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소르지멘토

이탈리아 통일, 민족 운동, 독립 전쟁,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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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통일, 민족 운동, 독립 전쟁,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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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탈리아반도와 주변 섬들이 단일 국가인 이탈리아 왕국으로 통합된 정치적, 사회적 운동입니다. 빈 회의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하여 1848년 혁명을 거쳐, 사르데냐 왕국 주도의 외교와 전쟁, 주세페 가리발디의 활약으로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1871년 로마를 수도로 확정하며 완성되었고, 이후에도 미회복지 통합 노력이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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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

[카르보나리당, 혁명 운동 조직 시작]

카르보나리당이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혁명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운동 '리소르지멘토'의 시초가 됩니다.

1814년, 비밀 결사 카르보나리당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통일을 향한 혁명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1815년 빈 회의에서 이탈리아가 여러 작은 국가들로 분열되고 강대국의 간섭을 받게 된 것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민족주의 운동의 초기 단계였습니다.

1820

[양시칠리아 왕국 반란]

스페인의 헌법 제정 반란에 영향을 받아 구글리엘모 페페가 이끄는 카르보나로 부대가 양시칠리아 왕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헌법 제정에 동의했으나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해 진압됩니다.

1820년, 스페인에서 성공적인 헌법 제정 반란이 일어나자, 이에 고무된 구글리엘모 페페가 지휘하는 카르보나로당이 양시칠리아 왕국의 반도 지역을 점령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처음에는 새로운 헌법 제정에 동의했으나, 신성 동맹의 오스트리아 군대가 개입하여 반란은 진압되고, 페르디난도 1세는 헌법을 폐지하고 혁명 세력을 박해했습니다.

1821

[피에몬테 혁명 운동]

산토레 디 산타로사가 이끄는 혁명 운동이 피에몬테에서 발생하여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제거와 사보이아 왕조 중심의 이탈리아 통일을 주장했습니다. 사르데냐 왕국의 섭정 카를로 알베르토가 일시적으로 새 헌법을 승인했지만,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은 왕 카를로 펠리체의 개입으로 반란은 진압됩니다.

1821년, 산토레 디 산타로사를 중심으로 피에몬테에서 혁명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축출과 사보이아 왕조를 통한 이탈리아 통일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알레산드리아에서 시작된 이 반란은 삼색기를 도입하며 치살피나 공화국 군대의 상징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왕의 섭정이었던 카를로 알베르토 왕자는 혁명군을 진정시키기 위해 새 헌법을 승인했지만, 돌아온 왕 카를로 펠리체는 이를 부인하고 신성 동맹의 오스트리아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디 산타로사의 군대는 오스트리아 군대에 패배하고 반란은 좌절되었습니다.

1831

[1830년대 초기 반란 진압]

모데나와 교황령에서 발생한 반란은 통일된 이탈리아 국가 성립을 선언하는 등 혁명 기운을 재점화했으나, 모데나 대공의 배신과 프랑스 루이 필리프의 약속 불이행으로 오스트리아 군에 의해 결국 진압됩니다.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반도에서 단일 국가 성립을 위한 반란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모데나 대공 프란체스코 4세는 초기에는 반란을 용인하는 듯했으나, 치로 메노티 등 공모자들을 체포하고 오스트리아 군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동시에 교황령의 볼로냐, 라벤나 등지에서도 반란이 성공하여 삼색기를 도입하고 통일 이탈리아 국가 성립을 선언했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오스트리아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결국 1831년 봄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해 모든 반란이 궤멸되었습니다.

1848

[1848년 혁명과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발발]

유럽 전역의 1848년 혁명 분위기 속에서 이탈리아에서도 밀라노와 베네치아에서 반란이 발생했습니다. 밀라노에서는 '5일간의 시가전' 끝에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고, 사르데냐 왕국이 반군을 지지하며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연합군은 쿠스토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며 통일의 꿈은 좌절되었습니다.

1848년 1월부터 시칠리아, 나폴리, 토스카나, 교황령 등 이탈리아 각지에서 헌법 승인을 요구하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3월 18일에는 밀라노와 베네치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하여, 밀라노 시민들은 5일간의 시가전 끝에 오스트리아 주둔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는 이를 지지하며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초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7월 24일 쿠스토자 전투에서 라데츠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 결정적으로 패배하며,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의 통제권을 오스트리아가 되찾게 됩니다.

1849

[로마 공화국 수립과 실패]

교황 비오 9세가 로마에서 탈출한 후, 주세페 마치니 등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로마 공화국이 선포됩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개입으로 두 달간의 공성전 끝에 로마는 함락되고 교황이 복위되며, 가리발디와 마치니는 도피하게 됩니다. 같은 해 베네치아도 오스트리아에 항복하며 초기 독립 혁명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1848년 11월, 펠레그리노 로시 장관 암살 사건 후 교황 비오 9세가 로마에서 탈출하자, 1849년 초 제헌 의회 선거를 통해 2월 9일 로마 공화국이 수립되고 3월 초 주세페 마치니가 수상에 취임합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교황 복위를 위해 개입, 두 달간의 공성전 끝에 6월 29일 로마는 함락되고 가리발디와 마치니는 도망쳤습니다. 이어서 오스트리아군에 포위된 베네치아도 8월 24일 항복하면서, 1848-1849년의 이탈리아 독립 혁명은 최종적으로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1852

[카보우르, 사르데냐 왕국 수상 취임]

카밀로 디 카보우르가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에 취임하며 외교와 군사를 통한 이탈리아 통일의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 등 강대국을 끌어들여 오스트리아 세력을 몰아내려 했습니다.

1852년, 카밀로 디 카보우르가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에 취임하면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카보우르는 사르데냐 왕국 단독으로는 통일이 어렵다고 판단, 프랑스나 영국 같은 강대국을 외교적으로 끌어들여 이탈리아반도 내 오스트리아 세력을 축출하려는 전략을 추진했습니다. 크림 전쟁 참전 등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국제적 입지를 강화하려 노력했습니다.

1858

[펠리체 오르시니의 나폴레옹 3세 암살 시도]

이탈리아 국가주의자 펠리체 오르시니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암살하려 시도했습니다. 이 사건은 나폴레옹 3세가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됩니다.

1858년 1월 14일,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 펠리체 오르시니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암살하려 시도했습니다. 과거 카르보나리당에 속했던 나폴레옹 3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탈리아 통일 문제에 대한 자신의 운명적 역할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이는 사르데냐 왕국과의 동맹으로 이어져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1859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발발 및 북부 통합]

사르데냐 왕국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며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합니다. 마젠타 전투와 솔페리노 전투에서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이 승리하며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북부 이탈리아 통합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858년, 카보우르와 프랑스 나폴레옹 3세는 비밀 협정을 맺고 오스트리아를 공동으로 공격하기로 합의합니다. 사르데냐 왕국은 1859년 3월 동원령을 선포하고 오스트리아의 군대 해산 요구를 거절하며 전쟁을 유발했습니다. 6월 4일 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이 승리하며 밀라노에 입성했고, 6월 24일 솔페리노 전투에서도 승리하며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성공적으로 몰아냈습니다. 이후 빌라프란카 휴전 협정 등을 거쳐 토리노 조약으로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의 대부분이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됩니다.

1860

[토리노 조약 체결]

프랑스와 사르데냐 왕국 간 토리노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가 니차(니스)와 사보이아를 할양받는 대가로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의 대부분이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되었습니다.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이후, 나폴레옹 3세는 빌라프란카 조약에서 약속을 어겨 니차와 사보이아 할양을 취소했었습니다. 그러나 1860년 1월 카보우르가 다시 수상직에 오르면서 프랑스와 재협상하여 3월 20일 토리노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니차와 사보이아를 얻었고, 사르데냐 왕국은 중부 이탈리아 연방(토스카나, 파르마, 모데나, 볼로냐, 페라라 등)을 포함한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합병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가리발디의 '천명의 원정대' 시칠리아 원정]

주세페 가리발디가 '천명의 원정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출발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정복을 시작합니다.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잇따라 함락시키며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 이탈리아 통일의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1860년 4월 양시칠리아 왕국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가리발디는 니스 탈환 계획을 미루고 카보우르의 설득에 따라 5월 6일 '천명의 원정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향했습니다. 시칠리아 반군과 합류한 가리발디군은 5월 13일 정규군을 격파하고 5월 14일 시칠리아 통치를 선언했습니다. 5월 27일 팔레르모를 함락시키고 7월에는 메시나까지 점령하며 시칠리아를 정복했습니다. 이후 메시나 해협을 건너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 9월 7일 민중의 환영 속에서 나폴리에 입성하며 남부 이탈리아를 빠르게 장악했습니다.

[사르데냐군 교황령 진군]

사르데냐 군대가 교황령 국경에 도착하여 교황군의 라모리시에르 부대를 격파하고 안코나를 포위, 항복을 받아냅니다. 이로써 이탈리아반도의 남쪽에서 올라오는 가리발디군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사르데냐군이 연결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가리발디가 남부 이탈리아를 빠르게 장악하자, 이탈리아반도의 안정을 위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와 사르데냐의 카보우르는 로마를 제외한 교황령의 일부 지역을 사르데냐 왕국이 차지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1860년 9월 11일, 라파엘 카도르나 지휘 아래 왕립 이탈리아군이 교황령 국경을 넘었고, 라모리시에르가 지휘하는 교황군을 격파한 뒤 9월 29일 안코나에서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10월 9일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직접 도착하여 통치권을 인수했고, 남쪽으로 진군하며 가리발디군과의 합류를 준비했습니다.

1861

[이탈리아 왕국 수립]

토리노에서 소집된 첫 이탈리아 의회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공표하며 이탈리아 왕국이 공식적으로 수립됩니다. 이는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이탈리아반도가 단일 국가로 통합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860년 가리발디의 남부 이탈리아 정복과 사르데냐군의 교황령 일부 점령으로 이탈리아 통일은 사실상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1861년 2월 18일, 토리노에서 첫 이탈리아 의회가 소집되었고, 3월 17일 의회는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공식 선포하며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했습니다. 3월 27일에는 로마를 이탈리아의 수도로 선언했으나, 실제 수도 이전은 1871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리소르지멘토'의 가장 큰 결실이었습니다.

[카보우르 백작 사망]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 중 한 명인 카밀로 벤소 카보우르 백작이 과로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왕국 건국 과정에서 외교와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며 통일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861년 6월 6일, 이탈리아 왕국 수립의 핵심 인물이었던 카보우르 백작이 과로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을 역임하며 외교적 수완을 통해 프랑스 등 강대국과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어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통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통일 이탈리아의 초기 국정 운영에 큰 손실이었지만, 그가 남긴 '이탈리아는 만들어졌다. 모든 것은 안전하다.'는 말은 통일의 확신을 보여줍니다.

1862

[가리발디의 로마 공격 시도와 좌절]

가리발디가 '로마 아니면 죽음'을 외치며 로마 점령을 시도했으나, 이탈리아 정부군과의 아스프로몬테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체포됩니다. 이는 교황령 문제에 대한 이탈리아 정부의 신중한 태도와 가리발디의 급진적인 통일 방식 간의 갈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탈리아 왕국 수립 후에도 로마는 교황령으로 남아 프랑스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1862년 6월, 가리발디는 '로마 아니면 죽음'(Roma o Morte)이라는 슬로건 아래 자원자들을 모집하여 로마 점령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는 국제적 반향을 우려하여 이를 반대했고, 8월 28일 아스프로몬테에서 가리발디의 군대와 정부군이 충돌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가리발디는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습니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 정부와 민족주의 운동가들 간의 통일 방식에 대한 이견을 드러냈습니다.

1864

[9월 협정 체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프랑스 나폴레옹 3세 사이에 9월 협정이 체결되어, 프랑스군이 2년 안에 로마에서 철수하고 이탈리아는 교황령의 국경을 존중하며 수도를 피렌체로 옮기기로 합의했습니다.

1864년 9월,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로마 문제 해결을 위한 '9월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프랑스군은 2년 안에 로마에서 철수하고, 이탈리아는 교황령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으며, 수도를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이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는 교황령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었습니다.

1865

[수도 피렌체로 이전]

이탈리아 정부는 수도를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이전했습니다. 이는 9월 협정에 따른 조치였으며, 로마를 최종적인 수도로 삼기 위한 중간 단계로 여겨졌습니다.

1865년, 이탈리아 정부는 9월 협정의 조건에 따라 수도를 사르데냐 왕국의 옛 수도였던 토리노에서 피렌체로 옮겼습니다. 이는 로마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로마를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로 삼기 위한 외교적 약속의 일환이었습니다. 수도 이전 과정에서 토리노 시민들의 반발로 일부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1866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발발 및 베네치아 획득]

이탈리아 왕국이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며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탈리아는 전쟁에서 쿠스토차 전투와 리사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프로이센의 승리 덕분에 베네치아를 획득하여 이탈리아에 합병했습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베네치아를 획득할 기회를 포착,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6월 20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6월 24일 쿠스토차 전투에서, 해군은 7월 20일 리사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고전했으나, 가리발디의 군대는 베체카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결국 프로이센의 결정적인 승리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를 프랑스에 양도했고, 프랑스는 사보이아 합병을 묵인하는 조건으로 10월 19일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양도했습니다. 10월 21일-22일 국민투표를 통해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습니다.

1867

[가리발디의 멘타나 전투 패배]

가리발디가 다시 로마 점령을 시도했으나, 프랑스군이 증원된 교황군에게 멘타나에서 패퇴했습니다. 이는 로마 문제 해결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드러냈습니다.

1867년, 가리발디는 로마 점령을 위한 두 번째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엔리코 카이롤리 형제 등 동료들은 로마 내 봉기를 시도했으나 진압되었고, 가리발디의 군대는 프랑스 예비군이 증원된 교황군에게 멘타나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이 패배로 인해 프랑스 수비대는 1870년까지 치비타베키아에 주둔하며 교황령을 보호하게 되었고, 이탈리아의 로마 획득은 다시 지연되었습니다.

1869

[지오반니 카이롤리 사망]

멘타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던 지오반니 카이롤리가 사망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 중 한 명으로, 형 엔리코 카이롤리와 함께 로마 탈취를 시도했었습니다.

1867년 멘타나 전투에서 형 엔리코 카이롤리가 사망하고 자신 또한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지오반니 카이롤리가 1869년 9월 11일 사망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통일 이탈리아의 로마 입성을 염원했다고 전해집니다. 카이롤리 형제는 리소르지멘토의 헌신적인 애국자들의 상징적인 인물들입니다.

1870

[로마 점령 및 이탈리아 수도 편입]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로 프랑스군이 로마에서 철수하자, 이탈리아 왕국군이 로마를 공격하여 포르타 피아를 통해 입성합니다. 이는 교황령의 세속적 지배를 종식시키고 로마를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로 편입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870년 7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나폴레옹 3세는 로마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을 철수시켰습니다. 이에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를 합병할 기회를 포착했고, 9월 11일 왕립 이탈리아군이 교황령 경계를 넘어 로마로 진군했습니다. 비오 9세 교황의 저항 명령에도 불구하고, 9월 20일 이탈리아군은 포르타 피아 부근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로마에 입성했습니다. 10월 8일 국민투표를 통해 로마와 라티움은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고, 1871년 7월 공식적으로 로마는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면서 '리소르지멘토'는 실질적으로 완성됩니다.

1915

[런던 조약 체결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1차 세계대전 중 런던 조약이 체결되어, 이탈리아가 미회복지(프리울리, 트렌티노, 달마티아 등)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동맹국(오스트리아-헝가리 등)에 선전포고하며 연합국에 합류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민족통일주의의 확장 노력이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중립을 선언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역사적 적개심과 미회복지(이탈리아 민족이 거주하나 타국 지배하에 있는 지역)를 되찾고자 하는 민족통일주의 열망이 강했습니다. 1915년 4월 런던 조약을 통해 프리울리, 트렌티노, 달마티아 등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동맹국에 선전포고하고 연합국 측에 합류했습니다. 이는 리소르지멘토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통일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였습니다.

1920

[라팔로 조약 체결로 일부 미회복지 합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라팔로 조약이 체결되어 일부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민족 집단이 거주하던 지역들이 이탈리아 왕국에 합류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때까지를 리소르지멘토의 완성으로 보기도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탈리아 민족통일주의는 트리에스테, 고리치아, 이스트리아, 자다르 등을 획득하며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20년 라팔로 조약 체결 이후에도 트렌티노알토아디제와 이스트리아반도의 이탈리아인 등 일부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민족 집단이 거주하던 지역들이 이탈리아 왕국에 추가로 합류했습니다. 이 시점을 마지막으로 리소르지멘토가 완성되었다고 보는 역사학자들도 있습니다.

1945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통일주의 운동 소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이탈리아 민족통일주의 운동은 이탈리아 정치에서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이는 리소르지멘토 시대 이후 오랜 기간 지속된 민족통일주의의 최종적인 종결을 의미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이탈리아는 달마티아와 코르시카, 니차 등을 일시적으로 차지하며 민족통일주의의 꿈을 거의 완성하는 듯했으나, 전쟁의 패배로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탈리아 정치에서 민족통일주의 운동은 더 이상 주요한 정치적 흐름으로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리소르지멘토의 확장된 목표였던 모든 '미회복지' 통합은 사실상 종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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