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조선시대, 정치적 숙청, 사화, 쿠데타

num_of_likes 0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9:16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조선시대, 정치적 숙청, 사화, 쿠데타
report
Edit

1519년 조선 중종 대에 발생한 대규모 정치적 숙청 사건으로,

훈구파가 신진 사림파 핵심 인물인 조광조 일파를 제거한 사건이다.

조광조의 급진 개혁에 대한 훈구파의 불만과 중종의 견제가 주요 원인이었으며,

'주초위왕' 사건으로 조광조를 모함하여 숙청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으로 사림 세력의 정치적 진출이 일시적으로 막혔으나, 이후 성리학 학문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기묘사화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506

[중종반정과 신진 사류 등용의 시작]

연산군 폭정에 이은 중종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하며,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하고 반정 공신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신진 사류를 등용하기 시작했다.

연산군 때의 무오·갑자사화로 유학이 쇠퇴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는데,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중종 반정 이후 무한대로 축재와 권력남용을 하던 공신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연산군 때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하고, 대의명분과 오륜의 도를 가장 존중하는 성리학을 크게 장려하였다.

1515

[조광조의 정계 진출과 세력 확장]

성균관 유생 200여 명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광조가 6품 관직에 임명되며 정계에 활발히 진출하여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김종직의 제자 중 성리학 연구가 가장 깊었던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는 1515년(중종 10년) 성균관 유생 200여 명이 연명하여 천거하고 이조판서 안당도 추천하면서 곧장 6품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5년간 정계에서 활약하며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삼대(하나라·은나라·주나라)의 왕도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1519

[훈구파의 불만 고조와 중종의 총애 상실]

조광조 일파의 급진 개혁과 정국공신 위훈 삭제 주장이 기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샀고, 이는 중종의 총애를 잃게 되는 원인이 되어 조광조는 점차 정계에서 고립되었다.

당시 훈구 재상으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모두 세력을 잃고 불평을 품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 등이 '정국공신(중종 반정 공신) 가운데는 공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 이들의 공신호를 박탈하자'고 건의하여, 마침내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호를 박탈하자 이에 놀란 훈신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모략·중상에 나섰으니, 이것이 조광조 일파의 젊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된 직접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처음에는 중종도 조광조 등의 혁신적인 정치를 후원하였으나 조광조의 정치가 혁신성을 잃고 도학적 언행만을 되풀이하자 점차 총애를 거두었다.

['주초위왕' 사건으로 조광조 모함]

훈구파 홍경주, 심정 등이 후궁을 이용해 궁궐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을 쓰게 하여 벌레가 파먹게 한 뒤, 이를 중종에게 보여주며 조광조 일파를 모함했다.

불평이 많은 훈구파의 홍경주, 김전, 고형산 등과 심정, 남곤 등은 연합하여 조광조 일파를 타도할 계획을 세운다. 홍경주는 딸 희빈을, 심정, 남곤 등은 경빈 박씨 등 후궁들을 이용, 이들 후궁들에게 호소하여 조광조 타도에 발 벗고 나섰다. 희빈 홍씨와 경빈 박씨 등은 나인들을 시켜 궁궐 안팎의 나뭇잎에 꿀을 발라서 벌레들이 파먹게 한다. 이들이 퍼뜨린 소문에 따르면 천하의 인심이 조광조를 지지하니 조광조는 공신들을 제거한 후에 스스로 임금 될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대궐 안의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는 4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하고, 이것이 묘하게 글자로 남은 것을 임금에게 보여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 “走肖”는 “趙”(조)의 파자에 해당하며, 이는 은연중에 조광조가 왕위에 오른다는 참언이었다.

[사림파 숙청과 훈구파 권력 장악]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 갔다가 사약을 받고, 김정, 기준 등 다른 사림파 인사들도 귀양 또는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 인해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이 되는 등 훈구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현량과가 폐지되었다.

조광조는 능주(綾州)에 귀양갔다가 곧 사약(賜藥)을 받고 죽었으며, 김정(金淨)과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식(金湜)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살, 김구(金絿), 박세희(朴世熹), 박훈 등은 귀양갔는데 모두 30대의 청년이었다. 또 그들을 옹호하던 안당(2년 후에 사형당했다.)과 김안국, 김정국 형제와 김세필은 파면되었다. 뒤이어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이 되고, 이유청은 우의정이 되었고 현량과도 곧 폐지되었다. 이 옥사가 기묘년(己卯年)에 일어났으므로 기묘사화라 하며, 이때 죽은 사람들을 후에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하였다.

[중종의 친위 쿠데타와 기묘사화 발발]

중종은 승지들도 모르게 대소신료를 소집하여 경복궁 신무문에서 비밀 회의를 열었다. 홍경주 등 훈구파는 조광조 일파의 과격한 정치를 고변했고, 중종은 조광조 등 신진 사림파 핵심 인물들을 체포했다. 학계에서는 이를 친위 쿠데타로 규정한다.

중종은 당시 승지들도 모르게 대소신료에게 갑자기 입궐명령을 내렸고, 홍경주, 김전, 남곤, 심정, 정광필, 안당 등은 갑자기 소환명령을 받고 경복궁의 북쪽 문이었던 신무문을 통해 들어와 승지들 모르게 회의를 열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사실상 친위 쿠데타로 규정한다. 남양군 홍경주와 예조판서 남곤, 공조판서 김전, 호조판서 고형산, 도총관 심정 등은 비밀리에 모의한 끝에 홍경주가 일당을 대표하여 조광조 등이 당파를 만들어 과격한 일을 자행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니 처벌해야 한다고 임금 중종에게 밀고하였다. 마침내 중종은 대사헌 조광조와 우참찬 이자, 도승지 유인숙, 좌부승지 박세희, 우부승지 홍언필을 비롯하여 조광조파로 지목되는 많은 사람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

[기묘사화의 영향과 성리학 발전]

기묘사화로 사림 세력의 정치적 진출은 막혔으나, 오히려 성리학의 학문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숙청에 가담했던 남곤은 후배 사림으로부터 간사한 인물로 매도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림들의 정치적 진출이 막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성리학의 학문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훈구파와 함께 조광조일파의 숙청에 가담했던 남곤은 후배 사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간사한 인물로 매도되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