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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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역사 사건, 정치 사건, 암살, 국제 관계 + 카테고리

* 1895년 일본 공사 주도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충격적 사건. * 일본의 조선 침략을 방해하는 황후 제거가 목적. * 경복궁에 침입 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움. * 조선 민중의 강력한 반일 감정 및 의병 운동 유발. * 일본 측 가담자 대부분 무죄 방면 및 영전 한국 근대사의 아픈 비극으로 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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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94

[갑오개혁 시작과 명성황후의 러시아 접근]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 후 조선 지배를 강화하며 친일 내각을 세우고 갑오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명성황후는 일본 세력 축출을 위해 러시아에 접근하며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1895

[박영효의 왕비 암살 미수 계획]

급진개화파 박영효가 명성황후의 권모를 두려워하여 암살을 계획하고 일본에 병력을 요청했으나, 유길준의 밀고로 계획이 누설되어 박영효 일당은 도주했습니다.

명성황후가 러시아와 결탁하여 군권을 회복하려 하자, 박영효는 이를 우려해 단독으로 왕비 암살을 모의했습니다. 그는 일본에 병력을 요청하며 유길준에게 뜻을 알렸으나, 유길준이 이를 고종에게 밀고하여 계획이 발각되었고, 박영효는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용산에서 기선을 타고 도주했습니다.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로 부임]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가 조선의 새 일본 공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평소 염불 공사라 불릴 만큼 은둔하며 경계심을 풀게 하는 위장술을 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계획 '여우사냥' 수립]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미우라 고로의 참모 시바 시로 등 핵심 인사들이 명성황후 시해 세부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 작전은 '여우사냥'으로 불렸습니다.

모의 내용은 첫째, 일본 낭인들이 범행을 맡고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위장하며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지휘한다. 둘째,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들로 구성하며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가 낭인을 동원한다. 셋째, 일본 공사관이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인다. 넷째,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으로 정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약조와 궁궐 앞 소란]

일본 공사관 소좌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공덕리에서 흥선대원군을 만나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4개조 약조문을 받아냈습니다.

사건 전날 밤 조선군 훈련대와 일본군이 대궐 앞에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당시 일본은 흥선대원군의 정치 참여를 원치 않았고,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이를 위해 약조문을 받아냈습니다. 이 날 밤의 소란은 익일 거사의 전조였습니다.

[훈련대 해산 통보 및 거사일 변경]

조선 정부가 훈련대 해산을 명령하자, 군부 대신 안경수와 우범선 등이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이 사실을 급히 통보했습니다.

이에 미우라는 거사 날짜를 그날 밤으로 앞당겨 변경 지시했습니다.

미우라는 거사 계획서인 〈입궐방략서〉를 영사관보 호리쿠치 구마이치에게 주고 용산으로 가서 거사 준비를 지시했습니다. 한성신보 직원들과 낭인들, 영사관 순사들이 용산으로 집결했고, 이주회가 조선인 몇 명을 규합하여 공덕리로 갔습니다. 그날 밤 공덕리 대원군 별장에 약 60여 명의 일본인과 조선인 협력자들이 모였습니다.

[경복궁 침입 및 명성황후 시해]

새벽 3시경 흥선대원군을 반강제로 끌어내 경복궁으로 향했습니다.

광화문 경비병의 저항을 격퇴하고 일본군과 조선인 훈련대가 3개 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돌진했습니다.

명성황후가 피신해 있던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에서 황후를 찾아내 칼로 찔러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뒤 연못에 던졌습니다.

새벽 2시경부터 일본군 수비대 제3중대가 광화문 부근에서 대기하고, 제2중대장은 훈련대 제2대대를 인솔하여 춘생문 부근에 집결, 경복궁을 포위했습니다. 새벽 4시 반 전후로 궁궐이 소란해지자 고종은 미국/러시아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경복궁에 진입한 일본인 낭인들은 궁녀들을 난타하며 황후의 처소를 물었고, 이경직 궁내부 대신이 황후를 막으려다 살해되었습니다. 낭인들은 변복한 황후를 찾아내 마룻바닥에 넘어뜨려 밟고 칼로 찔러 시해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시해 직전 왕후가 목숨을 구걸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죽인 사람이 황후인지 확신하지 못해 용모가 비슷한 궁녀 세 명을 추가로 살해했습니다. 이후 일부 주장에서 시해 전 능욕설이 제기되었으나, 이는 상식에 위배되는 거짓으로 일축되거나 신원 식별을 위한 행위로 해석되며 논란이 있습니다. 사건 목격자인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과 미국인 지휘관 윌리엄 다이는 일본군에게 폭행당했음에도 이 참상을 세계에 폭로했습니다. 황후 시신은 건청궁 동쪽 녹원 숲 속에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져 석유로 태워졌습니다. 타다 남은 유골은 훈련대 참위 윤석우가 수습하여 오운각 서봉 밑에 매장했습니다.

[일본의 증거 인멸 및 여론 호도 공작]

을미사변 당일 아침 고종이 미우라 공사를 불러 내막을 묻자, 미우라는 황후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고 화장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또한 미우라는 사건 직후 왕후 시해 사건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호도하는 공작을 펼쳤습니다.

미우라는 군부 대신 조희연을 내세워 일본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거짓 증명을 받아냈습니다. 외국인 목격자 다이와 사바틴의 입을 막으려 내무부 고문직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미우라는 사건 책임자를 위장하려 했으나 일본 정부가 낭인들의 퇴한 조치를 내리며 무산되었습니다.

[김홍집 내각의 황후 폐위 조서 발표]

김홍집 내각은 고종의 서명 없이 스스로 '왕후를 서인(庶人)으로 폐위한다'는 조서를 고종의 명의로 발표했습니다.

이는 고종의 의사와 무관한 조치였습니다.

왕태자가 명성황후의 폐위에 반발하며 태자위 양위를 저항하자, 다음날인 10월 11일 '왕후'를 후궁에 해당하는 '빈(嬪)'으로 승격시켰습니다. 10월 14일에는 황후를 새로 간택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나, 고종은 죽을 때까지 황후를 새로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의 낭인 퇴한 조치]

일본 정부는 을미사변 관련 사실이 밝혀질 것을 우려하여, 가담한 몇몇 낭인들에게 조선에서의 퇴한(退韓) 조치를 내렸습니다.

[훈련대 해산 및 친위대·진위대 설치]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조선의 훈련대가 해산되고, 왕궁을 호위하는 친위대와 지방을 방어하는 진위대가 새로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을미사변 이후 일본 세력의 약화를 보여주는 조치였습니다.

[황후 복위 및 관련자 파면]

국내외 악화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폐후 조칙이 취소되고 왕비가 복위되었습니다.

시해사건에 관계한 군부대신 조희연과 경무사 권형진이 파면되었습니다.

대원군도 스스로 은퇴하고, 이준용은 일본에 유학 명목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왕후 시해 사실 공식 발표 및 국상 시작]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5일 만에 고종은 공식적으로 그 사망을 발표하고 국상을 치르려 했습니다.

이는 고종의 친위 쿠데타 세력(정동파)의 몰락 분위기를 이용하여 국상을 진행하려 함이었습니다.

1896

[김구, 명성황후 복수 살인 사건]

청년 김구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며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살해했습니다.

김구는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직접 지시로 사형 집행이 중지되었습니다.

[일본인 관련자 무죄 석방 및 영전]

을미사변을 주동한 일본인 공사 미우라 고로 등 관련자 48명이 재판소에 회부되었으나, '증거 불확실'을 이유로 전원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일본군 장교 8명도 군법회의에서 무죄 방면되어, 일본 측 가담자 54명 중 누구도 형사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특히 사건을 총괄 기획한 가와카미 소로쿠는 2년 뒤 왕족이 아닌 자로서 세계최초로 육군참모총장에 오르는 등, 관련자 대부분이 무죄 방면 후 크게 영전하며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하고 관련자들을 보호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미우라 고로는 추밀원 고문관 겸 궁내관으로, 시바 시로는 중의원, 농상무 차관으로, 구스노세 유키히코는 육군 중장, 육군대신으로, 아다치 겐조는 중의원, 체신, 내무 대신으로 영전했습니다.

[아관파천 발생 및 을미사적 규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이 발생했습니다.

고종은 조칙을 내려 김홍집 일파, 즉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을미사적(乙未四賊)'으로 규정하고 역도로 선포했으며, 폐비 조칙을 무효화했습니다.

[명성황후 생존설 외교 문서 보고]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힐리어가 베이징 주재 영국 대리공사에게 명성황후의 사망 여부에 대한 고종의 침묵을 보고했습니다.

이는 을미사변 4개월 후 명성황후가 살아있다는 내용의 독일 외교 문서가 발견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상 절차 중단 및 무기한 연기]

아관파천 이후 김홍집 내각이 진행하던 명성황후 국상 절차가 중단되고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1897

[명성황후 장례 준비]

을미사변 발생 2년이 지나서야 명성황후에 대한 장례가 비로소 진행되었습니다.

유해는 뼈와 재, 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 판명이 어려웠다고 전해집니다.

[고종의 황제 즉위 및 명성황후 추존]

고종이 환구단에서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고, 낮 12시에 왕후를 '명성황후'로 책봉·추존했습니다.

이는 대한제국 성립의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대한제국 국호 반포]

황제가 태극전에 나아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반포하며 대한제국이 정식으로 성립되었습니다.

[명성황후 유해 홍릉 안장]

대한제국 성립 직후, 명성황후의 유해는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습니다.

1898

[흥선대원군 사망과 고종과의 관계 악화]

을미사변의 배후 중 한 명으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이 사망했으나, 아들인 고종은 장례식에 불참할 정도로 부자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2005

[일왕 결재 보고서 공개로 일본 정부 개입 확인]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 일본 영사가 작성하고 일왕이 결재한 보고서가 2005년에 공개되며,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시해 개입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2009

[일본인 암살범 후손들의 사죄]

일본 아사히 TV의 프로그램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범인 후손들이 명성황후의 후손을 만나 사죄하는 모습이 방영되었습니다.

2013

[명성황후 생존설 외교 문서 발견]

정상수 교수가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살해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독일과 영국의 외교문서를 찾아내 발표했습니다.

이는 명성황후의 사망 여부에 대한 역사적 논란을 재점화했습니다.

2013년 정상수 교수가 발견한 문서에 따르면, 1896년 2월 6일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후고 라돌린이 독일제국 총리에게 '명성황후가 살아있으며,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로 피신하려 한다'는 비밀 문서를 보냈습니다. 이는 당시 명성황후 생존설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이 문서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1. '소문'의 기록이지 '사실'의 증명이 아니다 :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이 문서를 작성한 후고 라돌린은 서울이 아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습니다. 그는 서울의 상황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러시아 외교가에서 떠도는 '소문(rumor)'을 수집하여 본국에 보고한 것입니다. 당시 을미사변 직후 일본이 사건을 은폐하고 "왕후가 무사히 피신했다"는 역정보를 흘렸기 때문에, 조선의 정세는 극도로 혼란했고 '생존설' 관련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2. 압도적인 '사망' 증거의 존재 : 명성황후가 1895년 10월 8일(을미사변)에 시해당했다는 직접적인 1차 사료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 일본 측 기록 : 시해에 가담한 일본 낭인들의 회고록과 보고서에 상세한 시해 정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조선 측 기록 : 궁궐 경비병, 궁녀들의 증언이 다수 존재합니다.

- 제3국 목격자 : 당시 경복궁에 있던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A. I. Sabatin)은 일본 낭인들의 만행과 왕후 시해 정황을 직접 목격하고 상세한 보고서를 남겼습니다.


3. 아관파천과의 모순 : 만약 명성황후가 살아있었다면, 5일 뒤 고종이 피신할 때(아관파천) 당연히 함께 갔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관파천은 고종과 세자(순종) 단둘이 궁녀의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탈출한 사건이며, 그 어떤 기록에도 명성황후가 동행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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