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

독립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 교육인, 사회운동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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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독립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 교육인, 사회운동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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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아동문화운동가로, '어린이'라는 호칭을 정립하고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을 창시했습니다. 월간 어린이 잡지를 창간하고 색동회를 조직하는 등 아동문학 발전과 어린이 인권 신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과로와 질병으로 33세에 요절했지만, 그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기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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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방정환 출생]

대한제국 한성부 적선방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경수와 손성녀의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 어린 시절 부유한 대가족 속에서 사랑받으며 자랐습니다.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 대한제국 한성부 서부 적선방 야주현계(지금의 서울 종로구 당주동과 신문로1가 경계)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한룡의 아들인 방경수와 손성녀의 장남으로 출생했으며, 친할아버지 방한룡에게 한문을 배웠습니다. 야주개의 큰 상인 집안에서 아들로 태어나 개구쟁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4대가 함께 사는 부유한 대가족으로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병약한 어머니에게 자랐고, 집안이 망한 후 일찍 출가한 누이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었습니다.

1905

[보성소학교 유치반 입학]

일곱 살 때 3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입학 시 전통에 반대되는 머리 단발을 하여 친할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일곱 살 때인 1905년 3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보성소학교에서는 입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하였는데, 이를 본 친할아버지 방한룡은 전통을 단절해야 할 구습으로 보는 진보 지식인들의 급진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매우 화를 내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했습니다.

1907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

작은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한순간에 가난해졌습니다. 이는 그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07년, 방정환의 집안은 작은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한순간에 가난해졌습니다.

1908

[소년입지회 조직]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펼치며 어린 시절부터 리더십과 문학적 소질을 보였습니다.

1908년에는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도 하였습니다.

1913

[선린상업고등학교 입학 및 문학 탐독]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상업 공부보다는 독서에 몰두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웠습니다.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상업학교 공부보다는 신문화 흡수를 위한 독서에 주력했습니다. 이 시기를 전후로 최남선이 발간한 어린이 잡지인 《소년》, 《붉은 저고리》를 탐독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 어머니가 사망했습니다.

1915

[조선총독부 취직 및 경성청년구락부 조직]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류 필사 업무를 하였고, 이때 함께 일했던 유광렬과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15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에서 취직하여 서류 필사 업무를 하였는데 이때 함께 일했던 유광렬과 뜻이 맞아 이후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합니다.

1917

[문학 등단 및 학업 중퇴]

최남선이 펴내던 잡지 《청춘》의 현상문예 선외가작에 뽑히며 문학가로 등단했습니다. 이후 적성에 맞지 않던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독학의 길을 택했습니다.

1917년 최남선이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현상문예 선외가작에 뽑힘으로써 등단했습니다. 그러던 중 졸업을 1년 앞두고,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모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독학의 뜻을 품었습니다. 훗날 그가 "선린상업학교를 계속 다녔다면 조선은행 서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회상할 정도로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이었습니다. 또한 1917년 이후 아버지도 사망했습니다.

[손병희 선생 사위가 되다]

천도교 3대 교주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 손용화와 결혼하여 천도교 보성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학하며 천도교청년회 핵심 활동가로 부각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17년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던 천도교인 권병덕의 천거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인 손용화 여사와 중매 결혼했습니다. 그 뒤 손병희가 교주로 있던 천도교에서 인수한 보성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고, 천도교청년회의 핵심 활동가로 부각되면서 삶의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됩니다. 처가의 배려로 삶이 안정되자, 잡지에 단편소설과 수필을 투고하는 등 작가로 활동하며 아동문학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습니다.

1919

[독립신문 발행 및 체포]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직접 등사기로 조선독립신문 2호를 찍어 중학생들과 함께 돌리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일주일 만에 풀려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보성학교 교장 윤익선이 천도교 보성사에서 인쇄한 조선독립신문을 내다 체포되자 직접 등사기로 찍은 조선독립신문 2호를 찍어 중학생들의 도움으로 돌리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일경이 들이닥치기 전에 등사기를 우물에 버린 덕에, 일주일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왔습니다. 하지만 같이 독립신문 발행에 동참한 청년구락부 동료들은 일경의 고문으로 옥사하였으며 방정환도 고문을 당했습니다.

1920

['어린이' 단어 보급 시작]

잡지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며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여, 어린이를 고유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뜻을 담아 보급하는 선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중세국어 시기에는 '어리다'가 어리석다는 뜻이었지만, 근대국어 시기 이후에 어린 사람을 뜻하는 '어린이'를 고유의 개성과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존중하는 뜻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기록적인 사실입니다.

[일본 유학 및 활동 시작]

개벽사 도쿄 특파원이자 천도교청년회 도쿄 지회장으로 일본에 건너가 활동했습니다. 이곳에서 철학과 신문화, 아동문학, 아동 심리학 등을 공부하며 지적 성장을 이어갔습니다.

1920년 9월 중순, 개벽사 도쿄부 특파원이자 천도교청년회 도쿄 지회장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했고 1921년 4월 도요 대학에 신설된 문화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정식 입학하여 철학과 신문화, 아동 문학, 아동 심리학 등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지만, 오히려 형사들과도 존중하는 관계를 유지할 정도였습니다.

1921

[천도교 소년회 조직]

서울에서 어린이의 윤리적, 경제적, 민족적 독립을 주장하며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어린이 운동의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1921년 서울에서 어린이의 윤리적, 경제적, 민족적 독립(해방)을 주장하며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하며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민족의 미래를 위해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도요 대학 문화학과 입학]

도요 대학에 신설된 문화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정식 입학하여 철학, 신문화, 아동문학, 아동 심리학 등을 공부하며 아동문학가로서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1921년 4월 도요 대학에 신설된 문화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정식 입학하여 철학, 신문화, 아동문학, 아동 심리학 등을 공부하였습니다.

1922

[대한민국 최초 어린이날 행사 주최]

소파 방정환은 색동회 회원들과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를 주최하며 어린이 인권 운동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는 당시 억압받던 어린이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선언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해 1922년 5월 1일에 어린이날 행사를 주최하였습니다. 소파가 노동절인 5월 1일에 어린이날 행사를 색동회 회원들과 개최한 이유는 당시 어린이들이 억압받고, 아동노동을 하고 있어 이들을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하고자 함입니다. 실제 당시 어린이 인권선언을 보면 어린이에게 낮춤말을 쓰지 말고 높임말을 쓸 것, 목욕 등의 위생을 위할 것, 어린이가 잘못을 했더라도 알아듣기 쉽게 차근차근 설명할 것, 잡지를 읽도록 해서 건강한 정서를 갖도록 할 것, 소풍을 자주 하도록 할 것 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어린이 인권운동의 시작이었습니다.

[번역동화집 《사랑의 선물》 출판]

《사랑의 선물》을 출판했습니다. 이는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출판한 유일한 단행본으로, 외국의 우수한 동화를 번안하여 조선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선사했습니다.

중국 유학 기간인 1921년에 외국 동화를 번역하여 1922년 7월 개벽사에서 번역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습니다.《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출판한 유일한 단행본이며, 난파선, 산드룡의 유리구두, 왕자와 제비 등 10편의 번안 동화가 실렸습니다. 당시 조선 어린이들이 누릴 만한 문화가 없었기에, 외국의 동화들을 번안하되 일부 내용은 각색하여 조선 어린이들이 읽기 좋도록 한 동화집을 펴내었습니다.

1923

[월간 《어린이》 창간]

한국 최초의 월간 순수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했습니다. 이 잡지는 마해송, 이원수, 윤석중 등 후대 아동문학가들을 발굴하며 한국 아동문학 발전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1923년 3월 20일, 월간 《어린이》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 보내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준다고 선전해도 불과 18명이 신청할 만큼 큰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방정환은 동화, 독자 응모 등을 실어 학부모와 어린이들의 공감을 얻었고, 윤동주 시인도 어린 시절에 《어린이》를 읽었다고 합니다. 《어린이》는 색동회의 동인이었던 마해송, 고한승, 정순철, 윤극영뿐 아니라 독자였던 이원수, 윤석중 시인 등이 작품을 투고하며 이후 아동문학가로 이름을 알리는 기회가 되어, 한국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색동회 창설]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했습니다. 이는 어린이 문학의 발전과 어린이 인권 신장을 위한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1923년 5월 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했는데,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 선생이 제안한 이름입니다. 색동회는 어린이 문화사업의 구심점이 되어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7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 역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동요 '형제별', 소년 소설 '칠칠단의 비밀' 등의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습니다.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형제별〉등의 동요, 동화, 《칠칠단의 비밀》 등의 소년 소설, 동극 등의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습니다.

1928

[세계아동예술전람회 개최]

세계 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던 기록적인 행사였습니다.

1928년에는 세계 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1931

[과로와 질병으로 요절]

잡지 발행, 동화 구연, 강연회, 집필 등 과도한 활동과 일제의 탄압,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 등으로 인한 과로와 스트레스로 신장염과 고혈압이 악화되어 향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1931년 7월 23일, 잡지의 발행·편집, 동화 구연과 소년문제 강연회 및 집필 중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과 개벽사의 재정난, 민족운동과 사회주의로 갈라진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 등 과로와 스트레스, 비만으로 건강이 악화된 방정환은 누적된 피로로 쓰러져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향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줄 만큼 성격이 밝았던 그는 '문간에 검은 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1936

[망우 역사 문화공원으로 유해 이장]

사망 후 홍제동 납골당에 안장되었던 유해가 방정환의 기일에 맞춰 망우 역사 문화공원으로 이장되었습니다.

방정환이 사망한 후 유해는 홍제동의 납골당에 안장되었으나 1936년 7월 23일, 그의 기일에 망우 역사 문화공원으로 이장되었습니다.

1957

['소파상' 제정]

방정환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업적과 정신을 후세에 알리고 계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57년 방정환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습니다.

1958

[고려대학교 명예 졸업장 추서]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학업을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을 기린 것이었습니다.

1958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이 추서되었습니다.

1971

[방정환 선생 동상 건립]

색동회가 주관하고 전국 어린이들의 성금을 모아 2년간 제작한 동상이 남산 어린이회관 옆에 세워졌습니다. 이는 그의 어린이 사랑 정신을 기리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1971년에는 색동회가 주관하고 또 전국 어린이들의 성금을 기금으로 하여 2년간 제작한 동상이 남산 어린이회관 옆에 세워졌습니다. 이 동상은 1987년에 능동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졌습니다.

1978

[금관문화훈장 추서]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그의 문화 예술적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1978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1980

[건국포장 추서]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공적을 기린 것입니다.

1980년 3월 1일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습니다.

1983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 건립]

어린이날,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있는 방정환의 묘소에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가 세워졌습니다. 그의 정신을 기리는 또 하나의 상징물이 추가된 것입니다.

1983년 어린이날,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있는 방정환의 묘소에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碑)」가 세워졌습니다.

1987

[독립기념관 어록비 건립]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습니다. 그의 어린이 인권 메시지가 영구히 보존되게 되었습니다.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습니다.

1990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최고 수준의 국가적 예우를 나타냅니다.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1998

[한국방정환재단 설립]

한국방정환재단이 설립되어 소파 방정환 정신을 구현하고 올바른 어린이 문화지평을 넓히는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에는 한국방정환재단이 설립되었고 한국방정환재단은 소파 방정환 정신의 구현을 위해 올바른 어린이 문화지평을 넓히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방정환의 정신과 가치를 연구하고, 사료를 수집 정리하는 사료편찬사업, 그리고 한국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조사연구와 함께 다양한 작은물결 프로젝트를 통해 창의적인 어린이 청소년 공익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2017

[묘소 국가등록문화재 지정]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있는 방정환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그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이 다시 한번 공인되었습니다.

2017년에는 망우 역사 문화공원에 있는 방정환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상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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