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전쟁
내전, 전쟁, 노예제 폐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8:23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에서 벌어진 내전입니다. 노예제 존폐와 주권 문제를 둘러싼 북부 연방과 남부 연합의 충돌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과 북부의 승리로 노예제가 폐지되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잔혹한 산업형 전쟁으로 기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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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
18세기부터 시작된 미국 노예폐지 운동의 일환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첫 반노예제 모임이 만들어지며 노예제 폐지 운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는 북부와 남부의 갈등을 예고하는 중요한 움직임이었다.
1780
펜실베이니아주 의회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노예해방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4개의 북부 주들도 이 움직임에 동참하며 북부와 남부 간 노예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787
[북서부 조례 노예제 폐지]
북서부 영토(현재 오하이오주 및 주변)가 북서부 조례를 통해 노예제도를 폐지하며 자유주 확산의 중요한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북서부 영토(지금의 오하이오주 및 그 주변)에서도 북서부 조례를 통해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이는 노예제를 폐지한 북부와 노예제를 여전히 법으로 인정하는 남부의 두 지역으로 미국이 나뉘게 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헌법제정의회 노예제 논쟁]
헌법제정의회에서 헌법 35조 및 아프리카 노예 수입 20년 연장 논쟁이 벌어지며 노예제 문제가 초기부터 주요 지역 간 분쟁의 핵심이었다.
헌법제정의회에서 헌법 35조와 아프리카 노예 수입을 20년간 연장하는 데 대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이 시기 거의 모든 지역 간 분쟁에는 노예제가 관련되어 있었다.
1793
[조면기 발명으로 노예 수요 폭증]
엘리 휘트니가 조면기를 발명하여 솜 가공량이 폭발적으로 증가, 남부의 노예 수요를 급증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엘리 휘트니가 발명한 조면기(cotton gin)는 하루에 가공될 수 있는 솜의 양을 50배로 늘렸다. 이러한 생산 방식의 변화는 남부에서 노예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노예제 존속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820
[미주리 타협 체결]
노예주인 미주리주의 연방 편입 논쟁 끝에 미주리 타협이 이루어져, 노예제 허용 지역을 둘러싼 지역 간 긴장을 일시적으로 완화했다.
노예주인 미주리주를 연방에 편입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쟁 끝에 미주리 타협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는 새로 편입될 주에서의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을 마련했으나, 근본적인 갈등은 해소하지 못했다.
1835
하원의 함구율(gag rule)은 1835년부터 1844년 간 노예제를 폐지하는데 대한 청원을 하원에서 논의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는 노예제 관련 논의를 회피하려는 남부의 노력을 보여주는 조치였다.
1845
[텍사스 합병과 멕시코 전쟁 발발]
텍사스가 노예주로 합병되면서 멕시코 전쟁이 촉발되었고, 새로운 영토에서의 노예제 시행 여부가 주요 갈등 요인으로 부상했다.
텍사스를 다른 영토와 함께 노예주로 합병한 것은 멕시코 전쟁(1846-1848)을 촉발시켰고, 새 영토에서의 노예제 시행에 대한 갈등은 1850년 타협으로 잠시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명백한 운명'론은 노예제를 확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영토를 연방에 포함시키는데 대한 근거가 되었다.
1850
[1850년 타협으로 노예제 갈등 진정]
멕시코 전쟁 이후 새 영토에서의 노예제 갈등을 1850년 타협으로 잠시 진정시켰으나, 북부의 노예제 철폐 노력인 윌모트 조항이 북부 정치인들의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멕시코로부터 정복한 영토에서의 노예제 시행에 대한 갈등은 1850년 타협으로 잠시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특히 윌모트 조항은 북부 정치가들이 멕시코로부터 정복한 영토에서 노예제를 철폐하기 위한 노력에 따른 것이었다.
1852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 출간]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큰 인기를 끌며 북부에서 도망노예법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헤리엇 비처 스토가 쓴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이 인기를 끌면서 북부에서는 1850년 타협의 결과물인 도망노예법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이 소설은 북부인들에게 노예제의 비인간성을 알리고 노예제 반대 여론을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54
[쿠바 노예주 합병 시도 실패]
오스텐드 성명을 통해 남부가 쿠바를 노예주로 합병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 노예제 확장을 위한 남부의 노력을 보여줬다.
오스텐드 성명(Ostend manifesto, 1854)을 통해 남부는 쿠바를 노예주로 합병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는 노예제를 확장하려는 남부의 정치적 시도 중 하나였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 제정]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제정되어 미주리 타협을 무력화하고 노예제 폐지 여부를 국민주권 투표로 결정하게 했으며, 이는 제2기 정당 구조를 붕괴시켰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1854)에서는 미주리 타협이 노예제를 금지한 지역에 대한 노예제 폐지 여부를 국민주권에 따라 투표로 결정하도록 했고, 이 법이 통과된 뒤 제2기 정당 구조는 무너졌다. 이는 남북 간 노예제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1857
[드레드 스콧 판결로 노예제 합법화 주장 강화]
대법원의 '드레드 스콧 판결'이 노예는 백인과 동등한 권한을 가질 수 없으며, 미주리 타협 또한 위헌이라고 선언하며 북부의 노예제 반대 노력을 크게 좌절시켰다.
1857년 대법원의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은 노예들은 백인들이 가진 권한을 동일하게 가질 수 없다고 판결했으며, 북위 36˚ 30' 위에 위치한 북부의 영토 내에서 노예제도를 금지한 미주리 타협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남부의 노예제 옹호 입장을 강화하고 북부와의 갈등을 최고조로 이끌었다.
1858
[링컨-더글라스 논쟁과 민주당 분열]
링컨-더글라스 논쟁 중 스티븐 더글라스가 '프리포트 주의'를 주장하여 드레드 스콧 판결과 국민주권 개념에 구애받지 않고 노예제 폐지 가능성을 열었으며, 이는 민주당 분열의 계기가 되었다.
링컨-더글라스 논쟁 중 북부 민주당의 지도자였던 스티븐 더글라스는 드레드 스콧 판결이나 국민주권의 개념에 구애받지 않고도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다는 '프리포트 주의'를 주장해 민주당을 남부와 북부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59
[존 브라운의 하퍼 페리 습격 및 사형]
북부 노예폐지주의자 존 브라운이 하퍼 페리 무기고를 습격하여 노예 반란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사형당했다. 이는 남부의 노예 반란 공포를 증폭시켰다.
북부 노예폐지주의자인 존 브라운은 하퍼 페리 무기고를 습격해 노예 반란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남부 백인들 사이에 노예 반란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키고, 북부 노예폐지론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키웠다. 그는 사형되었다.
1860
[남부 민주당의 노예제 법적 인정 요구]
남부 민주당이 새로 합병되는 준주에 노예제 법적 인정을 요구하며 남북 지역 간 갈등 구조가 완성되었다.
남부 민주당은 새로 합병되는 준주에 노예제를 법으로 인정하자고 요구함으로써 남부와 북부로 나뉘는 지역 간 갈등 구조를 완성시켰다. 이로 인해 민주당은 북부와 남부로 분열되었고, 링컨의 당선과 연방 분리라는 결과를 낳았다.
[링컨 대통령 당선]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노예제 확대 반대를 주장하는 공화당의 승리를 의미했으며, 이는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자, 남부 주들은 노예제 확장을 중단하고 폐지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 연방 탈퇴를 시작했다. 이 당선은 코윈 수정안과 크리텐던 타협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협이 실패하게 만들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연방 탈퇴 선언]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 선언'을 채택하며 노예주에 대한 권리 침해를 비난하고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다른 어떤 연방 주보다 무효화와 탈퇴에 적극적이었으며, 《연방 탈퇴의 원인과 정당성에 대한 즉각적인 원인의 선언》을 채택했다. 이는 '남부에서의 노예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북부의 도망노예법 불이행을 비난하며 연방 탈퇴를 공식화한 것이다.
1861
[남부 연합 결성 및 임시헌법 채택]
6개 남부 주가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했고, 7개 주가 남부 연합의 임시헌법을 채택하고 몽고메리를 임시 수도로 삼았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외 6개 남부 주들이 미합중국 탈퇴를 선언했으며, 같은 해 2월 7일에는 이들 7개 주가 미국 남부 연합의 임시헌법을 채택하고 앨라배마주의 몽고메리를 임시 수도로 삼았다. 이는 연방 탈퇴를 공식화하고 새로운 독립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링컨 대통령 취임]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하며, 연방의 영구성과 노예제 확장 중단을 강조했다. 남부 공격 의사는 없었으나 연방 재산 보호를 천명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 연설에서 헌법은 이전 연방 법령보다 더 완벽하고 영구적인 연합이며, 모든 부분은 "법적으로 자유롭다"고 밝혔다. 그는 남부를 공격할 의도도, 기존 노예제를 끝낼 의도도 없지만, 연방정부 재산을 지키기 위해 힘쓰겠다고 선언하며 연합 재결속을 호소했다.
[남북 전쟁 발발: 섬터 요새 포격]
남부 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며 남북 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4시 30분, 남부 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 지휘 아래 보우리가드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섬터 요새를 포격하며 항복을 강요했다. 이 사건은 링컨 대통령이 각 주에 의용군을 요청하게 만들었고, 이는 4개 남부 노예주의 추가 분리 독립과 남북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링컨, 남부 항구 봉쇄 작전 시행]
링컨은 남부 모든 항구에 북부군 봉쇄 작전을 실행하여 남부 경제를 약화시키고 국제 무역을 차단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부 모든 항구에 북부군의 봉쇄작전을 실행했다. 이 작전으로 인해 남부군으로 운송되던 정기적인 국제 운송물은 차단되었으며, 침입자들의 배와 화물들은 압수되었다. 1861년 말까지 이 봉쇄는 대부분의 항구 운항을 정지시키고 남부 경제의 핵심인 면화 수출을 막아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웨스트버지니아, 버지니아에서 분리 및 북부군 합류]
버지니아주 북서부 지방이 버지니아에서 분리 독립하여 새로운 주인 웨스트버지니아로 북부 군에 합류했다.
버지니아주 북서부 지방은 버지니아에서 분리 독립하여 새로운 주인 웨스트버지니아로 북부 군에 합류했다. 이는 북부 연방주의자들이 주도한 결과이며, 이로 인해 남부 연합의 국기도 주가 더 늘었다는 이유로 변경되었다.
[크리텐든-존슨 결의안 가결]
미국 의회가 크리텐든-존슨 결의안을 가결하여 전쟁의 목적이 노예제도의 종식이 아닌 주연합의 보존임을 정의했다.
전쟁으로 인한 큰 손실에 놀라, 노예 유출의 심각성을 느꼈으며, 노예주의 북부 연방 탈퇴를 막기 위해, 미국 의회는 크리텐든-존슨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이 결의안은 전쟁의 목적이 노예제도의 종식이 아닌 주연합의 보존임을 정의했다.
1862
[모니터호와 버지니아호의 철갑선 전투]
북해군의 철갑선 버지니아호가 봉쇄로를 공격하자, 북부군의 새로운 군함 모니터호와 철갑선끼리의 전투가 벌어졌으나 무승부로 끝났다.
북해군은 철갑의 《버지니아호》가 봉쇄로를 공격했을 때 남해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다음날, 버지니아호는 북부군의 새로운 군함인 《모니터호》와 철갑선끼리의 전투를 치러야했다. 그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봉쇄가 견고했다는 점에서 북부군에게 전략적 승리나 다름없었다.
북군 해군은 큰 전투를 벌이지 않고 뉴올리언즈를 장악했고 이로 인해 북군은 미시시피강에 상륙했다. 북군은 미시시피 강 전체의 통제권을 확보했으나 미시시피주의 요새 도시 빅스버그만은 예외였다.
[앤티텀 전투 발생]
리 장군이 이끄는 남부군이 처음으로 북쪽을 침입하여 앤티텀 전투를 치렀으나, 북군에 의해 저지되어 버지니아로 퇴각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하루 최다 사상자를 기록한 전투였다.
제2차 불런 전투로 자신감을 얻은 남부군은 최초로 북쪽을 침입했다. 리 장군은 자신의 북버지니아 군 45,000명을 이끌고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주로 이동했다. 링컨은 포프의 병력을 맥클렐런에게 돌려주었고 리와 맥클렐런은 샾스버그 근처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하루 사상자를 낳았던 안티에탐 전투를 치른다. 리의 군대는 여기서 마침내 저지되었고 맥클렐런이 쫓아오기 전에 버지니아로 돌아간다.
[예비 노예 해방령 발표]
앤티텀 전투 승리 후, 링컨 대통령이 예비적인 노예 해방령을 발표하여 노예 해방을 전쟁의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설정했다.
앤티텀 전투에서 이 기회가 만들어졌고 뒤이은 참모회의에서 링컨의 해방령에 대한 지지율이 더 높아졌다. 링컨은 이전에 특히 주경지방에게 연방을 구하려면 해방령을 인정해야 한다고 촉진하는 편지를 출판했다. 링컨은 예비적인 노예 해방령을 발표했다.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에서 북군 패배]
번사이드 소장이 지휘하는 북군이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에서 패배하여 마리의 고지에 비효율적인 정면 반복 공격으로 12,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조심스런 맥클렐런이 안티에탐 전투 뒤의 후속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하자, 암브로스 번사이드 소장이 그를 교체하게 된다. 번사이드는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에서 패배한다. 이 전투에서 북군은 마리의 고지에 비효율적인 정면 반복 공격을 감행하여 12,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기록했다.
1863
[링컨, 최종 노예 해방 선언]
링컨 대통령이 최종적인 노예 해방령을 발표하여 남부 연합에 속한 주들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이는 전쟁의 도덕적 대의를 강화하고 영국의 개입을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링컨은 최종적인 해방령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남부군 소속 지역의 노예들을 해방시킬 것을 선포했고, 이는 남부의 모든 노예들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었다. 또한, 영국의 간섭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북군 패배]
후커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이 남군보다 두 배가 넘는 병력을 보유했음에도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리의 군대에 패배했다.
번사이드 전투 후 조지프 후커 소장으로 교체되었으나 후커 장군 또한 리의 군대를 이길 수 없었다.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남군보다 두 배가 넘는 병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커 장군은 이 전투에서 망신을 당한다.
[웨스트버지니아, 북부 연합에 주로 합류]
버지니아에서 분리된 웨스트버지니아가 북부 연합의 새로운 주로 공식적으로 명명되며 연합에 합류했다.
버지니아주 북서부 지방은 버지니아에서 분리 독립하여 새로운 주인 웨스트버지니아로 북부 군에 합류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정부를 카나와로 부르자고 했지만 1863년 6월 20일에 조합에서 웨스트버지니아로 명명하기로 결정했다. 그 해 말에는 제퍼슨과 버켈리 주도 새로운 주로 합병되었다.
[게티스버그 전투, 남북 전쟁 전환점]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미드 장군이 리 장군에게 승리하며 남북 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받았고, 남군의 북진 계획을 좌절시켰다.
7월 1일부터 3일까지 벌어진 남북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낳은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미드 장군은 리 장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종종 남북 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되며, 7월 3일에 감행된 《피켓의 돌격》은 남군의 절정이라고도 불린다. 이 돌격으로 북쪽에서 워싱턴을 압박하려 했던 리 장군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빅스버그 함락, 미시시피강 통제권 확보]
게티스버그 전투 승리 다음 날, 미시시피주의 빅스버그 요새가 북군에게 함락되면서 북군이 미시시피강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 남부 연합을 지리적으로 양분하는 데 성공했다.
게티스버그 전투 다음 날, 미시시피강에 대한 지배권에 핵심적인 미시시피주 빅스버그가 북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로써 북군은 미시시피강 유역을 장악했고, 남부 연합을 지리적으로 두 개로 나눠버렸다.
1864
[그랜트 장군, 북부연방군 총사령관 취임]
링컨 대통령은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을 모든 북부연방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총력전을 통해 남부의 군사력과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파괴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을 모든 북부연방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랜트 장군은 포토맥 군대를 본대로 정하고 윌리엄 테쿰세 셔먼 소장에게 대부분의 서부 군대의 지휘권을 주었다. 그랜트 장군은 링컨, 셔먼과 함께 남부 동맹의 군사력과 경제적 바탕의 총체적인 패배만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총공세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셔먼 장군, 애틀랜타 점령]
셔먼 장군이 조지아주의 애틀랜타를 함락시키며 링컨 대통령 재선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 이는 남부의 전쟁 의지를 꺾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셔먼은 존스턴과 존 벨 후드와 함께 남부맹방의 조셉 장군을 이기면서 채터누가부터 애틀랜타까지 행진하였다. 애틀랜타의 함락은 링컨 대통령 재선의 매우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셔먼의 바다로의 행군]
애틀랜타를 떠난 셔먼의 군대가 '바다로의 행군'을 통해 조지아주 농장 약 20%를 초토화시키고 사바나에 도착, 남부의 생산 기반을 파괴했다.
애틀랜타와 공급품 기지를 떠난 셔먼의 군대는 목적지를 알리지 않은 채 행군하여, 조지아주 농장 약 20%를 초토화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바다로의 행군(March to the Sea)’이다. 셔먼은 조지아주의 대서양과 인접한 사바나에 도착했다.
1865
[북군, 피셔 요새 전투 승리]
북군이 제2차 피셔 요새 전투에서 승리하며 마지막으로 유용한 남부 항구를 폐쇄, 봉쇄 작전의 완벽한 성공을 알렸다.
북부군이 《제2차 피셔 요새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 승리가 마지막으로 유용한 남부 항구를 닫게 하자 사실상 봉쇄의 운영은 끝이 났다.
[파이브 포크스 전투 승리]
공화당이 파이브 포크스 전투에서 리의 군대를 피츠버그와 리치먼드에서 내몰며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
공화당은 《파이브 포크스 전투》에서 리의 군대를 피츠버그와 리치먼드에서 내몰며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 연방 수도는 흑인 군대로 구성된 유니언25 부대 손아귀로 떨어졌다.
[로버트 E. 리 장군 항복]
남부 연합군을 이끌던 로버트 E. 리 장군이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에서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며 남북 전쟁이 사실상 끝났다.
북버지니아 군대를 이끈 리 장군은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 마을의 맥린 하우스에서 항복했다. 이 항복은 남북 전쟁의 사실상 종결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링컨 대통령 저격당함]
남부 동정론자인 존 윌크스 부스에 의해 링컨 대통령이 저격당했고, 다음날 사망하며 재건 시대의 혼란을 예고했다.
리 장군 항복 5일 후, 링컨 대통령은 남부 동정론자인 존 윌크스 부스에게 저격을 당했다. 링컨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사망했으며, 앤드류 존슨이 대통령직을 맡았다.
[조셉 존스턴 부대 항복]
조셉 존스턴의 부대가 노스캐롤라이나 더럼의 베넷플레이스에서 셔먼 장군에게 패하며 남부군의 마지막 주요 저항이 무너졌다.
존 모스비의 43부대의 급습으로 버지니아의 기병들은 전멸되었고, 조셉 존스톤의 부대는 노스캐롤라이나의 더럼에 있는 베넷플레이스에서 셔먼 장군에게 패하였다. 앨라배마, 미시시피 연방정부, 동부 루이지애나 연합, 그리고 걸프 지역은 5월 4일, 5일에 항복하였다.
남부연합 대통령은 체포되었고 같은 날 남부 조지아, 플로리다 정부가 항복하였다. 연방 육군 장군인 제프의 부대는 그 다음 날 항복하였고, 그를 잇달아 북부 조지아 연합도 항복하였다.
[스탠드 와티, 휴전 조약 체결]
오클라호마 포트 토슨에서 스탠드 와티가 북연합 대표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며 남부 연합 장군으로서의 역할을 끝냈다.
오클라호마의 촉토족 영역인 포트 토슨에서 스탠드 와티는 북연합 대표와 휴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남부연합 장군으로서의 역할을 끝냈다.
[남북 전쟁 공식 종료]
북부연방 정부에 항복을 반대했던 남부 연합 조직 CSS의 사령관이 영국 리버풀에서 최종 항복하며 남북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났다.
마지막으로 항복한 남부연합 조직 CSS의 본부는 8월 2일까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북부연방 정부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던 조직의 사령관은 나라를 위해 음모를 꾀했으나 결국 영국 리버풀에서 항복을 하였고 이 항복은 남북 전쟁의 결과로 기록되었다.
[제13차 수정 헌법 비준, 노예제 완전 폐지]
미국 연방 제13차 수정 헌법이 비준되면서 노예제도가 미국 모든 곳에서 불법이 되었고, 남아있던 모든 노예들이 해방되었다.
승인된 미국 연방 《제13차 수정헌법》은 마침내 노예제도가 미국의 모든 곳에서 불법이 되도록 만들었고, 이에 따라 남아있는 노예들도 해방됐다. 약 400만 명의 흑인 노예가 1861년부터 1865년 사이에 해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