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

음악가, 작곡가, 지휘자, 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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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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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국가인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작곡했습니다. 일본 유학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스페인에 정착해 마요르카 교향악단을 지휘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 논란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며 그의 평가에 대한 논쟁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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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안익태, 평양에서 출생]

대한민국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지휘자, 첼리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906년 12월 5일, 안익태는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평양종로보통학교와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를 마쳤습니다. 훗날 대한민국 국가인 '애국가'를 작곡하고 '한국환상곡'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될 그의 생애가 시작된 순간입니다.

1921

[일본 유학 시작]

안익태는 음악 특기생으로 일본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1921년, 안익태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했습니다. 이후 1926년에는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하며 음악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1930

[미국 유학 및 음악 교육]

일본 음악학교 졸업 후 안익태는 더 깊은 음악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첼로와 지휘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며 음악적 지평을 넓혔습니다.

1930년,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안익태는 미국으로 유학했습니다. 신시내티 음악학교, 커티스 음악학교, 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 등을 배우며 역량을 강화했고, 한인 교회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1936

[애국가 작곡]

안익태는 한국인의 정신을 담은 곡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으로 '애국가'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은 훗날 대한민국의 국가로 채택됩니다.

1936년, 안익태는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로 사용되는 '애국가'를 작곡했습니다. 이는 그의 음악적 역량이 조국의 독립과 민족 정신을 표현하는 데 집중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같은 해 처음 유럽을 방문하여 파울 힌데미트,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등 당대 유명 음악가들과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1937

[유럽 활동 시작]

안익태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후 유럽으로 건너가 활발한 지휘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 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안익태는 1938년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는 것을 시작으로 유럽에서의 활동을 본격화했습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졸탄 코다이 등에게 작곡을 배우는 등 음악적 성장을 거듭하며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여러 유럽 국가에서 지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41

[친일 행적 논란]

제2차 세계대전 중 안익태는 주베를린 만주국 대사관 공무원의 집에서 거주하며 만주국 축전곡을 작곡했고, 일본 궁중음악과 국가를 지휘하는 등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되었습니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안익태는 주베를린 만주국 대사관 공무원 에하라 고이치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축전곡을 작곡했는데, 이 곡의 가사에는 추축국(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결속을 다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1941년에는 일본의 궁중음악 에텐라쿠와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지휘하며 친일 행적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1944

[대표작 '한국 환상곡' 완성]

제2차 세계대전이 심화되던 중 스페인으로 피난한 안익태는 그곳에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한국 환상곡'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필 악보를 완성했습니다.

1944년 4월, 안익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 악화로 파리에서 베토벤 축제 연주회를 마친 직후 독일의 우방국인 스페인으로 피난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그는 한국인의 정서와 역사를 담아낸 그의 대표작 '한국 환상곡'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필 악보를 완성하며 어려운 시기에도 창작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1946

[스페인 정착 및 결혼]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한 안익태는 마요르카 섬으로 이주하여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하며 스페인에 정착했습니다.

1946년, 안익태는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하여 마요르카 섬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어 스페인 음악계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이후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에서도 지휘봉을 잡는 등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1955

[고국 대한민국 방문]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한 안익태는 국민적 환영을 받으며 자신의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1955년 3월, 안익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습니다. 이는 그가 해외에서 활동하며 조국을 향한 그리움을 담아냈던 '애국가'와 '한국환상곡' 등을 직접 선보일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후 1962년부터 1964년까지 3년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1965

[마지막 연주회]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마지막 연주회를 마친 안익태는 건강 악화로 인해 두 달여 뒤 스페인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1965년 7월 4일, 안익태는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이 연주회 직후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두 달여 뒤인 9월 1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60세의 나이로 타계하며 음악 인생의 막을 내렸습니다.

1977

1977.07.08 사후 12년

[유해 국립서울현충원 봉환]

안익태의 유해는 타계 12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게 되었습니다.

1977년 7월 8일, 타계 12년 만에 안익태의 유해는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음악적 공헌을 기리고자 하는 대한민국의 뜻을 반영한 것이었으나, 훗날 친일 행적 논란과 맞물려 현충원 안장 여부에 대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2008

2008.04.29 사후 43년

[친일인명사전 등재 논란]

민족문제연구소가 안익태를 친일파로 규정하고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포함시키며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본격화되었습니다.

2008년 4월 29일, 한국의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와 그 산하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안익태를 친일파로 규정하여 친일인명사전 제2회 명단에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만주국 축전곡 작곡, 일본 궁중음악 지휘 등의 행적이 재조명되면서 안익태의 친일 행적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상황에서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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