표했습니다.

2001년 9월 26일, 미국 정보기관은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밀리에 핵무기 실험을 해왔으며 러시아 마피아로부터 생화학 무기용 부품을 입수한 것으로 보았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폭격 시작]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9.11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 탈레반 조직을 공격하고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2001년 10월 10일 빈라덴은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가 공포한 22대 FBI 수배 테러리스트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빈라덴은 FBI 10대 수배자와 22대 테러리스트 목록에 모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물로 남았다.

[FBI 22대 수배 테러리스트 목록 등재]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가 공포한 22대 FBI 수배 테러리스트 목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는 FBI 10대 수배자와 22대 테러리스트 목록에 모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2001년 10월 10일 빈라덴은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가 공포한 22대 FBI 수배 테러리스트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빈라덴은 FBI 10대 수배자와 22대 테러리스트 목록에 모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물로 남았다.

[미국, 탈레반의 빈라덴 인도 제안 거절]

탈레반이 빈라덴을 제3국 법정에 세우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조지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가 유죄라는 사실을 안다'며 이를 일언지하 거절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범인 신병 인도 요청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은 오사마 빈라덴의 신병 요청을 거부하였다. 2001년 10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자, 탈레반은 미국이 폭격을 중단하고 빈라덴의 9.11 테러 연계 증거를 제출하는 대가로 빈라덴을 제3국의 법정에 세우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에 조지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가 무죄인지 유죄인지를 논할 필요는 더 이상 없으며 우리는 그가 유죄라는 사실을 안다'라는 대답으로 탈레반의 제안을 일언지하 거절했다.

[9.11 계획 논의 비디오 테이프 발견]

미군이 잘랄라바드에서 빈라덴이 할레드 알하르비와 9.11 공격 계획을 논의하는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찾아냈습니다. 이 비디오는 12월 13일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미군은 2001년 11월 잘랄라바드 (아프가니스탄)|잘랄라바드]]에서 빈라덴이 할레드 알하르비와 공격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는 장면을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찾아냈으며, 이 비디오는 2001년 12월 13일 다양한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다.

[핵무기 보유 경고]

파키스탄 영자신문 "새벽(Dawn)"과의 인터뷰에서 빈라덴은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갖고 있으며 이를 사용할 준비도 돼있다"고 경고했습니다.

2001년 11월 10일, 파키스탄 영자신문 "새벽(Dawn)"의 인터뷰에서, 빈라덴은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갖고 있으며 이를 사용할 준비도 돼있다"고 경고했다.

[토라 보라 전투 이후 행적 분석]

미국 정부는 빈라덴이 2001년 말 토라 보라 전투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체류 중일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미국의 병력 부족이 그의 탈출과 알카에다와의 전쟁 실패의 원인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오사마 빈라덴이 2001년 말 토라 보라 전투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체류 중일 것이라고 결론지으며, 미국이 적절한 수의 병력을 파견하지 못한 것이 그의 탈출과 알카에다와의 전쟁에 실패하게 된 원인이라고 밝혔다. 정보부 직원 또한 심문과 통신 감청을 통하여 그가 아프가니스탄 동부 국경 산악지대의 지하시설에 은신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9.11 계획 논의 비디오 언론 보도]

미군이 발견한 빈라덴의 9.11 공격 계획 논의 비디오 테이프가 다양한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랍 전문가는 정보 부족으로 9.11 개입 의혹을 밝히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군은 2001년 11월 잘랄라바드 (아프가니스탄)|잘랄라바드]]에서 빈라덴이 할레드 알하르비와 공격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는 장면을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찾아냈으며, 이 비디오는 2001년 12월 13일 다양한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었다. 그러나 아랍 전문가 압델 엘후세이니 박사는 비디오 테이프에 나온 대화를 번역한 것으로는 정보가 부족하여 빈라덴의 9.11 개입 의혹을 밝힐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2002

[알카에다 핵배낭 구매 보도]

미국 뉴스 전문 인터넷 사이트 월드 넷 데일리는 알 카에다가 1998년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체첸 마피아로부터 3,000만 달러를 주고 핵배낭 20개를 구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2002년 12월 15일, 미국 뉴스 전문 인터넷 사이트 월드 넷 데일리는 알 카에다가 1998년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체첸 마피아로부터 3,000만 달러를 주고 핵배낭 20개를 구입했다고 보도했다.

2004

[옷가방 핵무기 입수 보도]

범아랍 신문 알 하야트는 1998년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이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를 방문했을 때 알 카에다가 옷가방에 담긴 TNT 1 kt급 핵무기를 입수했다고 전했습니다.

2004년 2월 8일, 범아랍 신문 알 하야트는,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이 1998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 거점인 칸다하르를 방문했을 때 알 카에다](알 카에다]]가 옷가방 속에 담긴 핵무기를 입수했다고 전했다. 폭발력은 TNT 1 kt급이라고 한다.

[알자와히리의 핵폭탄 구매 주장]

아이만 알자와히리의 전기 작가인 파키스탄 언론인 하미드 미르가 호주 ABC TV와의 인터뷰에서, 자와히라가 중앙아시아 암시장에서 3천만 달러로 서류가방형 핵폭탄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습니다.

2004년 3월 21일, 알케에다의 2인자 아이만 알자와히리]]의 전기 작가인 파키스탄 언론인 하미드 미르는, 호주 ABC TV와의 인터뷰에서, "자와히라가 웃으면서 3천만 달러를 들고 중앙아시아 암시장에 가서 불만에 찬 소련 과학자를 만나면 서류가방형 핵폭탄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9.11 테러 직접 지시 인정]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자신이 직접 19명에게 9.11 테러의 공중 납치를 지시했음을 인정했습니다. 이는 미국 총선을 4일 앞두고 보도되었으며, 빈라덴은 1982년 레바논 전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습니다.

거듭된 부인 끝에 오사마 빈라덴은 2004년에야 미국에서의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행위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인정하였다. 이 사태는 4대 민간 항공기를 공중납치하여 건물에 충돌시키는 방법으로 세계 무역 센터 (1973년~2001년)|세계 무역 센터]] 건물을 붕괴시키고 버지니아주]]의 펜타곤(미 국방성 건물) 건물을 일부 파괴하였다. 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탈레반 조직을 공격하고 알카에다 조직원들에 대한 체포에 돌입하였으며, 여러 국가들이 향후의 테러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대(對)테러 준비를 강화하였다. CIA에 신설된 특별 부서는 빈라덴을 추적하여 생포하거나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2005

[파키스탄 와지리스탄 은신 증거 발견]

아티야 압드 알라흐만이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에게 보낸 서신 내용에 따르면 빈라덴과 알카에다 지도부가 당시 파키스탄의 와지리스탄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2005년 12월 11일 아티야 압드 알라흐만이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에게 보낸 서신 내용에 따르면 빈라덴과 알카에다 지도부는 당시 파키스탄의 와지리스탄 지역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서신은 미국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의 대테러 전투 센터에서 번역되었으며, 알라흐만이라는 인물이 알자르카위에게 지도부 회동을 알리는 전령을 와지리스탄으로 보내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알라흐만은 또한 빈라덴과 알카에다가 약화되었으며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미국측이 이 서신의 내용을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는 내용이 후에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보도되었다.

2006

[9.11 테러 계획 구체적 책임 인정]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보도된 비디오 테이프에서 오사마 빈라덴은 자신이 9.11 테러 계획의 책임자였으며, 람지 빈 알시브, 함자 알감디, 와일 알셰흐리가 실제 공격을 준비했다고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2006년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보도된 다른 두 개의 비디오 테이프에서 오사마 빈라덴은 자신이 계획의 책임자였으며, 람지 빈 알시브, 함자 알감디, 와일 알셰흐리가 실제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 중 알감디와 알셰흐리는 9.11 테러의 공중납치범의 일원이었다.

2007

[토라 보라 산악 동굴 수색 실패]

미군과 아프가니스탄군이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토라 보라 일대의 산악 동굴들을 수색했습니다. 이는 라마단 기간을 앞두고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회의를 개최한다는 정보 때문이었으나, 빈라덴과 알자와히리를 찾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미군과 아프가니스탄군은 2007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토라 보라 일대의 산악 동굴들을 수색하였는데, 이는 라마단 기간을 앞두고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회의를 개최한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군은 10여명의 알카에다 및 탈레반 조직원들을 사살하였지만 오사마 빈라덴과 아이만 알자와히리를 찾는데는 실패하였다.

[현상금 5,000만 달러로 인상]

빈라덴의 현상금이 기존 2,500만 달러에서 2배인 5,000만 달러로 올랐습니다. 미국 항공 조종사 협회와 미국 항공 운송 협회도 2백만 달러를 추가 현상금으로 내걸었습니다.

9.11 참극 직후 미국 정부는 빈라덴과 알카에다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그의 체포나 제거에 결정적인 제보를 하는 사람에게 2500만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하였으며, 훗날 2007년 7월 13일 이 금액은 2배인 5000만으로 올랐다. 미국 항공 조종사 협회와 미국 항공 운송 협회 또한 2백만 달러를 추가 현상금으로 내걸었다.

2008

[버락 오바마, 빈라덴 제거 공약]

제2차 대통령 후보 토론 당시 버락 오바마 후보는 '오사마 빈라덴을 제거하고 알카에다를 박살내는 것이 국가 안보의 최우선 과제'라고 공약했습니다.

2008년 10월 7일 제2차 대통령 후보 토론 당시 외교 정책 부문에서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는 '오사마 빈라덴을 제거하고 알카에다를 박살내는 것이 국가 안보의 최우선 과제'라고 말하였다.

2009

[파키스탄 치트랄 지구 수색 보도]

뉴욕 데일리 뉴스(New York Daily News)는 칼람 협곡을 포함한 파키스탄 치트랄 지구를 중심으로 빈라덴 수색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는 체포된 알카에다 간부가 이곳을 빈라덴의 은신처로 지목했다는 주장에 기반했습니다.

2009년 3월 뉴욕 데일리 뉴스(New York Daily News)는 칼람 협곡을 포함한 파키스탄 치트랄 지구를 중심으로 빈라덴 수색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보도를 작성한 싱가포르의 테러리즘 관련 저술가인 로한 구나라트나는 체포된 알카에다 간부가 이곳을 빈라덴의 은신처로 지목하였다고 하였다.

[미 국방부, 빈라덴 소재 정보 부재 발표]

미국 국방부 장관 로버트 게이츠는 '정부가 빈라덴의 소재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를 수년간 확보하지 못하였다'고 발표했습니다. 일주일 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총사령관 스탠리 맥크리스탈은 빈라덴의 생존이 알카에다의 세계화에 기여한다고 밝혔습니다.

2009년 12월 첫주에 한 파키스탄 탈레반 억류자는 2009년 빈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그는 2009년 1월이나 2월경 만난 사람이 약 15~20일 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빈라덴을 보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2009년 12월 6일 미국 국방부 장관 게이츠는 미국이 빈라덴의 은신처에 대한 신뢰할 만한 정보를 수년간 확보하지 못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 후 파키스탄의 총리 유수프 라자 길라니는 오사마 빈라덴이 파키스탄에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였다.

2010

[사우디아라비아, 빈라덴 추방 요구]

사우디아라비아 외무부 직원이 탈레반이 빈라덴을 추방하고 극렬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가까이 한다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아프가니스탄 평화 정착을 위한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2010년 2월 2일 사우디아라비아 외무부의 한 직원은 탈레반이 빈라덴을 추방하고 극렬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가까이 한다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아프가니스탄 평화 정착을 위한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가 탈레반 재건을 위한 계획에 사우디아라비아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하여 방문하였을 때 이루어졌다.

[이란 은신설 보도]

<쿠웨이티 알 시야사>(Kuwaiti Al Siyassa)는 빈라덴이 이란 북부 사브제바르의 산악 마을에 은신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언론도 이 주장을 온라인으로 보도했습니다.

2010년 6월 7일 <쿠웨이티 알 시야사>(Kuwaiti Al Siyassa)는 빈라덴이 이란 북부 사브제바르의 산악마을에 은신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오스트리아 언론은 이 주장을 6월 9일 온라인으로 보도하였다.

[NATO의 파키스탄 비호설 제기]

익명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소속 인사는 빈라덴이 파키스탄에서 당국 정보부의 비호 아래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파키스탄 고위 당국자는 이러한 주장을 모함이라고 부정했습니다.

2010년 10월 18일 익명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소속 인사는 빈라덴이 파키스탄에서 당국 정보부의 비호 아래에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파키스탄 고위 당국자는 파키스탄 정부와 빈라덴의 연계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그러한 주장은 파키스탄과 미국 간의 유대 관계를 해치기 위한 모함이라고 주장하였다.

2011

[오바마 대통령, 빈라덴 체포 작전 서명]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빈라덴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에 서명했습니다. 이 작전은 '넵튠 스피어 작전'으로 명명되었으며, 빈라덴의 코드명은 '제로니모'였습니다.

2011년 4월 오바마는 빈라덴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에 서명하였다. 2011년 5월 1일, 오사마 빈라덴은 오바마가 서명한 비밀 작전에 의해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미국 네이비실 대원들에게 사살되었다. 향년 54세.

[알카에다의 핵폭탄 위협 문서 공개]

위키리크스 문서에 따르면,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알카에다 고위 간부가 미 국방부 심문에서 "오사마 빈라덴이 체포되거나 암살될 경우 알카에다가 유럽에 숨긴 핵폭탄을 터뜨릴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011년 4월 25일, 위키리크스](위키리크스]]로부터 문서를 미리 제공받아 분석한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알카에다 고위 간부는 미 국방부 심문에서 "오사마 빈라덴이 체포되거나 암살될 경우 알카에다가 유럽에 숨긴 핵폭탄을 터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사마 빈라덴 사살 작전 성공]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 있는 빈라덴의 3층 저택을 미국 네이비실 6팀 24명이 급습하여 빈라덴을 사살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빈라덴의 죽음을 발표하며, 그의 유해는 아라비아해에 수장되었다고 밝혔습니다.

2011년 5월 1일(파키스탄 표준시간 기준으로 5월 2일) 워싱턴 D.C에서 버락 오바마는 오사마 빈라덴이 사살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미군에 의하여 수습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향년 54세. 미국정부는 미국 해군 특수전 개발 그룹 소속 네이비실 6팀 24명이 합동 특수 작전 지휘부(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와 CIA 공조 하에 2대의 헬리콥터를 이용해 빈라덴의 저택을 급습하였다고 하였다. 이 작전으로 빈라덴과 남성 3명, 여성 1명이 사살되었으며 미군의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헬리콥터 1대가 기기 고장으로 불시착하였으며, 네이비실 팀에 의해 현장에서 폭파되었다. 오바마는 언론 발표에서 미군이 민간인의 피해를 야기하지 않기 위해 만전을 기하였다고 하였다. 미국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 공격은 파키스탄 측에 통보 없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작전 당시 빈라덴은 머리와 가슴에 치명상을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빈라덴의 죽음은 현장 사진과 함께 '제로니모 작전 중 사살'(Geronimo E-KIA)이라는 코드로 보도되었다. 작전 소요 시간은 정보부의 현장 수색까지 포함하여 40분이 걸렸다. 빈라덴의 유해는 수습되어 생명 안면 인식 시험이 이루어졌으며, 부차적으로 유전자 검사까지 시행되었다. 그의 시체는 땅에 매장할 경우 추종세력들이 그 곳을 성지로 정하고 테러활동을 원활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라비아해에 수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알카에다, 빈라덴 사망 인정 및 보복 천명]

알카에다는 오사마 빈라덴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보복을 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2011년 5월 6일 알카에다는 빈라덴의 죽음을 인정하면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보복을 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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