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 사건
역사 사건, 민족운동, 언어 연구 탄압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0:39
일제가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한글을 연구하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재판에 회부한 사건입니다. 우리말과 글을 지키려던 학자들의 노력은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결실을 맺어, 한글 보존과 독립정신 고취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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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국어연구학회 창립]
주시경 선생을 주축으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는 '국어연구학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조선어학회의 모태가 됩니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선생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이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한 민간 학술단체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학회는 후에 '배달말글몯음', '한글모', '조선어연구회'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11
국어연구학회는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모음'으로 명칭을 변경하며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1913
1913년 3월 23일, '배달말·글모음'은 '한글모'로 이름을 다시 바꾸고 한글 연구와 보급에 집중했습니다.
1921
1921년, '한글모'는 '조선어연구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조직을 재정비하여 더욱 체계적인 우리말 연구 활동을 펼쳤습니다.
1931
['조선어학회'로 개칭 및 활동 본격화]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변경하며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표준말 사정 등 활발한 사전 편찬 기반 작업을 펼쳤습니다.
1931년 1월 10일,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장지영, 이윤재, 최현배 등이 중심이 되어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 1936년 표준말 사정, 1940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 등 한국어 사전 편찬의 바탕이 되는 작업을 활발히 진행했습니다.
1932
1932년, 조선어학회는 학회지 '한글'을 창간하여 우리말과 글의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알리고 한글 보급에 기여했습니다.
1933
조선어학회는 1933년에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여 한글 표기의 통일성을 확립하고 한국어 사전 편찬의 중요한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1936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 강화]
일제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 등을 공포하고 학교의 국어 과목을 전폐하는 등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며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을 극심하게 강화했습니다.
1936년 일제는 한국인 탄압을 위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했으며, 1939년 4월부터는 학교의 국어(한국어) 과목을 전폐하고 신문·잡지 폐간을 강행했습니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며 지식인 탄압을 강화했고, 1943년에는 제4차 조선교육령으로 조선어 교육을 완전히 폐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는 등 민족 말살 정책을 극단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조선어학회 사건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1940
1940년, 조선어학회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하여 한국어 어휘의 통일된 표기 방식을 확립하고 한국어 사전 편찬의 중요한 부분을 완성했습니다.
1941
[일본의 진주만 습격 및 태평양 전쟁 참전]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이후 내부의 반항을 염려하여 조선인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습니다. 전쟁에 돌입하며 일제는 내부의 반항 세력을 경계했고, 이는 조선어학회에 대한 대규모 탄압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42
[조선어학회, 한국어 사전 편찬 본격 착수]
조선어학회는 오랜 준비 끝에 한국어 사전 편찬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민족의 숙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42년 4월부터 조선어학회는 민족의 숙원이었던 한국어 사전 편찬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는 한글맞춤법 통일안, 표준말 사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 등 오랜 기간 다져온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문화 운동이었습니다.
[박병엽 검문 사건 발생 (사건의 발단)]
함경남도 홍원에서 박병엽이 검문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게 불손하게 응대하여 연행되었고, 조카딸의 일기장에서 한글 사용 권장 내용이 발견되며 조선어학회 수사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발단이 되었습니다.
1942년 7월, 함경남도 홍원읍 전진역에서 박병엽이 일본 경찰의 검문에 퉁명스럽게 응대하다 연행되었습니다. 그의 집 수색 과정에서 조카딸 박영옥의 일기장에서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자를 처벌하였다'는 구절이 발견되었고, 이를 빌미로 박영옥을 포함한 친구들이 취조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고문 끝에 한글 사용을 권장했던 김학준, 정태진 두 교사를 지목하게 되면서 조선어학회 사건의 수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정태진 조선어학회 편찬원 소환 및 취조]
함흥 일출여고 학생이 한국어 대화로 발각된 후,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원 정태진이 관련자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에 소환되어 취조를 받았습니다.
함흥 일출여고(또는 영생여고) 학생이 한국어로 대화하다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취조를 받던 중, 1942년 9월 5일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원 정태진이 관련되었다며 소환되어 취조를 받았습니다. 이는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단정하고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하는 중요한 빌미가 되었습니다.
[조선어학회 관계자 대거 검거 및 옥중 순국]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단정하고 회원 및 관련 인물들을 대거 검거하여 혹독하게 고문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윤재, 한징 선생이 옥중에서 순국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1942년 10월 1일부터 일제는 조선어학회 관련자들을 대거 검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김윤경, 권승욱, 장지영, 한징, 이중화, 이석린, 이극로 등 11명의 주요 학회 관계자들이 서울에서 구속되어 홍원으로 압송되었으며, 이후 이우식, 김법린, 정열모, 이병기,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서승효, 안재홍, 이인, 김양수, 장현식, 정인섭, 윤병호, 이은상, 김도연, 서민호 등이 차례로 검거되었습니다. 총 29명이 검거되어 홍원경찰서 유치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943년 12월 이윤재 선생이, 이듬해 2월 한징 선생이 심한 고문과 열악한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조선어학회 관련 이우식, 김법린 검거]
1차 검거에 이어 조선어학회 관련 인물인 이우식과 김법린이 일제에 의해 추가로 검거되었습니다.
1942년 10월 18일, 조선어학회 사건과 관련하여 이우식과 김법린이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습니다.
1942년 10월 20일, 조선어학회 관련 인물인 정열모가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습니다.
[조선어학회 관련 이병기 등 4인 검거]
이병기,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등 4명의 조선어학회 관련 인물이 일제에 의해 추가로 검거되었습니다.
1942년 10월 21일, 이병기,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등 4명의 조선어학회 관련 인물이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습니다.
[조선어학회 관련 서승효 등 8인 검거]
서승효, 안재홍, 이인, 김양수, 장현식, 정인섭, 윤병호, 이은상 등 8명의 조선어학회 관련 인물이 추가로 검거되어 탄압이 확대되었습니다.
1942년 12월 23일, 서승효, 안재홍, 이인, 김양수, 장현식, 정인섭, 윤병호, 이은상 등 8명의 조선어학회 관련 인물이 일본 경찰에 의해 추가로 검거되었습니다. 이들 모두 홍원경찰서에 유치되었습니다.
1943
1943년 3월 말부터 4월 1일까지 신현모와 김종철은 불구속 상태로 일본 경찰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 시점까지 총 29명이 검거되어 홍원경찰서 유치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48명이 취조를 받았습니다.
1943년 3월 5일, 김도연이 조선어학회 사건과 관련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홍원경찰서에 유치되었습니다.
1943년 3월 6일, 서민호가 조선어학회 사건과 관련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홍원경찰서에 유치되었습니다.
1945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한반도는 잃었던 주권을 되찾고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이 소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억울하게 수감되어 있던 이들에게 석방의 기대를 안겨주었습니다.
[광복 후 피고인 석방 및 사전 원고 극적 발견]
광복을 맞이한 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던 피고인들이 석방되었습니다. 또한, 사라졌던 한국어 사전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어 이후 한글 대사전 편찬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찾아온 후, 이틀 뒤인 8월 17일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재판 중이거나 복역 중이던 피고인들이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이어 1945년 9월, 일제에 의해 압수되어 행방불명되었던 한국어 사전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발견은 민족의 숙원이었던 한글 대사전이 출판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의 비극을 넘어서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49
[조선어학회, 한글학회로 개칭]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우리말 연구와 보급 활동을 현대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1949년 9월 25일 이후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날까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