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선
문화운동가, 시인, 작가, 언론인, 독립운동가, 학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7:49
육당 최남선은 근대 한국의 문학과 언론을 개척한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였으나,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 행적으로 인해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 잡지를 창간하고 신체시를 발표하는 등 문화운동에 기여했으며, 3.1 운동에도 참여했으나, 조선사편수회 참여 등 친일 논란으로 비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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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
[문학적 재능을 키운 유복한 어린 시절]
근대 한국 문학의 개척자이자 사학자, 언론인으로 평가받는 최남선이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명문이었던 가문에서 유복하게 성장하며 어린 시절부터 한학과 독학으로 한글을 익혔다.
육당 최남선은 관상감 기사이자 한약방을 경영했던 아버지 최헌규와 어머니 진주 강씨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명문이었고 아버지 최헌규는 하급 관리였으므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으며, 1901년(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글을 투고하기도 했다.
1907
[한국 최초 근대 잡지 《소년》 창간]
귀국 후 이광수 등과 함께 근대적 종합잡지 《소년》을 창간하여 신문화 운동을 주도했다. 이 잡지에서 한국 최초의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며 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후일 이 날이 잡지의 날로 정해졌다.
1901년 3살 연상의 부인 연주 현씨와 결혼했다. 자습으로 한글을 깨쳐 황성신문에 글을 투고하기도 했으며, 1904년 대한제국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떠나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학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했으나 총동맹 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1907년 5월 귀국했다. 귀국 후 1907년 11월 이광수 등과 함께 잡지 《소년》지를 창간하며 논설문과 한국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또한 1908년 신문관을 창설하여 《대한역사》, 《대한지지》 등 중요한 책을 출판하고 계몽가요 ‘경부철도가’를 발표했다.
1910
[민족 문화 보존을 위한 조선광문회 설립]
민족 문화 보존과 보급을 위해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여 조선고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간행하는 사업을 주도했다. 이는 한국어 사전 편찬 계획으로 이어지는 등 중요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조선의 귀중한 옛 책들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민족 문화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켜 조선광문회를 설립해 조선고서를 한글로 번역, 발간하였고, 20여 종의 육전소설을 발간했다. 한편 그는 조선광문회를 통해 조선어 사전 편찬 계획을 세우고 구상했었다.
1911
[일제의 언론 탄압에 직면]
일제의 식민 통치가 심화되면서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소년》지가 폐간되었고, 이후 발간한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청춘》 등도 모두 강제 폐간되며 그의 언론 활동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잡지 창간을 계속해왔지만, 1911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소년》이 폐간되었다. 이듬해 1912년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 보이》, 《새별》등의 잡지를 발간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신문지법' 명령으로 모두 강제폐간되었다. 1914년 몇몇 뜻있는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다시 종합 계몽 잡지 《청춘》을 발간하여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민중 계몽을 위해 공헌했으나 이 역시 총독부에 의해 1918년 강제폐간되었다. 1918년 《청춘》에 역사 연구 논문인 《계고차존》(稽古箚存) 발표하기도 했다.
1919
[3.1 운동의 주역으로 기미독립선언서 작성]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9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역사적인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낭독하며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어 2년 8개월형을 받아 복역한 뒤 1921년 10월 18일에 가출옥하였다. 가출옥 사유는 “청년들을 규합하는 데 대단히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었다.
1922
[문화 운동 재개와 학자적 활동]
가출옥 후 '동명사'를 창립하고 주간지 '동명'을 창간하는 등 활발한 문화 및 언론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시대일보》를 창간했으나 총독부의 압력으로 폐간되었고, '백팔번뇌' 출간 및 〈단군론〉 발표로 한국사 연구에도 매진했다.
가출옥 후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창립했다. 같은 해 9월 주간지 '동명'을 창간해 1923년 6월까지 발행했다. 국사 연구에 전념하여 《조선역사통속강화》를 연재했다.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자금도 부족하였고, 신문의 반일적인 논조로 조선총독부의 압력을 받아 경영난에 처하자 곧 사임하였다. 1925년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활동에 참여했고, 동시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객원 논설위원을 지냈다. 1926년 근대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를 출간했고, 〈단군론〉(1926년)을 발표하였다.
1927
[조선사편수회 참여로 친일 논란 촉발]
총독부의 지원 유혹으로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참여하며 친일 성향으로 전향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 일로 이광수와 절교하고 한용운 등 동료들의 비판을 받는 등 근대 지식인의 고뇌와 비극적 선택의 상징이 되었다.
1927년 총독부가 집과 연구 비용을 지원한다고 회유하자 그해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회에 가담한 일로 이광수와 절교하고, 한용운과 홍명희 등도 연이어 그와 결별 선언을 했다. 한용운은 그의 나무 위패를 새기고 장례식을 거행하여 그를 조롱하려고 시도했다. 1928년 조선총독부 내 식민사관 유포를 위해 만든 어용단체인 ‘조선사 편수회’ 편수 위원직을 맡았으며, 1928년 〈불함문화론〉을 발표하였다.
1937
[중추원 참의 임명과 노골적인 친일 활동]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어 활동하며 매년 수당을 받았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매일신보》 등 총독부 어용지에 적극적으로 친일 논설을 게재하며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1937년 중추원 참의를 맡아 1938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문화의 당면과제'를 연재해 조선문화의 일본화, 즉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사설을 기고했다. 이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각종 친일논설을 게재했다. 1938년 《만몽일보사》 고문과 일본 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의 한국사, 한국학 교수로 부임해 1943년 2월까지 역임했으며, 1940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무장 세력을 상대로 귀순 및 투항공작을 전개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고문으로 활동했다.
1943
[일본에서 학병 지원 독려 강연]
태평양전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 이광수와 함께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강연을 했다. 그는 '화랑 사상'을 언급하며 한일 공통의 상무 정신을 역설, 일제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적극 가담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매일신보를 비롯해 경성일보등에 학도병 권유 유세문을 기고했고, 각종 시국강연에 나섰다. 1943년 귀국 직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 최남선은 “어떤 학자는 ‘(일본)무사도의 연원은 신라의 화랑이 그 토대였다’라는 것을 생각할 정도”라며 한일 양국 공통의 상무(尙武) 정신을 역설했고, 이에 이광수는 “저 ‘화랑’의 사상이란 오늘날 막 바로 부활시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며 동조했다.
1949
[반민특위 체포와 병보석 석방]
광복 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지목되어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민족과 연구 성과를 지키기 위한 협력이었음을 항변하며 '자열서'를 제출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며 사실상 처벌을 면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경성부 우이동에 은거하며 외부 출입을 삼가고 역사 논문 집필에 전념했다. 한민당의 영입 제의도 사양했다. 그러나 광복 후 그는 '민족개량주의로 흘러가 친일파로 변절했다.'는 것 때문에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비난을 받았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곧 바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투옥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5월에 공판을 받았다. 수감 중에 그는 자신은 민족을 위해서, 나의 연구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 협력하였다고 항변하였으며, 특별재판부에 참회의 뜻을 담은 '자열서'(自列書)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를 기소한 반민특위는 친일파 출신 정치인들이 친일 인사들을 정치적 목적에서 감싸면서 탄압받았고 1949년 2월 병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져 석방, 그의 친일행각은 사실상 처벌되지 않았다.
1957
[근대 지식인의 영욕을 안고 별세]
《한국역사대사전》을 편찬하던 도중 뇌일혈로 별세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3대 천재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과 함께 복합적인 평가를 받으며 생을 마감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해군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했다. 휴전 후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재직하였고, 신문과 잡지에 한국의 역사 문화와 관련된 기고활동을 계속했다. 1957년 10월 10일 《한국역사대사전》을 편찬하던 도중 병으로 죽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에 이광수,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다.
2009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등재]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며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동생 최두선은 민주당에서 활동하여 자유당으로부터 친일파로 공격받기도 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교육, 학술 분야에 수록되었으며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의 동생 최두선이 민주당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자유당에서는 최남선이 친일파라고 공격했다. 사후 장준하 등은 추도사를 통해 그가 자의에 의해 친일하지 않았다며 그를 '우리의 가장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라며 그의 업적을 치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