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 (시인)
시인, 대학교수, 문학가, 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8:26:54
조운은 일제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시조 시인이자 대학교수입니다. 초기에는 민족주의적인 시조를 발표하며 시조 부흥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동국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48년 가족과 함께 월북했습니다. 월북 후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조치로 재평가받았고, 2000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비 건립 등의 기념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조운 (시인)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900
[조운 탄생]
일제강점기 시조 시인이자 대학교수인 조운(본명 조주현)이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관은 창녕입니다.
1900년 7월 22일, 조운은 대한제국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조주현이었으며, 호는 정주랑입니다. 후에 시조 시인이자 대학 교수로 활동하게 됩니다.
1917
[목포상업전수학교 졸업]
조운이 목포상업전수학교(현 목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광농업보습학교에서 농업 교사로 재직하며 사회 계몽 운동을 펼쳤습니다.
1917년, 조운은 목포상업전수학교(지금의 목상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영광농업보습학교(지금의 영광중학교)에서 농업 교사로 교편을 잡고 사회 계몽 운동에 힘썼습니다.
1921
[시인 데뷔 및 활동 시작]
조운이 《동아일보》에 시조 <불살너주오>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 민족주의적 감성의 현대 시조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1921년 《동아일보》에 <불살너주오>를 발표한 것을 계기로 조운은 시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담은 현대 시조를 창작하기 시작했으며,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 〈나의 사람〉, 〈법성포 12경〉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며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1926
[국민문학운동 참여 및 시조 부흥론 주장]
조운이 최남선, 이병기 등과 함께 '국민문학운동'에 참여하여 시조 부흥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국민문학운동의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1926년, 조운은 최남선, 이병기 등 당대 주요 문인들과 함께 '국민문학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 그는 시조 부흥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하려 했습니다. 그는 또한 이 운동의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으로 1928년까지 활동했습니다.
1929
1929년 조운은 부인(이름 미상)과 결혼했습니다. 이후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1948년 가족 모두와 함께 월북했습니다.
1945
1945년 12월 13일, 광복 후 조운은 조선문학동맹 사무위원으로 가입하여 문학계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1946
[조선문학가동맹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
조선문학동맹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합맹하며 조운은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으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46년 2월 8일, 조선문학동맹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합맹되면서 조운은 새로운 조직에서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으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947
[《조운시조집》 발간 및 시인 은퇴]
조운이 자신의 작품을 모은 《조운시조집》을 발간하고, 시조 시인 활동에서 은퇴 및 절필을 선언했습니다.
1947년 조운은 자신의 시조들을 모은 《조운시조집》을 발간하여 그간의 문학적 성과를 집대성했습니다. 이와 함께 시조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은퇴하고 절필을 선언했습니다.
1947년 1월 8일, 조운은 조선문학가동맹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직에서 사퇴하며 문학 단체에서의 공식 활동을 마무리했습니다.
1947년 2월, 조운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임명되어 잠시 학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같은 해 8월 교수직에서 사퇴했습니다.
1947년 10월, 조운은 남조선로동당 당무위원으로 입당하여 정치적 행보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1월 탈당합니다.
1948
1948년 1월, 조운은 전해 10월 입당했던 남조선로동당 당무위원직에서 탈당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월북]
조운이 1948년 3월 중순, 부인과 1남 2녀의 자녀 등 가족 5명 모두와 함께 월북했습니다. 이후 행적은 불명확하며, 사망 연도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48년 3월 중순, 조운은 부인과 1남 2녀의 자녀 3남매 등 가족 5명과 함께 월북했습니다. 월북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의 사망 연도 또한 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월북으로 인해 그는 오랫동안 남한 문단에서 잊혀졌습니다.
1988
[월북 문인 해금 조치 및 재평가]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조치가 발표되면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조운 시인이 학계에 다시 알려져 재평가받기 시작했습니다.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조치가 발표되면서, 월북 문인이라는 이유로 남한에서 이름이 잊혀졌던 조운 시인이 학계에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문학적 가치를 재평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0
2000년 6월 29일부터 조운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 교육청 부지에 시비 건립이 추진되었습니다.
[시비 기단부 훼손 및 제막식 무산]
영광 시비 건립 과정 중 전남 교육청 측이 중장비를 동원하여 시비의 기단부를 훼손하면서 제막식이 무산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000년 7월 21일 밤, 조운 시인의 시비 건립이 진행되던 중 전남 교육청 측에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시비의 기단부를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정되었던 제막식이 무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습니다.
[탄생 100주년 기념 및 《조운시조집》 복간]
조운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조운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도로 《조운시조집》이 복간되었습니다.
조운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0년 7월 22일에 맞춰 '조운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주도로 그의 대표작인 《조운시조집》이 복간되었습니다. 이는 잊혀졌던 그의 문학 세계를 대중에게 다시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광 시비 제막식 거행]
우여곡절 끝에 조운 시인의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에 시비가 건립되었고, 2000년 9월 2일 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2000년 6월 29일부터 추진되었던 조운 시인의 시비 건립은, 7월 21일 전남 교육청의 기단부 훼손으로 제막식이 한 차례 무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2000년 9월 2일 그의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 교육청 부지에 시비 제막식이 성공적으로 거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