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

정치인, 교육자, 청년 운동가, 독립운동가, 언론인, 기독교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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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개화파 관료로서 외교 자주성을 확보했으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과 민권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옥중 기독교인이 된 후 YMCA 활동에 헌신하며 청년들을 지도했고, 민립대학 설립을 주도했습니다. 만년에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대한 신간회 회장을 맡아 민족통일전선 운동을 이끌었으며, 재물 욕심 없이 청년 지도자 양성에 힘쓴 '만년청년'으로 존경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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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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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

[월남 이상재, 선비 가문에서 출생]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아버지 이희택과 밀양 박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고려 시대 학자 이색의 후손으로, 전형적인 선비 집안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서천군(당시 한산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선공감 가감역을 지낸 이희택과 밀양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고려 말 학자 이색의 후손으로, 대대로 벼슬살이를 했으며, 비록 집은 가난했지만 학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 속에서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어려서 이름은 계호(季皓)였고, 성인이 된 뒤 이상재(李商在)로 바꿨으며 아호는 월남(月南)입니다.

1864

[조혼 및 효심 발현]

고종 1년에 당시의 조혼 풍습에 따라 3년 연상인 목천 장씨와 결혼했습니다. 이후 할아버지의 별세로 아버지가 투옥되자 대신 옥살이를 자청하며 효심과 의리를 보여주었습니다.

1864년(고종 1년) 조혼 풍습에 따라 3년 연상인 목천 장씨와 결혼했습니다. 할아버지 이경만 선생이 별세하여 선산에 안장되었으나, 선산 경계 마찰로 아버지 이희택이 투옥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상재는 한산군에 달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옥살이를 하겠노라 군수에게 청했고, 아버지 석방 후 자신이 대신 투옥되었다가 풀려나며 의리 있는 청년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1867

[과거 낙방과 박정양과의 만남]

18세에 과거에 응시했지만, 양반들의 연줄과 인맥으로 합격자를 정하는 매관매직 행위로 인해 낙방했습니다. 이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은거하다가, 한성에서 박정양을 만나 그의 비서로 관계에 투신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수련한 이상재는 18세에 과거에 응시했지만, 양반들의 연줄과 인맥으로 과거 합격자를 정하는 매관매직 행위로 낙방했습니다.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농업에 종사하며 은거했습니다. 한성부에서 우연히 박정양을 만나 시국을 논하며 뜻이 통했고, 1880년까지 박정양의 개인 비서로 일하며 국내외 정세에 대한 지식을 쌓고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사상을 형성했습니다.

1881

[일본 시찰 통해 개화사상에 눈 뜨다]

박정양의 일본 시찰에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등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유했습니다. 일본의 신흥 문물과 발전상에 충격을 받고 조선 사회 역시 개항이 필요하다는 시각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그의 개화운동 참여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881년, 박정양이 일본 시찰 목적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갈 때 이상재는 그의 수행원이 되어 동행했습니다. 일본에서 김옥균, 홍영식, 조준영, 어윤중 등 개화파 지식인들과 깊이 사귀었고,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유길준, 윤치호 등과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일본의 도심 번화가를 다니며 신흥 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조선 사회 역시 개항이 필요하다는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1884

[우정국 근무와 갑신정변 연루]

홍영식의 권고로 우정국 주사에 발령받아 인천에서 근무했으며, 같은 해 10월 11일 우정국 사사에 임명되었습니다. 갑신정변 직전 정변을 도왔으나, 3일 만에 실패하자 책임을 통감하고 관직에서 사퇴 후 낙향했습니다.

1884년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권고로 우정국 주사에 발령받아 인천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10월 11일에는 우정국 사사에 임명되었습니다. 갑신정변 직전 정변을 도왔으나 3일 만에 실패하자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고 관직에서 사퇴했습니다. 1884년 12월, 우정국 인천분국장에 임명되었으나 3일 만에 해임되었고, 갑신정변 실패로 연루자로 몰렸으나 수색 책임자인 한규설을 만나 떳떳이 처신하고 고향으로 내려감으로써 처벌을 면했습니다.

1887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조선 외교 자주성 확보]

박정양에 의해 다시 등용되어 친군영 문안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박정양의 미국 전권대사 수행원으로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며, 청나라의 방해를 물리치고 조선의 국서를 단독으로 봉정하여 조선 외교의 자주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887년 초 박정양에 의해 친군영의 문안으로 다시 등용되었습니다. 1887년 6월 박정양이 미국에 전권대사로 임명되자, 이상재는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수행하여 1년여 동안 워싱턴 D.C.에서 근무했습니다. 이때 청나라 공사가 국서(國書)의 봉정을 직접 하려 하자, 청나라 공사관 서기관과 담판하여 박정양이 단독으로 봉정하게 했고, 이로써 조선 개국 이후 외교관계에서 중국의 속국화된 인습을 없애버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892

[다양한 관직 역임 및 신교육 제도 도입]

전환국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894년에는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참찬관, 학부참사관, 법부참사관, 학부 아문 참의 겸 학무국장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신교육 제도 창안 및 학교 설립에 힘썼습니다.

1892년에 전환국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박정양이 내무부 독판이 되자 1894년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참찬관이 되었습니다. 그해 학부참사관·법부참사관을 거쳐 1894년 관제 개정 이후 신설된 학부 아문의 참의 겸 학무국장을 지냈습니다. 학무 아문 참의로 재직 중 신교육 제도를 창안하여 신교육령을 반포하고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하며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일본 공사의 강요를 거절하고 미국인과 프랑스인 교사를 고용하는 등 소신을 지켰습니다.

1896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주도, 민권 운동에 앞장서다]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내각 총서와 중추원 의관을 거쳐 의정부 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 색출과 처벌에 힘썼습니다. 7월에는 서재필,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 의장으로 활동하며 민중 계몽과 민권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내각 총서와 중추원 1등 의관이 되었고, 6월에는 내각의 의정부 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 색출과 처벌, 감사 활동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탐관오리 축출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1896년 7월 그는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이완용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 위원이 되어 민권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대중계몽집회인 만민공동회 의장과 사회를 맡아 종로에서 척외·황권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고 상소문을 올리는 등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1898

[헌의6조 건의와 독립협회 해산]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관민공동회를 개최, 전제군주권 제한 및 내각책임 행정을 요구하는 헌의6조를 결의하여 고종에게 건의했습니다. 고종이 이를 수락했으나 보수파의 반격으로 독립협회 해산령이 내려지고 구속되었습니다.

1898년 10월 28일,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전제군주권을 제한하고 내각책임 행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헌의6조(獻議六條)를 결의하여 고종에게 건의했습니다. 그해 10월 30일 고종이 이를 수락한 후 중추원을 개정하여 중추원 관제를 발표했으나, 조병식·유기환 등의 반격을 받게 됩니다. 11월 4일 독립협회 해산령이 내리고 정교·남궁억 등 16명과 함께 구속되었으며, 11월 10일 태(笞) 40대를 맞고 풀려났습니다.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습니다.

1902

[옥중 기독교 귀의, 삶의 전환점을 맞다]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옥중에서 이승만이 전달한 성서를 읽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으며, 출옥 후 고향에 '초갓집교회'를 설립하는 등 신앙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899년 11월 4일, 수구파가 보낸 군사들에 의해 독립협회 간부들 대다수가 체포됨으로써 독립협회는 해산당했습니다. 1902년에는 개혁파 인사들이 대거 구금되거나 일본으로 피신하는 개혁당 사건이 일어나자 그해 6월 둘째 아들 이승인(李承仁)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당시 그는 감옥에서 이승만이 전달한 성서를 읽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출옥 직후 그는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로 내려가 교회를 설립, '초갓집교회' 예배당을 헌당했습니다.

1904

[석방 후 이승만 후원]

특별 석방된 후 이승만의 옥바라지를 했으며, 이승만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 미국 유학 생활비를 지원하는 등 관계를 이어나갔습니다.

1904년 2월 이상재는 특별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이승만의 옥바라지를 했고, 이승만도 미국에 파견될 특사로 선정되어 곧 석방됩니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YMCA에서 만난 이승만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 주었고, 후일 이승만이 미국 유학을 할 때는 그의 생활비를 지원,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1905

[미국에 대한 실망과 관직 사퇴]

앨리스 루스벨트 환영 만찬에 참석하여 미국에 대한 기대를 가졌으나, 가쓰라-태프트 밀약 소식을 듣고 큰 실망감을 가졌습니다. 이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고종의 부름에도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의정부 참찬에 머물다 군대 해산 이후 완전히 사퇴했습니다.

1905년 9월 26일 서울 전동의 민영환 집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를 환영하는 만찬에 참석했습니다. 바다 건너 해양 문명국이 대한제국의 자유와 해방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제자인 이승만, 친구 윤치호 등으로부터 가쓰라-태프트 밀약 소식을 듣자 이상재는 미국에 대해 엄청난 실망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고종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관직에 미련이 없었음을 밝혔으나 고종의 애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사양했으며, 군대해산 이후 관직을 사퇴했습니다.

1910

[한일합방 후 공직 사퇴 및 풍자 저항]

한일 합방 이후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하고, 교육 계몽활동과 청년들의 실력 양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조선미술전람회 회장 추대 시 일제의 부당함을 풍자하는 발언으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드러냈습니다.

1910년 8월 한일 합방 이후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했습니다. 한일합방 이후 교육 계몽활동에 나섰고, 청년들의 깨달음과 실력 양성, 해외 유학과 견문 시찰을 청년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우연히 회장으로 추대되었을 때, 이인직의 의문에 '대감은 나라 망하는데 선수 아니십니까? 대감이 일본으로 이사가면 일본이 망할 것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하며 일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조롱을 보여주었습니다.

1911

[일본 YMCA 만찬에서 일제에 경고]

일본 YMCA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만찬회에 참석한 총리대신을 비롯한 대신들 앞에서 일본의 강력함이 영원하지 않으며, '하늘에 계신 임금'의 뜻을 명심해야 한다고 연설하여 일제의 오만함을 경고했습니다.

1911년 초봄, 일본 YMCA가 월남 이상재 선생을 초청했습니다. 한일 양국의 교인 간 친목을 표방했지만 독립운동의 의지를 꺾으려는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에 건너간 이상재 선생 일행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명승고적을 시찰한 후, 어느 날 저녁 총리대신이 베푸는 만찬회에 참석했습니다. 만찬이 끝날 무렵, 총리대신이 이상재에게 소신을 듣기를 청하자 그는 "여러분! 일본인들은 일본이 가장 강한 나라 중의 하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네들은 원하는 모든 것이 성사될 것으로 믿고 있으나 또 하나의 강력한 왕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임금께서 노하시게 되면 일본의 육해군은 눈 깜짝하는 사이에 멸망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이것을 명심하여 그 임금을 즐겁게 해드린다면 일본은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임금이란 두말할 것 없이 하늘에 계신 임금이십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1913

[YMCA 활동을 통해 청년 계몽 운동 지속]

조선총독부의 탄압 속에서도 황성 YMCA 총무에 취임하여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사수했습니다. 1914년에는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여 한국 YMCA의 모태를 마련하며 청년 계몽 운동을 지속했습니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YMCA의 확장을 경계하여 어용단체인 유신회를 동원해 기독교 청년회를 파괴하려 했습니다. 간부들이 축출, 구금, 추방되거나 해외 망명하는 혼란 속에서도 이상재는 황성 YMCA 총무에 취임하여 윤치호와 함께 YMCA의 간판을 지키고 청년회를 사수했습니다. 1914년에는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여러 학생YMCA와 연합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와 통합,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했는데, 이는 한국 YMCA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계몽운동에 참가하며 1920년대 조선 기독교계의 계몽운동에 중점을 둔 사회참여를 주도했습니다.

1918

[변영로에게 민족의 기개 가르치다]

YMCA 중학부에 재학 중이던 변영로를 만나 그의 이름을 부르며 꾸짖는 듯한 농담을 통해 한국인의 기개를 지키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말 것을 가르쳤습니다.

1918년 무렵 YMCA의 중학부에 재학하던 수주 변영로가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지 않고 종로 거리를 걸어가노라니까 뒤에서 누군가가 변정상(卞鼎常) 씨, 변정상 씨 하고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변영로가 불쾌히 여기며 항의하자 이상재는 "이놈아. 그러면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란 말이냐. 기백이 그만하면 됐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변영로에게 변씨 가문의 기개와 더불어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농담조로 전달한 일화입니다.

1919

[3·1 운동 관련 구금과 불굴의 기개]

3·1 만세 운동 참여 요청은 거부했으나, 관련자로 지목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습니다. 일본인 검사의 회유와 고문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한 태도를 보이며 석방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으로부터 조선독립선언문에 서명해 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3·1 만세 운동 관련자로 지목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습니다. 일본인 검사 상내(上內)가 문초를 할 때 각종 고문 도구들을 준비하고 회유하였으나 그는 거절하며 "옳지. 왜놈들은 제 부모도 친다더라. 늙은 나를 치려거든 쳐 보거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검사는 감히 그를 치지 못했고, 총독부 경찰은 그에게 3·1 만세 운동에 관련된 것을 추궁했으나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고, 별다른 혐의점이 없자 석방되었습니다.

1920

[YMCA 중심의 사회 계몽 운동 주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및 고문, YMCA 명예총무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계몽 운동을 펼쳤습니다. 물산장려운동, 소년척후대 운동 등을 주관하고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를 통해 대중을 계몽하는 데 힘썼습니다.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어 동년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20년 미국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제2의 독립운동·물산장려운동·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했습니다. 또한 각종 강연회·토론회·일요강좌·농촌운동·지방순회강연을 다니며 활발한 계몽 활동을 펼쳤습니다.

[반기독교 사태 중재, 기독교 본질 해명]

영주군에서 발생한 '권성영 아내 자결 사건'으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자, 동아일보 기자를 만나 기독교가 효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하며 반기독교 사태를 중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920년 9월, 경상북도 영주군에서 권성영의 아내가 남편이 예수교 신자가 된 후 시어머니 상식을 폐지시킨 것에 반발해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이 9월 1일자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되면서 사회에서는 기성 교회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반기독교적 시위와 항의가 확산되는 가운데, 동아일보 기자가 찾아오자 이상재는 기독교가 효를 거절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되지 못한 자가 신앙을 한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소신을 밝혔습니다. 그의 발언은 반기독교 풍조를 잠재우고 사태를 중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국체육대회 개회식 시구]

1920년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서 시구를 하며 사회 활동과 청년 지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920년 11월 4일 개최된 1920년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서 이상재 선생이 시구를 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이론가가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청년들과 소통하고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922

[민립대학 설립운동 참여]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했으며, 한규설, 윤치소 등과 함께 민립대학 설립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모금 활동을 주도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습니다.

1922년에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했습니다. 1920년대 초에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여 한규설, 윤치소 등과 민립대학 설립운동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뒤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켰고, 1922년 3월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습니다. 1922년 이상재는 이승훈, 윤치호,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으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습니다.

1923

[한국 YMCA의 국제적 위상 확립]

북경 세계기독학생연맹 대회에 한국 YMCA 대표단을 인솔하여 참석, 한국 YMCA의 독자적인 국제 연맹 가입을 설득하여 성사시켰습니다. 또한 소년연합척후대 초대 총재를 역임하며 청소년 운동에 힘썼습니다.

1922년 신흥우, 이대위, 김활란, 김필례 등 YMCA 대표단을 인솔하여 북경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국 YMCA가 단독으로 국제 YMCA연맹에 가입을 허락해줄 것을 각국의 YMCA 대표자들에게 설득 호소하고, 일본 YMCA 대표단과 담판하여 한국 YMCA가 단독으로 국제 YMCA에 가입하고 독자적으로 국제 YMCA 행사에 참여하게 하는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1923년에는 소년연합척후대(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었고, 물산장려운동·절제운동·지방전도운동·창문사운동 등을 지도했습니다.

[기독교 내 백인우월주의 비판]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 앞에서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히지 말고 관용과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을 강조하며, 당시 교회의 문제점과 사회주의와의 갈등을 예견했습니다.

1923년 이상재는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 앞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어떤 경계도 초월한다. 그러므로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자."고 연설했습니다. 그는 일부 개신교 선교사와 교인들의 오만함과 독선이 사회적인 분열과 갈등을 야기할 것이라 예견하며, 기독교 정신인 관용과 사랑으로 감싸려고 노력하자고 권고했습니다. 그의 이런 예견은 1920년대 초 사회주의가 조선에 본격 도입되면서 기독교인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났습니다.

1924

[조선일보 사장 역임 및 노소동락 주장]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퇴했으며, 독립운동가 이원순에 따르면 청년들과 노소동락(老少同樂)을 주장하며 젊은 세대와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퇴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원순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노소동락(老少同樂)을 주장하여 청년들과 경주하거나 바둑·장기 두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학생들끼리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을 보면 반드시 훈수하기를 좋아했고, 훈수대로 두지 않고 질듯한 사람에게는 자리를 비키게 하여 대신 이겨주고 즐거운 듯 파안대소(破顔大笑)하는 모습이 마치 홍안소년(紅顔少年)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1925

[배재고 졸업식에서 한글 축사 낭독]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식에서 일본인 총독과 도지사의 축사를 대신 낭독한 한국인 직원들 이후, 내빈 대표로 단상에 올라 "여러분, 조선말 들으실 줄 아시오? 나는 일본말을 몰라서 조선말로 하오."라며 한글로 축사를 낭독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1925년 2월, 손자 이홍직이 공부한 감리교 고등학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식에 참석했습니다. 조선총독부 총독과 일본인 경기도지사의 축사를 대신 낭독한 한국인 직원들의 낭독 이후, 내빈 대표로 축사를 낭독할 때 그는 "여러분, 조선말 들으실 줄 아시오? 나는 일본말을 몰라서 조선말로 하오."라며 한글로 축사를 낭독하여 참석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민족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1927

[신간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이념을 초월한 각계 인사가 모여 신간회를 결성하자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병석에 누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장직을 수락하며 민족통일전선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1925년 4월 15일 제1회 전국기자대회가 열리자 의장에 피선되었고,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이념을 초월한 각계 인사가 모여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자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상재는 당시 병석에 누워 있었으나 신간회 회장직을 수락하며, 조선 민족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민족통일전선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만년청년 이상재, 영면하다]

만년에 노환으로 고생하다 78세의 나이로 경성 전셋방에서 병사했습니다. 재산 없이 쌀 27가마의 빚을 남겼으나, 윤치호, 이승만, 김성수, 안창호, 송진우 등이 모금하여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그의 사회장에는 10만 인파가 몰려 민족적 애도를 표했습니다.

만년에 노환으로 고생하다가 말초신경에 부종 증세로 고생했으며, 1927년 3월 19일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습니다. 1927년 3월 29일 경성 재동의 전셋방에서 노환 합병증으로 인해 오전 5시에 병사하였고, 당시 나이 78세였습니다. 재산이 없던 그는 전셋방을 전전했으며, 사망 당시 쌀 27가마의 빚을 남겼습니다. 이 빚은 윤치호, 이승만, 김성수, 안창호, 송진우 등이 모금운동을 하여 갚아주었습니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세 아들이 그보다 먼저 죽고, 넷째 아들 승준만이 그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이후 거족적인 사회장이 4월 7일에 거행되었으며, 10만 인파가 몰려 민족의 애도를 표했습니다. 선영인 충청남도 한산군의 선영에 장사되었습니다.

1956

[이상재 선생 략전 발간]

광복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공보처에서 《이상재 선생 략전》이 발간되었습니다.

광복 이후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공보처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의 공적과 생애를 기리는 《이상재 선생 략전》이 발간되었습니다.

1957

[경기도 양주로 이장]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가 묘비문을 썼습니다.

1957년,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으며, 그의 묘비문은 변영로가 썼습니다. 고향인 한산면 종지리에는 그의 송덕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1962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서울 종묘공원에는 동상이, 독립기념관에는 어록비가 세워져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1962년, 이상재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과 민족 계몽에 대한 헌신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서울 종묘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고, 독립기념관에는 그의 어록비가 세워져 그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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