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바이올리니스트, 교육인,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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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바이올리니스트, 교육인,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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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본명은 홍영후이며, 아호는 난파입니다. ‘봉선화’, ‘고향의 봄’ 등 수많은 가곡과 동요를 작곡했으며,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하고 관현악단을 조직했습니다. 말년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그의 사후 평가에는 논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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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출생]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남양 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의 여덟 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 가족들은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으며 홍난파는 이 중 앙금을 연주했습니다. 이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금파, 난파 등의 별호를 받았습니다.

홍난파는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남양 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 24세손으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는데 홍영후는 그 중 앙금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많았던 관계로 아들에게 금파(錦坡), 난파(蘭坡) 등의 별호를 지어 주었습니다.

1899

[서울 이주와 서양 음악 입문]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교회를 다니면서 서양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향으로 그의 사촌 형 및 조카들이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고, 홍난파도 새문안교회에 다니며 1911년 세례를 받고 집사 및 성가대 활동을 활발히 했습니다.

1899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그는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서양 음악을 접하였고, 그 영향으로 그의 사촌 형 및 조카들이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그 또한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속한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1911년에 세례를 받았고 집사로서 성가대 활동을 하는 등 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습니다.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 음악회 때에도 바이올린 연주를 통한 전도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1910

[바이올린 독학 시작]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여 장난감 바이올린을 구입, 숫자보를 이용해 '도레미법'을 터득하며 음악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여 바이올린을 직접 구입할 돈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1910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였습니다. 중학과 재학 중 그는 장난감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숫자보를 사용하여 '도레미법'을 터득하였고, 중학과 재학 중에 고학과 아르바이트로 7원 50전이라는 돈을 모아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연습을 시작했습니다.

1912

[조선 정악 전습소 입학]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으며, 조선인 최초의 서양 음악 교사인 김인식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기악과에도 입학했습니다.

1912년에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고, 당시 조선인 최초의 서양 음악 교사인 김인식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였습니다. 1913년 조선 정악전습소 성악과를 졸업하고 그 해 기악과에 입학, 이듬해에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과 졸업 및 기악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보조교사로 잠시 있었습니다.

1915

[교사 부임 및 결혼]

조선 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부임하여 <악전대요>, <통속창가집>을 출간하고 <간이무답행진곡집>을 편찬하는 등 활발한 교육 및 음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김상운과 결혼했습니다.

1915년 조선 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부임하여 <악전대요>, <통속창가집>을 출간하였고, <간이무답행진곡집>을 편찬하는 등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해에 김상운과 18세의 나이로 결혼합니다.

1916

[의전 입학과 음악의 길 선택]

부친의 뜻에 따라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했으나, 음악에 대한 애정으로 성탄 축하 음악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등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입학 1년 만에 중퇴하고 이듬해 조선정악전습소 교사직을 사임했습니다.

홍난파의 형은 부친의 뜻에 따라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홍난파 또한 부친의 뜻에 따라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1916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세브란스 의전에서 열린 성탄 축하 음악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는데 이는 그의 첫 공연 무대로서 당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입학 1년 만에 중퇴하고 1917년 3년간 있던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직을 사임하였습니다.

1918

[장녀 출생과 일본 유학]

장녀 홍숙임을 얻었으며, 같은 해 일본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이듬해 3월 수료했습니다. 이는 그의 본격적인 해외 음악 유학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듬해 1월 5일 장녀 홍숙임을 얻었으며 1918년 일본에 유학 도쿄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예과(預科)에 입학하여 이듬해 3월 수료하였습니다.

1919

[<삼광> 창간과 경성악우회 조직]

도쿄에서 예술 잡지 <삼광>을 창간했으나 경영난으로 4호 만에 폐간되었습니다. 이후 3·1 운동 참여를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으나 본과 진학이 무산되자 경성악우회를 조직하며 국내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919년 도쿄에서 예술 잡지인 <삼광>을 창간하였으나 삼광은 경영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홍난파는 본과 진학이 무산되자 귀국하여 경성악우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19년 3월 그는 3·1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하였습니다. 3·1 운동 직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만다. 다시 귀국 후 그는 첫 작품의 작곡에 몰입합니다.

1920

[<애수> 작곡 및 조선인 최초 독주회 개최]

그의 대표작 <봉선화>의 원곡인 <애수>를 작곡했습니다. 같은 해 공식적으로 조선인 최초 독주회를 개최하며 작곡가이자 연주자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또한 매일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하며 생업을 유지했습니다.

1920년에 <애수>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봉선화>의 원곡입니다. 그 해 공식적으로는 처음 독주회를 열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 최초입니다. 1920년 매일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1921

[첫 창작 소설집 <처녀혼> 발간]

첫 창작 소설집 <처녀혼>을 발간하며 문학 활동도 병행했습니다.

1921년 첫 창작 소설집인 <처녀혼>을 발간하였고, 이듬해에는 연악회를 설립, 음악잡지 《음악세계》를 창간하였습니다.

[윤치호에게 바이올린 구입 자금 요청 거절 및 논쟁]

후원자였던 윤치호에게 250원 상당의 바이올린 구입 비용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홍난파는 윤치호에게 부자들의 죄악과 공산주의자들의 정당한 약탈론을 주장하며 윤치호를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일화는 윤치호의 1921년 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화 하나, 계몽운동가 겸 교육자 윤치호는 그를 후원하던 후원자들 중의 한명이었다. 홍영후는 그의 형 홍석후를 통해 윤치호를 알게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1921년 2월 6일(일요일)에 쓴 윤치호의 일기내용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홍영후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로 승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와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 그러자 홍영후는 윤치호에게 구두쇠의 죄악에 대한 설교를 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주장했다. 분개한 윤치호는 홍영후를 가리켜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라고 혹평하였다.

1922

[연악회 설립 및 음악잡지 《음악세계》 창간]

연악회를 설립하고 음악잡지 《음악세계》를 창간하며 음악계 활동을 확대했습니다. 이는 한국 음악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21년 첫 창작 소설집인 <처녀혼>을 발간하였고, 이듬해에는 연악회를 설립, 음악잡지 《음악세계》를 창간하였습니다.

1925

[<음악계> 창간 및 한국 최초 바이올린 독주회 개최]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고 바이올린 독주곡 <애수의 조선>, <로만스>, <동양풍의 무곡> 등을 작곡했습니다. 또한 연악회 주최로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며 한국 서양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1925년에는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고 바이올린 독주곡 <애수의 조선>, <로만스>, <동양풍의 무곡>을 작곡하였으며, 연악회 주최로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습니다.

1926

[일본 재유학 및 도쿄 교향악단 입단]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에 편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고, 동시에 도쿄 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하며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1926년 5월 13일 부인 김상운과 사별하였으며 다시 일본으로 유학가서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에 편입학하였습니다.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재학하면서 그는 도쿄 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습니다.

[부인 김상운과 사별 및 <봉선화> 수록]

부인 김상운과 사별했습니다. 이 시기에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찬했으며, 여기에 그의 대표작인 <봉선화>가 수록되었습니다.

1926년 5월 13일 부인 김상운과 사별하였으며 다시 일본으로 유학가서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에 편입학하였습니다. 1926년 홍영후는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찬하였는데 그의 작품 <봉선화>가 여기에 수록되었습니다.

1927

[라디오 방송을 통한 <봉선화> 첫 소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의 대표곡인 <봉선화>가 대중에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이후 민족의 애환을 달래는 상징적인 곡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봉선화 곡이 소개되었습니다.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르고 널리 퍼지게 한 당시 소프라노 김천애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봉선화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 작사자인 김형준(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선친)의 영향으로, 김형준이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씨는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덧붙여 김형준은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는 얘기도 했다고 합니다.

1929

[일본 유학 수료 및 귀국]

고등음악학원을 수료하고 도쿄 교향악단을 사직한 뒤 귀국하여 국내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했습니다.

1929년 고등음악학원을 수료한 뒤 도쿄 교향악단을 사직하고 귀국했습니다.

1931

[조선 음악가 협회 상무 이사 선임 및 미국 유학]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되어 음악계의 주요 인사로 활동했습니다. 같은 해 7월 성가대를 사임하고 미국 셔우드 음악학교로 유학길에 올라 더 깊이 있는 음악을 배웠습니다.

1931년 그는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해 7월에 성가대를 사임하고 미국의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를 2년간 다녔습니다. 사실 이 때의 유학길은 미국으로 간 애인을 따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을한이 지은 《그리운 사람들》(삼중당, 1991)에 따르면 홍영후가 서울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무렵 K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수양어머니가 홍난파의 애주를 문제 삼아 결혼을 매우 반대하였고, 그예 미국으로 모녀가 함께 돌아가자 그 뒤를 좇아 급하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 위촉]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되어 국내 음악계에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고, 지방 흥사단 대회에도 참가한 후 귀국하였습니다. 1931년 그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되었습니다.

1932

[미국 유학 중 교통사고로 건강 악화]

미국 유학 중 교통사고를 당해 늑골을 다치고 늑막염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이로 인해 귀국 후 잦은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1932년 흥사단 가입은 있으나, 교통사고 발생 시점이 1931-1932년 유학 기간으로 불확실하여 1932년으로 기재하고 불확실 처리)

그러나 홍영후의 미국 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수업을 받으며 내야 하는 납부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해 분납을 하며 생활해야 했고, 뜻하지 않은 교통 사고를 당하며 늑골을 다치고 말았습니다. 이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시달려야 했고 귀국 후에도 잦은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할 정도로 그의 건강이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1933

[국내 교육 및 음악 활동 재개, 난파 트리오 결성]

국내로 돌아와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수,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 출강하며 교육자로서 활동했습니다. 또한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하고, 최초의 실내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하여 음악 활동을 활발히 이어갔습니다.

국내에 돌아와 그는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수를 맡았고,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도 출강하였습니다. 1933년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최초의 실내 악단이자 바이올린 3중주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하였습니다. 난파 트리오는 홍영후와 그의 조카인 홍성유, 이영세로 구성되어 진고개(현재의 충무로)에 있는 메이지제과홀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1934

[일본 빅터레코드 음악 주임, 재혼, 경성방송 관현악단 조직]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하며 현제명과 작곡 발표회를 가지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습니다. 같은 해 이대형과 재혼했으며,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지휘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1934년에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현제명과 함께 작곡 발표회를 하는 등 다시 국내에서의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그 해 12월 27일 이대형과 재혼하였고, 많은 영화 음악이나 신민요, 가요 등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나소운(羅素雲)이라 적었습니다. 그 밖에 이화여전 강사를 지냈고,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지휘자로 활동하였습니다.

1936

[<코리아음악연구소> 창설 및 성서 트리오 결성]

박영근, 이승연과 함께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창설하여 음악 교육에 힘썼고, <특선가요곡집>을 출간했습니다. 조카 홍성유의 사망으로 난파 트리오는 해체되었으나, 이흥렬, 김태연과 함께 성서 트리오를 결성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36년 그는 박영근, 이승연과 함께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창설하여 음악을 가르쳤고, <특선가요곡집>을 출간하였다. 이 해 8월 18일 조카 홍성유가 29세로 요절하여 난파 트리오는 해체되었지만, 그는 다시 이흥렬, 김태연과 함께 성서 트리오를 결성하였습니다.

1937

[수양동우회 사건 검거 및 친일 활동 시작]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72일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석방 후에는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고, 애국가요대회에서 <정의의 개가>, <공군의 가>를 작곡하는 등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삶에 큰 오점으로 남게 됩니다.

홍난파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72일 동안에 걸친 옥고를 치른 후에 석방되었으나, 애국가요대회에서 <정의의 개가>, <공군의 가(歌)>를 작곡하였다. 그 후 그는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9년 당시 변절한 문학가 이광수의 시에 곡을 넣어 <희망의 아침>을 발표하였다. 그런가 하면 매일신보에 <지나사변과 음악> 등을 게재하기도 했다. 또한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일제 말기 전시 체제(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이후로 일제 총독부는 모든 분야에 발악했었고, 당시 옥중에 갇혔던 정치범들이나 독립운동지사들은 전향서를 써야만 석방을 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지사들이 변절하거나 전향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던 시기였다.

1938

[한국 최초 음악 산문집 <음악만필> 발행]

한국 최초의 음악 산문집이자 음악 평론집인 음악잡지 <음악만필>을 발행했습니다.

1938년 음악잡지 「음악만필」을 발행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음악산문집이자 음악 평론집이기도 했다.

1940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임명]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 일제는 모든 분야에서 전시 체제를 강화하며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에게 전향을 강요했습니다.

또한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일제 말기 전시 체제(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이후로 일제 총독부는 모든 분야에 발악했었고, 당시 옥중에 갇혔던 정치범들이나 독립운동지사들은 전향서를 써야만 석방을 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지사들이 변절하거나 전향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던 시기였다.

1941

[뇌결핵으로 별세]

미국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앓던 늑막염이 수양동우회 사건 체포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악화되어 뇌결핵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경성요양원에서 43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유언으로 연미복을 입혀 화장해 달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홍영후는 미국에서 당한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고 있다가 회복되긴 했지만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재발하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그 상황에서 1941년에는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지금의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그 해 8월 30일에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뇌결핵으로 이어져 끝내 경성요양원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火葬)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1942

[<봉선화> 전국적 히트와 일제의 탄압]

소프라노 김천애가 히비야 공회당에서 <봉선화>를 불러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했으나, 일제 경찰 당국은 이를 민족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로 보고 부르지 못하게 탄압했습니다. 김천애는 이 노래를 계속 부르다 여러 차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된 것은 1940년대였다. 1942년 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신인 음악회에서 김천애가 <봉선화>를 부른 것이 시초였고, 귀국 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 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하였다. 이는 주권을 일본에 침탈당한 국민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였기에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었으나, 일본 경찰 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봉선화>의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성하에의 애절함이라면, 2절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의 조사를 뜻하는데, 이어지는 3절이 애절한 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다. 곧,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 역할을 한다.

1954

[난파기념사업회 설립 및 '조선동요 100곡집' 재간행]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하는 등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하였다.

1965

1965.10.25 사후 24년

[대한민국 정부 문화 훈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음악적 공헌을 국가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1965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난파에게 문화 훈장을 추서하였다.

1968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 건립]

수원 팔달산에 그의 노래비가 세워져, 음악인 홍난파를 기리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1968년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의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습니다.

1969

1969.08.30 사후 28년

['난파음악제' 시작]

홍난파의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처음 개최했으며, 이후 해마다 계속되어 그의 음악 세계를 기리고 있습니다.

1968년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의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4

2004.09.04 사후 63년

[홍파동 생가 등록문화재 지정 및 기념관 개관]

그가 살던 종로구 홍파동 소재의 집이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홍난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집 앞에는 그의 흉상도 세워져 있습니다.

또한 그가 살던 집(종로구 홍파동 소재)이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홍난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집 앞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습니다.

2006

[화성시 홍난파 꽃동산 조성사업 추진 및 유품 논란]

화성시가 활초동에 홍난파 꽃동산 조성사업을 추진하며, 그의 유품을 단국대학교 측에 넘겨줄 것을 요구하는 등 기념사업 권리 문제로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홍난파가 1897년에 남양 활초리에서 태어나 기념사업 권리문제로 논란을 빚었던 화성시는 이번에는 단국대학교와 유품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2006년부터 181억 5천만원을 들여 활초동 4만5천270m2 부지에 지하 1층, 지상2층 규모의 기념관, 야외음악당, 공원 등을 갖춘 홍난파 꽃동산 조성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연고권을 들어 단국대학교 측에 유품을 넘겨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09

2009.11.26 사후 68년

[친일 명단 포함 유보 결정]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될 예정이었으나, 유족이 낸 효력정지 신청이 서울행정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서 명단 포함이 유보 결정되었습니다.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될 예정이었지만 2009년 11월 26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이 서울행정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유보 결정되었다. 당시 재판부는 '홍난파의 행위를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더 따져봐야 하기 때문에 본안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당 처분의 효력을 중지한다'고 말했다.

2010

2010.11.05 사후 69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최종 확정]

유족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을 취하함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결정이 무효가 되고 홍난파는 최종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2010년 11월 4일 홍난파의 유족이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의 선고(2010년 11월 5일)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소송 취하 의사를 밝혔고 행정안전부가 이에 동의하면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에 따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인 법원의 결정이 무효가 되었고 홍난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실리게 되었다.

2011

[유품 등록문화재 지정]

문화재청으로부터 동판 동요악보원판 51개를 비롯해 홍난파가 생전에 사용하던 바이올린 등 약 420여 점의 유품이 등록문화재 제47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유품들은 단국대학교가 소장하게 됩니다.

난파음악관의 전시실에는 2011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 479호로 지정된 동판 동요악보원판 51개를 비롯, 홍난파가 생전에 사용하던 바이올린 등 그의 음악적 삶이 담긴 수필 등 약 420여 점이 전시되었다.

2013

2013.03.13 사후 72년

[단국대학교에 '난파 홍영후 전시실' 개관]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에 신축된 전용 난파음악관에 '난파 홍영후 전시실'이 개관되었습니다. 이 전시실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유품 등 홍난파의 음악적 삶이 담긴 약 420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단국대학교는 2013년 3월 13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는 신축한 캠퍼스에 전용 난파음악관을 마련하고 별실의 홍난파의 유품을 전시한 '난파 홍영후 전시실'을 개관했다. 유족으로 난파 선생의 조카인 홍건유 전 포스코 부회장, 외손자 홍익표 전 연성대학 부총장 등이 참석하였다. 난파음악관의 전시실에는 2011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 479호로 지정된 동판 동요악보원판 51개를 비롯, 홍난파가 생전에 사용하던 바이올린 등 그의 음악적 삶이 담긴 수필 등 약 420여 점이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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