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조선시대 문신, 군인, 정치인, 도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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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군인으로, 영의정 권철의 아들이자 오성 이항복의 장인이다. 46세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발발 후 도원수로서 조선군을 총지휘했다. 이치 전투와 독성산성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특히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끌며 왜군 침략을 막아낸 명장으로 평가받는다. 사후 선무공신 1등에 추록되고 영의정에 추증, 영가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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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7

[권율 출생]

영의정 권철의 아들로 경기도 강화부에서 태어났다.

1537년 12월 28일 경기도 강화부(현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후일 영의정을 지내는 권철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적순부위(迪順副尉)를 지낸 조승현(曹承晛)의 딸이다.

1582

[식년문과 급제]

46세의 늦은 나이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46살이 되던 1582년(선조 15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를 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사실 개인적인 자존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과거에 응시한 부분도 있었는데 사위인 이항복이 1580년(선조 13년)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컸다. 이항복은 가족관계에서는 사위이지만 과거 시험으로 따지면 권율보다 2년 선배가 된다. 가족들이 이항복과 비교하며 사위는 벌써 관직에 나가서 활약하고 있는데 장인어른이라는 사람이 집에서 놀고 먹고 있는 게 말이 되냐는 타박으로 인해 권율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것을 결심했다.

1591

[의주목사 발령]

호조정랑을 거쳐 의주목사로 발령받아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1591년 초 호조정랑에 임명되었다가 1591년 9월 바로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발령받았으며, 의주목사 재직 중 당상관으로 승진했지만 1592년(선조 25) 해직되었다.

1592

[용인 전투 패전]

용인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하고 퇴각한 뒤 남은 군사들을 추슬러 광주군으로 퇴각하여 1천여 명의 병력과 의병을 추가로 모집했다.

이광이 용인으로 들어가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일본군들을 기습공격하려 하자, 권율은 평지이며 병력이 소수임을 들어 극력 반대했으나 이광이 듣지 않아 무모한 공격으로 대패했다. 이때 권율 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상당수 유지하고 남은 군사들을 추슬러 이끌고 광주군으로 퇴각하여 1천여 명의 병력과 의병을 추가로 모집했다.

[임진왜란 발발 및 광주목사 임명]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전라도관찰사 곽영의 휘하에 참전했다.

1592년(선조 25) 4월 그의 나이 56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 발령되고, 전라도관찰사 겸 방어사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한성탈환전에 참전했다.

[이치 전투 대승]

전라도 금산 이치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왜군을 막아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왜군은 전라도 진격작전을 포기하게 되었다.

권율은 전라도 금산에서 전주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 인근 전주 이치(梨峙배고개)에 진을 쳤다. 임시 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1천여 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2천여 명의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왜군은 그 후 다시는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권율은 전라감사로 승진하였다. '가을' 표현으로 9월 추정.

[전라도 관찰사 임명]

이치 전투에서 승전한 공로로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92년 가을 이치 전투에서 승전한 공로로 곧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독성산성 진지 구축]

한양 탈환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 수원 독성산성 진지를 보수하고 구축했다.

1592년(선조 25) 12월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 길에 올라 직산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가, 북상하라는 행재소의 전갈을 받고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잠시 병사들을 휴식시켰다가 얼마 뒤 독왕성의 진지를 보수, 구축하였다.

1593

[독성산성 전투 및 세마대 일화]

수원 독성산성에서 우키다 히데이예가 이끄는 왜군의 포위를 버텨냈다. 물이 부족한 상황을 역이용하여 말에게 쌀을 씻기는 척하며 적을 속이는 '세마대' 일화를 만들었다.

한양으로 향해 북상하던 도중 수원 독산(현 오산시)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였다. 독왕산성은 물이 귀한 곳이었으며 우키다 히데이예가 이끄는 왜군은 독왕산성과 그 주변에 물이 부족하다는 기미를 알고 한 달간 성을 포위했다. 권율은 산성 위에 군마들을 세워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말에게 쌀을 쏟아붓고 씻기게 하여, 성 아래 왜군들이 물이 풍부한 것으로 오인하게 만들었다. 이에 왜군은 의기소침하여 포위를 풀고 한성으로 후퇴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권율의 병법을 높이 치하하여 독왕산성 정상에 세마대(洗馬臺, 말을 씻긴 곳)를 짓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

[행주대첩 대승]

3,800명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해오는 3만 명의 왜군을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힌다.

1593년 음력 2월 12일(양력 3월 14일) 부사령관 선거이, 승병장 처영의 의승병 1천여 명 등 총 3,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했다.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왜군을 맞아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 화차, 비격진천뢰 등의 신무기와 부녀자들의 돌 운반 등으로 적군을 격퇴했다. 적장 우키다 히데이에를 비롯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히고 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대승을 거두었다. 행주대첩은 이순신의 옥포대첩,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4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파주산성으로 이동]

행주산성 전투 후 파주산성으로 이동하여 도원수 김명원 등과 연락하며 주둔했다.

권율은 왜병이 다시 올라올 것이라 보고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하여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피난시킨 뒤, 주둔군을 이끌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 등과 연락하면서 파주성을 지키면서 주둔하였다.

[팔도 도원수 승진]

행주대첩 승전의 공으로 도원수(조선군 총사령관)로 승진하여 조선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593년 6월 행주대첩 승전의 공(功)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고, 원수(元帥)에 올랐다가 다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으며, 영남으로 보내졌다.

1596

[도망병 처벌 논란 및 복권]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사건으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복권되었다.

영남에서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탄핵을 받고 해직되었다가 복권되었다.

[이몽학의 난 진압]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을 토벌하는 데 참여하여 반란군을 섬멸했다.

1596년(선조 29) 7월 충청도에서 왕족을 자처한 선비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 권율에게 명하여 이를 토벌하도록 하였고, 그는 바로 군사를 이끌고 급히 충청도 부여로 향하여 부여와 홍주(洪州)에서 이몽학의 군사를 섬멸시켰다.

[한성부판윤 및 주요 관직 역임]

이몽학의 난 진압 후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1596년 10월 한성부판윤으로 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호조판서가 되었다. 1596년(선조 29)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선조로부터 친히 어마(御馬)까지 선물로 하사받았다.

1597

[정유재란 참전 및 명군 비협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명나라 장수 마귀와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양호의 퇴각령으로 실패했다. 순천에서도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작전이 좌절되었다.

1597년(선조 30) 휴전이 되었지만 만일을 대비해 진안현감 오장에게 지시하여 호남의 군사를 이끌고 진주 제석산성(晉州 帝錫山城)을 보수, 수축하게 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은 해안가로 올라오는 일본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총지휘관이었던 명나라 군대 사령관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1599

[권율 서거]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1599년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 6일 병으로 집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낭관(郞官)을 보내 조문, 치제하게 했으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이틀간 정사(政事)를 폐하였다고 한다.

[좌찬성 추증 및 선무공신 1등 녹훈]

사후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등에 추증되었고,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며 영의정에 추증, 영가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권율은 죽은 뒤 전공으로 그해 7월 12일 판서 정창연(鄭昌衍), 참판 조정(趙挺), 참의 송순(宋諄) 등의 건의로 바로 특증(特贈)되어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동지성균관사에 추증되었다. 훗날 다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에 추증되고, 1604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임진왜란 중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려진 최고의 영예인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져 충장공(忠莊公)이 되었으며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1605년 청난원종공신 1등에 추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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