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연표
1896
1902
6세 때 고향 초량동에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와서 교회를 짓고 그 옆에 작은 집을 지어 동리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친 곳을 주민들은 양국서당(洋國書堂)이라 불렀으며, 허정도 그곳에 다니며 크리스찬이 되었다.
1904
1910
소년 시절 주시경이 쓴 잔 다르크전을 읽고 감명받았으며, 이동휘의 강연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1912
1917
[보성전문학교 진학]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여 수학했으며, 이후 중국 상해 오송상선학교와 남경 항해학교 등에서 수학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 영국 런던 항해대학교에서도 수학했다.
1919
[임시의정원 활동]
상하이 임시정부가 결성되자 임정 직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했으며,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했다.
1920
[개명 및 아호 제정]
프랑스에 도착한 후 어릴 적 이름인 허성수(許聖壽)에서 허정으로 이름을 바꾸고, 바다를 보고 '우양(友洋)'이라는 아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6개월 정도 체류하는 동안 프랑스 거주 한국인 거류민 회장이 되어 교민들을 결속하는 데 힘쓰고, 막노동 중 노령에서 건너온 한국인 노동자들의 무식함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멸시당하는 것에 충격을 받고,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도움을 얻어 유법한인회(留法韓人會)를 결성했다. 또한 낮에는 막노동과 밤에는 노동을 하고 돌아온 한국인들을 모아서 한국의 역사, 지리, 국어, 산수 등을 가르쳤다.
1922
1923
구미외교위원부에서 그가 맡은 일은 한인 교포들에 대한 인두세 징수와 구미위원부 기관지인 구미위원부 통보의 발간이었다. 통보에서 3·1운동의 결정체인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 삼고 임시정부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인두세를 납부하는 것은 해외 한국인 교포의 의무임을 강조하는 글을 싣고 인두세를 구미위원부로 보내달라고 호소하였다.
1932
1933
1938
1940
1942
1945
1946
1947
1948
[교통부 장관 취임]
제2대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어 취임했으며, 좌익 계열의 농성과 파업에 강력히 대응하며 철도 및 교통부 직원의 노조활동을 금지시켰다.
1949
1950
사회부장관으로 석탄공사 총재직을 겸직하다가 1951년 11월 23일 총재직을 부총재 김성호에게 넘겼다.
1951
1952
[총리 서리 전임 발령]
이승만은 국무총리 서리였던 허정에게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준비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허정은 직선제 개헌에 반대했다.
며칠 전 일본정부가 한국의 영해선언을 공해에 있어서의 항해와 어로에 관한 자유를 규정한 국제법을 무시한 일방적인 조치라고 지적하여 정식 항의해온 데 대해서 이상과 같이 정부의 태도를 밝히면서 계속하여 허총리서리는 영해선언을 가리켜 이론이나 정의 또는 공정에 있어서 어긋나는 아무런 점도 없으며 순전히 한국의 정당한 자위책을 위한 것을 강조하고 한편 타국의 수역이나 주권을 무시 혹은 침범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였다.
1954
일단 이 대통령 정부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를 반대하는 일선에 선다는 것은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 같았기 때문이라고 불참 이유를 밝혔다.
선거운동원 손홍병(孫洪秉, 당시 59세)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1956
1957
[서울특별시장 취임]
제8대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어 취임했으며, 인사파동을 지양하고 관청의 장이 갈릴 때마다 발생하는 무분별한 인사이동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958
1959
[4차 한일회담 결렬]
주일공사 최규하의 임석 하에 일본 도쿄로 가 4차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참석했으나 배상 금액 문제로 마찰을 빚다가 성과 없이 종결되었다.
1960
[대통령 권한대행 취임]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부통령과 대통령직이 공석이 되자 수석국무위원으로서 과도 정부의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한 허정은 '혁명적 목표를 비혁명적 방법으로 수행한다'고 시정방침을 발표했다.
[국무회의 개최]
첫 국무회의를 열어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경제 위기를 타개하며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 경제사범 엄단 등 5가지 정책을 채택했다.
[이승만 출국 주선]
새벽 김포공항에서 이수영 외무부 차관에게 지시하여 이승만 내외를 모시고 나오도록 했으며, 직접 공항으로 나가 이승만의 하와이 출국을 주선하고 배웅했다.
허정은 각료들까지도 모르게 단독으로 주한 미 대사와 상의하여 이승만의 출국을 추진했으며, 이는 그에게 큰 책임 논란을 가져왔다. 허정은 당시의 감정을 '나는 이승만의 아픈 심정을 직접 느끼는 듯해서 목이 메었다'고 회고했다.
국회에 불려가서 그 경위에 대해 '이 박사 건강이 아주 나빠졌는데 마침 하와이 거류민단으로부터 요청이 있어 보내드린 것이오. 매카나기 대사로부터 미국에서 입국 허가는 벌써 나와있어 정부가 여권만 내어주면 그분을 휴양차 하와이에 모실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단독으로 내 책임하에 비자를 내드렸오'라고 답변했다.
[권한대행직 재개]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민의원 의장 곽상훈에게 인계했으나, 곽상훈이 직을 맡을 수 없다며 사퇴하여 6월 23일 다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국무총리직 사임]
윤보선이 지명한 장면이 국무총리에 인준되자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나 야인이 되었고, 신임 장면 내각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1961
[5·16 군사정변 발생]
5·16 군사 정변 소식을 접했다.
군사혁명의 성공에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UN군 사령관의 저지 노력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을 목도했다.
1962
[정치정화법 대상]
정치활동정화법의 대상자가 되는 불운을 겪었다.
부패 정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주장했으나 요청이 거절당하자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1963
윤보선이 대통령 후보로 지목되자 허정은 김병로나 이인, 김도연이라면 양보할 의사가 있으나 윤보선에게는 절대 양보할 수 없음을 들어 끝까지 경선에 나섰으나, 결국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허정이 자진 용퇴했다.
[군정연장 반대 시위]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발표하자 윤보선과 함께 서울시청, 을지로 주변, 주한 미국 대사관 주변 등에서 산책데모를 벌이며 군정연장에 반대했다.
이날 대회는 민정당 대표위원 김병로, 신정당 위원장 허정, 민우당 고문 이범석을 당 공동대표로, 김도연, 이응준, 이인, 안호상, 전진한을 당 지도위원에 선출했다.
1964
박순천이 대표최고위원으로, 허정이 최고위원으로 만장일치 추대되었다.
1965
허정,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등은 이승만의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1966
1967
1969
1975
1979
1980
1981
1982
[청와대 위촉식 일화]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위촉식이 있을 때, 의전실장의 '줄을 서라'는 지시에 강하게 반발하며 기골 있는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되었다.
1983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