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광복군
군사 조직, 독립운동 단체, 항일 무장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9:2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준군사조직으로, 1940년 중화민국 충칭에서 결성되었다. 지청천, 이범석, 김원봉 등이 주도하여 태평양 전쟁 등 항일 연합작전을 수행했다.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광복을 맞았으며, 1946년 해산 후 대한민국 국군의 모태가 되었다. 해방 후 '짝퉁 광복군' 및 박정희 비밀공작원설 등 여러 논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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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한국광복군 조직 추진]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의 제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내 모든 조선인 무장세력을 규합하여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36년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의 제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에 있는 모든 조선인 무장세력을 규합하여 한국광복군 조직을 추진하게 된다. 이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조성된 조선인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와 장제스와 김구 개인의 돈독한 관계가 바탕이 되었다.
1937
[중일전쟁 발발과 중국 측의 지원 분위기 조성]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2차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제국에 맞서 싸우면서, 임시정부의 무력수단 확보에 대한 중국 측의 전폭적인 지원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일본제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무력수단을 갖추는 데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1939
[한국독립당 당군 창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의 당군인 한국독립군이 창립되어, 이후 한국광복군의 모태가 되었다.
1939년 1월 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의 당군인 한국독립군이 창립되었고, 이 조직이 훗날 한국광복군의 모태가 된다.
1940
[한국광복군 창립 승인 교섭]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장제스 총통에게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승인해줄 것을 교섭했고,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승인받았다.
1940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은 중국 국민정부 장제스 총통에게 한국광복군의 활동 승인을 교섭하였고,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승인받았다.
[「한국광복군선언문」 발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문은 광복군이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고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할 것임을 천명했다.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문은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광복군 창설]
중화민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준군사조직인 한국광복군이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며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이는 임정 요인들과 현지 한국 거류민, 중화민국 군관들이 임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이 거행되며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현지 한국 거류민 및 중화민국 국방성에서 파견한 군관들이 임석한 가운데 행사가 거행되었으며, 지청천이 총사령관, 이범석이 참모장을 맡았다. 광복군은 처음 약 30여 명 규모로 총사령부만 있는 '군인 없는 군대'였으나, 이후 시안으로 이동하여 장병 모집에 총력을 기울였다.
1941
1941년 1월,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으며, 이로써 광복군은 1·2·3지대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흡수한 5지대를 합친 4개 지대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전달]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한국광복군이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다는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 조항을 전달받았다.
중화민국 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년 11월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정부 측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으로 된 조건을 전달받았다. 이 준승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으며, 이현희는 이를 한국 독립군이 아닌 중국의 보조군이 되는 굴욕적인 협정으로 평가했다.
[임시정부, 일본 및 독일에 선전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태평양전쟁 발발에 맞춰 일본제국과 나치 독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항일 투쟁의 의지를 확고히 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일본제국과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로써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국제적인 항일전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42
한국광복군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조직을 흡수 통합하는 데 진력했으며,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흡수하였다. 그러나 일부 흡수된 조선의용대는 사상의 차이로 결국 떨어져 나가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중공군 하부 세력이 되었다.
1943
[버마 전역 투입]
한국광복군 일부 병력이 영국군에 파견되어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선 중 하나인 버마 전역에 투입되며 실제 전투 경험을 쌓았다.
한국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되어 버마 전역에 투입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실제 전투에 참여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OSS(전략사무국)의 특별훈련을 받기도 했다.
1944
[광복군 통수권 임시정부로 이양]
중화민국 정부가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공식적으로 이양하여, 광복군이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지휘권을 확보했다.
1944년 8월, 1941년 제정되었던 굴욕적인 한국광복군 준승이 폐기되고,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공식적으로 이양되었다. 이는 광복군이 임시정부의 독자적인 군사조직으로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45
[광복군 병력 기록 및 OSS 훈련 승인]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에 한국광복군의 총 병력 수가 339명으로 기록되었으며, 동시에 광복군의 미국 OSS 훈련이 승인되어 국내 진공작전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1945년 4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 또한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미국 OSS 훈련을 승인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국내정진군 편성]
일제 패망이 임박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기 위해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을 편성, 한반도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일본제국의 항복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기로 하고, 1945년 8월 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했다. 이는 광복군이 한반도 내로 진입하여 일본군을 직접 무장 해제하려는 계획이었다.
[광복]
대한민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한국광복군은 국내 진공 작전 직전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으로 대한민국은 35년간의 식민 통치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한국광복군은 국내 진공 작전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광복을 맞이하게 되어, 직접적인 국내 진공을 통한 국토 수복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국내정진군 선발대 진입 시도 및 회군]
미군 비행기를 통해 국내정진군 선발대가 한반도로 향했으나, '가미카제 특공대가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했다.
1945년 8월 16일, 미군 비행기를 통해 국내정진군 선발대가 한반도로 진입을 시도했으나,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작전을 중단하고 회군하였다.
[국내 진입 재시도 실패]
국내정진군이 다시 한반도 진입을 시도하여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광복 이틀 뒤인 1945년 8월 18일, 국내정진군은 다시 한반도 진입을 시도하여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당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해 결국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로 인해 한국광복군은 '국군 자격'으로 국내에 진입하는 것이 좌절되었다.
1946
[한국광복군 해산]
미군정의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과 중국 국공내전의 혼란 속에서 한국광복군이 공식적으로 해산을 선언했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정이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리면서 국내지대는 해체되었고, 중국에 남아있던 한국광복군 또한 1946년 5월 16일 중국 국공내전의 혼란 속에서 사실상의 해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범석 장군의 통솔 아래 귀국한 병력은 약 500명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