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고 차베스
정치인, 군인, 대통령, 사회주의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11:15
우고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의 제48대 대통령으로,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볼리바르 혁명'을 주도하며 사회주의 추진과 라틴 아메리카 통합을 지향했고, 미국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반미주의자로 알려졌다. 빈민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1998년 당선되어 2012년까지 4선에 성공했다. 대규모 사회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했으나, 경제 위기 및 민주주의 침해 비판도 받았다. 2013년 암 투병 중 사망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우고 차베스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954
바리나스 주 사바네타에서 교사 부부였던 아버지 우고 데 로스 레예스 차베스와 어머니 엘레나 프리아스 차베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인, 에스파냐인의 피가 흐른다. 어릴 적 형과 함께 사바네타로 보내져 친할머니 로사 이네스 차베스와 함께 살았고, 훌리안 피노 초등학교를 다녔다.
1971
17살이 되었을 때 군사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그의 정열적인 교수법과 베네수엘라 정부와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5
[군사학 학위 취득 및 중위 임관]
군사학 학위를 취득하고 중위로 졸업하여 몇 달 간 복무를 하였으며, 이후 카라카스의 시몬 볼리바르 대학에서 정치학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
군사학 학위를 취득하고 중위로 졸업하여 몇 달 간 복무를 하였다. 이후 카라카스의 시몬 볼리바르 대학에서 정치학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였으나 학위를 취득하지 않은 채 대학을 떠났다.
1980
[군 생활 회의감 극복 및 군 잔류 결정]
군 복무 중 수구적이고 부패한 군 내부 상황에 회의를 느껴 퇴역을 고민했으나, 형의 도움으로 게릴라 사령관 더글라스 브라보를 만나 조언을 듣고 군에 남기로 결정했다.
군 생활 도중, 수구적이고 부패한 군 내부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는 군 생활에 회의를 느꼈고, 퇴역할 목적으로 형인 아단 차베스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논하는 도중 형의 도움으로 게릴라 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브라보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그에게서 그나마 깨끗한 사람들이 군을 장악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군에 계속 남기로 결정했다. 이 기간 동안 차베스는 볼리바리안 주의를 따르는 혁명 볼리바리안 운동-200(MBR-200)을 조직하였다.
1992
[1992년 쿠데타 시도 및 실패]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행정부의 민중 불만과 경제 후퇴에 응답하여 시민사회 및 민간인 단체와 합세해 개혁적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이때 "지금으로서는 실패한 것일 뿐"이라는 발언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행정부 치하에서 누적된 민중 불만과 경제 후퇴에 응답하여 차베스는 시민사회, 민간인 단체와 합세하여 개혁적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MBR-200 주도 하의 쿠데타 날짜는 원래 1991년 12월로 잡았으나 새벽으로 연기하였다. 차베스 지휘 하의 군대 다섯 부대는 다수의 군사 목표물 및 통신망 점령을 목표로 카라카스 도심지로 진격하였고, 페레스 대통령을 사로잡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군 10% 미만의 세력만이 차베스의 명령을 따랐고, 수많은 배반과 실수로 인해 쿠데타는 실패했다. 격전 중 14명의 병사가 사망하고 50명의 병사와 80명의 시민이 부상당했다. 쿠데타 실패를 예측한 차베스는 불필요한 유혈충돌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정부군에 체포되었다. 정부는 반란 세력들이 투쟁을 중단하도록 차베스가 공영 방송국에 출연하는 것을 허락했으며, 차베스는 "지금으로서는" 실패한 것일 뿐이라는 말을 슬쩍 집어넣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수많은 베네수엘라 빈민은 그를 정부 부정부패에 맞설 수 있는 인물로 인식하게 되었다.
1994
[2년 수감 후 사면]
쿠데타 실패로 2년간 투옥된 후 라파엘 칼데라 대통령으로부터 사면받아 석방되었다. 이후 MBR-200을 제5공화국운동(MVR)으로 재편하며 정계 진입을 준비했다.
2년 간의 투옥 생활 이후 라파엘 칼데라 대통령으로부터 사면받았다. 감옥에서 풀려난 차베스는 MBR-200을 제5공화국운동(MVR - Movimiento Quinta República)으로 조직하였다. 이후 대선을 겨누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1997
제5공화국운동(Fifth Republic Movement)을 창당하였다.
1998
[제48대 베네수엘라 대통령 당선]
빈곤 노동 계급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아 카터 센터가 승인한 대통령 선거에서 56%의 지지를 받아 제48대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차베스는 자신의 카리스마와 투박한 연설 스타일을 통하여 빈곤 노동 계급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5월과 8월 사이에 차베스의 지지도는 30%에서 39%로 급상승하였다. 그는 카터 센터가 승인한 대통령 선거에서 56%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1999
[제48대 대통령 취임]
대통령으로 선서하며 베네수엘라의 경제 쇠퇴를 극복하고 국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임무를 맡았다. 첫 임기 동안 신법 제정과 헌법 개혁, 사회 복지 프로그램 확대를 추진했다.
선서식을 거쳐 베네수엘라의 경제 쇠퇴기를 극복하고 제계에 국가가 미치는 영향력을 강화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임기의 첫 수 달 동안 신법 제정과 헌법 개혁을 통해 양당체제를 해체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며, 이차적으로 사회 및 복지 프로그램에 추가적인 정부 자금을 배당하는 활동을 벌였다.
[제헌의회 소집 국민투표 승인]
국회의 반대에 부딪히자 기존 정당 다툼의 공화국을 교체할 "새로운 공화국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제헌의회 소집 국민투표를 승인했고, 72%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중반에 들어서 차베스의 빈곤 퇴치 캠페인에 반대하는 국회의 야당 의원들은 차베스의 입법안들을 저지하였다. 차베스는 이들 저항 세력을 넘어서기 위하여 본인이 당선된 지 몇 달 안 된 시기에 전국 선거를 승인하였다. 첫 선거는 제헌의회를 소집 할지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였다. 이 제헌 의회는 차베스의 정치 이념에 더 근접하는 새로운 베네수엘라 헌법을 만드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제헌 국민투표는 CNE의 심사 하에 72% 지지를 받아 통과되었다.
[새 헌법 국민투표 통과]
350개 조항으로 구성된 새 베네수엘라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되었다. 국명을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공화국"으로 변경하고 대통령 임기 연장 및 권한 강화, 단원제 국회 전환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제헌 의회는 베네수엘라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350개 조항을 가진 이 헌법은 세계에서 가장 긴 헌법 중 하나였다. 제일 먼저 도입된 변경 사항은 국명을 "베네수엘라 공화국"에서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공화국"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또한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6년으로 늘렸으며 동일 대통령직 연속 수행을 한번 연속에서 두 번 연속 수행으로(총 18년) 바꾸고 대통령 탄핵 국민투표를 가능케 했다. 이러한 국민투표는 최소 서명을 받아야 가능하다. 대통령직은 국회를 해산할 권한을 받는 등 강력한 직위로 바뀌었다. 새로운 헌법은 예전의 양원(하원과 상원으로 이루어진) 국회를 일원 국회로 바꾸고 권한을 축소하였다. 또한 대통령과 국회 그리고 헌법을 감시할 권한을 부여받는 검찰직을 탄생시켰다. 이 헌법은 제안되어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2000
[제48대 대통령 재선 성공]
새 헌법 하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60%의 지지를 받아 재선에 성공하며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새 국회 총선이 이루어졌다. 동시에 차베스는 새 헌법 하에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차베스의 연합 세력은 국회의 2/3를 쟁취했으며 차베스 본인은 60%의 지지를 받아 재선에 성공했다. 카터 센터는 정치적 경황 상 CNE의 공식 결과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으나 이후 선거 결과는 민심을 반영했다고 결론지었다.
2001
[권한부여법을 통한 주요 법안 제정]
"권한부여법"에 따라 부여받은 입법 권한을 활용하여 임기 만료 직전, 탄화수소법과 토지법 등 49개 행정부 조치를 내려 법을 만들었다. 이는 전국 상공회와 노동 총 연맹의 반발을 샀다.
선거 이후 차베스는 국회가 "권한부여법"을 통과시키는 것을 지지하였다. 이 법에 의하여 차베스는 일 년간 행정부 조치를 이용해 직접 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 법이 만료되기 직전 차베스는 49개 행정부 조치를 내려 법을 만들었다. 탄화수소법과 토지법 등이 대표적인 법이며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참고하라. 전국 상공회인 Fedecamaras와 노동 총 연맹인 CTV가 이들 법안에 반대하여 총파업을 제안했다.
2002
[반차베스 총파업 및 쿠데타 시도]
베네수엘라 노총 지도자 카를로스 오르테가가 이틀간의 총파업을 개시했으며, 대규모 시위가 대통령궁으로 향하던 중 폭력이 발생했다.
베네수엘라 노총(CTV) 지도자 카를로스 오르테가은 이틀간 총파업을 개시했다. 약 50만 명의 시위자들이 가두로 나서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 회사(PDVSA)로 행진해 해고당한 관리의 복구를 요구했다. 시위 조직가들은 행진을 친차베스 시위대가 집결 중이던 대통령궁 미라플로레스으로 보내기로 했다.
[우익 세력 쿠데타 발생]
반차베스 시위 도중 총기 난사 등 폭력이 발생했고, 군 총사령관이 차베스의 사임을 발표하며 페드로 카르모나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카르모나 정부는 차베스 혁명의 정책들을 되돌렸다.
차베스는 오후 내내 국영 방송을 통해 시위 해산을 요청했다. 시위대 사이에서 총기 난사 등 폭력이 발생했으며 이에 야당 출신 시장이 지휘하는 카라카스 경찰청과 차베스의 지휘 하에 있는 국토방위대가 개입했다. 친차베스 시위대와 반차베스 시위대가 밀집해있는 지역에 저격수들의 사격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 군 총사령관 루카스 린콘 로메로는 불시에 전국 방송을 통해 차베스가 대통령직을 사임했다고 발표했다. 차베스는 군사 기지로 끌려가 억류됐으며 군사 지도자들은 상공위장 페드로 카르모나를 베네수엘라의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카르모나의 첫 행정조치는 차베스 "볼리바리안 혁명"의 굵직굵직한 사회 및 경제 정책을 모두 원 위치로 되돌려 놓았다. 이것은 금융 제한 취소와 석유 생산 제한을 원 수준으로 되돌려 놓는 것 따위의 조치를 포함했다. 카르모나는 또한 국회와 사법부를 해산하고 국명을 베네수엘라 공화국으로 되돌렸다.
[민중 봉기로 대통령직 복귀]
카르모나의 신자유주의적 조치에 대한 민중 봉기와 친차베스 병사들의 맞대응 쿠데타로 차베스는 대통령직에 복귀하며 베네수엘라 역사상 가장 짧았던 임시 정부를 종식시켰다.
카르모나의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조치에 친차베스 세력과 전국 규모의 민중 단체들은 민중 봉기로 응답하였다. 친 차베스 병사들은 이들 봉기에 응답하여 대중 지지를 확보하고 맞대응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이들 병사들은 대통령궁을 점령하고 차베스를 해방하였다. 그리하여 베네수엘라 역사상 가장 짧았던 정부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차베스는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2003
[수크레 미션 시작 (무료 고등학교 교육)]
후반기에는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성인 이백만 명에게 무료 고등학교 교육을 제공하는 "수크레 미션"을 시작하여 교육 복지 확대를 추진했다.
후반기 대통령은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성인 이백만 명에게 무료 고등학교 교육을 제공하는 "수크레 미션"을 시작했다.
[로빈슨 미션 시작 (문맹 퇴치)]
대중적 지지 유지를 위해 150만 명의 문맹 성인 인구에게 무료 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치는 "로빈슨 미션"을 추진했다.
대중적 지지를 유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사회 및 경제 캠페인을 시작했다. 150만 명의 문맹 성인 인구에게 무료 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치는 "로빈슨 미션"을 추진했다.
[과카이프로 미션 시작 (원주민 보호)]
베네수엘라의 원주민 생활, 종교, 토지, 문화, 권리를 보호하는 "과카이프로 미션"을 시작했다.
베네수엘라의 원주민 생활, 종교, 토지, 문화 그리고 권리를 보호하는 프로그램인 "과카이프로 미션"을 시작했다.
2004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 부결]
야당이 청구한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59%의 반대표로 부결되어 차베스의 권력을 재확인했다.
6월, 야당은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를 청구한다. 국민투표는 실시되어 59% 반대표로 부결되었다.
2006
[제48대 대통령 3선 성공]
대통령 선거에서 60퍼센트가 넘는 득표율로 마누엘 로살레스 후보를 물리치고 3선에 성공하며 세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60퍼센트 대의 높은 득표율로 도전자인 마누엘 로살레스를 물리치고 3선에 성공했다.
2007
차베스는 연임 제한 철폐, 각종 사회개혁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포함해 모두 69개 조문을 고치기 위해 제안한 개헌안을 내놓았으나 이는 국민투표에 의해 부결됐다.
2009
[연임 제한 철폐 개헌안 국민투표 통과]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의 연임 제한을 철폐한 개헌안을 다시 제안하여 54% 찬성으로 국민투표를 통과시켰다.
2년 뒤 차베스는 다시 개헌안을 내놓았다. 이는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의 연임제한을 철폐한 조항을 담고 있었다. 차베스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2번째 개헌안이 부결될 경우 3번째 개헌시도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2번째 개헌안은 국민투표에서 54% 찬성, 46%의 반대로 통과됐다.
[유엔 인권국, 사법부 독립성 침해 비판]
유엔 인권국은 우고 차베스가 사법부의 독립성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유엔 인권국에서는 우고 차베스가 사법부의 독립성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2012
[제48대 대통령 4선 성공]
대통령 선거에 4번째로 출마하여 엔리케 카프릴레스 후보를 누르고 54%의 득표율로 4선에 성공했다.
차베스는 대통령 선거에 4번째로 출마했다. 상대 후보는 야권통합 후보인 엔리케 카프릴레스(Henrique Capriles) 전 미란다 주지사로 정해졌다. 대선 결과 차베스는 54%의 득표율로 45%의 지지를 받은 카프릴레스를 누르고 당선됐다.
[암 치료를 위해 쿠바로 출국]
4선에 성공한 후 2달이 지난 시점, 지병인 암을 치료하기 위해 쿠바로 떠났으며, 정확한 병명이나 상태는 알려지지 않았다.
4선에 성공한 차베스는 2달이 지난 시점, 지병인 암을 치료하기 위해 쿠바로 떠났다. 차베스의 정확한 병명이나 상태는 알려지지 않았다.
2013
베네수엘라 정부는 성명을 발표해 차베스가 암수술 뒤 폐감염 합병증으로 호흡곤란 상태에 있다고 밝혔다.
[대통령 취임식 무기한 연기]
예정된 대통령 취임식에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고 무기한 연기되었다. 야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베네수엘라 대법원은 이를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예정된 대통령 취임식에도 차베스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야권은 '대통령이 국회 앞에서 취임선서를 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 헌법 조항을 들어 차베스를 비판했지만, 베네수엘라 대법원은 "취임 선서를 하는 것과 새로운 임기를 시작하는 것은 명백한 차이가 있다"며, 대통령 취임식을 연기하는 것이 합헌이라고 밝혔다.
[쿠바 병상 사진 공개]
베네수엘라 정부는 국영TV를 통해 쿠바 병상에 있는 차베스가 두 딸과 함께 웃는 사진을 공개하며 건강 회복세를 알렸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국영TV를 통해 쿠바의 병상에 있는 차베스가 두 딸과 함께 웃는 사진을 공개했다. 정부는 이 사진을 전날 밤에 촬영한 것이라 밝혔다.
[베네수엘라 전격 귀국]
베네수엘라로 전격 귀국하여 건강 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 악화설이 다시 제기되었다.
베네수엘라로 전격 귀국했다. 베네수엘라 언론은 차베스가 걸어서 병원에 도착했다는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이미 차베스의 병세가 심각히 악화됐다고 긴급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우고 차베스 사망]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은 오후, 차베스가 암투병 끝에 향년 59세의 일기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7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차베스 건강 이상설의 실체는 밝혀졌다.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은 이날 오후 4시 25분(현지시간) 차베스가 암투병 끝에 숨졌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차베스가 사망한 뒤 베네수엘라 정부는 7일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으며,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차베스 지지자들은 "차베스는 살아있다" 등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차베스의 시신은 장례식을 마친 뒤 카라카스의 군사학교에 안치될 예정이었다. 헌법에 따라 30일 이내로 대통령선거가 다시 실시되어야 하며, 그 전까지는 마두로 부통령이 대통령 직무대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