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파인만
이론물리학자, 양자역학, 노벨상 수상자, 과학자, 대중강연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9- 10:16:25
양자 전기역학, 경로 적분 공식화, 초유체 물리학 연구 및 쪽입자 모형 제안으로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고, 챌린저 우주왕복선 폭발 사고 조사에 기여하며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양자 컴퓨터 분야를 개척하고 나노 기술의 개념을 도입하는 등 폭넓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물리학 강의는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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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리처드 파인만 출생]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이 뉴욕 퀸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 이민자였고 어머니는 미국 태생의 유대인 가정 출신이었다. 파인만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격려와 어머니의 유머 감각 속에서 자라며, 공학에 재능을 보이고 라디오 수리를 즐겨했다. 집에 직접 도난 경보 시스템을 만들기도 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과학적 호기심과 문제 해결 능력을 보였다.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은 1918년 5월 11일 뉴욕 퀸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유대인 혈통이었으나 종교는 없었고, 파인만 역시 젊었을 때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칭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질문하고 정통 사고에 도전하도록 격려했고, 어머니로부터는 유머 감각을 물려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공학에 재능을 보여 집에 실험실을 꾸리고 라디오 수리를 즐겼으며, 이는 훗날 이론물리학 문제 해결 능력의 바탕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부모님이 외출하는 동안 집에 도난 경보 시스템을 만들기도 했다.
1939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학사 학위 취득]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윌리엄 로웰 퍼트넘 수학경시대회에서 퍼트남 펠로우로 선정되었다. 그는 대학 입학 전 삼각법, 대수학, 미적분학 등을 독학하며 자신만의 수학 표기법을 개발하는 등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보였다.
파인만은 1939년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고 퍼트남 펠로우로 명명되었다. 그는 원래 수학을 전공했으나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여 전기 공학으로, 최종적으로 물리학으로 전환했다. 학부 시절 《피지컬 리뷰》에 두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그중 하나는 '분자의 힘'에 관한 선임 논문으로 훗날 헬만-파인만 정리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도 삼각법, 고급 대수학, 무한 급수, 해석기하학, 미분과 적분학을 독학했으며, 자신만의 표기법을 사용하여 반도함수와 같은 수학 주제를 실험하고 유도하기도 했다.
1941
[알린 그린바움과의 결혼 결심]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었던 알린 그린바움이 결핵으로 심각하게 아프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파인만은 프린스턴 대학으로 진학한 장학금 지급 조건 중 하나는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때 연인인 알린 그린바움과 계속 만났고, 그녀가 결핵으로 심각하게 아프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결핵은 불치병이었고, 알린은 2년 이상 살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다.
[프랭크포드 무기고에서 탄도 문제 연구]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상황에서, 파인만은 펜실베니아의 프랭크포드 무기고에서 탄도 문제를 연구하며 전쟁 노력에 기여했다.
1941년,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지만 미국은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파인만은 여름을 펜실베니아의 프랭크포드 무기고에서 탄도 문제를 연구하는 데 보냈다.
1942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학위 취득]
존 아치볼드 휠러의 지도를 받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양자역학의 최소 작용 원리'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논문은 양자역학의 경로 적분 공식화와 파인만 도표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양전자가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는 전자처럼 행동한다는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었다.
파인만은 1942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의 논문 지도교수는 존 아치볼드 휠러였다. '양자역학에서 최소 작용의 원리'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파인만은 전기역학의 휠러-파인만 흡수자 이론을 양자화하려는 욕구에 영감을 받아 최소작용의 원리를 양자역학의 문제에 적용하였고, 경로 적분 공식화와 파인만 도표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전자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는 전자처럼 행동한다는 중요한 통찰을 얻었다.
[알린 그린바움과 결혼]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었던 알린 그린바움이 결핵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황에서도 스태튼 아일랜드 시청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파인만은 장학금 조건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때 연인이던 알린 그린바움과 결혼하기로 결심했고, 1942년 6월 29일 페리호를 타고 스태튼 아일랜드로 가서 시청에서 결혼했다. 당시 알린은 결핵으로 심각하게 아픈 상태였고, 2년 이상 살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다. 결혼식에는 가족이나 친구 없이 낯선 사람들이 증인이 되었고, 파인만은 알린의 볼에만 키스할 수 있었다. 식이 끝난 후 그는 그녀를 데보라 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1943
[맨해튼 프로젝트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합류]
제2차 세계 대전 중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제안을 받아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로 이동했다. 그는 한스 베테의 이론적 부서에 배치되어 핵분열 폭탄의 폭발력을 계산하는 베테-파인만 방정식 개발에 기여했으며, 인간 컴퓨터 그룹을 관리하고 계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3년 3월 28일, 파인만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로 떠났다. 그는 한스 베테의 이론적(T) 디비전에 배치되어 그룹 리더가 될 만큼 베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파인만과 베테는 핵분열 폭탄의 폭발력을 계산하기 위한 베테-파인만 방정식(Bethe-Feynman equation)을 개발했다. 그는 주니어 물리학자로서, 이 프로젝트의 중심이 아니었지만, 이론 부문에서 인간 컴퓨터들의 연산 그룹을 관리하며 스탠리 프랭클과 니콜라스 메트로폴리스와 함께 IBM 천공 카드를 사용하는 계산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
1945
[아내 알린 그린바움 사망]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던 파인만은 병원에서 시한부 삶을 살던 아내 알린 그린바움의 임종을 지켰다. 그녀는 결핵으로 2년여의 투병 끝에 앨버커키 요양소에서 사망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던 파인만은 1945년 6월 16일, 아내 알린 그린바움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앨버커키로 가서 몇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 앉아 임종을 지켰다. 알린은 결핵으로 2년여의 투병 끝에 앨버커키의 요양소에서 사망했다.
[트리니티 핵 실험 참관]
인류 최초의 핵 실험인 트리니티 핵 실험에 참관했다. 그는 트럭 앞유리를 통해 유해한 자외선이 차단될 것이라고 추론하며 제공된 보호 안경 없이 폭발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아내의 사망 후, 파인만은 맨해튼 프로젝트 작업에 몰두했고 인류 최초의 핵 실험인 트리니티 핵 실험에 참관했다. 파인만은 매우 어두운 안경이나 용접공용 렌즈의 제공 없이 폭발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했으며, 트럭 앞유리를 통해 보는 것이 유해한 자외선을 차단할 수 있어서 안전하다고 추론했다. 폭발의 엄청난 밝기로 인해 그는 트럭 바닥으로 몸을 숨겼고 그곳에서 일시적인 "보라색 얼룩점" 잔상을 보았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끝난 후, 파인만은 1945년 10월에 코넬 대학교 물리학 조교수로 부임하기 위해 뉴욕 이타카로 떠나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그룹 리더 중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를 코넬로 데려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로버트 바허는 그를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칼텍)로 유인했고, 그는 1951-52년에 브라질에서 안식년을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코넬로 돌아가지 않았다.
1946
[아버지 사망 및 우울증]
평생 동안 과학적 호기심을 불어넣어 주었던 아버지 멜빌 아서 파인만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며 연구에 집중하기 어려움을 겪었다.
1946년 10월 8일 파인만의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했고, 파인만은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1946년 10월 17일 그는 사망한 아내 알린에게 자신의 깊은 사랑과 비탄을 표현하는 편지를 썼는데, 편지는 봉인되었고 그가 죽은 후에야 개봉되었다. 연구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던 파인만은 실용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해 물리학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1947
[쉘터 아일랜드 회의 참석]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양자전기역학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쉘터 아일랜드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파인만에게 평화 시에 참가한 첫 번째 대규모 학술 회의였다.
1947년 6월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쉘터 아일랜드 회의에서 만났다. 파인만에게 있어 이번 회담은 그의 "첫 번째 큰 사람들과의 큰 회의였다 ... 나는 평화시에 이런 곳에 가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양자전기역학을 둘러싼 문제들이 논의되었지만, 이론가들은 램 이동의 발견, 전자의 자기 모멘트의 측정 및 로버트 마삭의 2-중간자 가설을 보고한 실험가들에 의해 완전히 가려졌다.
1948
[포코노 회의에서 연구 발표]
포코노 회의에서 '양자전기역학의 대안 공식화'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며 파인만 도형을 소개했으나, 당시 청중들에게는 생소하게 받아들여져 이해시키지 못했다.
파인만은 1948년 포코노 회의에서 동료들에게 자신의 연구를 발표했다. 줄리언 슈윙거는 양자전기역학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 대해 긴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파인만은 "양자전기역학의 대안 공식화(Alternative Formulation of Quantum Electrodynamics)"라는 제목의 버전을 제안했다. 처음 사용된 생소한 파인만 도형은 청중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파인만은 자신의 요점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고 폴 디랙, 에드워드 텔러 및 닐스 보어는 모두 이의를 제기했다.
['고전 전기역학을 위한 상대론적 차단' 논문 발표]
포코노 회의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던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달하고자 '고전 전기역학을 위한 상대론적 차단'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파인만은 1948년에 발표된 "고전 전기역학을 위한 상대론적 차단 (A Relativistic Cut-Off for Classical Electrodynamics)"에 관한 논문에서는 포코노 회의에서 그가 이해시킬 수 없었던 것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 논문은 양자전기역학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그의 노력의 일환이었다.
1949
['양전자 이론' 논문 발표]
슈뢰딩거 방정식과 디랙 방정식을 다루고 파인만 전파 인자(propagator)를 도입하는 '양전자 이론' 논문을 발표하며 양자전기역학 연구를 이어갔다.
1949년에 발표한 "양전자 이론(The Theory of Positrons)" 논문은 슈뢰딩거 방정식과 디랙 방정식을 다루었으며, 전파 인자(propagator)인 파인만 전파 인자라고 불리는 것을 도입하였다. 이 논문은 양자전기역학의 이론적 틀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1949년 파인만은 코넬 대학에서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그는 1949년 7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몇 주를 보냈다. 당시 그는 학부생과 데이트하고, 매춘부를 고용하고, 친구의 아내와 자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타카의 추운 겨울 날씨를 싫어하고 따뜻한 기후를 원했다. 무엇보다 코넬에서 그는 항상 한스 베테의 그늘에 있었다.
1950
['전자기 상호작용 양자 이론' 논문 발표]
자신의 양자전기역학 이론의 수학적 기초를 다루는 '전자기 상호작용 양자 이론의 수학 공식화' 논문을 발표했다.
파인만은 1950년에 '전자기 상호작용 양자 이론의 수학 공식화(Mathematical Formulation of the Quantum Theory of Electromagnetic Interaction)'에 관한 논문에서 자신의 아이디어의 수학적 기초와 친숙한 공식을 도출하고 또한 새로운 것들을 발전시켰다.
1951
['양자전기역학 응용 연산자 미적분학' 논문 발표]
양자전기역학에 응용될 수 있는 연산자 미적분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며 자신의 이론적 기여를 확장했다.
파인만은 1951년의 "양자전기역학에 응용한 연산자 미적분학(An Operator Calculus Having Applications in Quantum Electrodynamics)"에 관한 논문에서 그의 아이디어의 수학적 기초와 친숙한 공식을 도출하고 또한 새로운 것들을 발전시켰다. 이로써 양자전기역학에 대한 그의 이론적 틀이 완성되었다.
[브라질 안식년 및 강의]
코넬 대학교에서의 안식년을 브라질에서 보내며 물리학 연구를 위한 브라질 센터에서 강의했다. 브라질 문화와 삼바 음악에 깊은 인상을 받으며 봉고 연주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파인만은 1951-52년에 안식년을 맞이했고, 브라질에서 보내기로 결정했으며, 거기 물리학 연구를 위한 브라질 센터(Centro Brasileiro de Pesquisas Físicas)에서 강의를 했다. 브라질에서 파인만은 삼바 음악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프라이팬을 기반으로 한 금속 타악기인 프리지데이라 봉고의 열정적인 아마추어 연주자이자 콩가 드럼을 연주했으며 뮤지컬의 피트 오케스트라에서 자주 연주했다.
1952
[메리 루이스 벨과 결혼]
브라질 체류 중 편지로 청혼하여 캔자스주 네오데샤 출신의 메리 루이스 벨과 아이다호주 보이시에서 결혼했다.
브라질에서 파인만은 캔자스주 네오데샤에서 온 메리 루이스 벨에게 매료되었다. 그들은 코넬의 한 카페테리아에서 만났으며, 그녀는 멕시코 미술과 직물의 역사를 공부했다. 파인만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편지로 그녀에게 청혼했으며, 그들은 그가 돌아온 직후인 1952년 6월 28일 아이다호주 보이시에서 결혼했다.
1954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상 수상]
미국 원자력 위원회 의장인 루이스 스트라우스로부터 15,000달러 상당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상을 수상했다. 오펜하이머 보안 인가 박탈 사건으로 인해 스트라우스에 대한 반감이 있었으나, 이지 도어 아이작 라비의 설득으로 상을 수락했다.
파인만의 연구에 대한 첫 번째 대중적 인정은 1954년 미국 원자력 위원회 의장인 루이스 스트라우스가 그에게 15,000달러 상당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상을 수상했으며 금메달과 함께 왔다고 알린 때였다. 오펜하이머의 보안 인가를 박탈한 슈트라우스의 행동 때문에 파인만은 상을 받기를 꺼렸지만,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가 그에게 "그는 많은 악덕을 가지고 있으며 그를 대적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여 결국 상을 수락했다.
1956
[메리 루이스 벨과 별거 시작]
두 사람의 정치적 성향 차이와 파인만의 격렬한 기질 등으로 인해 아내 메리 루이스 벨과 별거를 시작했다.
파인만과 메리 루이스 벨은 자주 다투었고 그녀는 그의 폭력적인 기질에 겁을 먹었다. 그들의 정치(성향)이 달랐는데; 그가 공화당으로 등록하고 투표했지만, 그녀는 더 보수적이었고 1954년 오펜하이머 보안 청문회("연기가 있는 곳에 불이 있다")에 대한 그녀의 의견은 그를 불쾌하게 했다. 결국 그들은 1956년 5월 20일에 별거했다.
1958
메리 루이스 벨과의 별거 이후, "극도의 잔혹함"을 이유로 1956년 6월 19일에 중간 이혼 판결이 내려졌고, 이혼은 1958년 5월 5일에 최종 결정되었다. 그녀는 이혼 소송에서 파인만이 깨어나자마자 머릿속에서 미적분 문제를 풀기 시작했고, 운전할 때, 거실에 앉아 있을 때, 그리고 밤에 침대에 누울 때 미적분을 했다고 진술했다.
[제네바 '평화를 위한 원자' 회의 참석]
미국 정부의 파견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원자'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훗날 세 번째 아내가 될 궤네스 하워스를 만났다.
미국 정부는 1958년 9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원자(Atoms for Peace)' 회의를 위해 파인만을 제네바로 보냈다. 제네바 호수의 해변에서 그는 요크셔 리폰덴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오페어로 일하는 궤네스 하워스를 만났다.
1959
[나노기술 개념 도입 강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바닥에 공간이 충분하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소형화된 기계를 설계할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나노기술의 개념을 도입했다. 이 강연은 오늘날 마이크로 기술 및 나노 기술 분야에서 중요한 문헌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1959년 파인만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바닥에 공간이 충분하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이 강연은 1년 후 출판되었으며, 소형화된 기계를 설계할 수 있는 미래의 기회에 대해 이론을 세웠다. 이 강연은 오늘날 마이크로 기술과 나노 기술에 관한 기술 문헌에서 자주 인용되는 매우 중요한 강연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0
[궤네스 하워스에게 청혼]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난 궤네스 하워스에게 청혼했다. 그녀는 파인만의 제안을 받아들여 1959년 6월 미국으로 건너왔고, 이후 결혼으로 이어졌다.
파인만은 제네바 호수에서 만난 궤네스 하워스에게 자신의 동거 하녀로 주당 20달러를 제안했고, 그녀는 1959년 6월 캘리포니아 알타데나에 도착했다. 비록 그녀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할 것을 주장했지만, 파인만은 1960년 초에 그녀에게 청혼했다.
[궤네스 하워스와 결혼]
패서디나의 헌팅턴 호텔에서 궤네스 하워스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 부부는 아들 칼과 입양한 딸 미셸을 두었다.
파인만은 1960년 9월 24일 패서디나 헌팅턴 호텔에서 궤네스 하워스와 결혼했다. 1962년에는 아들 칼이 있었고, 1968년에는 딸 미셸을 입양했다. 그들은 알타데나에 있는 집 외에도 바하칼리포르니아주에 파인만의 노벨상을 받은 돈으로 구입한 해변가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1961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기초 마련]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3년 동안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의 기초가 되는 일련의 강의를 진행했다. 이 강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교수진과 전문 물리학자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1960년대 초 파인만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의 학부생들의 수업을 "마무리"해달라는 요청에 동의했다. 3년 동안 이 과제에 전념한 후에, 그는 나중에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가 되는 일련의 강의를 만들었다. 원래 강의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나, 그의 동료들은 1학년 학생들의 의도된 청중들은 이 자료가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나이든 학생들과 교수진들은 영감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강의실은 1학년 학생들이 떨어져도 꽉 찼다고 말했다.
1962
[E. O. 로렌스상 수상]
미국 원자력 위원회(AEC)로부터 E. O. 로렌스상(Ernest Orlando Lawrence Award)을 수상하며 그의 과학적 업적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1962년 미국 원자력 위원회(AEC)의 E. O. 로렌스상(Ernest Orlando Lawrence Award)이 파인만에게 수여되었다. 이는 1954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상에 이은 또 다른 권위 있는 과학상 수상이었다.
1960년 9월 24일 궤네스 하워스와 결혼한 후, 1962년에는 아들 칼이 태어났다.
1965
[노벨 물리학상 수상]
줄리언 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와 함께 "기본 입자의 물리학에 대한 심층적인 결과와 함께 양자 전기역학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는 양자장론의 난제였던 무한대 문제를 해결한 재규격화 이론을 제시한 업적에 대한 것이었다.
파인만은 줄리언 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와 공동으로 "기본 입자의 물리학에 대한 심층적인 결과와 함께 양자 전기역학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로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의 주요 공헌은 양자 전기역학의 경로 적분 공식화, 파인만 도형 개발, 그리고 재규격화 이론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제시였다. 이 업적은 당시 양자장론이 겪던 무한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인만은 양자 전기역학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1965년에 왕립 학회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그의 국제적인 과학적 명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1966
[국가 과학교사 협회 연설]
국가 과학교사 협회에서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연설하며, 학생들이 과학자처럼 생각하고, 개방적이며, 호기심이 많고, 특히 의심하게 만드는 방법을 제안했다.
1966년 4월 파인만은 국가 과학교사 협회에서 연설을 하여 학생들이 과학자처럼 생각하고, 개방적이며, 호기심이 많으며, 특히 의심하게 만드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과학이 경험을 통해 놀고 배우는 지능적 생명체의 진화, 지식 전달을 위한 언어 사용, 그리고 전승된 것의 진실을 의심하고 실제 상황을 조사하는 과정을 거쳐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1968
궤네스 하워스와 1960년 결혼하고 1962년 아들 칼이 태어난 후, 1968년에는 딸 미셸을 입양하여 파인만 부부는 두 자녀를 두게 되었다.
1972
[외르스테드 메달 수상]
미국 물리학 교사 협회에서 수여하는 외르스테드 메달을 수상했다. 이 상은 물리학 교육에 탁월한 기여를 한 사람에게 수여된다.
1972년에 파인만은 미국 물리학 교사 협회에서 수여하는 외르스테드 메달을 수상했다. 이 상은 주로 물리학 교육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과학자에게 수여되며, 파인만의 탁월한 교수법과 물리학 대중화에 대한 기여를 인정한 것이다.
1974
['화물숭배과학' 졸업식 연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졸업식에서 '화물숭배과학(cargo cult science)'을 주제로 연설하며, 과학자의 윤리적 태도와 자기 기만을 경계해야 함을 강조했다.
1974년에 파인만은 과학과 유사하지만 과학자의 편에서는 "일종의 과학적 무결성, 일종의 과학적 사고의 원리에 상응하는 과학적 사고의 원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유사과학에 불과한 화물숭배과학(cargo cult science)을 주제로 칼텍 졸업식 연설을 했다. 그는 졸업반에게 "첫 번째 원칙은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하고-그런데 네가 가장 쉽게 속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매우 조심해야 한다. 자신을 속이지 않은 후에야 다른 과학자를 속이지 않기가 쉽다. 그 후에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단지 정직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1977
[동료 여성 교수 종신 재직권 소송 지지]
1969년 칼텍의 첫 여성 교수로 채용되었으나 1974년 종신 재직권이 거부되자 고용기회균등위원회에 소송을 제기한 동료 제니조이 라 벨 교수를 지지했다.
1977년 파인만은 1969년 칼텍의 첫 여성 교수로 채용되었지만 1974년 종신 재직권(tenure)이 거부되자 고용기회균등위원회(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에 소송을 제기한 동료 제니조이 라 벨 교수를 지지했다. EEOC는 1977년 칼텍에 불리한 판결을 내렸으며, 라 벨이 남성 동료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라 벨은 마침내 1979년에 종신 재직권을 얻었다. 파인만의 많은 동료들은 그가 그녀의 편을 든 것에 놀랐지만, 그는 라벨을 알게 되었고 그녀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1978
[지방육종 진단 및 수술]
복통으로 치료를 받던 중 희귀 암인 지방육종 진단을 받고, 한쪽 신장과 비장을 억누르던 축구공 크기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1978년에 파인만은 복통으로 치료를 받았고 희귀 암인 지방육종 진단을 받았다. 외과 의사들은 한쪽 신장과 비장을 억누른 축구공 크기의 종양을 제거했다. 이는 그의 건강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그는 이후에도 활발히 활동했다.
1979
1979년에 파인만은 미국의 최고 과학 영예 중 하나인 국가 과학 메달을 수상했다. 이는 그가 양자 전기역학, 입자 물리학, 초유체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기여한 공로를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1980
[양자 컴퓨터 연구 시작]
씽킹 머신 코퍼레이션에서 여름을 보내며 최초의 병렬 슈퍼컴퓨터 구축을 돕고, 양자 컴퓨터 구축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며 이 분야의 개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80년대에 파인만은 씽킹 머신 코퍼레이션(Thinking Machines Corporation)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최초의 병렬 슈퍼컴퓨터 구축을 돕고 양자 컴퓨터 구축을 고려하기 시작하며 이 분야를 개척한 과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물리학과 계산 사이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85
[자서전 출판]
랄프 레이튼과 함께 자신의 삶에 대한 일화들을 담은 자서전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를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그의 유쾌하고 호기심 많은 성격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에 파인만은 자서전을 쓰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는 역사학자들에게 인터뷰를 허락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그는 랄프 레이튼(로버트 레이튼의 아들)과 함께 일하면서 랄프가 필사한 테이프 레코더에 여러 장들을 녹음했다. 이 책은 1985년에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그의 유쾌한 성격과 독특한 삶의 방식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86
[챌린저 우주왕복선 사고 조사]
챌린저 우주왕복선 폭발 사고를 조사한 대통령 직속 로저스 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청문회에서 O링 샘플을 얼음물에 담가 탄성 변화를 시연하며, 추운 날씨가 사고의 원인이 되었음을 명확히 증명하여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파인만은 1986년 1월 28일 발생한 챌린저 우주왕복선 폭발 사고를 조사한 대통령 직속 로저스 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참여를 망설였으나 아내의 설득으로 합류했다. 그는 청문회에서 우주왕복선의 O링에 사용된 물질이 추운 날씨에 덜 탄력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얼음물에 담근 O링 샘플을 압축하여 시연했다. 이 시연은 사고 원인이 케이프 커내버럴의 비정상적으로 추운 날씨로 인해 O링이 제대로 밀봉되지 않았기 때문임을 대중에게 명확히 전달했다. 그는 NASA 경영진의 신뢰성 평가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며 "성공적인 기술을 위해서는 홍보보다 현실이 우선해야 하며, 자연은 속일 수 없다"고 경고하는 보고서 부록을 작성했다.
[지방육종 추가 수술]
1978년 지방육종 진단 후 1986년 10월과 1987년 10월에 걸쳐 두 차례 더 추가 수술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건강 악화를 나타내는 신호였다.
1978년에 지방육종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던 파인만은 1986년 10월과 1987년 10월에 추가 수술을 받았다. 이러한 반복적인 수술은 그의 암이 재발했거나 악화되었음을 보여주며,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건강 문제였다.
1988
[UCLA 의료 센터 재입원]
십이지장 궤양 파열로 인한 신부전 증상으로 UCLA 의료 센터에 다시 입원했으며, 이는 그의 마지막 입원이 되었다.
파인만은 1988년 2월 3일 UCLA 의료 센터에 다시 입원했다. 파열된 십이지장 궤양으로 신부전이 발생했으며, 그는 몇 달 동안 생명을 연장할 수도 있는 투석을 거부하며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리처드 파인만 사망]
희귀 암인 지방육종 진단을 받고 수차례 수술을 받았던 파인만은 십이지장 궤양 파열로 인한 신부전으로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투석을 거부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두 번은 못 죽겠다. 너무 지루하거든."이었다.
1978년에 희귀 암인 지방육종 진단을 받고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던 파인만은 1986년과 1987년 10월에 추가 수술을 받았다. 1988년 2월 3일 UCLA 의료 센터에 다시 입원했고, 파열된 십이지장 궤양으로 신부전이 발생했다. 그는 몇 달 동안 생명을 연장할 수도 있는 투석을 거부하고 1988년 2월 15일 69세의 나이로 아내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캘리포니아주 알타데나의 마운틴 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유언은 "두 번은 못 죽겠다. 너무 지루하거든"이었다.
1999
[역대 위대한 물리학자 선정]
사망 후 1999년 영국 저널 《피직스 월드》가 전 세계의 저명한 물리학자 1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역대 7번째 위대한 물리학자로 선정되었다.
1999년 영국 저널 《피직스 월드》가 전 세계의 저명한 물리학자 1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파인만은 역대 7번째 위대한 물리학자로 선정되었다. 이는 그의 사망 후에도 그의 업적과 영향력이 물리학계에 깊이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5
[미국 우정청 기념 우표 발행]
미국 우정청에서 "미국 과학자" 기념 우표 4장을 발행했는데, 그중 하나가 리처드 파인만을 기리는 세피아 톤의 우표였다. 우표에는 30대 파인만의 사진과 8개의 작은 파인만 도형이 그려져 있다.
2005년 5월 4일, 미국 우정청은 "미국 과학자(American Scientist)" 기념 우표 4장을 여러 가지 형태로 발행했다. 묘사된 과학자들은 리처드 파인만, 존 폰 노이만, 바버라 매클린톡, 그리고 조사이어 윌러드 기브스였다. 세피아 톤의 파인만의 우표에는 30대 파인만의 사진과 8개의 작은 파인만 도형이 그려져 있다. 이 우표들은 빅터 스타빈이 칼 T. 허먼의 예술적인 지시아래 디자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