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농학자, 식물학자,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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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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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학자, 식물학자,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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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의 농업 과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농생물과학자입니다. - '종의 합성' 이론을 정립하며 현대 유전학의 새 지평을 열었고, 씨 없는 수박 시연 등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 아버지의 역사적 오명에도 불구하고 한국 농업 재건에 헌신하며 '고무신 박사'로 불린 국민 과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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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일본 도쿄에서 출생]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고난을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1898년 4월 8일,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했던 조선인 우범선과 일본인 사카이 나카 사이의 2남 중 장남으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우범선의 암살로 인해 보육원과 사찰에서 생활하며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1903

[아버지 우범선 암살과 유년기 고난]

아버지 우범선이 암살당하자 어머니는 그를 보육원과 사찰에 맡겼고,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난을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1903년, 명성황후의 원한을 갚고자 했던 고영근에 의해 아버지 우범선이 암살당했습니다. 과부가 된 어머니는 우장춘을 잠시 보육원에 맡겼고, 이후 도쿄 회운사라는 사찰로 옮겨 생활했습니다. 보육원에서는 일본 본토 원생들에게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회운사 주지승 및 동자승들과는 돈독히 지냈습니다. 가내 사정이 완화되자 사찰을 떠나 어머니의 손에 자랐습니다.

1916

[동경제국대학 농학실과 입학]

동경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하여 농업 분야의 전문적인 학업을 시작하며 미래의 농업 과학자로서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1916년 4월, 동경제국대학 농학실과에 입학하며 농업 과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직하여 연구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1936

['종의 합성' 이론으로 농학박사 학위 취득]

모교에서 '종(種)의 합성'이라는 혁신적인 논문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술적 업적을 인정받았고, 이는 현대 유전학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36년 5월 4일, 모교에서 "종(種)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이론은 식물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현대 유전학 교과서에서도 중요한 내용으로 소개될 만큼 학술적으로 큰 의미를 지닙니다.

1950

[대한민국 귀국과 한국 농업 연구 시작]

이승만 정부의 요청으로 대한민국에 귀국하여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운영을 맡아 한국 농업 발전에 헌신했으며, 출국 금지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연구에 매진하고 씨 없는 수박 시연 등 대중적 활동도 펼쳤습니다.

1949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창설 후, 이승만 정부의 요청으로 1950년 3월 8일 대한민국에 귀국했습니다. 일본에 가족을 남겨두었으며, 당시 한일 관계 악화로 출국이 금지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일본에 가지 못하고 연구소 강당에서 위령제를 지냈으며, 조의금으로 연구소에 우물을 팠습니다. 채소 종자의 육종 합성 및 벼의 수도이기작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씨 없는 수박은 일본인이 먼저 개발했지만, 우장춘 박사가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시연하며 농업 기술 보급의 홍보용으로 활용하여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로 인해 그가 씨 없는 수박을 최초 개발한 것으로 잘못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1959

[대한민국 문화포장 수훈과 국민적 존경]

안익태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으며 한국 과학 발전에 대한 국가적 기여를 인정받았습니다. 대중에게 '고무신 박사'로 불리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습니다.

1959년, 우장춘 박사는 안익태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훈하며 국가적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연구소는 학생들의 수학여행 견학 코스가 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으며, 연구소에서는 늘 고무신 차림으로 연구에 몰두하여 대중에게 '고무신 박사'라는 친근한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존경받는 과학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한국 농업에 헌신하다 영면]

한국에 온 지 9년 만에 고된 일과로 만성 위 십이지장 궤양을 앓던 중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한국 농업 발전을 위한 그의 헌신은 막을 내렸습니다.

한국에 온 지 9년이 되던 1959년 8월 10일, 우장춘 박사는 고된 일과로 인해 만성 위 십이지장 궤양으로 국립의료원에서 향년 62세의 나이로 고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배우자 와타나베 고하루 여사가 곁을 지켰습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수원 농촌진흥청 내 여기산에 있으며, 사후 2003년 4월 21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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