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밴드 멤버, 문화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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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음악가이자 싱어송라이터.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해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음악으로 90년대 대중음악에 혁명을 일으켰다. 음악, 패션,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문화 대통령'으로 불린다. 저작권, 초상권 개념을 확립하고 공연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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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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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출생]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서태지는 1972년 2월 2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구한말시절 군인이었던 증조부 이래로 줄곧 종로구에서 거주하였다.

1986

[밴드 '하늘벽' 결성]

대동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하늘벽’이라는 밴드를 만들었으며, 음악에 심취하여 학업을 등한시하게 되었다.

서태지는 대동중학교(지금은 폐교) 2학년 때인 1986년에 친구들과 ‘하늘벽’이라는 밴드를 만들었으며, 음악에 심취하여, 열정과는 달리 가출을 자주 하며, 중학교 3학년 때는 전체 537명 중 꼴찌를 할 정도로 공부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1988

[서울북공업고등학교 자퇴]

서울북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음악과 학교생활 병행이 맞지 않다고 결심하고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자퇴하였다.

이듬해 1988년 서울북공업고등학교(건축과, 현 학교명: 서울도시과학기술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음악과 학교생활을 병행하는 건 맞지 않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부모님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중퇴를 하였다.

1989

[시나위 합류]

18세 때 밴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에게 스카우트되어 베이시스트로 합류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신대철에게서 스카우트된 서태지는 18세 때인 1989년 시나위에 합류하여 베이시스트로 활약하였다. 당시 시나위의 보컬은 김종서였다.

1990

[시나위 해체]

리더 신대철과의 의견 대립 등으로 시나위가 넷째 음반 활동을 끝으로 잠정 해체되었다.

당시 시나위는 최고의 밴드로 이름이 널리 퍼졌지만, 방송 출연은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일 정도였고, 리더 신대철과의 의견 대립 등으로 말미암아 넷째 음반 Four의 활동을 끝으로 시나위는 잠정 해체되었다. 이후 서태지도 자신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91

[서태지와 아이들 결성]

새로운 음악 활동을 모색하던 중 양현석, 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했다.

시나위의 해체 이후 새로운 음악 활동을 모색하던 서태지는 1991년에 양현석, 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하였다.

1992

[1집 《난 알아요》 발표 및 대성공]

1집 《난 알아요》를 발표하며 MBC '특종! TV 연예'를 통해 화제를 모으고 방송 3사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모두 석권, 170만 장 판매량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 4월 1집 《난 알아요》를 발표하였다. MBC의 《특종! TV 연예》를 통해서 화제를 모은 그들은 방송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들을 모두 석권하였으며, TV 저널 올해의 스타상, 서울가요대상 최고 인기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디스크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과 신인 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 등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고 《난 알아요》는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판매량인 17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뮤직비디오 판권 소송 승소 및 저작권·초상권 확립]

뮤직비디오 판권 소송에서 승소하여 국내 비디오 산업의 저작권 개념 확립에 기여했으며, 불법 영상집과 상품에 대한 초상권 문제에도 철저히 대응했다.

1992년 9월 국내 비디오 산업의 저작권 분쟁인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 소송에서 승소하며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 사건은 전 매니저와의 계약 문제로 두 곳에서 뮤직비디오가 발매되고 불법 제작이 이루어지자, 서태지가 저작권을 들어 고소하여 승리한 사건이다. 또한, 불법 영상집 및 상품에 대한 초상권 침해에도 대응하여 개념 확립에 기여했다.

1993

[2집 《하여가》 국내 최초 200만 장 판매]

2집 《하여가》를 발표하여 국내 최초로 20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고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휩쓸었다.

1993년 6월에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은 첫 활동 곡으로 〈하여가〉를 발표하여 국내 최초로 20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다시 한번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휩쓸었다.

1994

[3집 발표 및 사회적 메시지]

3집을 발표하여 기존 음반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수록하고 '발해를 꿈꾸며'의 성공과 '교실 이데아 소동' 등 크나큰 주목을 받았다.

1994년 8월에 3집을 발표하였다. 3집에는 기존 음반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가 수록되었고 통일을 다룬 〈발해를 꿈꾸며〉의 성공과 교실 이데아 소동 등 크나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1992년 ~ 1995년에는 환경 문제를 주제로 당대 아티스트들이 모인 환경 콘서트인 《내일은 늦으리》에 참가하여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더했다. 일본에도 진출하여 1994년에는 일본판 음반을 발매하였다.

1995

[4집 《컴백홈》 발매]

댄스적인 색채를 없앤 4집을 발매함과 동시에 갱스터 랩 스타일의 타이틀곡 '컴백홈'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3집에서 댄스적인 색채를 없애고 록, 메탈 등을 선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10월 4집을 발매함과 동시에 갱스터 랩 스타일의 〈컴백홈〉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컴백홈〉 방송 출연 당시 립싱크 공연 때에 마이크를 아예 소지하지 않는 등의 파격 행위도 이어졌다.

[한국 최초 '필승' 게릴라 콘서트]

한국 최초의 게릴라 콘서트를 기획하고 진행하여 '필승'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며 인기몰이를 계속하였다.

1995년 12월에 큰 활약을 펼친 후에도 길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펼쳐 〈필승〉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등 인기몰이를 계속하였다.

1996

[그룹 해체 및 잠정 은퇴 발표]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창작의 고통'을 이유로 그룹 해체와 잠정 은퇴를 발표하며 미국으로 떠나 전 사회적인 충격을 안겨주었다.

1996년 1월 19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50》에서 방송된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돌연 중단하였고, 1996년 1월 31일에는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른 창작의 고통, 그리고 화려할 때 미련없이 떠난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연 그룹 해체와 잠정 은퇴를 발표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그리고 잠정 은퇴 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각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다.

1998

[첫 솔로 음반 (5집) 발표]

잠정 은퇴 2년 만에 아무런 제목도 없는 첫 번째 솔로 음반 《Seo Tai Ji》(5집)를 발표하며 '음악가로서 팬들에게 보내는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잠정 은퇴 한지 2년후 1998년 7월 7일 서태지는 갑자기 첫 번째 솔로 음반을 발표했다. 훗날 서태지는 당시를 회고하며 “은퇴를 선언했을 때 음악과 무관한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1년의 휴식 끝에 음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밝혔다. 또한, 첫 솔로 음반을 발표할 당시 “연예인으로는 은퇴한 서태지가 음악가로서 팬들에게 보내는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이 음반은 아무런 제목도 없이 Seo Tai Ji (서태지)라는 이름만 적혀 있었으며, 수록된 6곡의 노래 모두 특정한 제목이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6곡의 노래와 3곡의 간주곡이 담긴 28분짜리 소형 음반으로, 보라색 케이스에 담겨 발매되었다. 팬들은 이 음반을 솔로 1집으로 부르지 않고 ‘5집’으로 부른다.

2000

[대중 앞에 복귀 및 6집 발매]

인터넷 팬사이트를 통해 컴백을 알렸고, 29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며 6집을 발매하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은퇴 선언 후 4년 7개월 만인 2000년 8월 11일에 서태지가 인터넷 팬사이트를 통해 컴백을 알렸고 2000년 8월 29일 김포공항을 통하여 미국에서 귀국하여 통산 서태지 6집을 발매하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날 김포공항은 수천 명의 팬들과 수백 명의 기자들로 마비상태가 되었으며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뉴 메탈을 시도한 음악들은 많은 화제가 되었다. 서태지는 한국 도착 직후 사서함을 개설하여 팬들에게 귀국 인사를 했다.

2001

2001 1해당 사건의 피인용 횟수를 나타냅니다. 29세

['컴백홈' 패러디 음반 무단 승인 사건]

서태지 씨의 대표곡 중 하나인 **'컴백홈(Come Back Home)'**을 가수 이재수 씨 측이 **'컴배콤'**이라는 제목으로 패러디하여 음반과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이재수 측은 음저협에 저작권 사용 승인을 요청했고, 음저협은 원저작권자인 서태지 씨(서태지컴퍼니)와 아무런 협의나 승인 절차 없이 해당 패러디 음반 발매를 허가했다.

서태지 씨는 결국 이재수 측을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서태지 씨의 손을 들어주며 저작인격권 중 동일성 유지권 침해를 인정했다.  

- 2002년 1월 : 서태지 씨는 음저협의 저작권 관리 소홀 등을 이유로 탈퇴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협회 측에서 이를 지연했다.

- 2003년 4월 : 이에 서태지 씨는 신탁행위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에서 이를 인용하면서 음저협은 서태지 씨의 신탁행위 권리를 박탈당했다.

- 2006년 12월 : 서태지 씨는 음저협을 상대로 저작권 사용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협회 탈퇴 인정 시점(2003년 4월 법원 결정 이후 또는 2006년 9월 공식 인정) 이전부터 무단으로 징수한 저작권료를 지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소송이었다.


최종 판결:

- 2013년 5월 : 약 10년에 걸친 긴 법적 다툼 끝에 대법원에서 서태지 씨의 일부 승소가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법원은 음저협이 서태지 씨에게 미지급된 저작권 사용료 일부를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국내 최초 ETPFEST 개최]

한국에서도 대규모 록 페스티벌인 ETPFEST (Eerie Taiji People FESTival: 괴기한 태지 사람들의 축제)를 국내 최초로 개최하였다.

2001년 《서머 소닉》에 참여한 후, 한국에서도 대규모 록페스티벌인 ETPFEST(Eerie Taiji People FESTival: 괴기한 태지 사람들의 축제, 이티피페스트)라는 대규모 록페스티벌을 개최하였다.

2002

[데뷔 10주년 기념 ETPFEST 2002 개최]

서태지의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ETPFEST 2002를 개최하여 역대 히트곡들의 록 편곡 버전을 최초로 공연했다.

2002년 다시 한번 ETPFEST 2002를 개최하며 국내에 들어왔다. 2002 ETPFEST는 서태지의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치뤄졌다. 이 콘서트에서는 지난 1998년 요절한 X JAPAN의 히데가 영상으로 참여하여 화제가 되었으며 서태지는 히데의 유족들에게 생전 히데가 사용하던 기타를 선물받았다. 이 콘서트에는 리쌍, NELL, 디아블로 등이 참여하였고 한 때 서태지와 아이들로 함께 활동했던 양현석이 이끄는 YG Family도 참여하였다. 서태지는 2일차 공연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올라 《난 알아요》, 《시대유감》, 《Come Back Home》 등 역대 히트곡들의 록 편곡 버전을 최초로 공연했다.

2004

[7집 '7th Issue' 발표 및 최다 판매 기록]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7집 음반 '7th Issue'를 발표, '감성코어' 장르를 명명하고 그 해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2004년 1월 사회적인 메시지 등을 담은 7집 음반 'Seotaiji 7th Issue'를 발표하였다. 1월 24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컴백 공연이었던 '2004 Live Wire'에서 그는 콘(KoЯn), 피어 팩토리(Fear Factory) 등 유명 해외 뮤지션과 합동 공연을 벌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서태지 자신은 이 앨범에 담긴 노래의 장르를 ‘감성코어’로 명명했다. 4년의 공백을 불식시키듯 5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며 그 해 최다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미국 영주권 포기]

7집 컴백을 앞두고 미국 영주권 갱신 기간 내 갱신을 하지 않아 영주권이 자동 만료되었다고 밝혔다.

서태지는 은퇴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2000년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였으나, 2004년 1월 7집 컴백을 앞두고 영주권을 포기하였다. 이에 서태지컴퍼니 측은 영주권 갱신 기간 내 갱신을 하지 않아 자동 만료된 것이라며, 그동안 일본에 머문만큼 미국에서 더 이상 영주할 의사가 없어 포기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 접견]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접견하고 7집 앨범을 선물하며 문화 정책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2004년 2월 10일, 서태지는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접견했다. 김 전 대통령은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3집 수록곡 《발해를 꿈꾸며》 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을 계기로 서태지와 인연을 맺었다. 서태지는 이 날 만남에서 자신의 싸인이 들어간 7집 앨범을 선물하였으며 국민의 정부 시절 문화정책과 김 전 대통령이 문화에 대해 가진 관심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김 전 대통령은 7집 컴백스페셜 다큐에도 직집 출연하여 서태지와의 인연과 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콘서트 개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러 수교 120주년 기념 '서태지 라이브 인 블라디보스토크'를 개최하고 러시아 한인이주 기념비를 헌정하였다.

2004년 5월 8일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러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서태지 라이브 인 블라디보스토크’를 개최하였다. 이때 서태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지신허 마을 옛터’라는 러시아 한인이주 기념비를 헌정하였다.

2008

[8집 홍보 '미스터리 서클' 논란]

코엑스 상공 UFO 동영상, 보령 미스터리 서클 등 일련의 사건들이 서태지의 8집 홍보 활동임이 밝혀지며 큰 화제를 모았다.

2008년 7월 초 코엑스 상공에서의 UFO 동영상, 충청남도 보령에서의 미스터리 서클 등의 일련의 사건들이 서태지가 만들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8집에 대한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으며 서태지는 서태지닷컴을 통해 글을 남겨 8집 발매를 앞뒀음을 암시했으며 코엑스에서의 UFO 구조물을 설치하여 더욱더 기대감을 모았다. 또한, 서태지닷컴을 비롯한 문화방송의 〈쇼 음악중심〉에선 매주 서태지의 티저영상을 방송하였다.

[8집 첫 싱글 《ATOMOS PART MOAI》 발매 및 완판 기록]

8집 정규 음반 발매 이전에 싱글 음반 《ATOMOS PART MOAI》를 우선 발매, 발매와 동시에 10만 장이 전부 선예약주문으로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세웠다.

2008년 7월 29일 서태지는 8집 정규 음반 발매 이전에 싱글 음반인 《ATOMOS PART MOAI》를 우선 발매하였다. 발매와 거의 동시에 10만 장이 전부 선예약주문으로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세워 추가로 5만 장을 추가 제작하였다고 밝혔다.

[서태지 심포니 공연]

톨가 가쉬프와 함께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더 그레이트 2008 서태지 심포니〉 공연을 펼쳤다.

9월 27일에는 톨가 가쉬프와 함께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더 그레이트 2008 서태지 심포니〉 공연을 했다.

2009

['Missing Taiji' 실종 컨셉 마케팅]

둘째 싱글 'ATOMOS PART SECRET' 발매를 앞두고 ‘Missing Taiji’라는 실종 컨셉 마케팅을 진행, 실종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9년 2월 22일 ‘Missing Taiji’라는 실종 컨셉으로 여러 마케팅을 진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실종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3월 10일 서태지는 둘째 싱글인 《ATOMOS PART SECRET》을 발매하였다.

2010

['서태지 심포니' 공연 실황 극장 상영]

'서태지 심포니' 공연 실황이 2주간 한정 상영되며 국내 가수 최초 콘서트 영상 유료 상영 기록을 세웠다.

2010년 1월 22일~2월 4일에는 2008년 9월 27일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3만 5천명과 함께했던 서태지 심포니 공연 실황과 공연 후기가 담긴 〈서태지 심포니〉가 2주간 한정상영으로 코엑스 메가박스 서태지 M관에서 개봉되었다. 국내 가수로는 최초의 콘서트 영상 유료상영의 기록을 남겼으며, 영화진흥위원회 공식집계로 2주동안 일일 최다관객수 2,138명, 전체 누적관객수 16,013명으로 국내 단관개봉 영화사상 최고의 관객 동원스코어를 기록하였다.

['The Mobius' 공연 실황 극장 상영, 최고 기록 경신]

'The Mobius Encore' 공연 실황이 극장 상영되어 일일 최다 관객수 3,578명, 누적 31,879명으로 단관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하였다.

2010년 5월 21일~6월 27일에는 2009년 8월 30일에 있었던 The Mobius Encore 공연 실황이 담긴 〈The Mobius〉가 코엑스 메가박스 서태지 M관(5/21~6/13)에서 개봉되었다. 기존 MBC에서 상영했던 〈서태지 심포니〉와는 달리 미공개 컨텐츠였기 때문에 예매율이 높아 메가박스에서 유래없는 풀타임상영(쉬는 시간없이 9회차 내리 상영)을 하는 진기록을 세웠으며, 지방관객들을 위해 부산 서면 메가박스(6/19~6/27)에서 연장상영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영화진흥위원회 공식집계로 일일 최다관객수 3,578명, 전체 누적관객수 31,879명이 관람하여, 종전 서태지심포니(16,013명)가 세운 단관사상 최고 기록을 거의 더블 스코어로 다시한번 갱신하였다.

2011

[이지아와의 혼인 및 이혼 사실 공개]

배우 이지아와의 과거 혼인 및 이혼 소송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세간에 알려지며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2011년 4월 21일 이지아와 서태지의 결혼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세간에 알려졌다. 이지아는 변호사 4명을 선임, 서태지를 상대로 위자료 및 재산분할청구 소송을 벌였다.

2013

[배우 이은성과의 결혼 발표]

2008년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던 배우 이은성과의 16세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결혼을 공식 발표했다.

서태지는 2008년 《BERMUDA(Triangle)》 뮤직비디오의 히로인으로 낙점 된 여배우 이은성과 첫 인연을 맺었다. 서태지는 이전에 김종서가 출연했던 SBS 드라마 《행복합니다》를 통해 이은성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이은성도 서태지에 좋은 감정을 갖게 되면서 두 사람은 16세의 나이차이를 뛰어 넘어 2009년부터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2013년 5월 15일 서태지는 이은성과 결혼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2014

[첫 딸 정담 출산]

이은성과의 사이에서 첫 딸 정담을 얻어 아버지가 되었다.

결혼 1년 3개월여만인 2014년 8월 27일에 첫 딸을 얻었다. 현재 이은성은 연예계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살림과 육아에만 전념하고 있다.

[9집 수록곡 '소격동' 선발매]

9집 '콰이어트 나이트' 수록곡 '소격동'을 선발매하며 컴백 활동을 시작했다.

2014년 10월 2일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에 수록된 곡이자 서태지가 작사·작곡한 노래인 '소격동'을 선발매했다.

[6촌 형제 신해철 사망, 추도문 발표 및 추도사 낭독]

6촌 형제인 음악가 신해철이 사망하자, 공식 사이트에 추도문을 발표하고 발인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하며 애도했다.

2014년 10월 24일 엠넷 《슈퍼스타K 6》 생방송에 출연한 자리에서, 심장 정지로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워있는 신해철의 쾌유를 빌며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신해철은 2014년 10월 27일 사망하였고, 서태지는 이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본인의 공식 사이트에 추도문을 직접 올렸다. 그리고, 같은 달 31일 치러진 발인식 및 영결식에서 서태지는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2024

[SNS 탄핵 관련 글 게시]

SNS에 '2025년을 맞이하는 시기에 또 다른 탄핵이라니 시대유감'이라는 글을 게시했다.

[서태지 글 전문]


제목: 안녕 2024 갑진 크리스마스 ~

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

울 퐐로들 다들 잘 지내고 있었나요?

벌써 한해가 지나고, 12월의 크리스마스가 찾아 왔어요.

올해는 갑진년이 었는데, 다들 값진 꿈 많이 이루었나요?

나도 자잘한 꿈들은 하나씩 이루고 있었던것 같아요.

요즘 7년만의 탄핵정국으로 대한민국이 시끌시끌 한데요

무려 2025년을 맞이하는 시기에 또 다른 탄핵 이라니 시대유감 입니다.

우리 퐐로들도 집회에 많이 참여 한 것 같은데.. 아직도 작동하는 응원봉이 있던가요? ^ ^

이번엔 특히 20대 친구들이 많이 참여했다는데 그 옛날 함께 투쟁하던 우리들 생각도 나고.. 기특하더라고요.

이제는 우리가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그들을 변함없이 지지해 줄수있는 삼촌,이모가 되어주자고요.

우리도 X세대 aka 서태지 세대 라는 격동의 젊은 시기를 지냈는데 벌써 중년(?) 의 나이라니.. ㅠ

나는 우리 노 퐐로들.. 추운날씨에 뼈 시릴까 걱정이예요. 꼭 따뜻하게 입기 바래요!

그나저나 모두들 2024년은 어떻게 보냈나요 중년(?)의 삶도 나름 괜찮은가요? ^ ^

나도 올해를 되돌아보니 특별한 일은 하나도 없었네요 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 만으로도 괜~찮은 삶을 보낸것 같아요.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벌써 담 탄생 10주년 이예요 ㅎ (올해는 산타의 증거를 대 보라며 아빠를 놀리는 지경임)

담이의 어릴적 꿈은 공룡박사였는데 공룡이 조류로 진화 했는지 지금은 새박사로 바뀌었어요.

그리고 최근엔 바이올린에도 살짝 꽂혀있는데요 (ㅎㅎ 기타면 더 좋았을텐데..) 눈뜨자마자 연습하는 모습이 신기할뿐!

헤비칙도 해체는 안 했지만 ㅎ 갑자기 음악장르가 확 달라져서 당황스러워요. 요즘은 차를 타면 듣는 음악이 전통가요와 클래식 이예요 ㅎㅎ

근데.. 며칠전엔 혼자 삐져서 방문을 닫고 들어가던데.. 곧.. 사춘기가 온다는게 사실인가요? ㄷㄷ (경험자들 조언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해서 담이가 태어난 10년전을 돌이켜 보니 성탄절의 기적이 수록된 9집 발매가 있었고,

그보다 10년전엔 로보트 7집, 그리고 또 10년전은 3집이 나온 1994년 이네요. 딱 세번만 되돌려 봐도 정말 세상이 크게 바뀐 느낌이예요.

3집때는 퐐로들, 아니 송아지 팬들이 교실이데아 사탄설에 놀라 우리를 지키겠다며 투사들이 되기 시작하고,

시대유감 투쟁도 하고 함께 블라디보스톡에도 가고 그렇게 30년동안 많은 추억을 만들었는데 벌써 2025년을 코앞에 두고있어요.

30년 전과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죠? 가끔은 이질적인 세상이 어색하고, 위축될때도 있겠지만

우리는 아날로그 에서 디지털 그리고 인공지능 까지 온몸으로 겪고있는 유일한 세대이니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나도 강인하게 잘 살아가리라 믿어요. ^ ^

올해 서태지컴퍼니에서 진행중인 "AI 4K 업스케일링 프로젝트" 는 잘 보고있나요? 나도 영상도, 댓글들도 잘(감시)보고 있어요 ㅎ

인공지능이 영상까지 선명하게 해주다니.. 예전엔 상상만 하던일이 마법같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네요.

특히 오래된 SD 영상들이 수혜를 보고 있는데, 영상이 선명해진 만큼 당시의 빛바랜 기억들도 좀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라 가치있는 기술 같아요.

언젠가 AI 16K 4D 신 기술이 나오면 또 해볼까요? ㅋㅋ (하라는 10집은 안하고!! ㅋ)

근데 그때쯤이면 우리는 시뮬레이션속에서 디너쇼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음.. 이스터 섬에서의 트로피컬 디너쇼? ㅎ

난 예전엔 130살까지 사는것이 목표였는데 요즘은 신체나이 30세로 영생을 하는게 목표가 되었어요 ㅋㅋ 다 알죠? 그 뭐냐.. 텔로미어 ㅎㅎ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겠지만 난 우리가 늙지 않고 영원히 살아간다면? 하는 상상을 자주해요.

영생을 하려면 일단 상서로운 근신으로 자양강장이 중요하니 다들 운동 열심히 하고 잘 관리하자고요 ! ㅋ

오늘 그런 의미로 내 신체나이 30, 퐐로들도 모두 힘이 넘치던 시절! 6집 사녹 영상 4곡을 업스케일링 해서 곧 올릴 예정이예요.

이 영상이 한국 최초의 사전녹화방송 인데요 그때 우리는 최고의 영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진짜 미친듯이 놀았었죠 (나한텐 눈길도 안주고 ㅠ)

사전녹화도, 스탠딩 공연도 처음이라 우리는 아주 거칠고, 완전한 날것이 담긴 귀한 영상을 남겼다고 생각해요.

잠시 그때로 돌아가서 충만한 필과 에너지를 얻어 영생을 위해 건강히 잘 버텨 보자고요.
(근데 오랜만에 영상을 보니 그때 우리 퐐로들은 진짜 느무느무 멋지네요. 리스펙!!)
아직 시국도 어수선하고 갈길도 멀지만 오늘 만큼은 여러분과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따뜻하고 안전한 크리스마스 되길 바래요.
나는 또 돌아올테니 너무 염려말고, 모두 모두 아프지말고, 신나는 25년을 맞이하길.
사랑해요 우리 퐐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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