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해리슨
음악가, 기타리스트,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비틀즈 멤버, 솔로 아티스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15:33
조지 해리슨은 전설적인 밴드 비틀즈의 '조용한 비틀'로, 그의 음악적 재능과 인도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로 비틀즈의 음악 세계를 확장했다. 솔로 활동에서도 성공적인 앨범과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 같은 선구적인 자선 공연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차례 헌액된 불멸의 음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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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아일랜드계 카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는 상점 점원이었고, 아버지는 화이트 스타 라인 급사에서 버스 차장으로 일했다. 어머니는 음악 팬으로 조지 임신 중 '라디오 인디아'를 들으며 시타르와 타블라 소리가 아기에게 평온을 주길 바랐다고 한다. 리버풀 아놀드 그로브 12번지 연립 주택에서 6년간 살다가 1949년 스피크 업턴 그린 25번지로 이사했다.
1956
[로큰롤에 빠져들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을 듣고 로큰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버지가 네덜란드제 에그몬드 플랫 탑 어쿠스틱 기타를 사주었다.
1956년 초, 자전거를 타다 인근 집에서 흘러나온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을 들으며 로큰롤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학교 교과서에 기타를 그리곤 할 정도로 기타에 완전히 빠졌으며, 아버지에게 네덜란드제 에그몬드 플랫 탑 어쿠스틱 기타를 선물받았다. 아버지 친구에게 기타 연주를 배웠고, 동생 피터와 친구 아서 켈리와 함께 스키플 그룹 '반란군'을 조직했다.
1958
[비틀즈의 전신, 쿼리맨에 합류]
폴 매카트니의 추천으로 존 레논이 이끄는 스키플 그룹 쿼리맨의 오디션을 보았고, 처음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으나 재도전 끝에 합류했다.
학교 버스에서 폴 매카트니와 음악적 공통점을 발견하며 친해졌고, 매카트니의 주선으로 존 레논이 속한 쿼리맨 오디션을 보았다. 처음에는 레논이 15세의 해리슨이 너무 어리다고 여겼으나, 매카트니의 설득으로 두 번째 오디션에서 기타 실력을 인정받아 그룹에 합류하게 되었다.
1960
[비틀즈, 함부르크에서 음악적 성장]
'비틀즈'라는 이름으로 함부르크에서 첫 투어를 시작하며 집중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고, 훗날 '조용한 비틀'로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 '비틀즈'라는 이름으로 밴드 멤버들과 함께 함부르크의 클럽에서 연주하며 즉흥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 토니 쉐리던의 백 밴드로 활동하며 기타 수업도 받아 자신만의 사운드와 조용한 성격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미성년자였던 해리슨은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투어가 조기 종료되기도 했다.
1963
[비틀즈, 비틀마니아를 일으키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매니지먼트와 EMI와의 계약을 통해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를 발표하며 전 세계적인 '비틀마니아'의 시작을 알렸다.
1961년 12월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면서 밴드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EMI와 녹음 계약을 맺었다. 첫 싱글 "Love Me Do"는 레코드 차트 17위를 기록했으며, 1963년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가 발표되면서 전 세계를 강타하는 '비틀마니아'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 앨범 《With the Beatles》(1963)에는 해리슨이 처음으로 작곡한 솔로곡 "Don't Bother Me"가 수록되었다.
1965
1965년 6월 4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의해 비틀즈 멤버들과 함께 대영 제국 훈장(MBE)을 받았다. 이는 음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서구 팝 음악에 시타르를 도입]
비틀즈의 앨범 《Rubber Soul》에 실린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에 시타르를 사용하여 서구 대중음악에 인도 악기를 최초로 도입했다.
1965년 발매된 비틀즈의 앨범 《Rubber Soul》에서 해리슨은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에 시타르를 사용하여 인도 고전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이는 서구 팝 음악에 인도 악기가 사용된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는 또한 "If I Needed Someone"과 "Think for Yourself"를 이 앨범에 기여했다.
1966
1966년 1월 21일, 조지 해리슨은 모델인 패티 보이드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1977년 이혼으로 끝났다.
1967
[힌두교와 초월 명상에 심취]
밴드와 함께 초월 명상을 시작하고 헤어 크리슈나 운동과 관계를 발전시키며 힌두교 신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1967년 비틀즈 멤버들과 함께 초월 명상을 시작한 조지 해리슨은 이후 헤어 크리슈나 운동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며 힌두교 신화와 명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는 그의 음악적, 개인적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 커버에 동양의 구루와 종교적 지도자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1968
[비틀즈 멤버 최초 솔로 앨범 발매]
비틀즈 멤버 중 최초로 솔로 앨범 《Wonderwall Music》을 발표하며 애플 레코드의 첫 LP를 기록했다.
1968년 11월, 조지 해리슨은 영화 《원더월》의 사운드트랙인 《Wonderwall Music》을 발표하며 비틀즈 멤버 중 처음으로 솔로 앨범을 냈다. 이 앨범은 인도 음악과 서양 악기를 결합한 기악곡이 주를 이뤘으며, 애플 레코드에서 발매된 첫 번째 LP이기도 하다. 같은 해 무그 신디사이저가 특징인 실험적인 앨범 《Electronic Sound》도 발매했다.
1969
["Something", 비틀즈 첫 A면 1위 곡 등극]
비틀즈의 마지막 정규 앨범 《Abbey Road》에 수록된 "Something"이 그의 첫 A면 싱글이자 처음으로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곡이 되었다.
1969년 발매된 비틀즈의 마지막 정규 앨범 《Abbey Road》에 수록된 조지 해리슨의 곡 "Here Comes the Sun"과 "Something"은 큰 존경을 받았다. 특히 "Something"은 더블 A 싱글의 절반에 수록되어 해리슨의 첫 A면 노래이자 차트 1위를 기록하는 곡이 되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 곡을 "지난 50년간 나온 것 중 가장 훌륭한 사랑 노래"라고 극찬했다.
1970
[비틀즈 해체 후 첫 트리플 앨범 《All Things Must Pass》 대성공]
비틀즈 해체 후 자신의 가장 성공한 싱글 "My Sweet Lord"와 함께 트리플 앨범 《All Things Must Pass》를 발표하며 솔로 경력을 화려하게 시작했다.
비틀즈 시절 음반에 자신의 곡이 제한적으로 수록된 것에 대한 해리슨의 해소를 반영하듯, 1970년 그는 두 장의 디스크에 자신의 곡을, 세 번째 디스크에는 친구들과의 재밍 세션 녹음을 담은 트리플 앨범 《All Things Must Pass》를 발표했다. 이 음반은 전 세계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히트 싱글 "My Sweet Lord"와 상위 10위 싱글 "What Is Life"를 포함했다. 필 스펙터와 공동 프로듀싱했으며, 여러 유명 음악가들이 참여하여 극찬을 받았다.
1971
[세계 최초의 대규모 자선 콘서트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 기획]
라비 샹카르의 요청으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기간 굶주린 난민들을 돕기 위한 세계 최초의 대규모 자선 콘서트인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를 기획했다.
1971년 8월 1일, 인도 음악가 라비 샹카르의 요청에 따라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두 차례 공연을 통해 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를 기획했다. 이 행사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으로 인한 난민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이 목표였다. 딜런, 클랩턴, 러셀, 스타 등 당대 최고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진행되었으며, 이는 라이브 에이드와 같은 대규모 자선 록 콘서트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74
[다크 호스 레코드 창립]
비틀즈의 애플 음반사 계약 만료 후 자신의 음반사인 다크 호스 레코드를 창립하여 독립적인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1974년,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의 애플 음반사와의 계약이 만료된 후 자신의 레코드 레이블인 다크 호스 레코드를 창립했다. 이를 통해 더욱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자신의 첫 북미 투어인 '다크 호스 투어'를 진행했으나, 여러 논란과 건강 문제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77
1966년 결혼했던 모델 패티 보이드와 1977년 이혼했다.
1978
조지 해리슨은 1978년 핸드메이드 필름을 공동 창립하며 음악 활동 외에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 회사는 후에 여러 성공적인 영화를 제작하며 영국 영화 산업에 기여했다.
1978년, 올리비아 아리아스와 결혼하여 아들 다니 해리슨을 얻었다. 아들의 탄생은 해리슨이 일보다 가족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80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이 피살당하자, 조지 해리슨은 정서적으로 불안해졌고 큰 상심을 겪었다. 그는 "우리가 함께 이 모든 것들을 겪은 뒤에도 전, 여전히 존 레논을 대단히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전 충격을 받고 멍해졌어요."라고 말했다.
1987
[《Cloud Nine》으로 화려한 부활]
플래티넘을 기록한 앨범 《Cloud Nine》을 발표하고, 수록곡 "Got My Mind Set on You"가 미국 차트 1위, 영국 차트 2위를 차지하며 솔로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1987년 11월, 조지 해리슨은 제프 린과 공동 프로듀싱한 플래티넘 앨범 《Cloud Nine》을 발표하며 음악계에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앨범에 수록된 제임스 레이의 커버곡 "Got My Mind Set on You"는 미국 차트 1위, 영국 차트 2위에 오르며 큰 인기를 얻었고, 뮤직비디오 또한 높은 방송 횟수를 기록했다. "When We Was Fab" 등의 다른 싱글들도 성공하며 비평과 대중의 찬사를 받았다.
1988
[슈퍼그룹 트래블링 윌버리스 결성]
밥 딜런, 제프 린, 로이 오비슨, 톰 페티와 함께 슈퍼그룹 '트래블링 윌버리스'를 결성하고 첫 앨범 《Traveling Wilburys Vol. 1》을 발표했다.
1988년, 조지 해리슨은 밥 딜런, 제프 린, 로이 오비슨, 톰 페티와 함께 슈퍼그룹 '트래블링 윌버리스'를 결성했다. 이들은 딜런의 차고에서 유럽 발매 싱글을 녹음하려다가 음반사의 요청으로 정규 앨범을 만들게 되었다. 1988년 10월, 이복형제들이 발표한 앨범이라는 설정을 가진 《Traveling Wilburys Vol. 1》을 출시했으며, 해리슨은 '넬슨 윌버리'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오비슨의 사망 이후에도 4인조로 《Traveling Wilburys Vol. 3》를 발표했으나, 라이브 공연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994
['비틀즈 앤솔로지' 프로젝트 참여]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제프 린과 함께 '비틀즈 앤솔로지' 프로젝트에 착수, 존 레논의 미발표 테이프를 기반으로 새로운 비틀즈 노래를 제작했다.
1994년, 조지 해리슨은 남은 비틀즈 멤버들인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그리고 프로듀서 제프 린과 함께 '비틀즈 앤솔로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존 레논이 녹음한 솔로 보컬과 피아노 테이프를 바탕으로 두 개의 새로운 비틀즈 노래를 제작하고, 비틀즈 활동에 대한 장시간 인터뷰를 담았다. 1995년 "Free as a Bird"가, 1996년 3월 "Real Love"가 발매되었으나, 해리슨은 세 번째 곡 완성에는 참여를 거부했다.
1997
1997년, 조지 해리슨은 후두암 진단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당시에는 성공적으로 예상되었으나, 그는 이 병이 수년간의 흡연 때문이라고 비난받았다.
1999
[자택에서 침입자에게 피습]
프리어 공원의 자택에 침입한 팬에게 부엌칼로 피습당했으나, 아내 올리비아의 용감한 대처로 위기를 넘겼다.
1999년 12월 30일, 조지 해리슨과 아내 올리비아는 프리어 공원에 위치한 자택에서 마이클 아브라함이라는 36세 팬의 공격을 받았다. 침입자는 부엌칼로 해리슨을 찔렀고, 폐에 구멍이 나고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아내 올리비아가 부지깽이와 램프로 침입자를 여러 번 내리찍어 제압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해리슨은 40군데가 넘는 자창으로 입원했다.
2001
2001년 5월, 조지 해리슨은 폐 중 하나에서 암종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2001년 7월, 조지 해리슨은 스위스 병원에서 뇌종양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 링고 스타가 방문했으나, 딸의 뇌 수술로 인해 급히 보스턴으로 떠나야 했다.
2001년 11월 29일, 조지 해리슨은 로스앤젤레스의 친구 집에서 58세의 나이로 폐암으로 사망했다. 11월 12일에는 뉴욕에서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와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힌두교 전통에 따라 인도의 갠지스강과 야무나강에 뿌려졌다. 약 1억 파운드의 유산을 남겼다.
2002
[유작 앨범 《Brainwashed》 발매]
사후 유작 앨범 《Brainwashed》가 아들 다니와 제프 린에 의해 완성되어 발매되었다.
2002년, 조지 해리슨의 마지막 앨범인 《Brainwashed》가 그의 아들 다니 해리슨과 제프 린의 도움으로 완성되어 발매되었다. 이 앨범의 라이너 노트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란 없으며,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들도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느니라. 또한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는 바가바드 기타의 인용문이 담겨 있다. 싱글 "Stuck Inside a Cloud"는 빌보드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 27위에 올랐다.
2004
[로큰롤 명예의 전당 솔로 헌액]
비틀즈 멤버로서 1988년에 이미 헌액되었던 그는 사후인 2004년에 솔로 아티스트로서 다시 한번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조지 해리슨은 1988년 비틀즈 멤버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그의 사후인 2004년에는 솔로 아티스트로서 두 번째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