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케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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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케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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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점성술사, 자연 철학자 + 카테고리

17세기 천문학 혁명의 핵심 인물이자 천체물리학의 선구자.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발전시켜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을 정립했으며 굴절 망원경 개량과 구분구적법 연구 등 다양한 과학 분야에 기여했다. 개인적 시련과 종교적 갈등 속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과학의 대중화에도 앞장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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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571

[요하네스 케플러 출생]

독일 바일데어슈타트에서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났다.할아버지는 읍의 장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었고, 용병이던 아버지는 케플러 5세 때 집을 나갔다.어머니는 치료사 겸 약재상으로 후에 마녀로 몰린다.병약했지만 영리하여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보였다.

1577

[1577년 대혜성 목격]

6세 때 어머니와 함께 1577년 대혜성을 목격했다.훗날 회고록에 "어머니께서 그것을 보기 위해 나를 데리고 높은 장소로 올라가셨다"고 기록하며 평생 천문학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

1580

[1580년 월식 관찰]

10세 때 1580년 월식을 관찰했다.훗날 월식을 보기 위해 "밖으로 불려가서" 달이 "약간 붉은 색이 된 것"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1589

[튀빙겐 대학교 입학 및 지동설 신봉]

초등, 라틴어 중등 학교, 개신교 신학교를 거쳐 튀빙겐 대학교에 신학 학생으로 입학했다.수학과 천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미하엘 매스틀린 교수에게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배웠으며 이때부터 지동설 신봉자가 되었다.

1594

[그라츠 개신교 학교 교사 임용]

목사가 되고자 하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학업 막바지에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개신교 학교(그라츠 대학 전신) 수학과 천문학 교사로 천거되어 23세에 임용되었다.그는 훌륭한 학자였지만 강의는 지루하여 수강생이 없기도 했다.

1595

[바바라 뮐러와 연애 시작]

23살의 딸 딸린 과부 바바라 뮐러를 소개받아 연애를 시작했다.그녀는 유복한 방앗간 주인의 딸이었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케플러의 가난 때문에 결혼을 반대했다.

[《우주구조의 신비》 구상]

그라츠에서 교사로 재직 중 토성과 목성의 주기적인 합을 증명하려다 영감을 얻어 첫 주요 천문학 연구인 《우주구조의 신비》를 구상하기 시작했다.그는 정다면체와 행성의 궤도 간 기하학적 관계가 우주의 신성한 계획을 담고 있다고 믿었다.

1596

[《우주구조의 신비》 출판]

스승 미하엘 매스틀린의 도움을 받아 성경 주해를 제거하고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묘사한 《우주구조의 신비》를 출판했다.이 책은 널리 읽히지는 않았지만, 케플러를 숙련된 천문학자로 명성을 얻게 했고 후원자 확보에 도움을 주었다.

1597

[바바라 뮐러와 결혼]

바바라 뮐러와 결혼했다.결혼 전 약혼이 거의 파기 직전까지 갔으나, 교회의 중재로 결혼에 성공했다.이 결혼 후 두 아이를 잃었지만, 이후 세 자녀를 두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서신 교환 시작]

《우주구조의 신비》를 발송한 많은 천문학자 중 한 명인 갈릴레오 갈릴레이로부터 "나도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지만, 물리적인 증거가 없어 아직 논리의 타당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답장을 받으며 서신 교환을 시작했다.

1598

[신우주설 제창자 논쟁에 휘말림]

스승 매스틀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튀코 브라헤의 숙적 라이마루스 우르소와 얽히며 논쟁에 휘말렸다.우르소는 케플러의 편지를 자신의 저서에 무단 재출판하며 튀코와의 싸움에 이용했다.케플러는 이 사건을 계기로 튀코와 서신을 주고받게 되었다.

1599

[연구 한계 봉착 및 튀코 브라헤와의 만남 결심]

기존 자료의 부정확함 때문에 연구에 한계를 느꼈다.관측 결과와 이론이 맞지 않자 코페르니쿠스의 관측값이 틀렸다고 결론 내렸고, 누구보다 정확한 관측 자료를 가진 튀코 브라헤를 만날 필요성을 절감했다.

1600

[튀코 브라헤를 찾아 프라하로 출발]

종교적으로 불안정한 그라츠에서의 상황과 연구의 한계 때문에 튀코 브라헤의 후원을 기대하며 프라하로 출발했다.당시 튀코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수학자가 되어 있었다.

[튀코 브라헤와 첫 만남]

프라하에서 50km 떨어진 베나트키나트이제로우에서 튀코 브라헤와 그의 조수들을 만났다.튀코는 자신의 자료를 극비에 부쳤으나 케플러의 이론 지식에 감명받아 자료 입수를 허락했다.

[그라츠에서 추방당함]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거부하여 그라츠에서 가족과 함께 추방당했다.몇 달 뒤 돌아와 나머지 식구들을 데리고 프라하로 떠났고, 이 사건은 그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가중시켰다.

1601

[튀코 브라헤의 조수로 활동]

튀코 브라헤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으며 그의 화성 관측 결과를 분석하고, 경쟁자 우르소에게 불리한 논문을 쓰는 일을 했다.튀코는 케플러를 새로운 프로젝트인 《루돌프 표》의 공동 작업자로 임명했다.

[튀코 브라헤 사망 및 제국 수학자 임명]

튀코 브라헤가 과음으로 인한 방광염으로 사망했다.튀코는 죽기 직전 케플러에게 자신의 연구를 완성해달라고 유언했고, 이틀 뒤 케플러는 튀코의 후임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수학자로 임명되었다.튀코의 유족들과 저작권 협상을 해야 했다.

1603

[광학 이론 연구 집중]

월식과 일식의 예상치 못한 현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광학 이론 연구에 할애했다.이 연구는 그의 저서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로 이어졌다.

1604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 출판]

빛의 역제곱 법칙, 거울 반사, 바늘구멍 사진기 원리, 시차 등을 설명한 《비텔로를 보완한 천문학의 광학적 측면에 대한 해설》을 황제에게 헌정하고 출판했다.이 책에서 인간 눈의 망막에 이미지가 상하좌우 반전되어 투영됨을 인지한 최초의 신경과학자로 평가받으며 현대 광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케플러 초신성(SN 1604) 관측]

새로운 밝은 항성(SN 1604)이 나타나자 직접 확인 후 체계적으로 관측하기 시작했다.이 초신성은 1년 이상 관측되었으며, 하늘이 영원불변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이 내용은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 있는 신성》에 기술되었다.

1605

[행성운동 제1법칙 발견]

튀코의 화성 관측 자료를 분석하며 수십 차례 실패한 끝에, 행성이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그리며 공전한다는 제1법칙(타원 궤도 법칙)을 발견했다.이 발견은 《신천문학》에 실렸다.

1609

[《신천문학》 출판]

행성운동의 두 가지 법칙(제1법칙: 타원 궤도 법칙, 제2법칙: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포함한 《신천문학》을 출판했다.이 책은 튀코의 화성 관측 자료에 기반한 분석적 검토의 결과물이다.

1610

[갈릴레오의 목성 위성 발견 지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목성의 4개 위성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갈릴레오의 자문 요청에 《별의 메신저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관측을 보증하며 우주론, 점성술, 천문학, 광학 분야로 발견의 의미를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굴절광학》 출판]

갈릴레오의 망원경 발견 소식을 듣고 광학 망원경 연구를 시작하여 《굴절광학》 원고를 완성하고 1611년에 출판했다.이 책에서 렌즈의 이론적 근거, 갈릴레오식 망원경의 원리 등을 설명했으며, 볼록 렌즈 두 장을 사용한 케플러식 망원경을 구상하여 오늘날 굴절식 천체 망원경의 모태를 마련했다.

1611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 집필]

친구 마태우스 바커 폰 바켄펠스 남작을 위해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라는 소논문을 집필했다.이 논문에서 눈송이의 육방정계 구조를 연구하고 구를 가장 촘촘하게 쌓는 방법(육방 밀집 쌓기)을 기술했는데, 이는 후에 수백 년간 수학적 난제로 남은 '케플러의 추측'으로 알려졌다.이는 결정체 및 식물 형태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설명 시도였다.

[가족의 비극]

아내 바바라가 홍반열에 걸려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회복될 무렵 세 자녀가 천연두에 걸려 6세 아들 프리드리히가 사망했다.이 비극은 케플러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1612

[아내 바바라 사망]

정치적 대변동과 종교적 불안, 가정의 비극(아내의 유산에 대한 법적 분쟁) 속에서 아내 바바라가 병이 재발하여 케플러가 돌아온 직후 사망했다.

[린츠 이주]

루돌프 황제가 사망한 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마티아스에게 궁정 수학자 지위를 재보장받고 린츠로 옮겨가 살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린츠에서 그는 지역 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고 점성술 및 천문학 용역을 제공했다.

1613

[《진실한 1년에 대해》 출판]

예수 탄생에 대한 보충 논문인 《진실한 1년에 대해,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의 성모 마리아의 자궁에서 나온 인간으로서의 성격》을 출판했다.또한 그레고리력 개정 심의에도 참여했다.

[수잔나 로이팅어와 재혼]

43세에 25세의 수잔나 로이팅어와 재혼했다.연애에 서툴렀던 케플러는 신부 후보들을 번호로 평가하는 등 독특한 청혼 과정을 거쳐 린츠 시민들의 가십거리가 되기도 했다.그녀는 겸허한 성실과 살림 솜씨로 그를 감동시켰다.

1615

[《포도주통의 신계량법》 출판]

다뉴브강을 따라 여행하던 중 다양한 형태의 포도주통 부피를 측정하는 수학 논문 《포도주통의 신계량법》을 집필했다.이 책은 얇은 판을 무한히 겹쳐 부피를 계산하는 방법과 유사한, 17세기 적분학의 기초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머니 카탈리나의 마녀 재판 시작]

케플러의 동생과 금전적 분쟁이 있던 우르술라 라인볼트가 케플러의 어머니 카탈리나가 사악한 술수로 자신을 병들게 했다고 주장하며 마녀 재판이 시작되었다.카탈리나의 과거 행동과 케플러의 소설 《꿈》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 집필 시작]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의 첫 세 권을 완성했다.이 책은 케플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업 중 하나로, 행성운동의 세 법칙을 모두 담고 있으며 천체운동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1617

[루터교와 결별]

린츠에서 루터교회의 엄격한 신앙고백 서명을 거부하여 교단에서 쫓겨났다.케플러는 "진리는 하나인데 세 종파로 찢겨 서로 비참하게 싸우는 게 가슴 아플 따름이다"라고 주장하며 이단자로 고소당했고, 결국 자신의 신학적 신념 때문에 루터교와 완전히 결별했다.

1618

[30년 전쟁의 시작]

체코 프라하에서 개신교도 대의원들이 황궁 창밖으로 가톨릭 집정관 두 명을 집어 던지는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 발생하며 유럽 최초의 세계대전인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이는 케플러의 남은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19

[《세계의 조화》 출판 및 제3법칙 발견]

어머니의 마녀 재판 중에도 연구를 지속하여 《세계의 조화》를 출판했다.이 책에서 자연계, 특히 천문학적 조화를 음악적 관점으로 설명하려 시도했고,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행성운동 제3법칙('조화의 법칙')을 명료하게 표현했다.

[이단으로 지목됨]

튀빙겐 신학 교수 마티아스 하펜레퍼에게 보낸 편지로 인해, "오류투성이 허상을 버리고 겸손한 믿음으로 신성한 진리를 받아들여라"는 공식 평결을 받고 루터교로부터 이단으로 지목당했다.

1620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 4권 출판]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의 4권이 출판되었다.이 책은 케플러의 행성운동의 세 법칙을 모두 포함하며, 천체운동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어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업 중 하나가 되었다.

[어머니 카탈리나 체포 및 투옥]

라인볼트 일가의 고소로 케플러의 어머니 카탈리나가 체포되고 심문 및 고문 명령이 내려졌다.카탈리나는 한밤중에 빨래 통에 처박혀 끌려갔고, 14개월 동안 투옥되었다.케플러는 어머니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직접 재판에 개입했다.

1621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 완간 및 《우주구조의 신비》 제2판 출판]

1615년부터 집필해온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개요》의 5~7권이 출판되며 완간되었다.또한 초판 출간 25년 만에 주석을 달아 확장된 《우주구조의 신비》 제2판을 출판했다.

[오랜 벗 예세니우스 사형]

페르디난트 2세 황제에 의해 프라하에서 케플러의 오랜 벗 예세니우스를 포함한 27명의 개신교도들이 사형당했다.예세니우스는 혀를 잘린 다음 사지가 찢겨 죽는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이는 30년 전쟁의 격화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어머니 카탈리나 석방]

고문의 위협 속에서도 혐의를 부인하며 결백을 주장한 어머니 카탈리나가 무죄를 입증받고 석방되었다.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6개월 후 사망했다.

1623

[《루돌프 표》 완성]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행성의 운동을 예측한 천문표인 《루돌프 표》를 마침내 완성했다.이 표는 케플러 자신의 주저로 여겨졌으나, 황제의 출판 요구와 튀코 브라헤 유족과의 합의 문제로 1627년까지 인쇄되지 못했다.

1626

[울름으로 이주]

30년 전쟁으로 인한 종교적 긴장과 가톨릭 개혁자들의 박해로 장서가 봉인당하고 린츠 시가 공격당하자, 《루돌프 표》 인쇄물을 편집하던 울름으로 옮겨갔다.

1627

[《루돌프 표》 출판]

튀코 브라헤의 유족들과의 저작권 분쟁 및 황제의 출판 요구로 지연되던 《루돌프 표》가 마침내 인쇄되어 출판되었다.이 천문표는 당시 가장 정확하고 중요한 천문학 자료로 평가받았다.

1628

[발렌슈타인 공작의 후원 받음]

30년 전쟁으로 모든 후원자를 잃고 루터교와 가톨릭 양쪽에서 박해받던 중, 어떤 종파든 용인하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공작의 땅으로 가서 그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발렌슈타인은 학문과 과학을 아끼는 교양인으로 선전하기 위해 케플러를 휘하에 두려 했다.

1630

[《꿈》 개정판 작업 시작]

사후 출판될 소설 《꿈》의 개정판 작업을 시작했다.이 소설은 환상적인 달나라 여행을 그린 세계 최초의 과학 소설로 평가되지만, 어머니의 마녀 재판에 영향을 미쳐 후일 과학적 정보와 비유를 설명하는 223개의 주석을 달아 본문보다 길어졌다.

[딸 수산나 결혼]

스트라스부르 친구 마티아스 베르게너의 중매로 딸 수산나가 야콥 바르타쉬와 결혼했다.바르타쉬는 《루돌프 표》를 기초로 천문력을 출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마지막 여행 시작]

체불된 임금을 독촉하고 재고 도서를 처리하며 정치적 세태를 지켜보기 위해 린츠,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등을 거쳐 레겐스부르크로 향하는 마지막 여행을 시작했다.

[요하네스 케플러 사망]

린츠와 라이프치히를 거쳐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한 뒤 차가운 가을 바람을 맞아 병을 얻어 사망했다.죽기 직전 개신교와 가톨릭을 화해시키려 최선을 다했다는 뜻을 밝혔다.그의 죽음과 함께 하늘에 유성이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1631

1631.11.7 사후 1년

[수성 일면통과 예측 확증]

케플러가 예측했던 수성 일면통과가 피에르 가상디에 의해 관측되었다.케플러는 관측자들에게 계산된 날짜보다 앞선 시점부터 관측에 임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이 조치는 수성 일면통과의 실제 관측으로 이어지며 역사상 최초의 관측 기록을 남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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