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아치볼드 휠러

이론물리학자, 대학교수, 핵무기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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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는 20세기 물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블랙홀', '웜홀', '양자 거품' 같은 혁신적인 개념들을 만들고 대중화했으며, 닐스 보어와 함께 핵분열의 기본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와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하여 역사적 순간들을 함께했으며, 일반 상대성이론의 부활을 이끌고 양자 중력 분야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특히 '비트로부터 그것'이라는 철학적 교리를 통해 우주의 본질과 정보의 관계를 탐구하며 현대 물리학과 철학에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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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존 아치볼드 휠러 탄생]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가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태어났습니다.

존 아치볼드 휠러는 1911년 7월 9일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사서인 조셉 루이스 휠러와 메이블 아치볼드 휠러 사이에서 4명의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1926

[고등학교 졸업]

휠러는 볼티모어 시티 칼리지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26년 볼티모어 시티 칼리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메릴랜드 주 장학금을 받고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30

[첫 과학 논문 발표]

그는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에서 여름 연구의 일환으로 첫 과학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휠러는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ational Bureau of Standards)에서 여름 연구의 일환으로 1930년에 첫 번째 과학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1933

[박사 학위 취득]

칼 헤르츠펠트 지도하에 '헬륨의 분산 및 흡수 이론'에 관한 논문으로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1933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칼 헤르츠펠트의 감독하에 수행된 그의 논문 연구 작업은 '헬륨의 분산 및 흡수 이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934

[브라이트-휠러 프로세스 개념 소개]

그레고리 브라이트와 함께 광자가 전자-양전자 쌍의 형태로 쌍생성될 수 있는 메커니즘인 '브라이트-휠러 프로세스'를 소개했습니다.

1934년 논문에서 브라이트와 휠러는 광자가 전자-양전자 쌍의 형태로 잠재적으로 쌍생성될 수 있는 메커니즘인 브라이트-휠러 프로세스를 소개했습니다.

1937

[S-행렬 개념 도입]

'공명하는 그룹 구조의 방법에 의한 가벼운 핵의 수학적 기술에 대하여' 논문에서 'S-행렬'(산란 행렬)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1937년 논문 '공명하는 그룹 구조의 방법에 의한 가벼운 핵의 수학적 기술에 대하여 (On the Mathematical Description of Light Nuclei by the Method of Resonating Group Structure)'에서 휠러는 S-행렬(산란 행렬의 약자) '적분 방정식의 임의의 특정 해의 점근적 거동을 표준 형식의 해의 점근적 거동과 연결하는 계수의 단일 행렬'을 도입했습니다.

1938

[프린스턴 대학교 부임]

존스 홉킨스 대학의 부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프린스턴 대학교의 조교수직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1976년 은퇴할 때까지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1938년 존스 홉킨스 대학의 부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프린스턴 대학교의 조교수직을 선택했습니다. 지위는 낮았지만 물리학과를 신설하고 있는 프린스턴이 더 나은 직업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976년까지 거기서 교수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1939

[핵분열 메커니즘 공동 설명]

닐스 보어와 함께 액체 방울 모형을 적용하여 핵분열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논문을 《피지컬 리뷰》에 발표했습니다. 이날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날이기도 합니다.

보어와 휠러는 핵분열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액체 방울 모형을 적용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실험 물리학자들은 핵분열을 연구하면서 수수께끼 같은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조지 플라첵은 왜 우라늄이 매우 빠르고 매우 느린 중성자 둘이 모두 분열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보어에게 물었습니다. 휠러와 함께 회의하러 걸어가면서, 보어는 낮은 에너지에서 핵분열은 우라늄-235 동위원소 때문인 반면에, 높은 에너지에서는 주로 훨씬 더 풍부한 우라늄-238 동위원소 때문이라는 통찰력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첫 번째 논문은 《피지컬 리뷰》에 실렸습니다. 당시 그 날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1939년 9월 1일이었습니다.

1940

[단일 전자 우주 가설 제시]

양전자가 시간을 거꾸로 이동하는 전자라는 개념을 고려하여 '단일 전자 우주' 가설을 제시했으며, 이는 리처드 파인만의 파인만 다이어그램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양전자가 시간을 거꾸로 이동하는 전자라는 개념을 고려하여 1940년에 단일 전자 우주(one-electron universe) 가정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대학원생 리처드 파인만은 이것이 믿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으나, 양전자가 시간을 거꾸로 이동하는 전자라는 생각에 흥미를 느꼈고 파인만은 시간의 가역성 개념을 그의 파인만 다이어그램에 통합했습니다.

1942

[맨해튼 프로젝트 합류]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후, 시카고 대학 맨해튼 프로젝트의 야금 연구소에 합류하여 유진 위그너의 그룹에서 원자로 설계를 연구했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휠러는 시카고 대학의 맨해튼 프로젝트 야금 연구소(Metallurgical Laboratory)에 합류해 달라는 아서 콤프턴의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그는 1942년 1월 그곳으로 이사하여 원자로 설계를 연구하고 있던 유진 위그너의 그룹에 합류했습니다.

1943

[핵분열성 물질 연쇄 반응 논문 작성]

플루토늄 정제 과정에서 중요한 '용액 내 순수 핵분열성 물질의 연쇄 반응'에 대해 로버트 F. 크리스티와 공동으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그는 플루토늄 정제 과정에서 중요한 '용액 내 순수 핵분열성 물질의 연쇄 반응'에 대해 로버트 F. 크리스티와 공동으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그것은 1955년 12월까지 비밀 취급이 해제되지 않았습니다.

1944

[핸포드 사이트 근무 시작]

듀폰의 플루토늄 생산 단지 건설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가족을 워싱턴 주 리치랜드로 옮겨 300 지역 과학 건물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듀폰의 임무는 원자로를 건설하는 것뿐만 아니라 워싱턴의 핸포드 사이트에 전체 플루토늄 생산 단지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휠러는 1944년 7월에 가족을 다시 이주했으며 이번에는 워싱턴 주 리치랜드로 옮겨 300 지역으로 알려진 과학 건물에서 일했습니다.

[B 원자로 가동과 핵 독극물 문제 해결]

핸포드 사이트의 첫 원자로인 B 원자로가 가동되었으나, 핵분열 생성물인 제논-135가 연쇄 반응을 방해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핸포드 사이트가 1944년 9월 15일에 3개의 원자로 중 첫 번째 원자로인 B 원자로를 가동하기 전에도 휠러는 일부 핵분열 생성물이 핵독극물로 판명될 수 있으며, 그 축적은 연쇄 반응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많은 열중성자들을 흡수하여 진행 중인 핵 연쇄 반응을 방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원자로가 예기치 않게 정지되고 약 15시간 후에 예기치 않게 다시 시작된 후 그는 반감기가 6.6시간인 요오드-135와 반감기가 9.2시간인 그 딸 생성물인 제논-135를 의심했습니다. 제논-135는 2백 반을 훨씬 넘는 중성자 포획 단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문제는 그 독을 태우기 위해 연료봉을 추가함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

[남동생의 죽음과 전쟁 종식 열망]

이탈리아에서 싸우던 남동생 조셉이 사망하자, 전쟁을 끝내기 위한 핵무기 개발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열망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휠러는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일한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있었던 그의 남동생 조는 그에게 '서둘러.'라는 간단한 메시지가 담긴 엽서를 보냈습니다.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조는 1944년 10월에 사망했습니다. 휠러는 나중에 쓰기를, '우리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핵무기를 만드는 데 매우 가까웠습니다. 나는 그래서 전쟁이 1944년 10월에 끝날 수 있었을 것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그 후에도 그 생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5

[A. 크레시 모리슨 상 수상]

A. 크레시 모리슨 상을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1945년 A. 크레시 모리슨 상을 수상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교로 복귀]

맨해튼 프로젝트가 끝난 후, 휠러와 그의 가족은 프린스턴으로 돌아와 교육 경력을 재개했습니다.

1945년 8월 휠러와 그의 가족은 프린스턴으로 돌아와 교육 경력을 재개했습니다.

1946

[구겐하임 펠로십 수상]

구겐하임 펠로십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6년에 구겐하임 펠로십을 받았고 1949-50 학년도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었습니다.

1949

[우주선 연구소 설립]

뮤온을 핵 탐사선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으며, 프린스턴의 우주선 연구소(Cosmic Rays Laboratory)의 설립자이자 초대 소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뮤온을 핵 탐사선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 논문은 1949년에 작성되어 사적으로 유통되었지만 1953년까지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뮤온이 방출하는 창 복사(Chang radiation)에 대한 일련의 측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뮤온은 우주선의 구성 요소이며, 또한 휠러는 1948년 해군연구청으로부터 미화 37만 5천 달러의 상당한 보조금을 받은 프린스턴의 우주선 연구소(Cosmic Rays Laboratory)의 설립자이자 초대 소장이 되었습니다.

[티옴노 삼각형 소개]

제이미 티옴노와 함께 뮤온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수행하여 서로 다른 형태의 방사성 붕괴와 관련된 '티옴노 삼각형'을 소개하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파인만과 함께 연구하면서 장이 아닌 입자로 물리학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제이미 티옴노와 함께 뮤온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수행하여 1949년 논문에서 티옴노와 휠러는 서로 다른 형태의 방사성 붕괴와 관련된 '티옴노 삼각형 (Tiomno Triangle)'을 소개를 포함하는, 주제에 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1950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 참여]

소련의 핵폭탄 실험에 대응하여 미국이 수소폭탄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자, 정부의 요청으로 개발 노력에 동참하기 위해 로스앨러모스로 돌아왔습니다.

1949년 소련에 의한 조-1(Joe-1)의 폭발은 텔러가 이끄는 미국이 이에 대응하여 보다 강력한 수소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했습니다. 프린스턴에서 휠러의 부서장인 헨리 D. 스미스 (Henry D. Smyth)는 그에게 노력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휠러는 보어와 대화한 후 로스앨러모스에 가기로 동의했습니다. 1950년에는 수소폭탄에 대한 실용적인 설계가 없었습니다. 텔러와 휠러는 '알람 시계'로 알려진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열핵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1951

[프로젝트 마터호른 설립]

브래드베리로부터 프린스턴에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지부인 '프로젝트 마터호른'을 설립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핵융합 연구(마터호른 S)와 핵무기 연구(마터호른 B)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951년 휠러는 브래드베리(Bradbury)로부터 두 부분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마터호른(Project Matterhorn)으로 알려진 프린스턴에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지사를 설립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마터호른 S (스텔라레이터, (휠러가 만든 다른 이름))는 라이먼 스피처(Lyman Spitzer) 밑에서 핵융합을 동력원으로 조사했습니다. 마터호른 B (폭탄용)는 휠러 밑에서 핵무기 연구에 종사했습니다. 고참 과학자들은 이 프로젝트에 무관심하고 냉담했기 때문에, 그는 젊은 대학원생과 박사 후 학생들과 함께 스태프를 만들었습니다.

[울람의 수소폭탄 설계 고안]

텔러와 휠러가 개발한 '알람 시계' 디자인이 진정한 열핵 무기가 아님이 밝혀진 후, 1951년 1월이 되어서야 스타니스와프 울람이 실행 가능한 수소폭탄 디자인을 고안해냈습니다.

1950년에는 수소폭탄에 대한 실용적인 설계가 없었습니다. 스타니스와프 울람 등의 계산에 따르면 텔러의 '클래식 슈퍼(Classical Super)'는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텔러와 휠러는 '알람 시계'로 알려진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열핵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1951년 1월이 되어서야 울람은 실행 가능한 디자인을 고안해냈습니다.

1952

[아이비 마이크 핵실험 성공 목격]

태평양 에네베탁 환초에서 최초의 진정한 수소폭탄인 '아이비 마이크' 핵실험의 성공을 직접 목격하며 수소폭탄 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마터호른 B의 노력은 1952년 11월 1일 태평양의 에네베탁 환초에서 휠러가 목격 아이비 마이크 핵실험의 성공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아이비 마이크 소시지(Sausage) 장치의 생산량은 매터호른 B가 추정한 것보다 약 30% 높은 10.4 TNT 메가톤(TNT 환산) (44 페타줄)으로 계산되었습니다.

1953

[극비 문서 분실 사건]

야간 열차 여행 중 리튬-6와 수소폭탄 설계에 관한 극비 문서를 잃어버리는 보안 위반에 연루되어 공식적인 견책 처분을 받았습니다.

1953년 1월 그는 야간 열차 여행 중 리튬-6와 수소폭탄 설계에 관한 극비 문서를 잃어버렸을 때 보안 위반에 연루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휠러는 공식적인 견책 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1955

[게온 이론 발표]

자신의 장의 인력에 의해 제한된 영역에서 함께 유지되는 전자기파 또는 중력파인 '게온'(geon)을 이론적으로 조사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중력 전자기적 개체'의 축약형으로 그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1955년 논문에서 그는 자신의 장의 인력에 의해 제한된 영역에서 함께 유지되는 전자기파 또는 중력파인 게온(geon)을 이론적으로 조사했습니다. 그는 '중력 전자기적 개체 (gravitational electromagnetic entity)'의 축약형으로 그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가장 작은 게온(geon)이 태양 크기의 원환체인데, 그러나 수백만 배나 더 무겁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1957

[웜홀 개념 도입 및 기하동역학 공식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대한 수학적 확장 작업을 하던 중, 시공간의 가상 '터널'을 설명하기 위해 '웜홀' 개념과 단어를 도입하고, 중력 및 전자기 현상을 휘어진 시공간 기하학적 특성으로 환원하는 '기하동역학'을 공식화했습니다.

1957년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대한 수학적 확장 작업을 하는 동안, 휠러는 시공간의 가상 '터널'을 설명하기 위해 '웜홀'의 개념과 단어를 도입했습니다. 보어가 그것들이 안정적인지를 물었는데, 휠러의 추가 연구는 그렇지 않다고 결정했습니다. 1950년대에 휠러는 중력 및 전자기력와 같은 모든 물리적 현상을 휘어진 시공간의 기하학적 특성에 대한 물리적 및 존재론적으로 환원하는 프로그램인 기하동역학(geometrodynamics)을 공식화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연구는 1957년과 1961년에 출판되었습니다.

1961

[기하동역학 연구 결과 발표]

기하동역학에 대한 추가 연구 결과가 1957년 논문에 이어 발표되었습니다.

휠러는 중력 및 전자기력와 같은 모든 물리적 현상을 휘어진 시공간의 기하학적 특성에 대한 물리적 및 존재론적으로 환원하는 프로그램인 기하동역학(geometrodynamics)을 공식화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연구는 1957년과 1961년에 출판되었습니다.

1965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상 수상]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상을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A. 크레시 모리슨 상 (1945),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상 (1965), 엔리코 페르미 상 (1968) 등 많은 상을 수상했습니다.

[《중력 이론 및 중력 붕괴》 저술]

켄트 해리슨, 킵 손, 마사미 와카노와 함께 《중력 이론 및 중력 붕괴》(Gravitation Theory and Gravitational Collapse)를 저술했습니다.

휠러는 켄트 해리슨 (Kent Harrison), 킵 손 (Kip Thorne), 마사미 와카노 (Masami Wakano)와 함께 《중력 이론 및 중력 붕괴 (Gravitation Theory and Gravitational Collapse)》(1965)를 저술했습니다.

1966

[골든 플레이트 어워드 수상]

미국 성취 아카데미의 골든 플레이트 어워드를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1966년 미국 성취 아카데미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의 골든 플레이트 어워드 (Golden Plate Award)를 수상했습니다.

[《시공간 물리학》 집필]

에드윈 F. 테일러와 팀이 되어 《시공간 물리학》(Spacetime Physics)을 집필했습니다.

휠러는 에드윈 F. 테일러 (Edwin F. Taylor)와 팀이 되어 《시공간 물리학 (Spacetime Physics)》(1966)과 《블랙홀 찾기 (Scouting Black Holes)》(1996)를 집필했습니다.

1967

[‘블랙홀’ 용어 대중화 및 휠러-디윗 방정식 개발]

NASA 고다드 우주 연구소에서 한 연설에서 '블랙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대중화했으며, 브라이스 디윗과 함께 양자 중력 분야의 선구적인 '휠러-디윗 방정식'을 개발했습니다.

일반 상대성이론에 대한 그의 연구에는 중력 붕괴 이론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1967년, NASA 고다드 우주 연구소에서 한 연설에서 '블랙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용어는 십년 일찍 사용되었으며 휠러는 강의 중에 청중 중 한 명이 휠러가 '중력적으로 완전히 붕괴된 물체'라는 말을 듣는 것에 싫증났을 때 이 용어를 제안했다고 말했습니다. 휠러는 1967년 브라이스 디윗와 함께 휠러-디윗 방정식(Wheeler-DeWitt equation)을 개발한 덕분에 양자 중력 분야의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1968

[엔리코 페르미 상 수상]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1968년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상했습니다.

1969

[프랭클린 메달 및 아인슈타인 상 수상]

프랭클린 메달과 아인슈타인 상을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1969년 프랭클린 매달과 1969년 아인슈타인 상을 수상했습니다.

1970

[국가 과학 메달 수상]

국가 과학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1970년 국가 과학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1972

[60세 생일 기념 논문집 출판]

그의 6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기념논문집 《마법 없는 마법: 존 아치볼드 휠러: 그의 60번째 생일을 기리는 에세이 모음집》이 출판되었습니다.

휠러의 '질량 없는 질량 (mass without mass)'를 암시하면서, 그의 6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기념논문집 (festschrift)은 《마법 없는 마법: 존 아치볼드 휠러: 그의 60번째 생일을 기리는 에세이 모음집 (Magic Without Magic: John Archibald Wheeler: A Collection of Essay in Honor of his Sixtyth Birthday)》(1972)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1973

[《중력》 교과서 공동 저술]

미스너, 손과 함께 방대한 일반 상대성이론 교과서 《중력》(Gravitation)을 공동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한 세대에 걸쳐 영향력 있는 상대성이론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켄트 해리슨 (Kent Harrison), 킵 손 (Kip S. Thorne), 마사미 와카노 (Masami Wakano)와 함께 《중력 이론 및 중력 붕괴 (Gravitation Theory and Gravitational Collapse)》(1965)를 저술했습니다. 이것은 미스너 (Misner)와 손 (Thorn)과 함께 공동 저술한 방대한 일반 상대성이론 교과서《중력 (Gravitation)》(1973)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반 상대성이론의 황금기에 적시에 등장한 것과 그 포괄성으로 인해 한 세대에 걸쳐 영향력 있는 상대성이론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1976

[프린스턴 은퇴 및 텍사스 대학교 부임]

65세의 나이로 프린스턴 대학을 떠나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 이론물리학 센터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휠러는 1976년 65세의 나이로 프린스턴 대학을 떠났습니다. 1976년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센터의 소장으로 임명되어, 은퇴할 때인 1986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고, 또한 명예교수(professor emeritus)가 되었습니다.

1978

[지연된-선택 실험 발표]

빛의 행동이 관찰자의 질문에 따라 파동 또는 입자처럼 반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몇 개의 양자 물리학 사고 실험인 '지연된-선택 실험'을 발표했습니다.

휠러의 지연된-선택 실험은 실제로 그가 제안한 양자 물리학의 몇개의 사고 실험이었으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들은 1978년과 1984년에 나타났습니다. 이 실험은 빛이 통과할 이중 슬릿 실험에서 실험 장치를 어떻게 든 '감지'하고 적절한 결정 상태를 가정하여 적합하도록 동작을 조정하거나, 빛이 파동도 입자도 아닌 불확정정 상태로 남아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려는 시도이며, 이러한 '질문'을 묻는 실험적 배열에 따라 파동 일관성 (wave-consistent) 방식 또는 입자 일관성 (particle-consistent) 방식으로 묻는 '질문'에 응답합니다.

1979

[초심리학 추방 요청]

미국 과학진흥협회(AAAS)에 초심리학을 유사과학으로 규정하며 추방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1979년 휠러는 미국 과학진흥협회(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AAAS)에 마거릿 미드의 요청으로 10년 전에 승인된 초심리학을 추방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유사과학이라고 불렀고, 그는 질문에 대한 진지한 연구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AAAS 제휴자가 되는 '정당성의 분위기'는 최소한 몇 가지 소위 psi 효과에 대한 설득력 있는 테스트가 있을 때까지 유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요청은 거절되었고 초심리학 협회는 AAAS의 회원으로 남았습니다.

1982

[닐스 보어 국제 금메달 수상]

닐스 보어 국제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1982년 닐스 보어 국제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

1983

[외르스테드 메달 수상]

외르스테드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1983년 외르스테드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1984

[J. 로버트 오펜하이머 기념상 수상]

J. 로버트 오펜하이머 기념상을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1984년 J. 로버트 오펜하이머 기념상을 수상했습니다.

1986

[텍사스 대학교 은퇴]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의 이론물리학 센터장 자리에서 은퇴하고 명예교수가 되었습니다.

휠러는 1976년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센터의 소장으로 임명되어, 은퇴할 때인 1986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고, 또한 명예교수 (professor emeritus)가 되었습니다.

1988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메달 수상]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1988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1990

[‘비트로부터 그것’ 교리 제안]

정보가 우주의 물리학의 기본이라는 '비트로부터 그것' 교리를 제안하며, 물리적 세계의 모든 것이 정보-이론적 기원을 가진다는 혁신적인 철학적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1990년 휠러는 정보가 우주의 물리학의 기본이라고 제안했습니다. 이 '비트로부터 그것' 교리에 따르면, 물리적인 모든 것은 그 기원이 정보-이론적 (information-theoretic)입니다. 휠러: 비트로부터 그것.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 - 모든 입자, 모든 힘의 장, 심지어 시공간 연속체 자체까지도 - 그 기능, 의미, 존재 자체는 전적으로 - 어떤 맥락에서는 간접적으로라도 - 장치가 예 혹은 아니오 질문, 이진 선택, 비트로부터 대답에서 파생합니다. 비트로부터 그것은 물리적 세계의 모든 항목이 바닥 - 대부분의 경우 매우 깊은 바닥 - 에 비물질적 출처와 설명이 있다는 생각을 상징하고;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아니오 질문을 제기와 장비-유발 응답 (equipment-evoked responses)의 등록의 최종 분석에서 발생합니다; 요컨대, 물리적인 모든 것은 기원은 정보-이론적이며 또한 이것이 '참여적 우주 (participatory universe)'라는 것입니다.

1993

[마테우치 메달 수상]

마테우치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1993년 마테우치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1996

[《블랙홀 찾기》 집필]

에드윈 F. 테일러와 함께 《블랙홀 찾기》(Scouting Black Holes)를 집필했습니다.

휠러는 에드윈 F. 테일러 (Edwin F. Taylor)와 팀이 되어 《시공간 물리학 (Spacetime Physics)》(1966)과 《블랙홀 찾기 (Scouting Black Holes)》(1996)를 집필했습니다.

1997

[울프 물리학상 수상]

울프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1997년 울프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2001

[존 아치볼드 휠러/바텔 물리학 교수직 설립]

프린스턴 대학교에 300만 달러의 기부금을 사용하여 그의 이름을 기리는 존 아치볼드 휠러/바텔 물리학 교수직이 설립되었습니다.

2001년 프린스턴은 300만 달러의 기부금을 사용하여 존 아치볼드 휠러/바텔 물리학 교수직 (John Archibald Wheeler/Battelle Professorship in Physics)을 설립했습니다.

2003

[아인슈타인 상 수상]

아인슈타인 상을 수상했습니다.

휠러는 2003년 아인슈타인 상을 수상했습니다.

2007

[아내의 사망]

72년간 결혼 생활을 함께 했던 아내 자넷 헤그너가 9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72년 동안 휠러는 교사이자 사회복지사인 자넷 헤그너(Janette Hegner)와 결혼했습니다. 헤그너는 2007년 10월 99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2008

[강당 명명]

그가 사망한 후 텍사스 대학은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존 A. 휠러 강당을 명명했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 텍사스 대학은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존 A. 휠러 강당(John A. Wheeler Lecture Hall)을 명명했습니다.

[존 아치볼드 휠러 사망]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가 뉴저지 주 하이츠타운에서 96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2008년 4월 13일, 휠러는 뉴저지 주 하이츠타운 (Hightstown)에서 96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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