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
종교 지도자, 독립운동가, 사상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7:40
손병희는 격동하는 구한말, 일제강점기 시대에 동학과 천도교를 이끌며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종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평등을 강조하는 동학의 교리에 매료되어 입도한 그는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으며, 동학의 3대 교주로서 종교를 천도교로 개칭하며 근대화와 인재 양성에 힘썼다. 특히 1919년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 낭독 후 투옥되는 등 고난 속에서도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손병희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861
[손병희, 충청도 청주목에서 출생]
충청도 청주목에서 세금 징수 담당 향리의 서자로 태어나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을 키웠다.
1861년 4월 8일, 충청도 청주목(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향리였던 아버지 손두흥의 첩실 최씨의 소생인 서자로 태어났다.
1882
[동학에 입도하며 새 세상에 눈뜨다]
배다른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하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교리에 매료되었다.
1882년, 배다른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다. 이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교리 때문이었다.
1885
[최시형의 수제자가 되어 동학의 핵심 인물로 성장]
동학 입도 3년 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최시형은 그의 정성스러운 모습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동학 입도 3년 뒤인 1885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최시형 선생은 일부러 손병희에게 어려운 문제를 풀게 했는데, 정성껏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한다.
1894
[동학농민운동 북접 지도자로 활약]
동학농민운동 당시 북접 소속으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다. 운동 실패 후 동학 재건과 포교에 힘썼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북접 소속으로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으며, 관군과 일본군의 폭력으로 수많은 신도들이 순도(殉道)를 했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원산 및 관서지방으로 피신한 그는 동학농민혁명 실패로 무너진 동학의 재건과 포교 활동에 큰 공을 세웠다.
1897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 제3대 교주가 되다]
동학 재건과 포교 활동에 큰 공을 세워, 정신적 스승인 최시형 선생의 뒤를 이어 동학 제3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실패로 무너진 동학의 재건과 포교 활동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1897년 4월 11일 (음력 3월 10일) 정신적 스승이었던 최시형 선생의 뒤를 이은 제3대 교주가 되었다.
1898
한편 관에 자수한 최시형은 이듬해 혹세무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함으로써 순도한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운동의 지도자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1900
[동학 탄압으로 조카 손천민 희생되다]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자신에게 동학을 포교했던 조카 손천민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러던 와중에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먼저 동학에 입교하여, 자신에게 포교했던 조카 손천민이 1900년 8월 29일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1901
[동학 탄압 피해 일본으로 망명]
탄압을 피해 안경 장수로 변장하여 중국에 피신했으나, 조선 정부의 압력으로 중국에 머물 수 없게 되자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탄압을 피해 손병희 선생은 안경장수로 변장하여 중국에 피신했으나 '손병희의 망명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조선정부의 압력으로 중국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2
일본 망명 중 <삼전론(三戰論)>을 저술했다. 이외에도 신문 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했다.
1903
[인재 양성에 힘쓰고 <명리전> 저술]
인재 양성이 시급함을 깨닫고 24명의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시켰으며, <명리전(明理傳)>을 저술했다.
상하이와 메이지 유신 이후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던 도쿄 등을 돌아보면서 인재 양성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903년부터 24명의 똑똑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시키게 된다. 또한 <명리전(明理傳)>을 저술했다.
1904
[갑진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진보회 조직]
일본 망명 중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켜 권동진, 오세창과 더불어 진보회를 조직했다. 이는 개화 운동 확산을 위한 단체였다.
망명 중 신문 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하다가 1904년에는 갑진개혁운동을 일으켜, 권동진, 오세창과 더불어 진보회를 조직했다.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개화복을 입을 것을 명하는 등 개화 운동의 확산을 위한 단체였다.
1905
1905년에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1906
[일진회에 출교 처분을 내리며 친일 세력과 단절]
천도교 내부에서 친일 조직인 일진회의 송병준, 이용구와 기타 세력 간의 반목이 심해지자, 일진회 인물들에게 출교 처분을 내리며 이들과 결별했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일진회의 송병준, 이용구와 기타 세력 간의 반목이 심해져서, 손병희는 친일 조직인 일진회 인물들에게 출교 처분을 내림으로써 이들과 결별한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후 1906년 4월 3일 (음력 3월 10일) 일본에서 귀국했다. 동학교도 즉, 천도교 신도라면 무조건 잡아갈 정도로 천도교를 극심히 탄압하던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기력해진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1908
귀국 후에는 교령 자리를 박인호에게 승계했다. 이 시기부터 교육 사업(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단 인수)과 출판사업에 관심을 쏟았다.
1919
[대한국민의회 대통령으로 선출]
대한국민의회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19년 3월 21일까지 활동하며 독립 정신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1일부터 1919년 3월 21일까지 대한국민의회 대통령으로 활동했다.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 3·1 운동 주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하며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체포되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4월 10일부터 1919년 4월 13일까지 조선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활동했다.
1922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 상춘원에서 영면하다]
징역형 선고 후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1922년 5월 19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춘원에서 별세했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1922년 5월 19일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상춘원에서 별세하였다.
1962
[대한민국 정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최고 등급의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