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조선 무신, 장군, 진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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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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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무신, 장군, 진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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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무신 김시민은 임진왜란 발발 후 진주 목사를 대리하여 무너진 민심을 수습하고 진주성을 수비했다. 특히 1592년 진주대첩에서 4천 명의 병력으로 2만 왜군을 격퇴하며 조선군의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으나, 전투 직후 부상으로 순국했다. 죽음 이후에도 선무공신으로 추봉되고 충무공 시호를 받는 등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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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4

[김시민 탄생]

조선 중기 무신 김시민이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에서 태어났다.

1554년 9월 23일(음력 8월 27일)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현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서 지평 김충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구)안동이며,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61

[8세 김시민, 뱀 퇴치 일화]

여덟 살 김시민이 마을 냇가에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을 해치던 큰 뱀을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로 쏘아 잡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시민이 8살이던 해, 마을 냇가에 큰 뱀이 출몰하여 마을 사람과 가축을 해치자, '뱀은 뽕나무 활에 쑥대 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손수 만든 활로 뱀을 쏘아 없애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1578

[무과 급제]

김시민이 선조 1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다.

1583

[니탕개의 난 토벌 참여]

여진족 니탕개가 회령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회령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1591

[진주판관 임명]

선조 24년에 진주판관으로 임명되며 진주 지역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1591년(선조 24년) 진주판관이 되었다.

1592

[진주목사 정식 임명 및 방어 준비]

고성, 창원 수복 및 거창 사랑암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식으로 진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취임 후에는 염초 5백여 근과 총통 70여 병을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성을 지킬 방책을 강화했다.

고성, 창원 수복과 거창 사랑암 전투의 공로로 1592년 진주목사로 관직을 승진 제수받았다. 취임 후 염초 5백여 근을 만들고 총통 70여 병을 만들고, 따로 부대를 배정하여 숙달시키는 한편,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과 진주목사 대리]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진주 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이경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을 받아 진주목사직을 대리하게 되었다. 이후 진주로 돌아와 성민을 안심시키고, 성채를 보수하며 군사 훈련으로 군사 체계를 갖추었다.

부임한 지 1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진주로 돌아와 성민을 안심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채를 보수하고, 한편으로 군사 훈련으로 군사 체계를 갖추었다.

[영남 지역 주요 거점 수복 및 거창 승전]

왜군이 사천에 집결하여 진주로 진격하자, 곤양군수 이광악,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합세하여 적을 요격하고 고성, 창원을 수복했다. 이후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아 구원병 1천 명을 이끌고 거창 사랑암에서 왜군에게 승전했다.

왜군은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진격하였다. 이에 곤양군수 이광악과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합세하고, 적을 중간에서 요격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였다. 이어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아, 구원병 1천을 이끌고 가서, 거창의 사랑암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군을 맞아 승전하였다.

[진해 전투 승리 및 통정대부 승진]

음력 9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를 사로잡아 조정에 보내자 통정대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금산에서 적을 격파하여 사기를 크게 높였다.

음력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소)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통정대부로 임명하였다. 그 뒤 금산에서 적을 격파하여 사기가 충천하였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진주대첩 대승]

2만 대군으로 진주성을 습격한 일본군에 맞서, 김시민은 고을 백성 남녀노소를 모두 성안으로 들여보내고 여자는 남장시켜 군세를 과장했다. 4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7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을 퇴각시키며 조선군의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다. 이는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기록된다.

한 번 대패한 일본군은 진주성을 빼앗으려고 다시 계획을 세웠다. 1592년 일본의 2만 대군이 진주성으로 습격했는데, 김시민은 고을 안에 사는 백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성으로 들어오게 한 후, 여자는 모두 남장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조직된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성을 철통같이 지키며 7일간의 격전 끝에 일본군을 퇴각시켰다. 조선군의 위대한 승리였다.

1593

1593.01.28 사후 1년

[진주대첩 후 순국]

진주대첩 직후 전장을 둘러보던 중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군의 총에 왼쪽 이마를 맞고 쓰러져 향년 38세로 순국했다.

1592년 마지막 날의 전투(진주대첩)를 끝낸 후 전장을 둘러보던 김시민은 시체 속에 숨어 있었던 한 왜군의 총에 왼쪽 이마를 맞고 쓰러졌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의 나이 향년 38세였다. 사망일은 음력 1592년 12월 26일, 양력 1593년 1월 28일이다.

1604

[선무공신 2등 및 상락군 추봉]

선조 37년에 선무공신 2등에 봉해지고 상락군에 추봉되었다.

1604년(선조 37년) 선무공신 2등에 봉해졌으며, 상락군(上洛君)에 추봉되었다.

1619

[진주성에 김시민 장군 전공비 건립]

광해군 11년, 김시민 장군의 전공비가 진주성에 세워졌다. 이 비석은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으며, 진주전상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불린다.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619년(광해군 11년) 음력 7월에 진주성에 세워졌으며, 성여신이 비문을 짓고,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진주전상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라고도 한다.

1702

[영의정 추증 및 충무공 시호 하사]

숙종 35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며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1702년(숙종 35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1868

[서원철폐령으로 인한 배향지 변경]

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민사가 없어지고, 진주성 내의 창열사에 함께 배향되었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민사가 없어지고, 진주성 내의 창열사에 함께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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