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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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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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정치인, 의사, 사상가 + 카테고리

아르헨티나 출신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이자 의사. 남아메리카 여행 중 빈곤과 억압의 참상에 눈을 떠 반자본주의 혁명에 투신.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핵심 인물로 쿠바 정부의 주요 요직을 역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혁명 무대인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 중 체포되어 사망. 사후 저항과 자유의 상징으로 전 세계 대중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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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28

[혁명가의 탄생]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바스크-아일랜드 혈통의 중산층 가정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미숙아로 태어나 2살 때부터 심한 천식을 앓았으나, 진보적인 부모님 아래 성장하며 럭비 등 격렬한 스포츠를 즐기는 열정적인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의 생년월일은 당시 보수적인 사회에서 혼전 임신을 숨기기 위해 실제보다 한 달 늦게 출생 등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51

[오토바이로 깨달은 현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의학 재학 중,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오토바이로 라틴아메리카를 방랑했습니다.이 여행에서 자신이 목격한 빈곤과 기아의 참상을 통해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현실에 눈을 뜨고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공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저서 '라틴아메리카 여행 기록'으로 출간되었고,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도 제작되었습니다. 평범한 의사 지망생이 혁명가로 변모하는 첫 의식 변화가 일어난 순간입니다.

1952

[볼리비아 인민운동 참가]

볼리비아 인민운동에 참여하여 외국자본의 유치와 산업 민영화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습니다.이로써 그의 사회 참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53

[의학 졸업 후 두 번째 여행]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학대학을 졸업한 지 불과 25일 만에 친구 카를로스 페레로와 함께 다시 라틴아메리카 방랑 여행을 떠났습니다.이 여행 중 볼리비아 혁명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1954

[과테말라 쿠데타 목격]

과테말라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중, 미국 CIA가 개입하여 아르벤스 정부를 전복시키는 쿠데타를 목격했습니다.'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라고 평했던 과테말라의 민주 혁명이 좌절되는 것을 보며, 무력에 의한 라틴아메리카 혁명을 진심으로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1955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 만남]

과테말라 쿠데타 이후 멕시코로 망명한 그는 이곳에서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습니다.카스트로의 혁명 목표에 깊이 공감하며 하룻밤 만에 반 바티스타 무장 게릴라 투쟁 참여를 결심, 쿠바 혁명의 운명적인 길에 들어섰습니다.

1956

[그란마호, 쿠바 혁명의 서막]

피델 카스트로가 과거 혁명 실패로 감옥살이를 하며 "역사가 나중에 나를 다시 평가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긴 뒤, 그는 다시 한번 혁명에 도전합니다.피델 카스트로를 포함한 82명의 혁명군과 함께 8인승 요트 '그란마호'에 탑승, 쿠바로 향했습니다.열악한 환경과 정부군의 기습으로 도착 직후 12명만이 살아남는 괴멸적인 상황에서도 혁명의 불씨를 살려냈습니다.

상륙 후 혁명군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잠복하며 군 재건을 도모했고, 게바라는 군의관으로 시작하여 혁명군의 정치 방송국(라디오 레베르데)을 설립하는 등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부사령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1958

[산타클라라 전투 대승리]

혁명군 제2군을 이끌고 쿠바 제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돌입했습니다.수많은 시민의 가세로 적들을 제압하고 수도 아바나로 가는 결정적인 길을 열며 쿠바 혁명의 승기를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59

[쿠바 혁명 달성]

새해 첫날 새벽,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면서 쿠바 혁명이 최종적으로 달성되었습니다.게바라는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쿠바 시민권을 부여받고 새 정부의 핵심 각료가 되었습니다.

혁명 이후 게바라는 혁명 정부의 핵심 인물로서 정치 개혁을 주도하고 친서방 또는 반혁명 세력 약 14,000명을 처형하는 등 강경한 혁명 수호 활동을 펼쳤습니다.

[쿠바 통상사절단으로 일본 방문]

31세의 게바라는 쿠바의 통상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습니다.당시 일본에서는 '카스트로 콧수염'이라는 야유 섞인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지명도가 낮았으나, 토요타, 미쓰비시, 소니 등 주요 공장을 시찰하며 쿠바의 통상 협력에 힘썼습니다.

[히로시마 방문, 던져진 의문]

바쁜 일정 중 예정을 변경하여 히로시마를 방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고 원폭 자료관을 둘러보았습니다.이 자리에서 그는 "왜 일본인은 미국에 대하여 원폭 투하의 책임을 묻지 않는가"라고 질문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이 방문은 쿠바 초등교육에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가르치는 계기가 됩니다.

[쿠바 중앙은행 총재 취임]

쿠바 국립은행 총재로 취임하여 1961년 2월까지 재직했습니다.화폐에 부정적인 생각으로 지폐에 자신의 풀 네임 대신 '체'라고만 서명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고, 이는 금융 전문가가 아닌 그에 대한 유머러스한 일화로 남았습니다.

그의 총재 취임 소식에 소규모 예금 인출 소동이 벌어지는 등 금융 불안이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1961

[쿠바 초대 산업부 장관]

혁명 정부의 초대 산업부 장관으로서 1965년 4월까지 재직했습니다.토지 개혁, 중앙 은행 설립, 쿠바 혁명군 건군 등 혁명 후 쿠바의 핵심적인 경제 및 군사 정책을 주도하며 '쿠바의 두뇌'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65

[새로운 혁명을 향한 여정]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는 편지를 남기고 홀연히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쿠바에서의 안락한 최고위직을 버리고 새로운 혁명을 위해 아프리카 콩고, 그리고 볼리비아로 투쟁 무대를 옮기는 헌신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의 이 같은 행동은 '혁명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위대한 사랑'이라는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967

[혁명가의 비극적 최후]

볼리비아에서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던 중,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되어 39세의 나이로 총살당했습니다.그의 시체는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오히려 그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며 전 세계적으로 저항의 상징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그를 처형한 병사 마리오 테란 살라사르는 후년 눈 치료를 위해 쿠바를 찾았고, 쿠바 정부는 특별히 문제 삼지 않고 그에게 무상 치료를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일화는 체 게바라의 이상과 쿠바 혁명 정신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1997

1997.10.9 사후 30년

[30년 만의 귀환]

볼리비아 안데스 산맥에서 30년 만에 그의 유해가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습니다.그의 유해는 다시 쿠바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고, 이는 그의 불멸의 정신을 기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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