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조선시대 사건, 사화, 정치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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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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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입니다. 사초에 기록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의 진노를 샀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김일손 등 사림파 인사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첫 번째로, 사림파의 기세를 크게 위축시켰고 훈구파의 독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왕권 강화를 꾀한 성종이 훈구파 견제를 위해 사림파를 중용하면서 발생한 갈등의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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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6

[성종, 훈구파 견제 위해 사림파 중용 시작]

성종은 즉위 후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태종과 세조 시대에 숙청되었던 사림파를 대거 중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친정을 시작하며 원상제를 폐지하고 사림파를 삼사에 기용하며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로 계승서열을 뛰어넘어 즉위하며 왕권이 약했습니다. 이에 친정을 시작하면서 세조 시대의 공신들이 실권을 잡았던 원상제를 폐지하고, 태종과 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대거 중용했습니다. 사림파는 주로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삼사에 기용되어 훈구파의 부정부패와 전횡을 비판했고, 양측의 충돌이 빈번해졌습니다.

1494

[연산군, 사림파의 왕권 견제에 불만 품어]

성종 말년부터 사림파의 성리학 근본주의적 행태에 거리를 두었던 성종에 이어, 연산군은 사림파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연산군 즉위 이래 사림파는 삼사를 통해 국왕의 국정방식에 대한 상소를 거의 매일 올리며 국왕과 대립했습니다.

성종이 말년에 사림파와 거리를 두게 되었고, 그의 아들 연산군은 사림파를 매우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사림파 역시 연산군의 국정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겨, 삼사를 통해 연산군 즉위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릴 정도로 국왕과 대립하며 왕권을 견제했습니다.

1498

[이극돈, 김일손 사초에서 '조의제문' 등 훈구파 비리 기록 발견]

연산군 즉위 후 《성종실록》 편찬이 시작되자, 책임자였던 훈구파 이극돈은 실록 편찬 원고인 사초를 열람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림파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에 이극돈 자신의 비리를 포함, 훈구파 대신들의 부정부패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기록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실록》 편찬을 명했고, 실록청 당상관에 임명된 훈구파 이극돈은 사초를 열람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사림파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에 정희왕후 상중에 기생을 가까이 하고 뇌물을 받은 자신에 대한 비리를 비롯, 훈구파 대신들의 각종 부정과 비리, 그리고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실려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극돈, 유자광과 손잡고 연산군에게 '조의제문' 고변]

사초 삭제 요청이 거부되자 이극돈은 사초를 훈구파 유자광에게 유출하여 의논했습니다.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을 품고 있던 유자광은 노사신, 윤필상 등 다른 훈구파 대신들을 움직여, 사관의 배석 없이 연산군에게 사초의 내용을 비밀리에 고변했습니다. 연산군은 사림파의 왕권 견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보고를 받은 직후 사초를 자신에게 올리라는 전대미문의 명령을 내리며 사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김일손에게 사초 내용 삭제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한 이극돈은 실록 편집이 끝나면 파기되어야 할 사초를 훈구파 유자광에게 유출하여 의논했습니다. 유자광은 과거 김종직에게 모욕을 당한 개인적 악감정과 사림파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극돈과 결탁했습니다. 유자광은 노사신, 윤필상 등 다른 훈구파 대신들을 설득하여, 도승지 신수근이 사관의 참여를 막은 상태에서 연산군에게 김일손 사초에 담긴 '조의제문'의 내용을 비밀리에 보고했습니다. 사림파의 왕권 견제에 불만이 많았던 연산군은 보고 직후 사초를 왕에게 올리라는 파격적인 명을 내려 사건을 공개화하며 무오사화가 본격적으로 발발했습니다.

[연산군, 김일손 사초 열람 후 격노하여 숙청 지시]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직접 열람할 것을 명했습니다. 사초에는 세조의 총신 비판, 왕위 찬탈 비난, 황보인·김종서의 절개 기록, 단종 시해 비판 등 사림파의 비판적 입장이 담겨 있었고, 특히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유자광이 직접 풀이하여 세조를 모독한 글임을 강조하자 연산군은 크게 격노하여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지시했습니다.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들여올 것을 명령했고, 이극돈 등은 관련 부분만 절취하여 올렸습니다. 사초에는 세조가 신임한 승려 학조의 술법, 훈구파 권람의 전횡 비판, 계유정난 때 세조의 왕위 찬탈 비난, 황보인과 김종서의 절개 기록, 이개·박팽년 등 절의파 행적 긍정 기술, 세조의 며느리 탐색 의심 내용 등 사림파의 비판적 입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특히 유자광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하여 진나라 초 회왕 살해 사건에 빗대 세조의 단종 시해를 비판한 것임을 연산군에게 강조하자, 연산군은 크게 격노하며 사림파 숙청을 명했습니다.

[김일손 사형 및 김종직 부관참시]

연산군의 명령에 따라 사초 사건에 연루된 김일손은 능지처참 당했으며, 김종직은 이미 사망했음에도 무덤이 파헤쳐져 부관참시되었습니다. 권오복, 권경유 등 여러 사림파 인사들도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사림파 세력이 크게 위축되고 몰락했습니다. 이극돈 등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수사관들은 파직되었습니다.

김일손은 청도에서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 김종직의 가르침을 받아 불충한 행위를 했다는 훈구파의 주장에 따라 능지처참 되었습니다.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무덤이 파헤쳐져 부관참시되었고, 그의 저술인 《점필재집》도 불태워졌습니다. 권오복, 권경유 등 김종직의 제자들 역시 능지처참되거나 표연말, 정여창, 최부, 김굉필 등이 유배되는 등 사림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되었습니다. 사초 내용을 보고하지 않은 수사관 이극돈, 유순, 윤효손, 어세겸 등은 파직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첫 사화, 훈구파 독무대 형성]

무오사화는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첫 번째로,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불립니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과 김일손으로 대표되는 영남사림파는 크게 몰락했고, 견제 세력이 사라진 조정은 다시 훈구파의 독무대가 되었습니다. 유자광은 막강한 권세를 누리며 조정이 독사처럼 여길 정도였습니다.

무오사화는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첫 번째 사화이자,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불립니다. 이 사건으로 영남사림파는 몰락하고 그 기세가 크게 위축되었으며, 견제세력이 사라진 조정은 훈구파의 독무대가 되었습니다. 유자광은 이때의 공로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으며, 조정 대신들이 그를 독사처럼 보고 감히 거스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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