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06- 23:17:14
토마토의 연혁은 안데스 기원 부터 아즈텍의 '토마틀' 을 거쳐 유럽에 당도한 후, '사랑의 사과' 라는 환대와 동시에 과학적 오해 및 납 퓨터 식기 가 결합된 '독초' 라는 치명적 누명을 쓴 역사입니다. 이 누명은 토마토 자체가 아닌, 당시의 사회경제적 환경이 빚어낸 오해였습니다. 미국에서는 '만병통치약' 이라는 과장된 열광을 거쳐, 1893년 대법원 판결 을 통해 '식물학적 과일'임에도 '문화적 채소'라는 법적 지위를 획득하며 식탁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결국 토마토의 역사는 식물 자체의 특성보다, 그것을 수용한 인간 사회의 편견과 수용의 거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수정 시각 : 2025-11-06- 22:11:33
케첩의 역사는 '감칠맛'과 '보존'을 향한 욕망이 빚은 세계화의 연대기입니다. 아시아의 발효 어장 '케찹(kê-tsiap)'은 보존성을 무기로 유럽에 전파되었고 , 18세기 영국에서는 버섯과 호두 등 현지 재료로 '번역'되는 창조적 변용을 겪었습니다. 1812년 토마토가 처음 도입되고 1834년 '약'으로 오해받는 과도기를 거쳐, 1876년 하인즈가 식초와 설탕으로 보존법을 혁신하고 투명한 병으로 '신뢰'를 판매하며 비로소 오늘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완성되었습니다.
BC 5C
[안데스 기원, 멕시코의 '토마틀']
토마토의 원종은 남미 안데스 산맥에서 유래했으나 , 작물화는 멕시코(중앙아메리카)에서 c. 500 BC경 이루어졌습니다. 아즈텍 문명은 이 작물을 '토마틀(tomatl)'이라 부르며 일상적인 식재료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토마토가 유럽에 전래되기 훨씬 이전부터 신세계의 중요 식량자원이었음을 시사합니다.
토마토의 식물학적 기원은 현재의 페루, 에콰도르, 칠레 등 남미 안데스 산맥 서부 지역입니다. 이 지역의 야생 토마토는 작고 신맛이 강한 열매였습니다. 주목할 점은, 토마토의 '기원지(Origin)'와 '작물화 중심지(Center of Domestication)'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작물화는 기원지가 아닌 멕시코(중앙아메리카)에서 c. 500 BC경 아즈텍 및 마야 문명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에도 아메리카 대륙 내에서 인디오들의 이동과 농업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줍니다. 아즈텍인들은 이 열매를 '토마틀(tomatl)'이라 불렀는데, 이는 '부풀어 오르는 과일'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토마틀'은 스페인어 '토마테(tomate)'를 거쳐 오늘날 '토마토(tomato)'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아즈텍인들은 이미 토마토를 소금, 양념 등과 함께 생식하거나 다양한 요리에 활용했으며, 씨앗이 예지 능력을 준다고 믿는 등 고유의 식문화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BC 5C
1544
[유럽 상륙: '사랑'과 '황금'의 이름]
16세기 초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유럽에 전래된 토마토는 식재료가 아닌 관상용 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1544년 피에트로 마티올리(Pietro Andrea Matthioli)에 의해 '황금 사과(pomi d'oro)' 로, 프랑스에서는 최음제라는 소문과 함께 '사랑의 사과(pomme d'amour)' 로 불렸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인들이 토마토를 실용적 식재료가 아닌, 이국적이고 신화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스페인 탐험가들이 16세기 초 멕시코에서 토마토 씨앗을 유럽으로 가져왔습니다. 토마토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에서 쉽게 자랐습니다. 유럽 최초의 문헌 기록은 1544년 이탈리아의 식물학자 피에트로 안드레아 마티올리(Pietro Andrea Matthioli)에 의한 것으로, 그는 토마토를 '황금 사과(pomi d'oro)'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에 전래된 초기 품종이 현재의 붉은색이 아닌 노란색 계열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사랑의 사과(pomme d'amour)'라 불렸는데, 이는 신대륙에서 온 이국적인 식물이 최음제(aphrodisiac) 효과를 지녔을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스페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지역, 특히 북유럽에서는 토마토를 약 200년간 식용이 아닌 '관상용 식물(ornamental plant)'로만 여겼습니다. 이러한 명칭은 토마토에 대한 유럽 사회의 초기 인식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아즈텍의 실용적인 이름('부풀어 오르는 과일') 과 달리, 유럽에서는 '황금'이나 '사랑' 이라는 신화적, 관능적 프레임을 씌웠습니다. '황금 사과'라는 이름은 성경 속 '유혹의 열매'를 연상시키며 , 토마토를 식탁이 아닌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이는 곧이어 등장할 '독초' 누명의 문화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1544
1597
[존 제라드의 『Herbal』, '독초' 낙인]
1597년 영국의 식물학자 존 제라드(John Gerard)가 그의 저서 『Herbal』에서 토마토를 '유독한 가지과(deadly nightshade)' 식물로 잘못 분류했습니다. 토마토는 실제로 같은 가지과(Solanaceae)에 속하며 줄기와 잎에 독성(솔라닌)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라드의 이 분류는 식용 가능한 열매 자체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켰고, '늑대 복숭아(wolf peach)'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게 했습니다.
토마토에 대한 공포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으며, 당대의 '과학적 권위'에 의해 뒷받침되었습니다. 토마토는 식물학적으로 감자, 담배, 고추 그리고 치명적인 독초인 벨라돈나(Atropa belladonna, deadly nightshade)와 함께 가지과(Solanaceae)에 속합니다. 실제로 토마토의 잎, 줄기, 뿌리에는 신경 독소인 '솔라닌(solanine)'이 포함되어 있어 섭취해서는 안 됩니다. 1597년, 영국의 식물학자 존 제라드(John Gerard)는 자신의 영향력 있는 식물지 『Herbal』에서 이 식물학적 유사성에 근거하여, 토마토가 유독한 '데들리 나이트셰이드' 계열이라고 기술했습니다. 제라드의 저서는 토마토의 열매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유독한 가문의 일원이라는 '부분적 진실'을 '열매도 독이다'라는 '전체적 오류'로 확대했습니다. 이 '과학적 권위'에 의한 낙인은 토마토 열매 자체를 유독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으며, '독사과(Poison Apple)' 라는 별명을 공고히 했습니다. 이는 과학적 권위가 어떻게 대중의 인식을 200년 이상 지배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1597
1600
1600
[케첩의 원형, 아시아의 케찹]
현대 케첩의 어원은 중국 남부 푸젠성(Fujian)의 호키엔(Hokkien) 방언 '케찹(kê-tsiap)' 또는 '게찹(kôe-chiap)'이며, 이는 '절인 생선이나 갑각류의 염수(젓갈)'를 의미했습니다. 이 소스는 1600년대 활발한 해상 무역의 허브였던 푸젠성을 중심으로 중국 남부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케첩의 초기 확산 동력은 맛 자체보다 냉장 기술이 없던 시대에 상하지 않고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보존성'에 있었습니다.
케첩의 원형은 현대의 붉고 달콤한 소스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물질이었습니다. 이는 '膎汁'(kôe-chiap / kê-chiap)으로 표기되며, 발효시킨 생선이나 해산물에서 나오는 짠 국물, 즉 '액젓'에 가까웠습니다. 1873년 편찬된 중국어-영어 사전에도 'kôe-chiap'이 "절인 생선이나 조개류의 염수"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 소스가 글로벌 상품이 될 수 있었던 일차적 요인은 '물류'였습니다. 17세기는 냉장 기술이 전무했던 시대로, 특히 장거리 항해를 하는 선원들에게 식품의 '보존성'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케찹'은 발효 과정을 통해 수개월간 부패하지 않고 보관할 수 있었기에 , 유럽 상인들에게는 실크, 도자기, 향신료와 더불어 아시아에서 구매해야 할 매력적인 교역 상품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상인들은 "중국 상인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할 정도로 , 아시아는 이미 선진적인 글로벌 무역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즉, 케첩의 원형은 유럽인들의 '발견'이 아니라, 이미 아시아 경제권 내에서 활발히 유통되던 '상품'을 구매한 것이었습니다.
1699
1699
[유럽의 케첩 수용과 확산]
17세기 말, 동남아시아에서 향신료, 직물, 도자기를 찾던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은 현지의 발효 어장인 '케찹'을 처음 접했습니다. 이 소스는 장기 보관이 용이해 선원과 상인들에게 매력적이었고 , 1699년 영국 문헌에 "높은 동인도 소스(a high East-India Sauce)"로 처음 기록되었습니다. 1711년 무역상 찰스 록커(Charles Lockyer)는 "최고의 케첩은 통킹(Tonquin, 현 베트남 북부)에서 온다"고 기록하며, 당시 유럽인들이 이를 명확한 아시아산(産) 고급 소스로 인식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럽으로의 전파는 단일 경로가 아니었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은 각기 다른 동남아시아의 무역항에서 이 소스를 접했으며 , 이로 인해 'ketchup', 'catsup', 'katchup' 등 다양한 철자가 혼용되었습니다. 이들이 원본 소스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현지에서 레시피를 어설프게 복제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의 발효 기술과 재료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원본 소스가 가진 핵심 속성, 즉 '강렬한 감칠맛'과 '보존성'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1700년대 초반 영국에서 '케첩' 또는 '캣첩(catsup)'으로 불리기 시작한 이 소스들은, 원본의 맛을 재현하기 위해 stale beer(김빠진 맥주)나 향신료 등을 첨가하는 초기 변형을 거쳤습니다.
1700
['독사과' 썰의 진실: 식기가 범인이었다]
1700년대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토마토를 먹고 병들거나 죽는 사례가 발생하며 '독사과' 공포는 극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진범은 토마토가 아니라, 귀족들이 사용한 '퓨터(Pewter, 백랍)' 식기였습니다. 토마토의 강한 산성(Acidity)이 납(Lead) 함량이 높은 퓨터 식기에서 납을 용출시켰고 , 사람들은 토마토가 아닌 '납 중독(Lead Poisoning)'으로 사망했습니다.
18세기 유럽에서 '독사과' 신화는 실제 사망 사례로 인해 '증명'되는 듯했습니다. 부유한 유럽 귀족(aristocrats)들이 토마토를 먹은 후 병들거나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이 비극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은 환경적 요인에 있었습니다.
1.식기: 당시 부유층은 납(Lead) 함량이 매우 높은 퓨터(백랍) 식기(Pewter plates)를 사용했습니다.
2.식재료: 토마토는 산도(Acidity)가 매우 높은 과일입니다.
3.화학 반응: 토마토의 강한 산성이 퓨터 식기의 납을 용출(leach)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귀족들은 납에 오염된 음식을 먹고 '납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치명적인 연관성(식기-산도-납)을 알지 못했고, 낯설고 의심스러운 식재료였던 토마토를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이 '독사과' 신화는 식물학적 현상이 아닌 '사회경제적 아이러니'의 산물입니다. 이 비극은 비싼 퓨터 식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부유층'에게만 선택적으로 발생했습니다. 나무나 저렴한 식기를 사용했던 평민들은 토마토를 먹어도 안전했습니다. 즉, 토마토는 살인자가 아니라, 당시 상류층의 사치품(납 식기)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드러낸 '목격자'였습니다.
1700
1727
1727
[최초의 유럽식 케첩 레시피]
유럽에서 '케첩'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최초의 레시피는 1727년 엘리자 스미스(Eliza Smith)의 베스트셀러 요리책 The Compleat Housewife에 등장했습니다. 이 'Katchup' 레시피는 멸치(anchovies), 샬롯, 식초, 생강, 육두구(nutmeg) 등을 포함했습니다. 이 레시피는 아시아의 '발효 어장'을 유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염장 멸치'로 대체하여 원본의 감칠맛을 구현하려 한, 동서양의 조리법이 혼합된 과도기적 형태였습니다.
엘리자 스미스의 레시피는 케첩 역사에서 중요한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역할을 합니다. 1600년대 아시아의 원형(발효 생선 젓갈)과 1800년대의 토마토 케첩 사이에서, 1727년의 이 레시피는 '멸치'를 사용함으로써 그 기원이 '생선'에 있음을 명확히 증명합니다. 영국인들은 아시아의 'kê-tsiap'을 직접 제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흔하고 저렴하게 '발효 생선의 감칠맛'을 낼 수 있는 재료인 염장 멸치를 선택했습니다. 이 레시피는 이미 식초와 향신료를 사용하며 원본의 어장에서 벗어나 '소스'의 형태로 진화하고 있었지만, 그 뿌리가 어장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1750
1750
[토마토 없는 케첩의 황금기]
18세기는 토마토가 아닌 다양한 재료로 케첩을 만들던 '황금기(golden age)'였습니다. 이는 아시아 소스의 복제 실패가 아니라, '감칠맛(umami)'이라는 개념을 현지 재료로 '번역(translation)'하려는 창조적 변용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버섯 케첩 , 호두 케첩 , 굴 케첩 등이 유행했으며, 이 외에도 맥주, 와인, 과일, 견과류 등이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18세기 영국인들에게 '케첩'은 특정 재료(토마토)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장기 보존이 가능하도록 소금이나 식초, 알코올 등으로 처리한 고농축 감칠맛 소스'라는 기술적 카테고리를 의미했습니다.
버섯 케첩 (Mushroom Ketchup): 제인 오스틴이 선호했다고 알려진 가장 대중적인 변형이었습니다. 제조 과정은 "썩어가는 늪의 웅덩이"처럼 보였지만 , 최종 결과물은 간장이나 우스터셔 소스와 유사한 짙은 갈색의 감칠맛 소스였습니다.
호두 케첩 (Walnut Ketchup): 18세기 후반에 유행했으며, 생선 요리의 풍미를 더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굴 케첩 (Oyster Ketchup): 한 1700년대 레시피는 굴 100개, 화이트 와인 3파인트, 레몬 껍질 등을 요구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버전도 존재했습니다.
기타: 'Prince of Wales' 케첩은 엘더베리와 멸치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모든 레시피의 공통점은 '감칠맛'과 '보존성'입니다. 영국인들은 아시아의 '케찹'이 가진 핵심 속성, 즉 '감칠맛'을 자신들에게 익숙한 버섯 피클 등의 아이디어와 결합시켰습니다. 이는 사용자가 언급한 '뇌절'이 아니라, 외래의 개념을 현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창조적 변용'이었습니다.
1812
1812
[최초의 토마토 케첩 등장]
최초의 '토마토' 기반 케첩 레시피는 1812년 필라델피아의 과학자이자 원예가인 제임스 미스(James Mease)에 의해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사랑의 사과(love apples)'라 불리던 토마토가 최고의 케첩을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레시피는 토마토 펄프와 향신료 외에 보존제로 '브랜디(brandy)'를 사용했으며 , 현대 케첩의 핵심인 설탕과 식초는 거의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H.J. 하인즈(1876년)의 공로로 언급한 '토마토의 도입'은 사실 하인즈보다 64년이나 앞선 1812년에 제임스 미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미스의 케첩은 현대의 것과 매우 달랐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보존 방식'입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버섯이나 굴 케첩의 부패를 막기 위해 와인이나 브랜디 같은 알코올을 첨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조리법이었습니다. 미스가 1812년 레시피에서 브랜디를 사용한 것 은, 그가 '새로운' 현대 케첩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기존' 18세기 영국식 케첩 제조법에서 주재료만 버섯/호두에서 토마토로 '교체'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소스는 달고 신맛이 아닌, 알코올 향이 나는 짠맛의 소스였을 것이며 , 현대 케첩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중요한 '과도기적 산물'이었습니다.
1834
[만병통치약이 된 토마토 알약]
1834년, 미국 오하이오의 존 쿡 베넷(John Cook Bennett) 박사가 토마토를 의학적 '만병통치약(panacea)'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토마토가 소화불량, 설사, 황달 등을 치료한다고 주장했으며 , 이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이 선언으로 인해 토마토 케첩과 토마토 알약이 한동안 약으로 판매되는 기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유럽의 공포가 옅어진 19세기 미국에서 토마토는 정반대의 극단적인 수용 과정을 겪었습니다. 1834년, 오하이오의 의사 존 쿡 베넷(John Cook Bennett)은 토마토가 소화불량, 황달, 설사 등 광범위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학적 효능이 있다고 언론에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었지만 , '독초'의 이미지를 벗어던질 강력한 내러티브가 되었습니다. 이 소동으로 인해 토마토 케첩이(당시 버섯에서 토마토로 주재료가 바뀌는 중이었음 ) 약으로 홍보되거나, 심지어 '토마토 알약(tomato pills)' 이 만들어져 판매되는 열풍이 불었습니다. 이 '만병통치약' 소동은 '독사과'라는 극단적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극단적 처방'이었습니다. 수백 년간의 '독(Poison)'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약(Panacea)' 이라는 강력한 반대 내러티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베넷의 주장은 과학적으로는 거짓이었으나, "혐오스럽고 유독한 식물에서 미국 식단의 필수품으로" 토마토의 이미지를 '재구성(reframe)'하는 데는 성공적인 마케팅이었습니다.
1834
[케첩, 만병통치약이 되다]
1834년 오하이오주의 의사 존 쿡 베넷(John Cook Bennett) 박사는 토마토가 소화불량, 설사, 황달 등 각종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토마토는 유독성 식물인 '가지과(nightshade family)'에 속한다는 이유로 '독초'라는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베넷 박사는 이 인식을 뒤집고 토마토 케첩을 농축한 '토마토 알약(tomato pills)'을 개발하여 약으로 판매했습니다.
토마토가 '독초'에서 '식품'으로 격상되는 데 결정적인 사회적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1830년대는 콜레라가 창궐하고 식품 안전 규제가 전무하여 설사나 소화불량이 치명적인 질병으로 여겨지던 시기였습니다. 베넷 박사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음에도 이러한 대중의 불안감을 파고들며 '토마토 건강 열풍(fad)'을 일으켰습니다.
이 '의학 사기'는 역설적으로 토마토의 대중화에 기여했습니다. '독초'라는 공포의 대상이 '약'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리브랜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열풍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베넷의 성공 이후 '카피캣(copycats)'들이 시장에 난립하여, 토마토 알약이라 속이고 실제로는 단순 '설사약(laxatives)'을 판매하는 '토마토 알약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1850년대에 의학적 명성은 완전히 무너졌지만 , 토마토는 더 이상 '독'이 아닌 '식재료'로서의 가능성을 대중에게 각인시키게 되었습니다
1876
1876
[하인즈, 현대 케첩의 표준화]
1876년 헨리 J. 하인즈(Henry J. Heinz)는 'F. & J. Heinz Company'를 설립하고 'Catsup'을 출시하며 현대 케첩의 산업적 표준을 확립했습니다. 하인즈의 혁신은 '토마토의 도입'이 아니라, 기존 케첩의 만성적인 부패 문제를 해결한 '보존법의 혁신'에 있었습니다. 그는 '발효' 방식을 완전히 버리고, 다량의 '식초'(산도를 높여 보존)와 '설탕'(식초의 신맛을 중화)을 사용하여 화학 보존제 없는 장기 보존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인즈가 시장에 진입할 당시, 상업용 토마토 케첩은 보존성이 매우 낮아 쉽게 썩거나 발효가 진행되어 시큼하게 변하는 저급한 제품이었습니다. 하인즈의 진짜 혁신은 '요리'가 아닌 '화학(Chemistry)'과 '마케팅'에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케첩을 '생물학적(발효)' 보존 식품에서 '화학적(산성)' 보존 식품으로 재정의했습니다. 그는 200년간 케첩의 정체성이었던 '발효' 를 중단시키고, 대신 다량의 식초를 투입하여 박테리아의 성장을 억제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유해한 화학 보존제 없이도 상온에서 유통 가능한 최초의 '보존제 프리(preservative free)' 케첩이 탄생했습니다.
둘째, 현대 케첩 특유의 '달고 신 맛(sweet and tart)' 은 이 화학적 혁신의 '부산물(byproduct)'입니다. 보존을 위해 투입한 막대한 양의 식초는 케첩을 너무 시게 만들었습니다. 하인즈는 이 신맛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막대한 양의 설탕을 투입해야 했습니다. '보존'이라는 공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맛'의 표준이 우연히 탄생한 것입니다.
셋째, 하인즈는 '신뢰'를 판매했습니다. 1869년 첫 제품(서양 고추냉이)부터 , 그는 '투명한 유리병(clear glass bottles)'을 고집했습니다. 당시 경쟁사들이 부패나 저급한 재료를 숨기기 위해 '갈색 병(brown bottles)' 을 사용한 것과 정반대였습니다. 식품 규제가 없던 시대, 투명한 병은 제품의 '순수성(purity)'과 '품질'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마케팅 전략이었습니다. 하인즈는 '맛'이 아니라 '안전'을 판매함으로써 시장을 지배했습니다.
1893
[과일일까? 채소일까?]
1883년 미국 관세법이 수입 '채소(vegetables)'에는 세금을 부과하고 '과일(fruit)'은 면제하자 , 수입업자 닉스(Nix)는 "토마토는 식물학적으로 과일"이라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893년 5월 10일, 미국 연방 대법원은 닉스 대 헤든(Nix v. Hedden) 판결에서 토마토가 "식물학적으로는 과일이 맞으나 , 일상 용어(common parlance) 및 식사 용례상 '채소'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만장일치로 판결했습니다.
토마토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은 1893년 미국 연방 대법원까지 도달했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1883년 관세법(Tariff Act of 1883)으로, 수입 '채소'에는 관세를 부과했지만 '과일'은 면제했습니다. 수입업자 존 닉스(John Nix & Co.)는 이미 낸 관세를 돌려받기 위해, 토마토가 식물학적으로 씨앗을 포함한 구조물(seed-bearing structure)이므로 '과일'이라고 주장하며 뉴욕항 세관원 헤든(Hedden)을 고소했습니다. 1893년 5월 10일,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피고(정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호러스 그레이(Horace Gray) 대법관은 판결문에서 "식물학적(Botanically)으로는 토마토가 포도나무의 열매(fruit of the vine)가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법률 용어는 특별한 상업적 의미가 없는 한 '일상적인 의미(ordinary meaning)'를 따라야 한다고 판시했습니다. 그리고 "일상 용어(common parlance)로 토마토는 디저트(dessert)로 제공되지 않고, 식사의 주요 부분(main course)으로" 소비되므로 '채소'라는 것입니다. 닉스 대 헤든 판결은 과학적 진실(식물학)과 문화적 용례(식탁)가 충돌할 때, 법이 문화의 손을 들어준 상징적 사건입니다.
18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