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 혁명

혁명, 정치적 사건, 입헌 군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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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영국에서 발생한 무혈 혁명입니다.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옹호 정책과 의회 무시가 배경이 되었습니다. 의회와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 빌럼이 연합하여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공동으로 즉위했습니다. 1689년 권리장전이 서명되며 영국의 입헌 군주제와 의회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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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9

[휘그당의 제임스 2세 폐위 시도]

휘그당은 추방 결의를 통해 가톨릭 신자였던 제임스 2세의 왕위 계승을 막으려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제임스 2세 즉위 이전인 1679년에 신학적으로 저교회파 성공회 신자들의 정당인 휘그당이 추방 결의를 통해 제임스 2세의 폐위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시도는 제임스 2세의 왕위 계승에 대한 초기 반발을 보여줍니다.

1681

[휘그당의 두 번째 제임스 2세 폐위 시도]

휘그당이 다시 한번 추방 결의를 통해 제임스 2세의 폐위를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681년에 휘그당은 또다시 추방 결의를 통해 제임스 2세의 폐위를 시도하였으나, 앞선 시도와 마찬가지로 실패했습니다. 이는 제임스 2세에 대한 정치적, 종교적 반감이 꾸준히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1685

[제임스 2세의 즉위와 친가톨릭 정책]

제임스 2세가 즉위하여 고교회파 토리당을 지지했지만, 종교적 관용을 내세워 가톨릭 신자들을 관리로 채용하는 등 심사율을 무력화하며 토리당의 반발을 샀습니다.

1685년 제임스 2세가 즉위한 후, 그는 왕정 의회를 다수의 토리당원으로 채웠으나, 토리당의 견해를 무시하고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관리로 채용하는 등 종교적 관용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심사율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잉글랜드 교회(영국 성공회)의 붕괴로 비쳐 토리당의 큰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1686

[국왕 법정을 통한 가톨릭 우대 정책 강화]

제임스 2세는 국왕 법정을 열어 심사율 폐지를 강요하고, 가톨릭 반대 주교를 퇴위시키고 옥스퍼드 대학에 가톨릭 신도를 채용하는 등 노골적으로 가톨릭을 우대했습니다.

제임스 2세는 1686년 '국왕 법정'을 개최하여 로마 가톨릭 관료 기용을 제한하는 심사율의 폐지를 강요했습니다. 그는 런던 주교 핸리 콤프튼을 퇴위시키고 옥스퍼드 대학교 맥달런 컬리지의 개신교도 교직원을 해고한 뒤 가톨릭 신도로 채용하는 등 가톨릭 우대 정책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의회의 동의 없이 많은 가톨릭 신도를 상비군으로 고용하여 하운슬로우에 3만 4천여 명의 상비군을 주둔시키는 등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반 국왕 음모 조직]

도세트 주에서 한 무리의 음모자들이 '스튜어트 왕가의 폭군'인 제임스 2세를 무너뜨리기 위한 모의를 시작했습니다.

1686년, 도세트 주 차버러프 하우스에 한 무리의 음모자들이 모여 '스튜어트 왕가의 폭군'으로 불리던 제임스 2세를 무너뜨릴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의는 훗날 명예혁명의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1687

[제임스 2세의 양심의 자유 선언 반포]

제임스 2세는 비국교도들과 연합하여 로마 가톨릭에 대한 억압을 철폐하기 위한 '양심의 자유 선언'을 반포했습니다.

1687년, 제임스 2세는 자신이 신봉하던 로마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 이외의 개신교인인 비국교도들과 연합하여 '양심의 자유 선언'을 반포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영국 내 로마 가톨릭에 대한 억압을 철폐하고 종교적 관용을 확대하려 했으나, 이는 성공회 중심의 기득권층에게 큰 반감을 샀습니다.

[윌리엄 공의 영국 정치 개입 시작]

오라녜 공 윌리엄은 사절을 영국 토리당과 휘그당 지도자들에게 보내 비밀 편지를 전달하며 프랑스에 대항할 영국 군사력 동원을 요청하며 영향력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1687년 4월, 오라녜 공 윌리엄은 그의 사절을 영국 토리당과 휘그당 지도자들에게 보내 비밀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전제정치에 반대한다면 왕족의 권리를 사용하여 그들과 함께할 것임을 약속하며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잉글랜드의 군사력 동원을 요청했습니다. 이는 윌리엄이 영국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려는 시발점이었다.

[윌리엄 공의 제임스 2세 종교 정책 비판 공개 서한]

윌리엄은 네덜란드 수석 행정관을 통해 영국 백성을 향한 공개 편지를 배포, 제임스 2세의 종교적 관용 정책 중단을 촉구하며 왕권에 대한 도전임을 암시했습니다.

1687년 9월, 오라녜 공 윌리엄은 네덜란드의 수석 행정관 가스팔 파겔을 통해 영국 백성을 향한 공개 편지를 배포했습니다. 이 편지에서 윌리엄은 제임스 2세의 종교적 관용 정책의 중단을 촉구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제임스 2세의 왕권에 대한 암묵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688

[칙령 반포와 주교 수감]

제임스 2세가 모든 영국 교회에 '양심의 자유 선언' 낭독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한 캔터베리 대주교와 6명의 주교를 수감했으나 공개 재판에서 무죄가 선언되었습니다.

1688년, 제임스 2세는 영국의 모든 교회에서 '양심의 자유 선언'을 낭독하라는 칙령을 반포했습니다. 이를 거부한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샌크로프트와 6명의 주교를 수감하였으나, 공개 재판에서 런던 군중들의 지지 속에 그들에 대한 무죄가 선언되며 왕권에 대한 저항이 심화되었습니다.

[제임스 2세 아들 탄생]

제임스 2세의 아들이 태어나자, 기존 왕위 계승 1순위였던 개신교도 딸 메리의 희망이 사라지고, 브리튼 제도에 가톨릭 왕국이 세워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었습니다.

1688년 4월,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프란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태어났습니다. 이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개신교도 딸 메리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영국 개신교도들은 브리튼 제도에 가톨릭 왕국이 세워질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서로 대립하던 토리당과 휘그당은 동맹을 맺고 국왕에 대항할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영국-프랑스 함대 지원 합의와 윌리엄의 전략]

영국과 프랑스가 함대 지원에 상호 합의하면서, 윌리엄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적, 정치적, 재정적 지원을 필사적으로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1688년 4월, 영국과 프랑스가 항로에 있는 함대의 지원에 대해 상호합의했습니다. 이로 인해 윌리엄은 새로운 가톨릭 왕위 후계자 문제와 맞물려 늦어도 11월까지 영국을 침공하기로 협약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으며, 윌리엄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적, 정치적, 재정적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윌리엄 공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동맹]

윌리엄은 제네바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드 1세와 협약을 맺고, 영국 내 가톨릭 박해 중단과 오스만 제국 대항 동맹을 전제로 지지를 얻었습니다.

1688년 5월, 오라녜 공 윌리엄은 제네바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드 1세와 협약을 맺었습니다. 레오폴드 1세는 영국의 가톨릭 신도에 대한 박해가 없을 것과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는 것을 전제로 윌리엄을 지지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윌리엄의 대외적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습니다.

[왕위 이양을 위한 봉기 시작]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왕위를 그의 딸 메리와 남편 윌리엄에게 넘기기 위한 봉기가 체스터필드의 올드 휘팅턴에서 일어났습니다.

1688년 6월, 제임스 2세의 아들 출생으로 위기감을 느낀 개신교도들이 더비사이어 주 체스터필드의 올드 휘팅턴에서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왕위를 그의 개신교도 딸 메리와 사위 윌리엄에게 넘기기 위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 둘은 찰스 1세의 손자 손녀였습니다.

[영국 침공 준비를 위한 병력 및 자금 확보]

윌리엄은 암스테르담의 지원을 받아 400척의 수송선과 1만 3천여 명의 독일 용병, 같은 규모의 네덜란드 용병을 모집하고 유대인 은행가 등으로부터 7백만 길더의 막대한 자금을 확보했습니다.

1688년 6월 내내, 오라녜 공 윌리엄은 암스테르담의 수석 행정관 벤틴크와 비밀스럽고도 어려운 협상을 벌여 영국 침공을 위한 대규모 병력과 자금을 확보했습니다. 벤틴크는 400척의 수송선과 브란덴부르크, 뷔르템베르크 등지에서 모집한 13,616명의 독일 용병을 확보했으며, 같은 규모의 네덜란드 용병도 준비되었습니다. 윌리엄은 유대인 은행가 프란시스코 로페스 수아소로부터 2백만 길더를 빌렸고, 심지어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까지 숙적인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견제하기 위해 자금을 빌려주었습니다. 총 비용은 7백만 길더에 달했습니다.

['불멸의 7인'의 윌리엄 지지 서한]

제임스 2세에 의해 수감되었던 캔터베리 대주교 등 '불멸의 7인'이 윌리엄에게 보낸 편지가 도착하며, 윌리엄은 자신의 거사를 폭군으로부터 개신교도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확보했습니다.

1688년 6월 30일, 제임스 2세에 의해 수감되었던 캔터베리 대주교와 6명의 주교, 이른바 '불멸의 7인'이 오라녜 공 윌리엄에게 보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이 편지는 윌리엄의 영국 침공이 외국의 침략이 아닌, 폭군으로부터 개신교도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강력한 명분을 제공하며, 침공 계획의 첫 번째 목표인 '외국 침략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을 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존 처칠의 윌리엄 공 지지 선언]

말버러프 백작 존 처칠이 윌리엄에게 지지 편지를 보내, 윌리엄은 왕실 해군에 대한 강력한 군사적 지원까지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1688년 8월 14일, 제임스 2세의 실책으로 영국 군대 내에서도 불만이 고조되던 중, 말버러프 백작 존 처칠이 윌리엄에게 편지를 써 '당신을 위해 내 명예를 바칠 수 있어 신과 나라에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윌리엄은 왕실 해군까지 자신의 수중에 넣게 되며 잉글랜드 내에서 강력한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대 프랑스 동맹]

신성 로마 제국이 네덜란드 공화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에 대항하기로 했으며, 하노버 공과 색소니 선제후 등도 윌리엄을 지지했습니다.

1688년 9월 4일, 신성 로마 제국은 네덜란드 공화국과 동맹하여 프랑스에 대항하기로 하였고, 하노버 공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와 색소니의 선제후 존 조지 3세 역시 오라녜 공 윌리엄을 지지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윌리엄의 대 프랑스 연합 전선 구축과 영국 침공 계획에 든든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루이 14세의 경고와 윌리엄 공의 확신]

프랑스 사절이 루이 14세의 제임스 2세 공격 말라는 경고 편지를 전달했으나, 윌리엄은 이를 통해 프랑스가 즉각적으로 네덜란드를 침공할 의사가 없음을 파악하고 침공을 강행할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1688년 9월 9일, 프랑스 사절이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친서 2통을 전달했습니다. 첫 번째 편지에는 제임스 2세를 공격하지 말라는 경고가 적혀 있었고, 두 번째 편지에는 프랑스가 독일 내정을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편지는 의도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는데, 윌리엄은 이를 통해 프랑스가 즉각적으로 네덜란드를 침공할 의사가 없음을 파악하게 되었고, 이는 그가 영국 침공을 강행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네덜란드 선박 출항 금지]

루이 14세가 프랑스 항구에 있는 모든 네덜란드 선박의 출항을 금지했으나, 이는 단순한 경고에 불과했습니다.

1688년 9월 22일,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프랑스 항구에 있는 모든 네덜란드 선박의 출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는 네덜란드와 윌리엄에 대한 경고의 의미였으나, 실제적인 군사적 개입은 아니었습니다.

[암스테르담 의회의 영국 침공 승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의회가 윌리엄의 영국 침공 계획을 공식적으로 승인했습니다.

1688년 9월 26일,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 의회는 오라녜 공 윌리엄의 영국 침공 계획을 공식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이는 침공을 위한 중요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단계였습니다.

[홀란드 주 의회의 윌리엄 공 지원 결정]

홀란드 주 의회는 비밀 모임을 통해 윌리엄을 지원하고, 수송선 호위를 위해 53척의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688년 9월 29일, 홀란드 주 의회는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1672년의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 공격과 같은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윌리엄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은 53척의 군함을 수송선 호위를 위해 파견했으며, 이는 윌리엄의 해상 수송 작전에 필수적인 지원이었습니다.

[제임스 2세의 네덜란드 침략 선포]

윌리엄의 수송 준비가 완료되자, 제임스 2세는 이를 네덜란드의 잉글랜드 침략이라 선포했습니다.

1688년 9월 22일 시작된 윌리엄의 수송선 병력 및 물자 준비가 10월 8일 완료되어 홀란드 주 의회에 보고되자, 같은 날 제임스 2세는 이를 네덜란드의 잉글랜드 침략이라 선포하며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윌리엄 공의 헤이그 선언서 반포]

윌리엄은 헤이그 선언서를 반포하고 6만 장을 잉글랜드에 살포하며, 자신의 군사 행동이 개신교와 자유로운 의회를 위한 것이며 자신의 권리 행사임을 천명했습니다.

1688년 10월 10일, 오라녜 공 윌리엄은 헤이그 선언서를 반포하고 6만 장을 제작하여 잉글랜드에 살포했습니다. 선언서를 통해 윌리엄은 자신의 군사 행동이 오로지 개신교와 자유로운 의회를 위한 것이며 웨일즈 공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일 뿐이라고 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임스 2세는 두 번째 성명을 통해 윌리엄을 왕위를 찬탈하려는 침략자로 규정하며 더 이상의 설전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폭풍으로 인한 네덜란드 함대 출항 지연]

'개신교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네덜란드 함대가 출항했지만, 다시 바람 방향이 바뀌어 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688년 10월 첫 주까지 날씨의 영향으로 네덜란드 함대는 발이 묶여 있었습니다. 가을 폭풍이 일찍 시작되자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를 '교황의 바람'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10월 말이 되자 폭풍은 끝나고 바람의 방향이 서풍에서 동풍으로 바뀌어 '개신교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 함대는 3주나 기다린 끝에 10월 28일 출항하였으나, 다시 바람의 방향이 남서풍으로 바뀌자 11월 9일 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함대의 성공적인 재출항]

3주간의 지연 끝에 네덜란드 함대가 마침내 재출항하여 잉글랜드 하위크에 당도했습니다.

1688년 11월 11일, 네덜란드 함대는 다시 출항하였고, 스페인 무적함대보다 4배나 많은 배에 6만 병력과 5만 말을 태운 대규모 군대가 잉글랜드 하위크에 당도했습니다. 바람이 북풍으로 바뀌어 윌리엄의 함대는 남쪽으로 밀려났지만, 이는 오히려 영국 해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윌리엄 공의 영국 상륙]

오라녜 공 윌리엄이 15,000명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데번주 브릭스햄 부근 토베이에 상륙했으며, 많은 군중이 그를 환영하고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1688년 11월 15일(그레고리력 기준), 오라녜 공 윌리엄의 대규모 군대가 데번주 브릭스햄 부근의 토베이에 상륙했습니다. 윌리엄의 군대는 보병 11,000명, 기병 3,660명 등 대략 15,000명 규모였으며, 영국 망명자들과 위그노들을 포함한 5,000명의 자원자들도 동행했습니다. 그는 많은 군중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 이들 중 일부가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상륙일은 화약음모사건 기념일과 겹쳐 그 의미를 더했습니다. 그의 깃발에는 '잉글랜드의 자유와 개신교의 신앙, 나는 지켜낼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영국 함대의 추격 실패]

남서풍이 불면서 조지 렉이 지휘하던 영국 함대가 윌리엄의 군대를 추격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1688년 11월 17일(그레고리력 기준), 바람이 남서풍으로 바뀌면서 조지 렉의 지휘하에 있던 영국 함대가 윌리엄의 군대를 추격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교황령 공격을 위해 지중해에 집중돼 있었기에 윌리엄의 상륙은 더욱 수월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네덜란드 함대는 이 상륙을 '영광의 도해(渡海)'라고 명명했습니다.

[플리머스의 투항과 윌리엄 공의 진격 시작]

플리머스가 윌리엄에게 투항하자 윌리엄은 진격을 시작했으며, 제임스 2세가 자멸하기를 희망하며 수비적인 태세를 유지했습니다.

1688년 11월 18일, 주요 도시인 플리머스가 윌리엄에게 투항하자 그는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윌리엄은 자신의 군대가 제임스 2세의 오합지졸 군대에 비해 월등히 강력하다고 확신했지만, 상륙지가 제임스 2세 진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제임스 2세가 자멸하기를 희망하며 수비적인 태세를 취한 가운데 잉글랜드 내 동맹들에게 제임스 2세를 압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3개월에 걸쳐 천천히 진군하며 보급선 관리에 유의하고 군대의 약탈을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윌리엄 공의 엑시터 당도]

윌리엄은 상륙 후 천천히 진군하여 엑시터에 당도했습니다.

1688년 11월 19일(그레고리력 기준), 오라녜 공 윌리엄은 데번주 브릭스햄에 상륙한 뒤 천천히 진군하여 엑시터에 당도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군대가 약탈에 나서지 않도록 엄격히 통제하며 민심을 얻으려 노력했습니다.

[귀족들의 윌리엄 공 지지 선언]

윌리엄이 엑시터에 당도한 후, 많은 귀족들이 그의 지지를 선언하며 제임스 2세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습니다.

1688년 11월 22일(그레고리력 기준), 윌리엄이 엑시터에 당도하자 많은 귀족들이 그의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양 진영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사태를 관망하는 등 여전히 불확실한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딸 앤의 투항과 제임스 2세의 퇴각]

제임스 2세의 최고 사령관들이 연이어 윌리엄에게 투항하고 딸 앤마저 배신하자, 제임스 2세는 전의를 상실하고 런던으로 퇴각했습니다.

1688년 11월 23일, 제임스 2세 측 최고 사령관 루이 드 듀라가 윌리엄 측에 투항했고, 11월 24일에는 사령관 존 처칠이, 그리고 11월 26일에는 제임스 2세의 딸 앤마저 윌리엄 측에 투항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군대 내 충성심이 의심되는 장교들이 많았음에도 제임스 2세는 이를 방관하다 결국 전의를 상실하고 런던으로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제임스 2세가 권력을 잃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제임스 2세의 솔즈베리 합류]

런던에서 반 가톨릭 폭동이 일어나는 혼란 속에, 제임스 2세는 19,000여 명의 주력 부대와 솔즈베리에 합류했으나 군사적 사기는 저하된 상태였습니다.

1688년 11월 29일(그레고리력 기준), 런던에서 반 가톨릭 폭동이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제임스 2세는 자신의 주력 부대(약 19,000명)와 함께 솔즈베리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이미 많은 수가 전의를 상실했으며, 충성심이 의심되는 장교들이 섞여 있었음에도 제임스는 이들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리지 않고 방관하여 군사적 결속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윌리엄 공의 솔즈베리 협상 시작]

윌리엄은 솔즈브리에 당도하여 왕의 자문위원회와 협상을 시작했으며, 제임스 2세는 잉글랜드 통제력을 상실한 채 자유 선거와 사면을 제안했으나 이미 의미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688년 12월 3일(그레고리력 기준), 윌리엄은 솔즈브리에 당도하여 왕의 자문위원회와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제임스 2세는 자유로운 선거와 반역자에 대한 일반 사면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이미 잉글랜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그의 제안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제임스 2세는 윌리엄이 자신을 사형에 처할까 두려워했고, 자신의 군대마저 믿을 수 없게 되자 결국 군대에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윌리엄 공의 제임스 2세에 대한 조건 제시]

윌리엄은 제임스 2세의 사자를 만나 그의 조건을 수락하는 대신,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의 전쟁 비용을 지불하고 가톨릭 관료를 즉각 해임할 것을 요구했으나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1688년 12월 8일, 오라녜 공 윌리엄은 제임스 2세의 사자를 만나 제임스의 조건을 수락하는 대신,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의 전쟁비용을 지불할 것과 잉글랜드 정부의 가톨릭 관료를 즉각 해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윌리엄은 제임스 2세로부터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하며 협상의 진척은 없었습니다.

[리딩 전투에서 제임스 2세 군대 패퇴]

리딩에서 양측 간의 교전이 발생하여 제임스 2세의 군대는 패배했으며, 여러 도시에서 반 가톨릭 폭동이 확산되고 도버 성이 개신교도에게 함락되었습니다.

1688년 12월 10일, 리딩에서 양측 간의 교전이 발생하여 제임스 2세의 군대는 퇴패했습니다. 브리스톨, 히어포드, 요크, 켐브리지, 시로프사이어 등지에서 반 가톨릭 폭동이 발생하였고, 도버 성이 개신교도에게 함락되는 등 제임스 2세의 통제력 상실은 가속화되었습니다.

[제임스 2세의 도주 시도와 체포]

제임스 2세는 왕실 인장을 템즈강에 던져버리고 도망쳤으나, 다음날 페버세임에서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1688년 12월 11일, 제임스 2세는 왕실 인장을 템즈강에 던져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이는 사실상 국왕으로서의 권한을 포기하려는 시도였으나, 그는 다음날 페버세임의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같은 날, 스피리처의 영주와 템포럴의 영주는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윌리엄에게 통치를 요청하며 제임스 2세에게 런던으로 돌아와 처분을 받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아일랜드의 밤' 폭동 발생]

제임스 2세의 도주 소식이 알려지자 런던에서 반 가톨릭 폭동이 일어나 가톨릭 신자 집과 여러 대사관이 약탈당하는 '아일랜드의 밤'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688년 12월 11일 밤, 제임스 2세의 도주 소식이 알려지자 런던에서 대규모 반 가톨릭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가톨릭 신자의 집과 여러 가톨릭 국가의 대사관이 약탈당했으며, 가톨릭 교도인 제임스의 아일랜드 용병들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런던 시민들은 가톨릭 교도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력과 약탈을 행사했습니다. 이 사건을 '아일랜드의 밤'이라고 합니다.

[제임스 2세의 런던 귀환과 정권 유지 시도]

제임스 2세는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런던으로 돌아와 정권을 유지할 희망을 가졌고, 윌리엄에게 협상을 재개할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1688년 12월 16일, 제임스 2세는 런던으로 돌아왔고, 군중들은 그에게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환호를 본 제임스 2세는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추밀원 위원들과 회동을 열었습니다. 그는 페버세임의 영주를 윌리엄에게 보내 협상을 계속할 의사를 전달하며 상황을 반전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윌리엄 공의 런던 입성]

제임스 2세는 윌리엄의 압박과 해군의 지지 상실로 켄트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 윌리엄은 오랜지색 옷을 입은 런던 군중의 환호 속에 입성했습니다.

1688년 12월 18일, 윌리엄은 제임스 2세가 더 이상 왕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고, 잉글랜드 해군 역시 윌리엄의 지지를 표방하면서 제임스 2세는 스스로 네덜란드 경비대와 동행하여 켄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윌리엄은 이 날 런던에 입성했으며, 런던의 군중들은 오랜지색 옷을 입고 그를 환영했습니다.

[제임스 2세의 프랑스 망명]

윌리엄과 네덜란드 장교들의 제안으로, 찰스 1세처럼 처형당할까 두려워하던 제임스 2세는 아내가 있는 프랑스로 건너가며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1688년 12월 23일, 런던에서 윌리엄이 입성한 후 제임스 2세는 찰스 1세처럼 자신도 사형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장교들은 '제임스 2세가 원한다면 국외로 보내 줄 수 있다'는 제안을 했고, 제임스 2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아내가 있는 프랑스로 건너갔습니다. 이로써 그의 짧고도 논란 많던 통치는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윌리엄 공의 정부 재편과 임시 의원 대회]

윌리엄은 정부를 재편하고 휘그당과 연합하여 임시 의원 대회를 개회했습니다. 왕좌가 공식적으로 공석이었기 때문에 이를 '의회'로 부를 수는 없었습니다.

1688년 12월 28일, 오라녜 공 윌리엄은 정부를 재편하고 휘그당과 연합하여 임시 의원 대회를 개회했습니다. 잉글랜드 왕좌가 공식적으로 공석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를 '의회'라고 부를 수 없었지만,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에 여전히 제임스 지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제임스가 힘을 길러 반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1689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의 공동 즉위와 권리장전 서명]

의원 대회의 논쟁 끝에 윌리엄과 메리는 공동 군주로 즉위하고, 의회로부터 '불만사항 23조'로 불리던 1689년 권리장전을 전달받아 서명하며 영국의 왕권이 무혈로 이양되었습니다.

1689년 2월 13일, 임시 의원 대회에서는 왕위 이양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휘그당은 윌리엄 단독 국왕 옹립, 휘그당 온건파는 공동 즉위, 토리당은 메리 단독 집권을 주장했습니다. 결국 윌리엄과 메리는 공동 집권하기로 합의하고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로서 즉위하게 됩니다. 이들은 의회로부터 처음에는 '불만사항 23조'로 불리던 1689년 권리장전을 전달받고 이에 서명함으로써 영국의 왕권은 별다른 유혈 충돌 없이 이양되었으며, 이는 영국 입헌 군주제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의회의 윌리엄 공 지지 안건 무산]

스코틀랜드 의회가 윌리엄 3세를 위한 정부 구성을 논의했으나, 제임스 2세 지지자들이 거부하고 퇴장하여 의회가 무산되었습니다.

1689년 3월 14일, 스코틀랜드 의원들은 윌리엄 3세를 위한 정부의 구성을 안건으로 에든버러에서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임스 2세를 지지하고 있던 침례교 의원들이 이를 거부하고 퇴장하자 의회는 무산되었으며, 스코틀랜드의 왕좌는 여전히 공석이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왕권 인수]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스코틀랜드의 권리장전에 서명한 이후에야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인수했습니다.

1689년 3월 14일 스코틀랜드 의회가 무산된 후, 스코틀랜드의 왕좌는 공석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5월에 이르러 스코틀랜드의 권리장전에 서명한 이후에야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인수할 수 있었습니다.

1691

[재커바이트 반란 진압]

제임스 2세 지지 세력인 재커바이트가 일으킨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제임스 2세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고원지대, 잉글랜드의 지지자들로부터 여전히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이들은 재커바이트라 불리며 반란을 준비했습니다. 이 재커바이트 반란은 1691년에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1715

[재커바이트 반란 재발 (1차)]

이전에 진압되었던 재커바이트의 반란이 다시 한번 일어났습니다.

1691년 완전히 진압되었던 재커바이트의 반란이 1715년에 다시 한번 발생하여 윌리엄과 메리 이후의 왕권을 위협했습니다.

1745

[재커바이트 반란 재발 (2차)]

재커바이트 반란이 또다시 발생하여 영국 왕권의 안정에 도전했습니다.

1715년에 이어 1745년에도 재커바이트의 반란이 다시 한번 일어났습니다. 이는 제임스 2세의 후손을 지지하는 세력이 오랫동안 영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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