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
축구인, 축구 선수, 축구 감독, 국가대표팀 감독, 프로팀 감독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22:42:58
4개국 국가대표팀을 맡아 월드컵, 유로 등 주요 대회에서 모두 4강 이상의 놀라운 성과를 기록한 명장이다. 대한민국을 2002년 월드컵 4강으로 이끌며 '꿈은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파, 한국 축구의 새 역사를 썼다. PSV 에인트호번, 첼시 등 클럽팀에서도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달성하며 뛰어난 지도력을 입증했다. '4강 징크스'라는 흥미로운 이력과 함께 세계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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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거스 히딩크 출생 및 선수 경력 시작]
네덜란드 파르세벨트에서 태어나 이후 더 흐라프스합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며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PSV 에인트호번 등 여러 클럽을 거쳤지만 국가대표팀에는 선발되지 못했다.
1946년 11월 8일 네덜란드 파르세벨트에서 태어났다. 아마추어 클럽 SC 바세펠트를 거쳐 1967년부터 더 흐라프스합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70년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했으나 주전 확보에 실패해 1년 만에 더 흐라프스합으로 복귀했다. 이후 미국 북미 축구 리그 워싱턴 디플로매츠, 새너제이 어스퀘이크스에서 잠시 활동했고, 고향으로 돌아와 NEC 네이메헌, 다시 더 흐라프스합에서 뛰다가 1982년 은퇴했다. 선수 시절 주로 미드필더로 활동하며 뛰어난 기술을 보였으나 국가대표팀에는 선발된 적이 없다.
1987
[PSV 에인트호번 감독 부임 및 트레블 달성]
PSV 에인트호번의 보조 코치로 시작해 1987년 감독으로 승격했다. 부임 다음 해인 1988년, 팀 창단 이래 최초로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함께 유럽 축구 역사상 세 번째 트레블을 달성하며 PSV를 네덜란드 3강으로 이끌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PSV 에인트호번의 보조 코치로 재직했으며, 1987년에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1988년, 팀 창단 이래 최초로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포함, 유럽 축구 역사상 세 번째로 트레블(리그, FA컵,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PSV를 AFC 아약스, 페예노르트와 함께 네덜란드 축구 리그의 3강으로 올려놓았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팀에 두 번의 네덜란드 1부 리그 우승 타이틀과 한 번의 준우승을 안겼다.
1991
[발렌시아 CF 감독 부임 및 인종차별 문제 대응]
터키 페네르바체를 거쳐 스페인의 강호 발렌시아 CF 감독으로 부임했다. 경기 중 메스탈라 스타디움에 인종 차별적 구호가 적히자 이를 즉시 없애도록 지시하며 자신의 강직한 성격을 보여주었다.
1990년 터키 프로축구팀 페네르바체 감독으로 잠시 재임했지만 1년 후 사임하고 스페인의 발렌시아 CF 감독으로 갔다. 이 시기 히딩크는 자신의 강직한 성격을 드러냈는데, 한번은 경기 중 발렌시아의 메스탈라 스타디움에 인종 차별적 구호가 적혀 있자 경기 중에 이를 없애도록 지시했다. 그의 공격적인 축구 스타일은 발렌시아 팬들뿐만 아니라 스페인 리그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1998
[1998 FIFA 월드컵 네덜란드 4위 달성]
1995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 후, 팀 내 분란을 수습하며 1998 FIFA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4강에 진출시켰다. 준결승에서 브라질에 승부차기로 패하고 3-4위전에서 크로아티아에 패해 최종 4위를 기록했다.
1995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을 때, 각기 뛰어난 선수들로 구성된 팀 내의 분란을 수습해야 하는 큰 도전에 직면했다. 유로 1996 토너먼트에서 다비즈를 선발에서 제외시키는 등 강단을 보였다. 이러한 내분을 잘 수습하여 1998 FIFA 월드컵에서 조별리그를 통과하고 유고슬라비아, 아르헨티나를 물리치며 4강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브라질에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고 크로아티아와의 3-4위전에서도 패해 최종 4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후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레알 마드리드 감독 부임 및 도요타컵 우승]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직 사임 후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 역사상 최초로 도요타컵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구단 수뇌부와의 마찰과 성적 부진으로 인해 경질되었다.
1998 FIFA 월드컵 이후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하여 역사상 최초로 도요타컵 우승을 시켰다. 그러나 구단 수뇌부와의 마찰과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당했다. 이후 레알 베티스에서도 짧은 기간을 보냈다.
200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대대적인 구조조정 단행]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취임 후 대대적인 선수단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동국을 제외하고 설기현을 중용했으며, 고종수 대신 박지성, 송종국을 발탁했다. 또한, 김병지 대신 이운재를 주전 골키퍼로 승격시키고, 선수들에게 멀티 포지션 훈련과 체력 훈련을 병행시켜 팀의 기량을 혁신적으로 끌어올렸다.
히딩크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자마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공격수 부분에서 이동국을 과감히 제외하고 설기현으로 대체했으며, 설기현은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 동점골로 팀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 고종수가 부상으로 하차하자 박지성, 송종국 등으로 대체했고, 박지성은 이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 홍명보를 제외했다가 추후 다시 포함시켰으며, 김병지 골키퍼 대신 이운재를 주전으로 승격시켰다. 각 선수들에게는 자신의 원래 포지션 이외의 다른 포지션도 소화해낼 수 있는 특별훈련과 체력 훈련을 병행시켰고, 이 결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2002년 한일월드컵 준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공식 취임]
2000년 12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 제의를 수락하고, 2001년 1월 1일 공식 취임했다. 2002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침체되어 있던 한국 축구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2000년 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고심 끝에 수락했으며, 2000년 12월에 정식 계약을 맺었다. 이로써 2001년 1월 1일, 거스 히딩크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공식 취임하며 2002 FIFA 월드컵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2002
[PSV 에인트호번 복귀 및 리그 우승]
2002 FIFA 월드컵에서의 성공 이후, 재계약하지 않고 네덜란드 프로 팀 PSV 에인트호번 감독으로 복귀하며 박지성과 이영표를 영입했다. 2002-03, 2004-05, 2005-06 시즌 에레디비시 우승을 이끌었다.
2002 FIFA 월드컵에서의 공로를 뒤로하고 대한민국 대표팀과의 재계약을 하지 않은 채 네덜란드의 프로 팀 PSV 에인트호번을 맡게 되었다. 이때 그는 박지성과 이영표를 PSV에 영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PSV 에인트호번에서 2002-03, 2004-05, 2005-06 시즌 에레디비시(네덜란드 1부 리그)에서 연이어 우승을 차지했다.
[2002 FIFA 월드컵 대한민국 4강 신화 달성]
2002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이끌고 폴란드전 첫 승, 포르투갈전 승리로 16강에 진출했다. 이후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차례로 꺾고 아시아 팀 최초로 월드컵 4강에 진출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이 공로로 대한민국 명예국민 1호가 되었다.
2002 FIFA 월드컵이 개막한 이후,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대표팀은 6월 4일 폴란드전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한국의 월드컵 사상 첫 승을 안겨주었다. 6월 10일 미국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고, 6월 14일 포르투갈전에서 1-0으로 승리하며 D조 1위로 한국 축구 사상 최초로 16강에 진출했다. "아직 배가 고프다"는 명언을 남긴 후, 6월 18일 16강전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연장 골든골로 2-1 승리, 아시아 팀으로는 두 번째로 8강에 진출했다. 6월 22일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도 승부차기 끝에 5-3으로 승리하며 월드컵 사상 최초로 아시아 팀이 4강에 진출하는 새 역사를 기록했다. 비록 준결승에서 독일, 3-4위전에서 터키에 패해 최종 4위를 기록했지만, 불과 몇 개월 전 부진했던 팀을 4위로 이끈 대단한 성과였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국민이 되었고,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훈했다.
2005
[호주 국가대표팀 감독 겸임 및 2006 월드컵 16강 진출]
PSV 에인트호번 감독과 동시에 2005년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수락했다. 우루과이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며 호주의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고,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호주를 16강에 진출시켰다.
2005년 7월 22일, 히딩크는 PSV 에인트호번 감독과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동시에 수행하기로 했다. 이후 남미 5위 우루과이와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승리하며 오스트레일리아의 1974년 서독 월드컵 이후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성공시켰다. 2006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 호주는 일본을 3-1로 꺾고, 크로아티아와 2-2 무승부를 거둬 1승 1무 1패로 16강에 진출했다. 비록 16강에서 지난 대회에서도 맞붙었던 이탈리아에 패했지만, 호주 축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2006
[러시아 국가대표팀 감독 부임 및 유로 2008 4강 진출]
2006년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UEFA 유로 2008 예선에서 잉글랜드를 제치고 본선에 진출했으며, 본선에서는 네덜란드를 꺾고 4강에 올랐다. (이후 우승국 스페인에 패배)
2006년 4월 14일, 히딩크는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수락했다. 2년 6개월의 계약 기간과 240만 달러의 연봉 조건이었다. 2006 FIFA 월드컵 이후 러시아 감독직을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8월 16일 라트비아와의 친선전을 통해 공식 첫 경기를 치렀다. UEFA 유로 2008 예선에서 E조 2위를 차지해 본선에 진출했고, 본선 조별리그에서 D조 2위를 차지하여 8강에 올랐다. 2008년 6월 21일에는 친정팀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3-1로 승리하며 4강에 진출했으나, 4강전에서 우승국 스페인에 0-3으로 패배했다.
2007
2007년 2월, 탈세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와 벌금 45,000유로를 선고 받은 적이 있다.
2009
[첼시 FC 임시 감독 부임 및 FA컵 우승]
2009년 2월, 첼시 FC의 임시 감독으로 부임하여 남은 시즌 동안 팀을 이끌었다.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시키고, FA컵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팀에 우승컵을 안겼다.
첼시 FC의 감독이었던 루이스 펠리피 스콜라리가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자,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설득으로 히딩크는 남은 시즌 동안만 감독직을 이행하는 조건으로 2009년 2월 11일부터 첼시의 감독직에 앉게 되었다.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유벤투스를, 8강에서 리버풀을 물리쳐 첼시를 4강에 진출시켰으나 FC 바르셀로나와의 준결승전에서 아쉽게 탈락했다. 리그에서 첼시를 3위로 끌어올렸으며, FA컵 결승전에서 2-1 역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남긴 이러한 성과들로 인해 많은 팬들이 잔류를 주장했으나, 결국 이 경기 이후 히딩크는 계약대로 첼시를 떠나게 되었다.
2010
[터키 국가대표팀 감독 및 이후 클럽 경력]
2010년 8월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으나 유로 2012 본선 진출에 실패하며 경질되었다. 이후 FC 안지 마하치칼라, 다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그리고 첼시 FC 임시 감독을 역임하며 다양한 팀을 지휘했다.
2010년 8월부터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기 시작해 유로 2012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지만 크로아티아에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이후 러시아의 FC 안지 마하치칼라 감독으로 부임했다. 2014년 FIFA 월드컵 이후 루이스 판 할 감독의 뒤를 이어 다시 한번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UEFA 유로 2016 예선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여 2015년 6월 29일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2015년 12월 주제 무리뉴 감독의 사임 후 첼시 FC의 임시 감독직을 다시 한번 수행했다.
2018
[중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선임 및 경질]
2018년 8월 중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어 2020년 도쿄 올림픽 본선 진출을 목표로 했으나, 졸전을 거듭하다 2019년 9월 경질되며 불명예스럽게 중국을 떠났다.
2018년 8월 4일 중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3년 계약, 연봉 147억 원의 조건으로 선임되었다. 2020년 하계 올림픽 본선 진출을 목표로 잡았으나 평가전을 포함한 국제 경기에서 졸전을 거듭했고, 심지어 제자인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U-23 대표팀에 0-2로 완패하면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결국 2019년 9월 19일 전격적으로 경질을 당하면서 불명예스러운 모습으로 중국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