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채소, 과일
최근 수정 시각 : 2025-11-06- 23:17:14
토마토의 연혁은 안데스 기원 부터 아즈텍의 '토마틀' 을 거쳐 유럽에 당도한 후, '사랑의 사과' 라는 환대와 동시에 과학적 오해 및 납 퓨터 식기 가 결합된 '독초' 라는 치명적 누명을 쓴 역사입니다. 이 누명은 토마토 자체가 아닌, 당시의 사회경제적 환경이 빚어낸 오해였습니다. 미국에서는 '만병통치약' 이라는 과장된 열광을 거쳐, 1893년 대법원 판결 을 통해 '식물학적 과일'임에도 '문화적 채소'라는 법적 지위를 획득하며 식탁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결국 토마토의 역사는 식물 자체의 특성보다, 그것을 수용한 인간 사회의 편견과 수용의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BC 5C
[안데스 기원, 멕시코의 '토마틀']
토마토의 원종은 남미 안데스 산맥에서 유래했으나 , 작물화는 멕시코(중앙아메리카)에서 c. 500 BC경 이루어졌습니다. 아즈텍 문명은 이 작물을 '토마틀(tomatl)'이라 부르며 일상적인 식재료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토마토가 유럽에 전래되기 훨씬 이전부터 신세계의 중요 식량자원이었음을 시사합니다.
토마토의 식물학적 기원은 현재의 페루, 에콰도르, 칠레 등 남미 안데스 산맥 서부 지역입니다. 이 지역의 야생 토마토는 작고 신맛이 강한 열매였습니다. 주목할 점은, 토마토의 '기원지(Origin)'와 '작물화 중심지(Center of Domestication)'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작물화는 기원지가 아닌 멕시코(중앙아메리카)에서 c. 500 BC경 아즈텍 및 마야 문명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에도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 인디오들의 이동과 농업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줍니다. 아즈텍인들은 이 열매를 '토마틀(tomatl)'이라 불렀는데, 이는 '부풀어 오르는 과일'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토마틀'은 스페인어 '토마테(tomate)'를 거쳐 오늘날 '토마토(tomato)'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아즈텍인들은 이미 토마토를 소금, 양념 등과 함께 생식하거나 다양한 요리에 활용했으며, 씨앗이 예지 능력을 준다고 믿는 등 고유의 식문화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1544
[유럽 상륙: '사랑'과 '황금'의 이름]
16세기 초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유럽에 전래된 토마토는 식재료가 아닌 관상용 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1544년 피에트로 마티올리(Pietro Andrea Matthioli)에 의해 '황금 사과(pomi d'oro)' 로, 프랑스에서는 최음제라는 소문과 함께 '사랑의 사과(pomme d'amour)' 로 불렸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인들이 토마토를 실용적 식재료가 아닌, 이국적이고 신화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스페인 탐험가들이 16세기 초 멕시코에서 토마토 씨앗을 유럽으로 가져왔습니다. 토마토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에서 쉽게 자랐습니다. 유럽 최초의 문헌 기록은 1544년 이탈리아의 식물학자 피에트로 안드레아 마티올리(Pietro Andrea Matthioli)에 의한 것으로, 그는 토마토를 '황금 사과(pomi d'oro)'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에 전래된 초기 품종이 현재의 붉은색이 아닌 노란색 계열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사랑의 사과(pomme d'amour)'라 불렸는데, 이는 신대륙에서 온 이국적인 식물이 최음제(aphrodisiac) 효과를 지녔을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스페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지역, 특히 북유럽에서는 토마토를 약 200년간 식용이 아닌 '관상용 식물(ornamental plant)'로만 여겼습니다. 이러한 명칭은 토마토에 대한 유럽 사회의 초기 인식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아즈텍의 실용적인 이름('부풀어 오르는 과일') 과 달리, 유럽에서는 '황금'이나 '사랑' 이라는 신화적, 관능적 프레임을 씌웠습니다. '황금 사과'라는 이름은 성경 속 '유혹의 열매'를 연상시키며 , 토마토를 식탁이 아닌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이는 곧이어 등장할 '독초' 누명의 문화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1597
[존 제라드의 『Herbal』, '독초' 낙인]
1597년 영국의 식물학자 존 제라드(John Gerard)가 그의 저서 『Herbal』에서 토마토를 '유독한 가지과(deadly nightshade)' 식물로 잘못 분류했습니다. 토마토는 실제로 같은 가지과(Solanaceae)에 속하며 줄기와 잎에 독성(솔라닌)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라드의 이 분류는 식용 가능한 열매 자체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켰고, '늑대 복숭아(wolf peach)'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게 했습니다.
토마토에 대한 공포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으며, 당대의 '과학적 권위'에 의해 뒷받침되었습니다. 토마토는 식물학적으로 감자, 담배, 고추 그리고 치명적인 독초인 벨라돈나(Atropa belladonna, deadly nightshade)와 함께 가지과(Solanaceae)에 속합니다. 실제로 토마토의 잎, 줄기, 뿌리에는 신경 독소인 '솔라닌(solanine)'이 포함되어 있어 섭취해서는 안 됩니다. 1597년, 영국의 식물학자 존 제라드(John Gerard)는 자신의 영향력 있는 식물지 『Herbal』에서 이 식물학적 유사성에 근거하여, 토마토가 유독한 '데들리 나이트셰이드' 계열이라고 기술했습니다. 제라드의 저서는 토마토의 열매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유독한 가문의 일원이라는 '부분적 진실'을 '열매도 독이다'라는 '전체적 오류'로 확대했습니다. 이 '과학적 권위'에 의한 낙인은 토마토 열매 자체를 유독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으며, '독사과(Poison Apple)' 라는 별명을 공고히 했습니다. 이는 과학적 권위가 어떻게 대중의 인식을 200년 이상 지배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1700
['독사과' 썰의 진실: 식기가 범인이었다]
1700년대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토마토를 먹고 병들거나 죽는 사례가 발생하며 '독사과' 공포는 극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진범은 토마토가 아니라, 귀족들이 사용한 '퓨터(Pewter, 백랍)' 식기였습니다. 토마토의 강한 산성(Acidity)이 납(Lead) 함량이 높은 퓨터 식기에서 납을 용출시켰고 , 사람들은 토마토가 아닌 '납 중독(Lead Poisoning)'으로 사망했습니다.
18세기 유럽에서 '독사과' 신화는 실제 사망 사례로 인해 '증명'되는 듯했습니다. 부유한 유럽 귀족(aristocrats)들이 토마토를 먹은 후 병들거나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이 비극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은 환경적 요인에 있었습니다.
1.식기: 당시 부유층은 납(Lead) 함량이 매우 높은 퓨터(백랍) 식기(Pewter plates)를 사용했습니다.
2.식재료: 토마토는 산도(Acidity)가 매우 높은 과일입니다.
3.화학 반응: 토마토의 강한 산성이 퓨터 식기의 납을 용출(leach)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귀족들은 납에 오염된 음식을 먹고 '납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치명적인 연관성(식기-산도-납)을 알지 못했고, 낯설고 의심스러운 식재료였던 토마토를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이 '독사과' 신화는 식물학적 현상이 아닌 '사회경제적 아이러니'의 산물입니다. 이 비극은 비싼 퓨터 식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부유층'에게만 선택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나무나 저렴한 식기를 사용했던 평민들은 토마토를 먹어도 안전했습니다. 즉, 토마토는 살인자가 아니라, 당시 상류층의 사치품(납 식기)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드러낸 '목격자'였습니다.
1834
[만병통치약이 된 토마토 알약]
1834년, 미국 오하이오의 존 쿡 베넷(John Cook Bennett) 박사가 토마토를 의학적 '만병통치약(panacea)'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토마토가 소화불량, 설사, 황달 등을 치료한다고 주장했으며 , 이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이 선언으로 인해 토마토 케첩과 토마토 알약이 한동안 약으로 판매되는 기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유럽의 공포가 옅어진 19세기 미국에서 토마토는 정반대의 극단적인 수용 과정을 겪었습니다. 1834년, 오하이오의 의사 존 쿡 베넷(John Cook Bennett)은 토마토가 소화불량, 황달, 설사 등 광범위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학적 효능이 있다고 언론에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었지만 , '독초'의 이미지를 벗어던질 강력한 내러티브가 되었습니다. 이 소동으로 인해 토마토 케첩이(당시 버섯에서 토마토로 주재료가 바뀌는 중이었음 ) 약으로 홍보되거나, 심지어 '토마토 알약(tomato pills)' 이 만들어져 판매되는 열풍이 불었습니다. 이 '만병통치약' 소동은 '독사과'라는 극단적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극단적 처방'이었습니다. 수백 년간의 '독(Poison)'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약(Panacea)' 이라는 강력한 반대 내러티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베넷의 주장은 과학적으로는 거짓이었으나, "혐오스럽고 유독한 식물에서 미국 식단의 필수품으로" 토마토의 이미지를 '재구성(reframe)'하는 데는 성공적인 마케팅이었습니다.
1893
[과일일까? 채소일까?]
1883년 미국 관세법이 수입 '채소(vegetables)'에는 세금을 부과하고 '과일(fruit)'은 면제하자 , 수입업자 닉스(Nix)는 "토마토는 식물학적으로 과일"이라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893년 5월 10일, 미국 연방 대법원은 닉스 대 헤든(Nix v. Hedden) 판결에서 토마토가 "식물학적으로는 과일이 맞으나 , 일상 용어(common parlance) 및 식사 용례상 '채소'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만장일치로 판결했습니다.
토마토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은 1893년 미국 연방 대법원까지 도달했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1883년 관세법(Tariff Act of 1883)으로, 수입 '채소'에는 관세를 부과했지만 '과일'은 면제했습니다. 수입업자 존 닉스(John Nix & Co.)는 이미 낸 관세를 돌려받기 위해, 토마토가 식물학적으로 씨앗을 포함한 구조물(seed-bearing structure)이므로 '과일'이라고 주장하며 뉴욕항 세관원 헤든(Hedden)을 고소했습니다. 1893년 5월 10일,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피고(정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호러스 그레이(Horace Gray) 대법관은 판결문에서 "식물학적(Botanically)으로는 토마토가 포도나무의 열매(fruit of the vine)가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법률 용어는 특별한 상업적 의미가 없는 한 '일상적인 의미(ordinary meaning)'를 따라야 한다고 판시했습니다. 그리고 "일상 용어(common parlance)로 토마토는 디저트(dessert)로 제공되지 않고, 식사의 주요 부분(main course)으로" 소비되므로 '채소'라는 것입니다. 닉스 대 헤든 판결은 과학적 진실(식물학)과 문화적 용례(식탁)가 충돌할 때, 법이 문화의 손을 들어준 상징적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