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음악가, 가수, 작곡가, 평화 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14:43
존 레논은 비틀즈의 공동 설립자이자 핵심 멤버로, 폴 매카트니와 함께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곡 파트너십을 이뤘습니다. 반항적인 본성과 신랄한 재치를 음악, 저술, 사회 운동에 담아냈으며, 'Imagine' 같은 솔로 히트곡으로 평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1980년 비극적인 피살로 막을 내렸으나, 그의 예술과 메시지는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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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존 윈스턴 레논 탄생]
영국 리버풀 산부인과 병원에서 줄리아 스탠리 레넌과 상선 해병 앨프리드 레논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친할아버지 존 '잭' 레논과 당시 수상 윈스턴 처칠에서 따왔습니다.
존 윈스턴 레논은 영국의 전쟁 시기이던 1940년 10월 9일 리버풀 산부인과 병원에서 줄리아 스탠리 레넌과 상선 해병이었던 앨프리드 레논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앨프리드는 레논의 출생 당시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레논의 이름을 그의 친할아버지 이름 존 '잭' 레논(John 'Jack' Lennon)에서 따왔고, 중간 이름 윈스턴은 당시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에서 따왔습니다.
1944
레논의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지만, 레논과 아내가 살던 리버풀의 뉴캐슬 로드로 꾸준히 일정한 생계비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44년 2월 실종되어 생계비 지원이 끊겼습니다. 6개월 후 가족을 돌보고자 집으로 돌아왔지만, 당시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밴 상태였던 레논의 어머니 줄리아는 그를 거절했습니다.
1946
[부모님의 양육권 다툼과 이모집으로 이사]
아버지 앨프리드가 존을 뉴질랜드로 데려가려 했으나 어머니 줄리아와 양육권 다툼 후 어머니를 따라갔으며, 이후 아버지와는 20년간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후 이모 미미 스미스와 이모부 조지 스미스와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줄리아의 언니인 미미 스미스가 리버풀 사회복지부에 두 번을 요청한 끝에 줄리아는 레논의 양육권을 미미에게 넘겼습니다. 1946년 7월 레논의 아버지는 미미 스미스를 찾아가 레논을 블랙풀에 데려왔고, 뉴질랜드로 가서 살 계획을 몰래 세웁니다. 줄리아는 당시 남자친구 바비 디킨즈와 함께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레논의 양육권을 두고 격한 언쟁을 벌였고, 아버지는 5세의 레논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구를 따라갈 것인지 선택하게 했습니다. 레논은 아버지를 두 번 선택했으나, 어머니가 떠나려고 하자 울면서 그녀를 쫓아갔습니다. 이후 아버지와는 20년간 연락이 끊겼습니다. 레논은 이후부터 자식이 없던 이모 미미 스미스와 이모부 조지 스미스와 함께 멘러브 애비뉴 251번지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1952
도브데일 초등학교 졸업 후 1952년 9월부터 1957년까지 레논은 리버풀에 있는 쿼리 뱅크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1955
레논이 14세가 되던 해인 1955년 6월 5일에 이모부 조지는 간 출혈로 52세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1956
[스키플 그룹 '쿼리맨' 결성]
쿼리뱅크 고등학교의 이름을 따 스키플 그룹인 '쿼리맨'을 결성했습니다. 이 밴드는 훗날 전설적인 비틀즈의 모태가 됩니다.
15세의 레논은 쿼리뱅크 고등학교에서 이름을 따와 명명된 스키플 그룹인 쿼리맨을 결성했습니다. 1957년 여름, 쿼리맨은 스키플 반 로큰롤 반으로 이루어진 '영혼이 담겨진 세트 리스트'를 공연했습니다.
1957
레논은 교육 자격 검정 시험 GCE O 레벨을 통과하지 못했고, 이모와 교장이 나서서야 겨우 리버풀 예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레논은 테디 보이 의류를 입기 시작했으며, 선생님들을 괴롭히고 수업을 방해하는 걸로 유명해졌습니다. 결국 레논은 회화 강의와 그래픽 아트 강좌에서 연달아 쫓겨났고, 라이프 드로잉 수업에서 누드 모델의 허벅지 위에 앉는 등의 나쁜 태도로 인해 퇴학될 수도 있다고 경고를 받았습니다. 학년말 시험에서 떨어진 그는 친구들과 훗날 아내가 되는 신시아 파월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학교에서 퇴학당했습니다'.
[폴 매카트니와 첫 만남]
울튼의 성 베드로 교회 원유회에서 열린 쿼리맨의 두 번째 공연에서 폴 매카트니를 처음 만나 밴드에 들어올 것을 권했습니다.
레논은 폴 매카트니를 7월 6일 울튼의 성 베드로 교회 원유회에서 열린 쿼리맨의 두 번째 공연에서 처음으로 만났고, 레논은 매카트니에게 밴드에 들어올 것을 권했습니다.
1958
1958년 7월 15일, 레논이 17세가 되던 해 그의 어머니 줄리아는 미미 스미스의 집에 방문 후 귀가하는 길에 차에 치여 사망했습니다.
1960
['비틀즈' 결성 및 함부르크 공연]
레논이 결성한 '쿼리맨' 밴드가 '비틀즈'로 발전했습니다. 그해 8월, 비틀즈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공연을 위해 피트 베스트를 영입하며 48일간 거주했습니다.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과 섯클리프는 1960년대 초 '비틀즈'가 되었습니다. 그해 8월에 비틀즈는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48일간 거주하게 되었는데, 당시 공연을 위해 드럼 연주자가 급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피트 베스트를 영입했습니다. 레논의 이모는 당시 19세였던 레논이 함부르크에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상당히 충격을 받았고, 여행 대신 미술 공부를 계속하라고 설득했습니다. 함부르크에서의 첫 체류 이후 비틀즈는 1961년 4월에 두 번째로, 1962년 4월에 세 번째로 체류했습니다. 다른 밴드 멤버들처럼 레논은 함부르크에서 지낼 때 프레루딘을 접했고, 긴 밤 공연을 위한 각성제로 암페타민 따위의 마약을 복용했습니다.
1962
[브라이언 엡스타인, 비틀즈 매니저로 합류]
비틀즈의 매니저로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임명되었습니다. 엡스타인은 밴드의 복장과 무대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62년부터 비틀즈의 매니저를 맡은 브라이언 엡스타인는 이전에 밴드 매니저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지만, 비틀즈의 초창기 복장 양식과 무대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레논은 처음에 엡스타인이 제안한 양복 차림의 전문적인 용모를 강하게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돈만 준다면 바보 같은 풍선이라도 입어야지.'라며 받아들였습니다. 매카트니는 섯클리프가 함부르크에 남기로 하자 대신해서 베이스 연주자를 맡기로 했고, 드럼 연주자는 베스트에서 링고 스타로 교체되었습니다. 비틀즈는 1970년 해산까지 4인조 체제를 형성하게 됩니다.
레논은 1962년 7월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고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야, 신. 우리 둘은 결혼해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신시아 파월과 결혼]
리버풀 마운트 플레즌트 등기소에서 신시아 파월과 결혼했습니다. 매니저는 비틀즈의 인기에 영향을 줄까 봐 결혼을 비밀로 유지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커플은 8월 23일 리버풀에 있는 마운트 플레즌트 등기소에서 결혼했습니다. 레논의 결혼과 동시에 비틀마니아가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결혼식 오후에 공연을 했고, 그 이후에도 거의 매일 공연을 하러 다녔습니다. 그가 결혼한 사실을 팬들이 알면 인기가 식을 것이라고 생각한 엡스타인은 레논에게 결혼을 비밀로 유지하도록 요청했습니다.
밴드의 첫 싱글 〈Love Me Do〉는 1962년 10월에 발매되었고, 영국 차트에서 17위를 기록했습니다.
1963
[비틀즈의 영국 내 성공]
비틀즈가 영국 주류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여왕이 관람한 로열 버라이어티 쇼에서 '싼 좌석 사람들은 손뼉, 나머지는 보석을 흔들어달라'는 재담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비틀즈는 1963년 초부터 영국의 주류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여왕과 다른 왕실 가족들이 관람한 로열 버라이어티 쇼 공연 때, 레논은 관객을 향해 다음과 같은 재담을 쏟아냈습니다. '다음 곡을 위해서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싼 좌석에 있는 사람들은 손뼉를 쳐주시고, 나머지 분들은 보석을 흔들어주세요.'
[비틀즈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 녹음]
비틀즈의 데뷔 음반 《Please Please Me》를 10시간에 걸쳐 녹음했습니다.
그들은 데뷔 음반 《Please Please Me》를 1963년 2월 11일 10시간에 걸쳐 녹음했습니다. 그 날 레논은 감기에 걸려있었고, 이는 그 날 마지막으로 녹음된 곡 〈Twist and Shout〉의 보컬에 명백히 드러납니다. 레논-매카트니는 14곡 중에서 8곡을 작곡했습니다. 레논은 이 때만 해도 앨범 제목 등 몇 가지를 빼곤 가사에 말장난을 넣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린 그냥 노래를 썼어요 ...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단순히 노래를 쓴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가사들은 대부분 상관없었죠.'라고 말했습니다.
[첫째 아들 줄리언 레논 출생]
첫째 아들 줄리언 레논이 출생했습니다. 레논은 당시 투어 중이어서 3일이 지나서야 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첫 자식인 줄리언은 1963년 4월 8일에 출생했습니다. 당시 투어 중이었던 레논은 3일이 지난 후에야 그를 보았습니다. 엡스타인은 그가 비틀즈의 상업적 성공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대중에게 줄리언의 출생을 포함하여, 신시아와의 결혼에 대해 비밀로 지켜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매카트니 생일 파티에서 MC 폭행]
폴 매카트니의 21번째 생일 파티에서 MC 밥 울러가 '신혼여행은 어땠냐'고 농담하자 그를 폭행했습니다. 레논은 '밥이 날 퀴어라고 불렀고, 그래서 나는 그의 갈비뼈를 피나도록 때렸다'고 회고했습니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뒤, 레논은 1963년 6월에 열린 매카트니의 21번째 생일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캐번 클럽의 MC 밥 울러는 말장난과 애정 어리지만 가슴을 찌르는 말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 날 레논에게 '그래서 신혼여행은 어땠어, 존?'이라고 농담삼아 물었습니다. 당시 술에 취했던 레논에게 이 문제는 간단했습니다. '밥은 날 퀴어라고 불렀고, 그래서 나는 그의 갈비뼈를 피나도록 때렸다'.
1964
[책 《그 자신의 이야기》 출판]
말장난이 담긴 글을 모은 책 《그 자신의 이야기》(In His Own Write)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다양한 형식의 단편 소설, 시, 연극, 그림을 포함합니다.
레논은 이 무렵 책 《그 자신의 이야기》(In His Own Write)를 썼습니다. 비틀즈 전기작가 빌 해리는 레논의 저서 《그 자신의 이야기》이 출판된 경위를 '비틀즈를 다루는 기자들이 와서 어쩔 수 없이 그가 글을 보여주자, 그들이 '책을 써라'고 말했다. 그렇게 첫 번째 책은 탄생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책은 《데일리 홀》과 마찬가지로 단편 소설, 시, 연극, 그리고 그림 등 다양한 형식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비틀즈의 미국 데뷔 및 세계적 스타 등극]
비틀즈가 《에드 설리번 쇼》를 통해 미국에서 역사적인 데뷔 공연을 펼쳤고, 머지않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이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1년 후인 1964년 2월에 비틀즈는 《에드 설리번 쇼》를 통해 미국에서 역사적인 데뷔 공연을 펼쳤고, 머지않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비틀즈는 2년 동안 지속해서 투어를 돌면서 영화 제작과 작곡을 했습니다.
1965
[책 《일하는 스페인 사람》 출판]
책 《일하는 스페인 사람》(A Spaniard in the Works)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 또한 그의 문학적 재능을 엿볼 수 있게 했습니다.
레논은 이 무렵 책 《일하는 스페인 사람》(A Spaniard in the Works)을 썼습니다. 빅터 스피네티와 아드리엔 케네디는 《일하는 스페인 사람》과 《그 자신의 이야기》을 기반으로 무대극 《The John Lennon Play: In His Own Write》을 제작했습니다.
비틀즈는 1965년 여왕 서작식에서 대영 제국 훈장(MBE)을 받았습니다.
[LSD 첫 경험]
저녁 파티에서 치과 의사가 몰래 커피 속에 넣어 준 LSD를 처음 복용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약물 사용을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해 3월 레논, 해리슨과 그들의 부인을 저녁 파티에 초대한 치과 의사는 몰래 커피 속에 LSD를 담아 그들에게 권했습니다. 그들이 떠나고자 할 때 LSD를 복용했다는 것을 밝히면서 부작용 때문에 외출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밖으로 나간 그들은 한 나이트클럽의 엘리베이터에서, 마치 불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고함을 질렀습니다.
1966
['예수보다 인기 많다' 발언 파문]
《이브닝 스탠더드》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금 예수보다 인기가 많다'는 발언을 해 미국 기독교 신자들로부터 큰 파급과 항의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비틀즈가 투어를 중지하는 결정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966년 3월, 《이브닝 스탠더드》의 리포터 마린 클리브와의 인터뷰 중에 레논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없어질 거예요. 오그라들고 사라질 거란 말입니다 ... 우리는 지금 예수보다 인기가 많아요. 로큰롤과 기독교 중에 어떤 게 먼저 없어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발언은 영국에서는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다섯 달 후인 8월에 미국의 한 잡지가 인터뷰를 공개하면서 큰 파급을 초래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비틀즈 음반을 불태웠고, KKK는 레논을 위협하거나 공연 중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같은 활동은 비틀즈가 투어를 중지하겠다는 결정에 도화선을 당겼습니다.
[비틀즈 라이브 공연 중단]
비틀즈의 마지막 상업적 콘서트가 끝난 후, 라이브 공연을 중단하고 상실감과 밴드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느꼈습니다.
1966년 8월 29일, 마지막 상업적 콘서트가 끝나고 일상적이던 라이브 공연을 뒤로한 레논은 상실감과 밴드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느꼈습니다. 지난 1월 의도치 않은 LSD 복용 이후 약물 사용이 늘어났으며, 특히 1967년에는 지속해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노 요코와 운명적인 첫 만남]
런던 인디카 갤러리에서 개념 예술 전시회를 준비하던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오노 요코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 만남은 그의 삶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66년 11월 9일 런던에 있는 인디카 갤러리에 간 레논은 거기서 개념 예술 전시회를 준비하던 오노를 갤러리 주인이던 존 던바에게 소개받았습니다. 레논은 오노의 작품인 〈못을 박기 위한 페인팅〉에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전시회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나, 요코를 찾아온 존 레논이 '못을 박고 싶으니 망치를 빌려달라'고 했으나 청을 거절했습니다. 던바는 그녀에게 '이 분이 누군지 몰라요? 그는 백만장자예요! 이걸 살지도 모른다고요.'라고 말했습니다. 오노는 비틀즈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했고 이후 그가 다시 찾아오자 5실링(약 50센트)에 망치를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레논은 '제가 상상의 5실링을 드릴 테니, 상상의 못을 망치질하게 해줘요'라고 말했고 이에 마음이 풀렸습니다.
1967
[〈Strawberry Fields Forever〉 발표]
레논이 쓴 비틀즈의 곡 〈Strawberry Fields Forever〉가 발표되어 《타임》지로부터 '놀라운 창의력'이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1967년 레논이 쓴 〈Strawberry Fields Forever〉가 발표되었고, 《타임》지는 이를 '놀라운 창의력'이라고 격찬했습니다. 비틀즈의 대표 음반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가사는 레논-매카트니가 초기에 쓴 간단한 사랑 노래와는 큰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마하리시 요기와의 만남과 엡스타인 사망]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를 소개받아 초월 명상 세미나에 참여했습니다. 세미나 도중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8월에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를 소개받은 비틀즈는 그의 초월 명상 세미나가 진행되는 웨일스의 뱅고어에 가서 주말 개인 강습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세미나 도중에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레논은 후에 '저희가 위험에 직면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전 우리가 곡을 연주하는 것 외엔 다른 것을 할 수 없단 걸 알았고, 그 때문에 겁을 먹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해리슨과 레논은 동양 종교에 대한 흥미가 컸고, 이에 힘입어 비틀즈는 나중에 인도에서 마하리시의 아시람을 방문하여 더 많은 지도를 받았습니다. 거기에 있는 동안 《The Beatles》와 《Abbey Road》의 대부분 곡을 작곡했습니다.
레논은 혼자서 장편 반전 영화 《존 레논의 전쟁 대작전》에 출연했습니다. 영화는 1967년 10월에 상영되었습니다.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 공개]
엡스타인 없이 비틀즈가 제작한 TV 영화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가 공개되었습니다. 영화는 평론가들의 악평을 받았지만, 레논이 영감을 받아 만든 사운드트랙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비틀즈가 처음으로 엡스타인 없이 진행한 텔레비전 영화 프로젝트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는 폴 매카트니가 진행하고 비틀즈가 직접 각본 및 감독을 맡았습니다. 그해 12월에 공개된 영화는 평론가로부터 비틀즈 작품 중에서는 처음으로 악평을 받았으나, 레논이 루이스 캐럴로부터 영감을 얻은 〈I Am the Walrus〉를 수록한 사운드트랙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68
[오노 요코와 실험 음악 음반 작업]
오노 요코와 함께 세 개의 실험 음악 음반 《Unfinished Music No.1: Two Virgins》, 《Unfinished Music No.2: Life with the Lions》, 《Wedding Album》을 작업했습니다.
레논의 관심은 비틀즈에게서 멀어져, 1968년과 1969년 사이 오노와 작업한 세 개의 실험 음악 음반, 《Unfinished Music No.1: Two Virgins》, 《Unfinished Music No.2: Life with the Lions》 그리고 《Wedding Album》에 창의성을 집중시켰습니다.
[슈퍼그룹 '더티 맥' 결성 및 출연]
연말에 슈퍼그룹 '더티 맥'의 멤버로 《더 롤링 스톤스 록 앤 롤 서커스》에 출연했습니다. 이 그룹은 레논, 에릭 클랩턴, 키스 리처즈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968년 말 레논은 더티 맥의 멤버로서 《더 롤링 스톤스 록 앤 롤 서커스》에 출연했습니다(1996년까지 발표되지 않았다). 이 슈퍼그룹 더티 맥은 레논, 에릭 클랩턴, 키스 리처즈, 그리고 미치 미첼로 구성되었고, 오노는 영화 내에서 백 보컬을 담당했습니다.
[멀티미디어 기업 '애플 코어' 설립]
비틀즈 멤버들과 함께 멀티미디어 기업 '애플 코어'를 설립했습니다. 레논은 이를 '사업 구조 내에서의 예술적 자유'를 위한 시도라고 설명했습니다.
엡스타인의 사망 이후, 비틀즈 멤버들은 사업 활동에 점차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1968년에 2월 애플 레코드와 몇 개의 자회사로 이루어진 멀티미디어 기업인 애플 코어를 세웠습니다. 레논은 기업을 '사업 구조 내에서의 예술적 자유'를 추구하기 위한 시도라고 설명했으나, 그의 늘어만 가는 마약 실험과 오노 요코에 대한 집착, 그리고 매카트니 자신의 결혼 계획으로 인해 애플은 전문적인 매니지먼트가 필요했습니다. 레논은 비칭 경에게 그 역할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고 돌아가 음반을 만들라고 충고했습니다. 레논은 롤링 스톤스와 여러 밴드의 매니저를 맡아온 앨런 클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클라인은 레논, 해리슨, 스타에 의해 애플 최고 경영자로 임명되었지만, 매카트니는 매니지먼트 계약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오노 요코와의 동거 시작 및 불륜 발각]
부인이 그리스로 휴가를 간 동안 오노 요코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 밤새도록 《Two Virgins》의 수록곡을 녹음하고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부인이 돌아왔을 때 오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켰습니다.
오노는 이후 레논의 집에 계속 전화를 걸었고, 신시아가 레논에게 이에 대해 따졌습니다. 레논은 그녀에게 오노는 그저 '멍청한 아방가르드 예술'로 돈을 벌려고 하는 것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1968년 5월, 부인이 그리스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레논은 오노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둘은 밤에 음반 《Two Virgins》의 수록곡을 녹음했고, 레논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새벽에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신시아는 오노가 자신의 목욕 가운을 입은 상태에서 레논과 차를 마시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녀를 본 레논은 간단하게 '오, 안녕.'이라고 인사했습니다.
[오노 요코 유산 및 신시아와의 이혼 합의]
오노 요코가 임신했으나, 11월 21일 존 오노 레논 2세라 이름 지은 아이를 유산했습니다. 몇 주 뒤 신시아와 이혼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오노는 1968년에 임신했으나, 그들이 존 오노 레논 2세라고 이름 지은 아이를 1968년 11월 21일에 유산했습니다. 몇 주 뒤 레논과 신시아는 이혼했습니다. 협상 이후, 레논은 항복하면서 같은 이유로 이혼했습니다. 이 사건은 1968년 11월 법정에서 해결되었으며, 레논은 그녀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고, 줄리언에 대한 양육비로 10만 파운드를 지급했습니다.
1969
[플라스틱 오노 밴드 결성 및 솔로곡 발표]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결성하고 《Live Peace in Toronto 1969》를 발표했습니다. 헤로인 복용 후 심경을 표현한 〈Cold Turkey〉와 영국 비아프라 전쟁 개입 항의곡 〈Instant Karma!〉를 발표했습니다.
1969년에는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결성하여 《Live Peace in Toronto 1969》를 발표했습니다. 1969년과 1970년 사이에 레논은 1969년 베트남 전쟁 반대 노래로 널리 채택된 〈Give Peace a Chance〉, 헤로인 복용 후 그의 후회하는 심정을 표현한 〈Cold Turkey〉, 그리고 영국이 비아프라 전쟁에 개입한 데 항의하는 〈Instant Karma!〉를 발표했습니다.
[제임스 핸래티 사건 지지 활동]
오노와 함께 1962년 살인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진 제임스 핸래티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가족들을 지지했습니다. 런던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해 말, 레논과 오노는 1962년 살인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진 제임스 핸래티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피해자의 가족들을 지지했습니다. 레논은 핸래티를 사형한 사람들은 '남아프리카의 거리에서 총기로 흑인들을 살해하는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며 '같은 놈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같은 사람들이 모든 걸 운영하는 이 모든 게 엿 같은 부르주아 현상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레논과 오노는 런던에서 'Britain Murdered Hanratty'와 'Silent Protest For James Hanratty'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고, 사건에 관한 4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대영 제국 훈장(MBE) 반납]
영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국을 지원한 것과 〈Cold Turkey〉의 차트 순위 하락에 항의하며 여왕에게 대영 제국 훈장(MBE)을 반납했습니다.
영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국을 지원한 것과, 〈Cold Turkey〉의 차트 순위가 내려간 것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레논은 훈장을 여왕에게 반납하나, 포기할 수가 없는 MBE 상태에는 아무 영향이 없었습니다.
[반전 시위 '베드 인 포 피스' 시작]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공개 시위 '베드 인 포 피스'를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에서 시작했습니다. 이는 전 세계 미디어의 조롱을 받았으나, 평화를 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레논과 오노는 자신들의 신혼여행을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에서 베드 인 포 피스라는 활동을 하는데 사용했습니다. 1969년 3월에 전개된 이 활동은 전 세계 미디어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오노 요코와 결혼]
오노 요코와 지브롤터에서 결혼했습니다. 신혼여행을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에서 1주일간 '베드 인' 시위를 하며 보냈습니다.
레논과 오노는 1969년 3월 20일에 결혼했으며 자신들의 신혼여행 장면을 그린 14개짜리 석판화 시리즈를 선보였습니다. 이 중 여덟은 불건전하다고 판단되었고, 대부분 금지되거나 몰수되었습니다. 레논은 이 시기를 비틀즈의 노래 〈The Ballad of John and Yoko〉에 상세히 담았습니다.
[중간 이름 '오노' 추가]
중간 이름에 '오노'를 추가하여 존 윈스턴 오노 레논이 되었습니다. 출생 시 이름은 취소할 수 없어 공식 문서에는 존 윈스턴 오노 레논으로 표기되었습니다.
레논은 1969년 4월 22일 중간 이름에 오노를 추가했습니다. 이를 축하하는 의미로 세 달 전에 루프탑 콘서트가 열렸던 애플 코어 건물에서 소소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가 비록 존 오노 레논이란 이름을 사용하긴 했지만, 출생시 주어진 이름은 취소할 수 없기 때문에 공식 문서에는 존 윈스턴 오노 레논이라고 표기되었습니다.
[두 번째 베드 인 시위 및 〈Give Peace a Chance〉 녹음]
미국 입국 거부로 캐나다 몬트리올 퀸 엘리자베스 호텔에서 두 번째 베드 인 시위를 진행하며, 반전 앤섬이 된 〈Give Peace a Chance〉를 녹음했습니다.
둘은 미국에서도 이 시위를 할 계획이었으나 입국을 거부당해서, 대신 몬트리올의 퀸 엘리자베스 호텔에서 시위했고 여기서 〈Give Peace a Chance〉를 녹음했습니다. 싱글로도 발매된 이 노래는 빠른 속도로 반전 앤섬이 되었습니다.
레논은 1969년 9월에 비틀즈를 떠났고, 그룹이 녹음 계약을 재협상하는 동안에는 이를 매체에 발표하지 않기로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 4월 매카트니가 데뷔 솔로 음반 발표와 동시에 밴드 탈퇴를 선언하자 레논은 분개했습니다. 레논은 '하느님 맙소사! 그가 전부 자기 걸로 만들어버렸어!'라고 반응했습니다. 그는 후에 '내가 밴드를 시작했고, 내가 해체했다. 그렇게 단순한 거다'라고 썼습니다.
[워싱턴 DC 반전 시위에서 〈Give Peace a Chance〉 울려 퍼짐]
워싱턴 DC에서 열린 베트남 반전 시위에서 50만 명의 사람들이 레논이 쓴 〈Give Peace a Chance〉를 불렀습니다. 이 곡은 반전 운동의 강력한 앤섬이 되었습니다.
싱글로도 발매된 이 노래는 빠른 속도로 반전 앤섬이 되었습니다. 11월 15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베트남 반전 시위에서 50만 명의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War Is Over! If You Want It' 캠페인]
오노와 함께 'War Is Over! If You Want It'이라는 문구를 세계 각 언어로 번역하여 10개 도시에 걸기 위해 빌보드에 돈을 지급했습니다.
12월, 둘은 'War Is Over! If You Want It'이라는 문구를 세계 각 언어로 번역하여 10개 도시에 걸기 위해 빌보드에 돈을 지급했습니다.
1970
[〈Power To The People〉 작곡 및 정치적 발언]
타릭 알리와의 인터뷰 때 그의 혁명적 정치 견해에 영감을 받아 〈Power To The People〉를 썼습니다. 그는 나중에 알리의 근거 없는 외설 혐의로 기소된 《Oz》지를 '역겨운 파시즘'이라고 비판하며 지원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같은 해, 레논은 타릭 알리와의 인터뷰 때 그의 혁명적 정치 견해에 영감을 받아 〈Power To The People〉를 썼습니다. 레논은 나중에 알리의 근거없는 외설 혐의로 인해 《Oz》지가 기소되자, 이 기소를 '역겨운 파시즘'이라고 맹렬히 비판했습니다. 그와 오노(엘라스틱 오즈 밴드)는 싱글 〈God Save Us / Oz〉를 발매하고는 잡지사 지원을 위한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원초 치료와 솔로 데뷔 음반 《John Lennon/Plastic Ono Band》 발표]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서 야노브 의사를 통해 원초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 치료를 통해 유년기의 감정적 고통을 해소하려 했으며, 그의 감정이 잘 표현된 데뷔 솔로 음반 《John Lennon/Plastic Ono Band》를 발표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1970년, 레논과 오노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서 야노브 의사를 통해 원초 치료를 받았습니다. 유년기의 감정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고안된 치료법으로 일주일에 두 번, 4개월간 진행되었습니다. 의사는 더 장기적으로 치료하기를 원했으나, 커플은 더 이상 계속 치료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런던으로 돌아왔습니다. 레논의 감정이 잘 표현된 데뷔 솔로 음반 《John Lennon/Plastic Ono Band》(1970)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는 '존이 부른 〈God〉의 마지막 소절은 로큰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음반은 레논이 어릴 적 직면해야 한 감정이 들어간 노래 〈Mother〉, 부르주아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노래 〈Working Class Hero〉('넌 아직도 망할 하류층이야'라는 가사로 인해 방송사들로부터 비판을 샀다)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폴 매카트니의 비틀즈 탈퇴 선언에 분개]
폴 매카트니가 데뷔 솔로 음반 발표와 동시에 비틀즈 탈퇴를 선언하자, 레논은 '하느님 맙소사! 그가 전부 자기 걸로 만들어버렸어!'라며 분개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 4월 매카트니가 데뷔 솔로 음반 발표와 동시에 밴드 탈퇴를 선언하자 레논은 분개했습니다. 레논은 '하느님 맙소사! 그가 전부 자기 걸로 만들어버렸어!'라고 반응했습니다. 그는 후에 '내가 밴드를 시작했고, 내가 해체했다. 그렇게 단순한 거다'라고 썼습니다.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폴이 한 것을 안 한 난 바보였다. 음반 파는데 그걸 이용한 거 말이다.'라며 매카트니를 비꼬았습니다.
1971
[뉴욕으로 이주]
밴드의 해체로 인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오노 요코의 제안으로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처음에는 세인트 레지스 호텔에 지내다 그리니치빌리지로 이사갔고, 강도 사건 후 더 안전한 다코타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밴드의 해체로 인해 쏟아질 비난을 피하기 위해 레논은 오노의 제안으로 1971년 8월 31일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둘은 처음에 5번가에 있는 세인트 레지스 호텔에서 지내다가 1971년 10월 16일 그리니치빌리지의 뱅크로 105번지로 이사갔습니다. 강도 사건 이후 보다 안전한 웨스트 72번가의 더 다코타로 이사갔습니다.
[솔로 음반 《Imagine》 발표 및 빌보드 핫 100 1위]
솔로 음반 《Imagine》을 발표했습니다. 타이틀곡 〈Imagine〉은 반전 운동의 상징적인 노래가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레논의 다음 음반 《Imagine》(1971)은 평론가들로부터 신중한 반응을 받았습니다. 《롤링 스톤》은 '수록곡의 대부분이 좋은 음악'이라고 평했으나, '그의 가식은 곧 단순히 따분해질 뿐만 아니라, 시시하게 되어버릴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앨범의 타이틀 곡 〈Imagine〉은 반전 운동을 위한 노래가 되었고, 〈How Do You Sleep?〉은 《Ram》에서 나타난 자신을 비꼬는 가사에 대한 반격으로, 매카트니는 후에 가사가 레논과 오노를 향한 공격이었다고 인정했습니다. 《Imagine》은 《레코드 월드》가 집계한 미국 싱글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습니다.
[〈Happy Xmas (War Is Over)〉 발매]
오노와 함께 〈Happy Xmas (War Is Over)〉를 발매했습니다. 이 곡은 연말의 대표적인 반전 캐럴이 되었습니다.
레논과 오노는 12월에 〈Happy Xmas (War Is Over)〉를 발매했습니다.
[존 싱클레어 석방 자선 공연 참여]
미시간주 앤아버에서 존 싱클레어 석방을 위한 자선 공연 'John Sinclair Freedom Rally'에 참여했습니다. 이 공연에는 스티비 원더, 밥 시거 등도 함께 했습니다.
정치운동가, 흑표당의 공동설립자이자 시인인 존 싱클레어는 마약 소지로 붙잡혔고, 이후 마리화나 두 롤을 판 죄로 1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71년 12월 미시간주 앤아버에서 존 레논, 스티비 원더, 밥 시거, 흑표당의 바비 실 등이 항소 공연이자 자선 공연인 〈John Sinclair Freedom Rally〉를 열었고, 이에 15,000명이 참여했습니다. 레논과 오노는 데이비드 필과 루빈의 도움을 받아 《Some Time in New York City》(이때에는 발매되지 않음)에 수록된 어쿠스틱 세트 4곡을 연주했습니다. 여기에는 존 싱클레어의 석방을 호소하는 〈John Sinclair〉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연 전날에 미시간 상원은 마리화나 소지에 대한 처벌을 크게 줄이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4일 뒤 싱클레어는 항소심에서 석방되었습니다.
1972
[닉슨 정부의 추방 시도 시작]
리처드 닉슨 정부가 레논의 반전 운동에 맞서 '전략적 대응책'을 취하고 그를 미국에서 추방하려는 시도를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은 4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새해, 닉슨 정부는 레논이 주도한 반전 운동과 반닉슨 선전에 맞서 '전략적 대응책'을 취했고, 그를 추방하려는 4년의 시도에 착수했습니다. 1972년, 레논은 뉴욕에서 맥거번이 닉슨에게 선거에서 패한 후, 제리 루빈에 의해 열린 선거 후 행사에 오노와 참여했습니다. 이민 당국과의 계속되는 법적 전투에 집중한 레논은 결국 미국 영주권을 거부당했습니다(1976년 이후 풀렸습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 비판 및 IRA 지지 발언]
북아일랜드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영국의 행위를 비판하는 곡 〈Luck of the Irish〉와 〈Sunday Bloody Sunday〉를 음반에 수록했습니다.
1972년 북아일랜드에서 비무장한 14명의 시민권 운동가들이 영국 육군에 의해 총으로 사살된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레논은 육군과 아일랜드 공화국군 임시파(IRA)(당시 사건과는 연관이 없었다)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IRA를 고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레논과 오노는 아일랜드를 탄압하는 영국의 행위를 비판하는 〈Luck of the Irish〉와 〈Sunday Bloody Sunday〉를 써서 음반 《Some Time in New York City》에 수록했습니다.
[사회 비판 음반 《Some Time in New York City》 발매]
오노와 공동으로 제작한 음반 《Some Time in New York City》가 발매되었습니다. 여성권리, 인종관계, 북아일랜드를 탄압하는 영국 등 사회 문제를 다뤘으나 혹평을 받았습니다.
뉴욕 밴드 엘리펀트스 메모리가 백 보컬을 맡고, 오노와 공동으로 제작한 음반 《Some Time in New York City》은 1972년에 발매되었습니다. 여성권리, 인종관계, 북아일랜드를 탄압하는 영국, 그리고 레논의 영주권 획득 문제에 관한 노래가 수록된 이 음반은 큰 혹평을 받았습니다.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 방송 거부 사태]
수록곡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가 미국에서 싱글로 발매되었고, 《딕 커뱃 쇼》를 통해 전파를 탔습니다. '깜둥이'라는 단어 때문에 많은 라디오 방송국들이 방송을 거부했습니다.
수록곡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은 같은 해 미국에서 싱글로 발매되었고, 5월 11일 《딕 커뱃 쇼》를 통해 전파를 탔습니다. 많은 라디오 방송국들이 '깜둥이'라는 단어 때문에 방송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마지막 장시간 공연]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엘리펀트스 메모리와 게스트들과 함께 윌로우브룩 주 학교 정신 시설 환자들을 위한 자선 공연을 열었습니다. 이는 그의 마지막 장시간 공연이었습니다.
레논과 오노는 엘리펀트스 메모리, 그 외 게스트들과 함께 윌로우브룩 주 학교 정신 시설의 환자들을 위해서 두 번의 자선공연을 열었습니다. 1972년 8월 3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진행된 이 공연은 레논의 마지막 장시간 공연이었습니다.
1973
[오노 요코와의 별거 시작 ('잃어버린 주말')]
음반 《Mind Games》를 녹음하고 있었을 때, 오노 요코와 떨어져 지내기로 했습니다. 이 18개월간의 별거 기간을 레논은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불렀습니다.
레논이 《Mind Games》(1973)을 녹음하고 있었을 때, 그와 오노는 떨어져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18개월간 떨어져 지냈고, 레논은 이후 이 기간을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불렀습니다. 레논은 그동안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개인 비서 메이 팡과 함께 지냈습니다.
[미국 추방 명령]
미국 이민귀화국(INS)으로부터 60일 이내에 미국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오노는 영주권 획득).
1973년 3월 23일, 레논은 60일 이내에 미국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오노는 영주권을 얻었습니다).
['누토피아' 설립 선언 및 정치 망명 요청]
뉴욕시 변호사 협회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고 '땅이 없고, 경계도 없고, 여권도 없고, 오직 사람'만 있는 국가 '누토피아'의 설립을 발표하며 미국에 정치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레논과 오노는 1973년 4월 1일 뉴욕시 변호사 협회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고 '땅이 없고, 경계도 없고, 여권도 없고, 오직 사람'만 있는 국가 '누토피아'의 설립을 발표했습니다. 누토피아의 국기인 흰 깃발(두 개의 손수건)을 든 그들은 미국에서 정치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기자 회견은 촬영되어 나중에 2006년 다큐멘터리 《존 레논 컨피덴셜》에 등장했습니다. 레논의 《Mind Games》(1973)에는 3초의 침묵을 담은 트랙 〈Nutopian International Anthem〉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자회견 직후 닉슨의 정치 스캔들 개입이 밝혀졌고, 6월 워싱튼 DC에서 워터게이트 청문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4개월 후 닉슨 대통령은 사임되었습니다.
플라스틱 U.F.오노로 표기된 《Mind Games》는 1973년 11월에 발매되었습니다. 레논은 같은 달에 발매된 링고의 음반 《Ringo》에 가이드 보컬을 제공해 주었고, 이는 《John Lennon Anthology》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1974
[해리 닐슨과의 만취 소동]
술에 심하게 취해 해리 닐슨과 함께 트루바두르 클럽에서 웨이트리스와 시비, 스모더스 브라더스를 괴롭히다 퇴장당하는 등 사건을 일으켜 머리기사를 장식했습니다.
1974년 초에 레논은 술을 심하게 마셨으며, 해리 닐슨과의 만취 사건으로 머리기사를 장식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두 사건은 트루바두르 클럽에서 3월에 일어난 일입니다. 첫 번째는 레논이 이마에 생리대를 놓고 웨이트리스와 실랑이를 벌인 것이고, 두 번째는 2주 후 레논과 닐슨이 같은 클럽에서 스모더스 브라더스를 괴롭히다 퇴장한 것입니다.
[음반 《Walls and Bridges》 발표 및 솔로곡 빌보드 핫 100 1위]
음반 《Walls and Bridges》를 발표했습니다. 이 앨범의 수록곡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는 그의 솔로 경력 중 유일하게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엘튼 존이 백 보컬과 피아노를 담당했습니다.
뉴욕에 다시 돌아온 레논은 《Walls and Bridges》를 녹음했고, 이는 1974년 10월에 발매됐습니다. 엘튼 존이 백 보컬과 피아노를 담당한 수록곡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의 싱글은, 레논이 솔로 경력 때 발표한 것 중 유일하게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음반에서 나온 두 번째 싱글 〈#9 Dream〉은 연말 전에 발매됐습니다. 링고의 《Goodnight Vienna》(1974)에서 레논은 타이틀 곡을 쓰고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엘튼 존 콘서트 특별 게스트 출연]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엘튼 존의 추수감사절 콘서트에 특별 게스트로 참여했습니다. 엘튼과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가 1위에 오르면 공연에 참가하겠다는 내기를 지킨 것입니다.
11월 28일, 레논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엘튼 존의 추수감사절 콘서트에 특별 게스트로 참여했습니다. 엘튼과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가 1위에 오르면 공연에 참가할 것이라고 서로 내기했고, 레논은 이 약속을 지켰습니다. 레논은 공연에서 '폴이라고 불리는 나의 떨어져 있는 오랜 약혼자의 노래.'라고 소개하면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과 〈I Saw Her Standing There〉를 연주했습니다.
1975
[데이비드 보위의 〈Fame〉 공동 작곡 및 엘튼 존 커버곡 1위]
데이비드 보위의 미국 첫 1위 곡 〈Fame〉을 함께 작곡했으며, 녹음에서 기타 연주와 백 보컬을 맡아주었습니다. 같은 달 엘튼 존이 커버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도 차트 1위를 차지했습니다.
레논은 데이비드 보위의 미국 첫 1위 곡 〈Fame〉을 함께 작곡했으며, 1975년 1월에 이루어졌던 녹음에서 기타 연주와 백 보컬을 맡아주었습니다. 같은 달, 엘튼 존은 자신이 커버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로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여기서 '닥터 윈스턴 오'부기'라는 가명으로 참여한 레논은 기타 연주와 백 보컬을 담당했습니다.
[오노 요코와 재회]
오노 요코와 재회하여 '잃어버린 주말'이라 불리는 별거 기간을 끝냈습니다. 오노는 그에게 금연이 가능한 방법을 찾았다고 말하며 재회를 유도했습니다.
메이 팡은 오노에게 자신과 레논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노는 그녀에게 레논과 육체적 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하면서 '그는 널 굉장히 좋아해'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논과 팡은 캘리포니아로 이사갔고 레논이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부른 18개월 동안 동거했습니다. 1975년 1월, 레논은 금연이 가능한 방법을 찾았다고 말한 오노의 말을 계기로 그녀와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와 해후한 레논은 귀가하거나 팡과 연락을 취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다음 날 팡이 전화를 걸자, 오노는 레논이 최면 요법으로 인해 피곤해서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틀 뒤 레논을 함께 예약한 치과에서 만난 그녀는 그가 세뇌를 당했다고 의심될 정도로 몽롱하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레논은 팡에게 오노와의 분가는 이제 끝났지만, 오노가 그녀를 정부로서 계속 만날 수 있게 해줬다고 말했습니다.
[커버 음반 《Rock 'n' Roll》 발매]
커버 음반 《Rock 'n' Roll》을 발매했습니다. 이 앨범은 미국과 영국에서 히트했지만, 이후 5년 동안은 싱글을 발매하지 않았습니다.
오노와 다시 만난 레논은 커버 음반 《Rock 'n' Roll》(1975)을 발매했으며, 2월에 나온 싱글 〈Stand by Me〉는 미국과 영국에서 히트했고, 이후 5년 동안은 싱글을 발매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무대 출연]
ATV 스페셜 방송 《A Salute to Lew Grade》에서 마지막 무대 출연을 했습니다. 이 공연에서 어쿠스틱 기타와 밴드와 함께 〈Stand by Me〉, 〈Slippin' and Slidin'〉, 〈Imagine〉을 공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무대 출연을 ATV 스페셜 방송 《A Salute to Lew Grade》에서 했으며, 이는 4월 18에 녹음되어 6월에 방송되었습니다. 어쿠스틱 기타와 반주를 담당한 8인조 밴드와 함께 레논은 《Rock 'n' Roll》의 〈Stand by Me〉, 〈Slippin' and Slidin'〉(두 곡 모두 방송되지 않음)와 〈Imagine〉을 공연했습니다. 여기서 함께한 'Etc.'라는 밴드는 머리 뒤에 가면을 썼는데, 이는 그레이드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레논의 아이디어에서 착상한 것입니다.
[컴필레이션 음반 《Shaved Fish》 발매]
EMI/캐피틀과의 계약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이전에 녹음된 노래를 담은 컴필레이션 음반 《Shaved Fish》를 발매했습니다.
그달에 EMI/캐피틀과 한 계약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이전에 녹음된 노래를 담은 컴필레이션 음반 《Shaved Fish》을 발매했습니다.
[둘째 아들 숀 레논 출생 및 음악 활동 중단]
둘째 아들 숀 레논이 제왕 절개를 통해 출생했습니다. 레논은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5년간 음악 경력에 공백을 냈습니다.
둘째 아들 숀 레논이 1975년 10월 9일에 출생했고, 레논은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5년간 경력에 공백을 냈습니다. 그달에 EMI/캐피틀과 한 계약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이전에 녹음된 노래를 담은 컴필레이션 음반 《Shaved Fish》을 발매했습니다. 레논은 매일 6시에 일어나 숀의 밥을 준비하고 그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1976
이민 당국과의 계속되는 법적 전투에 집중한 레논은 결국 미국 영주권을 거부당했으나 1976년 이후 풀렸습니다. 레논은 자신의 영주권을 증명하는 '그린 카트'를 받았습니다.
[폴 매카트니의 마지막 방문 및 재결성 제안 거부]
폴 매카트니가 마지막으로 레논을 방문했습니다. 둘은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서 비틀즈 재결성 시 3,000달러를 주겠다는 제안을 시청했으나, 너무 피곤하여 스튜디오 방문을 포기했습니다.
매카트니가 레논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1976년 4월에 둘은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에피소드를 시청했는데, 진행자인 론 마이클스가 이 쇼에서 비틀즈가 재결성하면 3,000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둘은 스튜디오를 방문해서 돈을 받아 나누는 것도 고려하였으나 너무 피곤해서 그만두었습니다.
[링고 스타 음반 참여]
링고 스타의 음반 《Ringo's Rotogravure》의 수록곡 〈Cookin' (In the Kitchen of Love)〉를 쓰고 녹음했습니다. 이는 1980년까지 그의 마지막 녹음 세션이었습니다.
그는 링고의 음반 《Ringo's Rotogravure》(1976)의 수록곡 〈Cookin' (In the Kitchen of Love)〉를 쓰고 6월에 녹음했습니다. 이는 1980년까지 그의 마지막 녹음 세션이 됩니다.
1977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1977년 1월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레논과 오노는 취임 축하 무도회에 참석했습니다.
[음악 활동 중단 선언]
도쿄에서 '아기에게 최대한 전념할 것이며,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고 느끼면 그때 무언가 만들 시간을 할애하겠다'며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습니다.
1977년 6월, 레논은 도쿄에서 '우리는 이보다 좋을 수 없을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아기에게 최대한 전념할 것이고,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고 느끼면 그 때 무언가 만들 시간을 할애하겠다.'며 음악을 그만두겠다 선언했습니다. 이 공백기에 그는 일련의 그림을 그렸고, 자서전 요소와 그가 '미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을 혼합하여 책을 저술했습니다.
1980
[음악 활동 복귀 및 싱글 발표]
싱글 〈(Just Like) Starting Over〉를 발표하며 5년 만에 음악 활동에 복귀했습니다. 이 곡은 그가 새롭게 안정된 가족에게서 느끼는 만족감을 반영했습니다.
레논은 1980년 10월에 싱글 〈(Just Like) Starting Over〉을 발표하며 복귀했고, 그 다음 달에 오노와 함께 공동으로 정규 음반 《Double Fantasy》를 발표했습니다. 이 음반에는 6월에 43피트 크기의 항해선을 타고서 버뮤다를 여행하는 동안 쓴 곡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곡은 레논이 새롭게 안정된 가족을 가짐으로서 느끼는 만족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노 요코와 공동 음반 《Double Fantasy》 발표]
오노 요코와 공동으로 정규 음반 《Double Fantasy》를 발표했습니다. 이 음반은 그가 가족과 함께 느끼는 만족감을 반영했으나, 처음에는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레논은 1980년 10월에 싱글 〈(Just Like) Starting Over〉을 발표하며 복귀했고, 그 다음 달에 오노와 함께 공동으로 정규 음반 《Double Fantasy》를 발표했습니다. 이 음반에는 6월에 43피트 크기의 항해선을 타고서 버뮤다를 여행하는 동안 쓴 곡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곡은 레논이 새롭게 안정된 가족을 가짐으로서 느끼는 만족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충분한 곡들이 다음 음반 《Milk and Honey》를 위해 녹음됐다(사후인 1984년에 발표됨). 《Double Fantasy》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멜로디 메이커》는 '관대하기 짝이 없이 무미건조하다 ... 지독하게도 따분하다'고 평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환경미화원 파업 지원 성명 발표]
샌프란시스코의 환경미화원 파업을 지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오노와 함께 12월 14일 노동자 시위에 동참할 계획이었습니다.
레논이 마지막으로 정치 활동을 벌인 것은 1980년 12월 5일 샌프란시스코의 환경미화원 파업을 지원하는 성명서였습니다. 그와 오노는 12월 14일 노동자 시위에 동참할 계획이었습니다.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에게 피살]
오후 10시 50분경, 뉴욕 다코타 아파트에 돌아왔을 때 비틀즈의 팬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쏜 총탄에 맞아 4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이날 저녁, 그는 채프먼을 위해 《Double Fantasy》에 사인해 주었습니다.
1980년 12월 8일, 오후 10시 50분경(EST) 레논과 오노는 뉴욕에 위치한 다코타 아파트에 돌아왔습니다.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은 아파트의 아치에서 레논의 등을 향해 총으로 네 발을 쐈습니다. 레논은 근처에 있는 루즈벨트 병원 응급실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도착 시간인 11시경에 4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 날 저녁, 레논은 채프먼을 위해 《Double Fantasy》에 싸인을 해 주었습니다. 오노는 그 날 '존을 위한 장례식은 없다'고 말했고, '존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부디 그를 위해 똑같이 기도해주세요.'라고 끝맺었습니다. 레논의 시신은 뉴욕 시 하츠데일 펀클리프 묘지에서 화장되었으며, 오노는 레논의 재를 뉴욕 센트럴 파크에 흩뿌렸습니다.
1981
[《Double Fantasy》 그래미상 올해의 앨범 수상]
《Double Fantasy》 앨범이 그래미상 '올해의 앨범'을 수상했습니다.
레논의 베스트셀링 앨범 《Double Fantasy》는 1981년 그래미상 올해의 앨범을 수상했습니다.
1982
1982년 레논은 브릿 어워드 우수기여상을 수상했습니다.
1984
[사후 음반 《Milk and Honey》 발표]
오노 요코와 함께 작업한 사후 음반 《Milk and Honey》가 발표되었습니다. 이 앨범은 그가 사망하기 전에 녹음된 곡들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충분한 곡들이 다음 음반 《Milk and Honey》를 위해 녹음됐다(사후인 1984년에 발표됨).
1987
레논은 사후인 1987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비틀즈의 멤버로서, 솔로 아티스트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2회 헌액되었습니다.
1994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솔로)]
솔로 아티스트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비틀즈 멤버로서도 헌액되어 총 2회 헌액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레논은 사후인 1987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비틀즈의 멤버로서, 솔로 아티스트로서 199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2회 헌액되었습니다.
1999
[〈Imagine〉,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사로 선정]
'국립 시의 날'에 BBC가 진행한 여론 조사에서 그의 노래 〈Imagine〉이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사로 선정되었습니다.
1999년 '국립 시의 날'(National Poetry Day)에서 BBC가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확인하기 위해 여론 조사를 한 결과 〈Imagine〉이 선정되었습니다.
2002
2002년에는 레논의 고향에 위치한 공항의 이름이 리버풀 존 레논 공항(Liverpool John Lennon Airport)로 바뀌었습니다.
2002년 BBC가 여론 조사한 영국의 가장 위대한 100인에서 레논은 8위에 올랐습니다.
2003
[《롤링 스톤》 '위대한 음반 500장' 선정]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500장'에서 그의 음반 《John Lennon/Plastic Ono Band》는 22위, 《Imagine》은 76위를 차지했습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롤링 스톤》은 레논의 예술과 음악에 대해 여러 리뷰를 게재했고, 그의 음반인 《John Lennon/Plastic Ono Band》와 《Imagine》은 롤링 스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500장'에서 각각 22위와 76위를 차지했습니다.
2008
[《롤링 스톤》 '가장 훌륭한 가수' 및 '위대한 아티스트' 선정]
《롤링 스톤》이 선정한 '가장 훌륭한 가수 100명'에서 5위, '위대한 아티스트 100명'에서 38위에 올랐습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롤링 스톤》은 레논의 예술과 음악에 대해 여러 리뷰를 게재했고, 100명의 가장 훌륭한 가수에서 5위에, 100명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에서 38위에 선정되었습니다.
2010
[존 레논 평화비 제막]
레논 탄생 70주년을 맞아 리버풀 차바스 공원에 'Peace & Harmony'라는 제목의 존 레논 평화비가 세워졌습니다.
2010년에는 레논 탄생 70주년을 맞이하여 신시아와 줄리언 레넌에 의해 리버풀 차바스 공원에 존 레논 평화비가 세워졌습니다. 'Peace & Harmony'라는 제목의 이 기념비는 평화를 상징하고, '생명의 보전을 위한 지구 상의 평화 · 존 레논을 기리며 1940–1980'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2013
2013년 12월, 국제 천문학 연합회는 수성의 분화구 중 하나를 그의 이름 '레논'을 따서 명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