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무장, 해상왕, 상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7- 21:28:12
장보고는 신라 하대 해상 무역을 장악하며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한 인물이다. 당나라에서 군인으로 무장 경력을 쌓은 뒤 귀국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 해적을 소탕하고 삼각 무역을 주도하며 거대한 해상 제국을 건설했다. 왕위 다툼에 개입하여 신무왕을 옹립하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으나, 결국 문성왕의 견제와 귀족들의 시기로 인해 자객 염장에게 암살당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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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
장보고는 신라에서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 서주로 건너가 탁월한 승마와 창술 실력을 선보이며 군인으로서 성공했습니다. 그는 무령군중소장이라는 직책을 받아 1천에서 5천 명의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828
[청해진 설치와 해상 질서 확립]
신라로 돌아온 그는 흥덕왕에게 해적 피해를 보고하며 청해진 설치를 건의, 승인받아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완도에 청해진을 세워 해상 무역로를 안정시켰습니다.
흥덕왕 3년에 신라로 귀국한 장보고는 신라 백성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는 참상을 왕에게 아뢰고, 해적 소탕을 위한 군사 거점 설치를 청했습니다. 왕의 승인을 받아 1만여 명의 군사를 확보한 그는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대사 직책을 맡아 해상권을 장악했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827년부터 835년 이후 신라 노예 매매가 사라졌다고 평가됩니다.
830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거물로 성장]
해적 토벌을 넘어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당나라, 일본 등 여러 나라와 활발한 무역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한 이후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당나라와 일본은 물론 발해, 탐라, 우산국, 참파 등 아시아 여러 나라와 무역하며 큰 이익을 얻고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그는 산둥성의 신라인 사찰인 법화원 건립을 적극 지원하고, 노예로 팔린 신라인들을 사들여 석방하는 등 신라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838
[왕위 다툼 개입 및 신무왕 옹립]
신라 왕위 다툼에서 김우징(훗날 신무왕)을 지지하며 친구 정년에게 군사를 주어 김우징을 왕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흥덕왕 사후 신라에서 왕위 다툼이 벌어지자, 김제륭에게 패하고 피신해 온 김우징을 청해진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이후 김우징이 왕위에 오르면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고, 친구 정년에게 청해진 군사 5천 명을 내주어 왕경으로 진격하게 했습니다. 장보고와 정년의 군사는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추대하는 데 성공했으며, 장보고는 감의군사의 직책과 식읍 2,000호를 하사받았습니다.
840
[국제 무역 활성화와 왕실과의 갈등]
신무왕 사후 문성왕이 즉위하자 진해장군에 임명되어 일본과 당나라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며 삼각 무역을 더욱 활성화했지만, 왕비 문제로 문성왕 및 귀족들과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한 뒤 장보고는 진해장군에 임명되었습니다. 문성왕 2년(840년)에는 일본에 무역 사절을, 당나라에는 견당매물사를 보내는 등 활발한 삼각 무역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신무왕과의 약속대로 그의 딸이 왕비가 되지 못하고, 귀족과 신하들이 장보고의 세력을 경계하며 문성왕에게 지속적으로 경고함에 따라 왕실과의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841
[자객 염장에게 암살당함]
문성왕의 명을 받은 자객 염장에게 청해진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사망 연도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으나, 현재 841년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귀족과 신하들의 지속적인 경고와 장보고의 왕비 문제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문성왕은 결국 예전 장보고의 부하였던 자객 염장을 보냈습니다. 염장은 반란을 꾀하는 척 청해진에 투항했고, 장보고의 환대를 받으며 술에 취한 장보고를 칼로 베어 살해했습니다. 《삼국사기》는 846년, 《속일본후기》는 841년 11월, 《입당구법순례행기》는 845년 7월로 기록이 서로 다르지만,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841년을 장보고의 사망 기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851
[청해진 폐지와 주민 이주]
장보고 사망 후 10년 뒤, 신라 조정은 그의 세력 기반이었던 청해진을 폐지하고 그 주민들을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장보고가 암살된 지 10년 후인 문성왕 13년(851년) 2월, 신라 조정은 장보고의 세력 기반이었던 청해진을 공식적으로 폐지했습니다. 청해진의 주민들은 벽골군(현재 전북 김제 일대)으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이는 장보고와 함께 성장했던 해상 세력의 해체를 의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