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대첩
전투, 임진왜란, 조선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8:57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조선군과 백성들을 이끌고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입니다. 비격진천뢰, 화차 등 신무기를 활용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7차례 맹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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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
['행주' 지명의 고려 초기 유래]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행주(幸州)'라는 지명은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으며, 이는 '행주치마'에서 '행주산성' 지명이 유래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행주(幸州)'라는 지명은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다. 이는 '행주치마'라는 용어가 먼저 생기고 그로 인해 '행주산성'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1517
['행주치마' 용어의 최초 기록]
'행주치마'라는 용어가 임진왜란 발발 및 행주대첩보다 76년 앞선 1517년에 편찬된 사성통해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행주대첩에서 유래했다는 민간어원설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행주치마'라는 용어는 행주대첩이 일어나기 76년 전인 1517년에 편찬된 '사성통해(四聲通解)'에 이미 존재했다. 이는 행주대첩에서 여성들이 돌을 나르기 위해 치마를 활용했다는 민간어원설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언어학자들은 이를 민담에 근거한 민간어원설로 판단한다.
1592
[동래성 전투 여성 활약]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에서 두 명의 여인이 기왓장을 던져 일본군과 싸운 기록이 정사에 남아있다. 이는 행주대첩의 '행주치마' 이야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에서 두 명의 여인이 기왓장을 던져 일본군과 싸웠다는 내용이 정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송공단에 이 두 여인을 기리는 의녀비들이 세워져 있다. 이 실제 사건이 행주대첩의 '행주치마' 민간어원설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1593
[권율, 행주산성 고립]
임진왜란 초기 이치, 독성산성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권율은 전라도 순찰사가 된 후 행주산성으로 이동해 명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고 한양으로 돌아가 고립되었습니다. 이 시기 이순신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았습니다.
광주 목사로 이치 전투와 독성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권율은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했다. 이후 한양 탈환을 위해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명군과 합류하려 했으나, 벽제관에서 명군이 대패하고 평양으로 철수하면서 권율은 고립된 상황에 처했다. 이 시기 권율은 이순신으로부터 여러 무기를 지원받아 방비에 힘썼다.
[행주산성 방어 태세 구축]
권율은 음력 2월 부사령관 선거이에게 금주산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주둔했습니다. 의병장 김천일과 승병장 처영의 병사들도 합세하여 총 9,000여 명의 병력을 모았고, 행주산성은 배수진 형태의 낮은 언덕에 위치한 토성으로, 목책을 둘러싸고 싸워야 하는 열악한 조건이었습니다.
1593년 음력 2월, 권율은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를 금천 금주산에 배치하고, 자신은 한강을 넘어 행주산성에 주둔했다. 의병장 김천일과 승병장 처영의 병사들까지 합류하여 관군 3,000명, 의병 6,000명 등 총 9,000여 명의 병력이 모였다. 행주산성은 후방에 한강이 흐르는 배수진 형태였으며, 높이 120m의 낮은 언덕에 위치한 소규모 토성으로, 성벽이 낮아 목책으로 방어해야 하는 불리한 지형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행주대첩, 조선군의 압도적 승리]
일본군 우키타 히데이에는 3만여 병력을 이끌고 행주산성을 7차례 공격했으나, 조선군은 비격진천뢰, 신기전, 천자총통 등 최신 무기와 바위, 화살, 끓는 물까지 동원해 모든 공격을 격퇴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최소 500여 명의 일본군 사상자가 발생하고, 우키타 히데이에를 포함한 주요 장수들이 부상을 입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593년 3월 14일(음력 2월 12일), 일본군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3만여 명의 병력이 행주산성을 맹공했다. 조선군은 휘하 다이묘들을 이끌고 공격해 온 일본군을 맞아 비격진천뢰, 신기전, 천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까지 퍼부어 7차례에 걸친 총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이로 인해 최소 500명 이상의 일본군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가 부상을 입었다. 특히 우키타 히데이에는 중상을 입었으나 부하 병사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와 비격진천뢰, 이순신에게 제공받은 각종 함포들이 맹활약하며 조선군의 결정적 승리에 기여했다.
[권율의 전공과 지위 변화]
행주대첩 승리 후 권율은 도원수에 올랐으나, 탈영병 즉결 처분으로 해직되었다가 한성부판윤 겸 비변사당상으로 재기용되었습니다. 1596년에는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는 등 지위 변화를 겪었습니다. 농성 성공에도 불구하고 권율은 곧 행주산성을 버리고 김명원과 합류했습니다.
행주대첩의 전공으로 권율은 도원수에 올랐다. 그러나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인해 일시 해직되었고, 이후 한성부판윤 겸 비변사당상으로 재기용되었다. 1596년에는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는 등 여러 차례 지위 변화를 겪었다. 한편, 권율은 농성에는 성공했지만 곧 행주산성을 버리고 김명원과 합류하는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