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

정치사건, 사화,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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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연산군이 1504년 모후 폐비 윤씨의 복수와 왕권 강화를 위해 일으킨 대규모 숙청 사건입니다. 폐비를 찬성했던 훈구 원로 세력이 대거 숙청되었으며, 왕권을 제약하는 대간과 훈구세력 제거가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부관참시, 능지처참, 쇄골표풍 등 전례 없는 잔혹한 형벌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사화로 희생된 인물들은 중종 반정 이후 대부분 복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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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

[폐비 윤씨 사사]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왕실에서 쫓겨난 후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갑자사화의 주요 명분이 됩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는 1482년에 사사되었습니다. 연산군은 갑자사화의 명분으로 폐비 윤씨의 폐위를 찬성한 신하들에 대한 처벌과 복수를 내세웠습니다.

1503

[이세좌 유배와 연산군의 왕권 강화 시도]

연산군이 자신의 옷에 술을 엎지른 이세좌를 핑계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비난하며 유배 보냈습니다. 이는 왕권 강화와 훈구세력 제거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연산 9년 9월, 연산군은 이세좌가 실수로 자신의 옷에 술을 엎지른 것을 핑계 삼아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운운하며 이세좌를 유배 보냈습니다. 이는 연산군이 왕권을 제약하는 대간과 자신의 절대왕권 구축에 걸림돌이 되는 훈구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실천 과정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1504

[홍귀달 사건을 빌미로 한 이세좌 재유배]

연산군 간택령에 홍귀달이 불응하자, 연산군은 이를 이세좌의 행위를 본받은 것이라며 이세좌를 추가로 유배 보냈습니다. 폐비 윤씨 복수와 '능상지풍' 척결이라는 연산군의 목적이 드러납니다.

연산 10년 2월, 연산군의 간택령에 홍귀달이 불응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연산군은 "대간들이 간하지 않는 것은 이세좌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홍귀달의 언사가 불공하고 임금을 경시하는 태도 역시 이세좌의 행위를 본받았기 때문이다"라며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세좌도 홍귀달과 함께 유배 보냈습니다. 이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이세좌를 통해 어머니에 대한 복수와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연산군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사헌부 관원 투옥 및 이세좌 사면 금지]

연산군은 홍귀달의 언사가 불경하다며 죄를 논하게 했고, 이세좌의 죄를 논하지 않은 대사헌 이자건 등 사헌부 관원들을 감옥에 가두고 이세좌의 사면을 금지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3월 12일, 연산군은 홍귀달의 언사가 불경하다며 죄를 논하게 하고, 이세좌가 중한 죄를 범했음에도 대간들이 두려워 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사헌 이자건과 대사간 박의영 등 사헌부 관원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또한 앞으로 이세좌를 사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연산군의 '위 능멸 풍습' 척결 지시와 홍귀달·이세좌 유배]

연산군은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고치도록 의정부에 알리고, 홍귀달과 이세좌를 유배 보냈습니다. 신하들에게는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는 경계의 글을 차게 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3월 13일, 연산군은 대신들과 대간들이 붕당을 이루어 임금을 고립시키는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시하며 의정부에 알렸습니다. 이 날 홍귀달과 이세좌를 유배 보냈습니다. 또한 환관들에게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어디서나 굳건하리라.'는 경계의 글귀를 나무 패에 새겨 차고 다니게 했습니다.

[이세좌 아들과 승지 국문]

이세좌가 유배길에 사죄하려 하자 연산군은 이를 자신의 뜻을 탐지하려는 행위로 보고 승지들을 국문했으며, 이세좌의 아들 이수정 역시 직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간 죄로 국문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3월 14일, 연산군은 이세좌가 궐문 밖에 와 사죄하는 것을 자신의 뜻을 탐지하려는 행위로 간주하고, 이를 아뢴 승지들을 국문했습니다. 또한 이세좌의 아들 이수정이 직을 맡고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직을 떠나 아버지를 따라간 이유로 잡아다 국문하게 했습니다.

[홍언국 국문과 전 대간 유배]

홍언국이 국문당하고, 전 대간들이 유배되었습니다. 이세좌를 방문한 자와 이세좌 일로 의정부 당상 및 승지들도 국문 대상이 되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3월 15일, 홍언국이 국문당하고 전 대간들이 귀양 보냈습니다. 이세좌를 방문한 자들을 국문하게 했으며, 이세좌의 일로 의정부 당상과 승지들도 국문하게 했습니다.

[이세좌와 홍귀달 재차 곤장]

이세좌를 논하지 않은 홍문관과 대간이 국문당했으며, 유배 중이던 이세좌와 홍귀달은 다시 잡혀와 곤장을 맞았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3월 16일, 연산군은 이세좌를 논하지 않은 홍문관과 대간을 국문하게 했습니다. 유배가던 홍귀달을 양평군까지 따라가 다시 잡아와 곤장을 때리게 했고, 이세좌도 잡아와 곤장을 때렸습니다.

[연산군의 어머니 보복 숙청, 창경궁 피바람]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계된 아버지 성종의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직접 구타하고 죽였습니다. 이후 자순대비와 할머니 인수대비를 찾아가 어머니 죽음의 책임을 추궁하며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두 후궁의 시신은 찢겨 산과 들에 버려졌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3월 20일 밤, 창경궁 뜰에서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금금(정씨)과 엄귀인(엄씨)을 결박하고 직접 구타했습니다. 이후 그들의 아들인 안양군 이항과 봉안군 이봉에게 어머니를 때리도록 명령했고, 이항은 어두워서 모르고 따랐으나 이봉은 차마 때리지 못하자 연산군은 분노하여 사람을 시켜 두 후궁을 죽여버렸습니다. 이후 연산군은 칼을 들고 어머니 자순대비의 거소 앞에서 협박했으며, 할머니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찾아가 폐비 윤씨를 왜 죽였나며 따지는 등 불손한 언행을 이어갔습니다. 밤이 깊어서야 피바람이 멈췄습니다. 다음날 모르고 어머니를 때린 이항에게는 말 한 마리가 하사되었는데, 조롱의 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두 후궁의 시신은 찢겨 젓갈이 되어 산과 들에 흩어졌습니다.

[폐비 윤씨 시호 논의와 관련자 색출 명령]

대신들이 폐비 윤씨의 시호를 논의했고, 연산군은 승정원에 폐비 당시 의논에 참여한 재상, 시위한 재상, 사약을 내릴 때 참여한 재상들을 상고하여 보고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3월 24일, 대신들이 폐비 윤씨의 시호를 의논했습니다. 연산군은 승정원에 폐비 당시 의논에 참여한 재상, 궁궐에서 나갈 때 시위한 재상, 그리고 사약을 내릴 때 나가 참여한 재상들을 《일기》를 상고하여 보고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엄씨와 정씨 서인 강등 및 친족 처벌]

엄씨와 정씨는 서인으로 강등되고 자녀들은 가두어졌으며, 그 친족들까지 난신의 예로 연좌되어 처벌받았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3월 26일, 연산군은 엄씨와 정씨를 서인으로 강등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가두었습니다. 또한 그 족친들을 난신의 예로 연좌시켜 처벌하게 했습니다.

[좌의정 이극균 국문 및 엄씨, 정씨 재산 몰수]

좌의정 이극균이 이세좌의 일을 논한 것이 잘못되었고 죄줄 사람을 율 밖이라 하여 반박했다는 이유로 국문당했습니다. 엄씨와 정씨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3월 28일, 좌의정 이극균이 "전에 이세좌의 일을 의논한 것도 글렀거니와, 또 죄줄 사람을 의논하는데 율 밖이라 하여 반박하는 의논"을 한 이유로 국문당했습니다. 이와 함께 엄씨와 정씨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이세좌와 김순손 사형]

이세좌에게는 사약을 내리고 김순손은 목 베어 죽이는 참형에 처했습니다. 연산군은 이를 통해 "군상에게 교만한 자의 경계"를 삼고 "위를 업신여기는 풍습"을 비난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3월 30일, 이세좌에게 사약이 내려지고 김순손은 목 베어 죽이는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연산군은 이를 "군상에게 교만한 자의 경계"로 삼고 "위를 업신여기는 풍습"을 비난했습니다. 정인석과 엄산수도 교형에서 한 등급 올려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이극균 유배 및 궁중 일 누설한 궁인 참형]

이극균은 인동현으로 유배되었고, 궁궐 안의 일을 누설한 궁인 나읍덕, 존비, 존이 등은 참형에 처해져 효수되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4월 1일, 이극균은 인동현에 유배되었습니다. 궁궐 안의 일을 누설한 죄로 궁인 나읍덕과 존비, 존이 등은 군기시 앞에서 참형에 처해져 효수되었습니다.

[이세좌 유배지에서 자결]

유배 중이던 이세좌가 곤양군 양포역에서 자신에게 죽음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명주 홑이불로 목을 매 자결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4월 9일, 의금부 도사 안처직이 유배 중이던 이세좌가 곤양군 양포역에 도착하여 "위에서 너에게 죽음을 내렸으니 속히 죽도록 하라"는 명령을 전달받고 명주 홑이불로 목을 매어 자결했음을 보고했습니다. 이세좌는 죽기 전 "내가 죽은 뒤에 개가 찢어먹지 못하게 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좌의정 이극균 사사]

의금부 경력 김영순이 인동으로 파견되어 좌의정 이극균에게 사약을 내렸습니다. 이극균은 자신이 무고하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연산 10년 윤4월 12일, 의금부 경력 김영순이 인동(仁同)으로 보내져 좌의정 이극균에게 사사를 집행했습니다. 이극균은 "신의 나이 70이 다 되고, 몸에 병이 쌓여 있으니, 죽어도 다른 생각이 없겠습니다만, 신이 소시부터 변방에서 일하였으며, 나라 일에는 크고 작은 것 없이 모두 진심 갈력하였습니다. 신이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한가지 죄도 없습니다. 이 말을 주상께 전달하기 바랍니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윤필상 사사 및 재산 몰수]

윤필상에게 사약이 내려져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이극균의 아들, 사위, 윤필상의 아들도 장 1백 대에 처해졌습니다.

연산 10년 윤4월 13일, 윤필상에게 사사가 내려지고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이극균의 아들, 사위는 장 1백 대에 처해져 먼 변방으로 유배되었고, 윤필상의 아들 역시 장 1백 대에 처해졌습니다.

[간사한 생각과 헛소리 죄목으로 정성근, 김취인 등 처형]

정성근은 '간사한 생각, 거짓 충성' 등의 죄로, 김취인은 '용렬한 무리로 국사를 생각지 않고 헛소리를 부연한 죄'로 처형되어 머리가 철물전 앞 다리에 매달렸습니다. 구성, 최숙근 등도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연산 10년 윤4월 15일, 정성근은 '간사한 생각, 거짓 충성으로 은밀히 아첨하는 생각을 가지고, 시제(時制)를 어기어 가며, 3년간 소식(素食)을 한 죄'로, 김취인(金就仁)은 '용렬한 무리로 국사를 생각지 않고 헛소리를 부연하여 수령(守令)에게 말한 죄'로 함께 처형되어, 머리가 철물전 앞 다리에 매달리게 했습니다. 구성, 최숙근도 군기시 앞에서 베어졌습니다.

[조지서 국문 중 사망, 능지처참 및 시체 조리돌림]

문신 조지서가 국문 도중 사망했습니다. 그의 시체는 능지되어 팔도에 돌려 보여졌고, '스스로 높은 체하고 임금을 능멸했다'는 죄명이 새겨진 찌가 효수되었습니다.

연산 10년 윤4월 16일, 조지서가 잡혀와 당직청에서 국문하게 하였는데, 형장 3대를 맞고 사망했습니다. 그의 머리는 철물전 앞에 효수되고, 시체는 군기시 앞에 두었으며, 밤 4경에 '제 스스로 높은 체하고 군상(君上; 임금)을 능멸한다.'라고 찌를 써서 달아매고, 백관들로 하여금 차례로 서서 보게 했습니다. 다음 날 그의 시체는 능지되어 팔도에 돌려 보여지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며, 죄명은 판자에 새겨 보이게 했습니다.

[폐비 관련자 처벌 및 종묘 배향 삭제]

폐비 윤씨 사건에 관련된 이파의 자손은 서인으로 강등되고, 한명회, 심회, 정창손, 정인지 등은 종묘 배향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세좌의 아들과 친척도 영구히 관직에 오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4월 18일, 폐비 윤씨와 관련된 이파의 자손은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한명회, 심회, 정창손, 정인지, 김승경 등 만일 종묘에 배향된 자가 있으면 내치게 했습니다. 이세좌의 아들과 친척도 서인으로 하여 영구히 사판(仕版)에 오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변형량 저잣거리에 효수]

변형량이 저잣거리에 목이 매달려 효수되었습니다. 궁궐이 내려다보이는 성균관 근처의 인가도 헐게 했습니다.

연산 10년 윤4월 19일, 변형량이 저잣거리에 목이 매달려 효수되었습니다. 대궐이 내려다보이는 성균관 근처의 인가도 헐게 하고, 궁궐을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올라가지 못하게 금표를 세웠습니다.

[이유녕 저잣거리에 효수]

전 사헌부 지평 이유녕이 군기시 앞에서 목 베어져 저잣거리에 효수되었습니다. 백관이 보게 하고 '경솔하게 친구 말을 듣고 다른 사람 비밀을 발설한 죄'라고 경고했습니다.

연산 10년 윤4월 20일, 전 사헌부 지평 이유녕이 사천시에서 잡혀와 군기시 앞에서 베어져 저잣거리에 효수되었습니다. 백관이 차례로 서서 보게 하고 "네가 경솔하게 친구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의 비밀을 발설하되 공론(公論)이라 칭탁하여, 중죄에 빠지게 무고하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리하여 형벌에 처하게 하니, 그리 알라"고 경고했습니다.

[송흠 부관참시 및 권주 종으로 삼음]

송흠은 시신이 파헤쳐지는 부관참시를 당했고, 권주는 사형을 감하고 장 70대 후 먼 변방의 정로간으로 종이 되게 했습니다.

연산 10년 윤4월 20일, 송흠을 부관참시하고 권주(權柱)는 사형을 감하고 장 70대에 처하여, 아주 먼 변방의 정로간(庭爐干)으로 정역하게 했습니다.

[이극균, 윤필상 등 능지처참 및 한명회, 정창손 등 부관참시]

송흠, 이파, 윤필상, 이세좌는 시체를 찢는 능지처참 후 사방에 돌려 보였으며, 정창손, 심회, 한명회 등은 대신으로서 시종 고집하지 못한 죄로 부관참시에 처해졌습니다.

연산 10년 윤4월 21일, 송흠(宋欽), 이파, 윤필상, 이세좌를 모두 능지하여 시체를 사방에 돌려 보이게 했습니다. 대신들이 정창손, 심회, 한명회 등은 처음에는 간하다가 나중에 따랐으니 그 죄가 윤필상에 비하여 차이가 있다고 했으나, 연산군은 "3인이 처음에는 정지하기를 간하였지만, 대신이란 큰일을 만나면 시종 고집하여야 하는 것이다"라며 3인을 부관참시하게 했습니다. 의금부 낭청은 양주군에서 송흠의 시체를 부관참시했습니다.

[폐비 관련 귀인 권씨 폐서인 및 봉보 부인 백씨, 두대 부관참시]

폐비와 관련된 귀인 권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봉보 부인 백씨와 전언 두대는 시신을 파헤쳐 참수하는 부관참시에 처해졌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4월 23일, 폐비 윤씨 사건에 관련된 귀인 권씨는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봉보 부인 백씨와 전언 두대를 부관참시했습니다. 두대의 지아비 강선은 장 1백 대를 때려 종으로 삼고 가산을 몰수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이유녕 효수 현장 공개]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에게 이유녕이 효수된 곳을 가서 보게 하고, '앞으로 임금을 섬길 때 이 사람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연산 10년 윤4월 22일, 연산군은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으로 이유녕이 효시된 곳을 가서 보게 하고 "너희들이 글을 읽는 것은 앞으로 인군을 섬기려 하는 것이니, 이 사람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연산군, 경연 정지 명령]

연산군은 몸이 불편하고 큰일을 만나 기운이 안정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경연을 정지시켰습니다. 이는 학문 강론에 뜻이 없고 학자들의 간언을 거부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연산 10년 윤4월 23일, 연산군은 "근자에 몸이 불편한 데다가 또 큰일을 만나서 마음을 썼더니 기운이 안정되지 않는 것 같다. 경연(經筵)을 정지하려 하는데, 어떤가?"라고 전교하며 경연을 정지시켰습니다. 이는 연산군이 주색에 빠져 학문 강론에 생각이 없고, 신하들이 견책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권하지 못함으로써 경연이 영구히 폐지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지러운 말’ 백성 경고 위해 고을 혁파 논의]

연산군은 '어지러운 말하는 무리'가 많다며 광주, 고양 등 선왕의 능침이 있는 고을이라도 혁파하여 백성들에게 경계를 삼아야 한다고 논의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4월 25일, 연산군은 "앞서 어지러운 말하는 무리를 모두 중한 법으로 처벌하였는데도 완악하여 징계할 줄 모르고 서로 잇따라 나온다"는 이유로 광주, 고양 등 고을을 혁파할 것을 의정부에 논의하게 했습니다. 이는 선왕의 능침이 있는 고을이라도 '어지러운 말을 한 백성'이 있다면 혁파하여 경계를 삼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연산군 폭언 이후 인수대비 화병으로 사망]

연산군의 할머니이자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책임자로 지목되었던 인수대비가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망했습니다. 연산군의 횡포와 폭언이 화병의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연산 10년 음력 4월 27일,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망했습니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을 추궁하며 불손한 말을 많이 한 것이 화병의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유자광과 임사홍 충군 명령 취소]

이극균과 사귀었다는 이유로 참형에 해당한다는 사헌부의 상소를 받았던 유자광과 임사홍에 대한 충군(군대 복무) 명령이 취소되었습니다.

연산 10년 윤4월 29일, 사헌부에서 이극균과 사귀었으니 그 죄가 참대시에 해당한다고 상소했으나 연산군은 다만 3천 리 유배형을 속바치고 그대로 일은 보게 하라고 전교했습니다. 이후 이 명령이 취소되어 유자광과 임사홍의 충군이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성준 교수형 후 효수, 한치형 부관능지]

성준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효수되었으며, 한치형은 관을 부수고 시신을 찢는 부관능지 후 가산이 몰수되고 분묘와 비석이 파괴되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5월 3일, 의금부 낭청이 성준을 잡아와 국문했으며, 병으로 걷지 못하는 성준을 끌고 들어와 국문하라고 연산군이 명령했습니다. 음력 5월 4일, 성준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문 밖에서 효수되었습니다. 한치형은 부관능지 후 가산이 적몰되고 분묘와 비석 등이 파괴되었으며, 머리는 효수되었습니다. 연산군은 한치형이 이극균의 술책에 빠져 불초한 일을 많이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한명회 부관참두 및 저잣거리 효시]

청주시로 가서 사망한 한명회의 시신을 파헤쳐 머리를 베는 부관참두를 집행하고, 죄명을 써서 저잣거리에 목을 매달았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5월 11일, 청주시로 가서 한명회의 시신을 파헤쳐 머리를 베는 부관참두를 집행하고, 죄명을 써서 저잣거리에 효시했습니다.

[이세좌의 네 아들 참형 후 효시]

이세좌의 아들 이수원, 이수형, 이수의, 이수정이 군기시 앞에서 목 베이는 참형을 당하고 효수되었습니다. 백관이 참형을 보고, '자리잡은 세력을 믿고 임금을 능멸한 죄'라고 경고하는 찌를 달았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5월 13일, 이세좌의 아들 이수원과 이수형, 이수의, 이수정이 군기시 앞에서 참형을 당하고 효수되었습니다. 형벌 집행 시 백관을 차례로 서서 보게 한 뒤, 박한주(朴漢柱)를 효수한 곳으로 가서 보게 하고 "자리잡은 세력을 믿고 위를 업신여기며 조정을 능멸한 죄이니, 이런 사람은 그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한다."라고 찌를 써서 매달았습니다. 이극균의 서자인 이연명도 같은 날 참수되었습니다.

[내관 최수연 사형 후 효시]

내관 최수연이 불초한 행동이 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지고 머리가 매달렸으며, 시체는 돌려 보이며 내시들에게 경계하도록 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5월 19일, 내관 최수연이 불초한 행동이 있다는 이유로 베어져 머리가 매달리고 시체를 돌리며 내시들에게 번갈아 나가서 보게 했습니다. 최수연의 처형 시 뒤에 처져서 본 내관 이존명도 장 90대에 처해져 봉로간으로 정해졌습니다.

[궁중 일 누설한 홍식과 종친 이총 참형]

궁중 일을 누설한 홍식과 종친으로서 조사들과 결탁한 이총이 참형에 처해지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며, 홍식의 아들 홍세필도 참형당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5월 30일, 궁중 일을 누설한 홍식과 종친으로서 조사들과 사귀어 결탁한 이총이 참형에 처해지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며, 가족은 장 1백 대를 때려 유배 보내고 아들 홍세필도 참형에 처했습니다.

[연산군 간언한 김천령 능지처참 및 민휘 등 참형]

연산군이 중국 수박을 먹고 싶다고 한 것을 말린 김천령이 능지처참 후 효수되었고, 시체는 사방으로 돌려 보여졌습니다. 민휘, 윤금손 등도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6월 4일, 중국의 수박(西苽)을 먹고 싶다고 한 연산군을 말린 김천령이 능지처참 후 효수되어 시체를 사방으로 돌려 보였습니다. 민휘, 윤금손, 심순문, 권헌, 조세보 등도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승지 박열과 권균 등은 사냥을 지적한 일로 사직을 청했으나, 연산군은 그들의 간언이 자신의 안전 때문이라며 '스스로 편안하려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전향과 수근비 능지처참]

궁인 전향과 수근비가 능지처참되었습니다. 연산군일기에는 장녹수의 참소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는 외딴 섬에 묻고 죄명을 세웠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6월 9일, 궁인 전향과 수근비가 능지처참되었습니다. 연산군일기에는 장녹수가 참소하였기 때문이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머리가 문 위에 달리고 사지가 여러 고을에 돌려 보여졌으며, 죄명은 '흉포한 마음으로 속으로 임금을 원망하여 불경한 말을 숙용의 집에 몰래 붙였다'와 '간사한 마음으로 몹시 방해되는 일을 버젓이 행하였다'였습니다. 이후 그들의 머리는 외딴 섬에 묻고 죄명을 새긴 돌을 세웠습니다.

[박은 참형 및 효수]

연산군의 밤 사냥을 지적한 일에 관계되어 박은이 군기시 앞 거리에서 참형당하고 효수되었습니다. '거짓 충성으로 스스로 편안하고 신진으로서 장관을 업신여겼다'는 죄명이 달렸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6월 15일, 밤까지 사냥함은 온편치 못하다고 운운한 일에 관계되어, 전 홍문관 수찬 박은이 군기시 앞 거리에서 참형당하고 효수되었습니다. 가산이 몰수되고, '거짓 충성으로 스스로 편안하고 신진(新進)으로서 장관(長官)을 업신여겼다.'고 찌를 써서 매달았습니다. 홍형은 부관참시되고 이인형의 직첩이 거두어졌습니다.

[전 이조판서 홍귀달 교형]

전 이조판서 홍귀달이 오만함이 심하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6월 16일, 전 이조판서 홍귀달이 오만함이 심하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하게 했습니다.

[갑자사화 관련자 집 연못 조성 및 비석 건립]

이극균 등 갑자사화에 연루된 인물들의 집을 헐어 연못을 파고 죄명을 적은 비석을 세우는 일을 담당하는 임시 관아인 척흉청(滌兇廳)이 설치되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7월 1일, 임시 관아인 척흉청(滌兇廳; 흉악한 것을 씻어낸다는 뜻)을 두어 이극균 등 갑자사화에 연루된 인물들의 집을 헐어 못을 파고 죄명을 적은 비석을 세우는 일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이극균, 윤필상 등이 세운 과조 폐지]

이극균과 윤필상 등이 과거에 세웠던 법률과 규칙들이 모두 의논을 거쳐 폐지되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8월 30일, 이극균과 윤필상 등이 세운 과조(科條; 법률, 명령, 규칙 따위)를 모두 의논하여 없애라고 전교했습니다.

[한치형이 세운 비융사 폐지]

한치형이 설립한 갑옷과 투구 만드는 관청인 비융사가 혁파되었습니다.

연산 10년 음력 9월 1일, 한치형이 세운 비융사(備戎司; 갑옷과 투구 만드는 일을 맡은 관청)를 폐지했습니다.

[무오사화 생존자들 체포 명령]

무오사화 때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모두 잡혀오도록 명령되었습니다. 이는 갑자사화의 보복 범위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연산 10년 음력 9월 26일, 무오년 사초 사건(史草事件; 무오사화)으로 살아남은 자들을 모두 잡아오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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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상 시체 쇄골표풍]

윤필상의 시체를 불태워 뼈를 부수고 바람에 날려 버리는 쇄골표풍(碎骨漂風) 형벌이 집행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사람의 뼈가 부수어져 바람에 날려졌습니다.

연산 11년 음력 3월 24일, 윤필상의 시체를 태워 뼈를 부수어서 바람에 날리게 하는 쇄골표풍(碎骨漂風) 형벌이 집행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송흠, 한치형, 이파, 윤채 등 여러 사람의 뼈가 부수어져 바람에 날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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