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연표
1818
[카를 마르크스 출생]
프로이센 트리어에서 하인리히 마르크스와 헨리에테 프레스부르크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조부는 네덜란드 랍비였고, 친가는 1723년 이래 대대로 트리어 랍비 집안이었다.
부친은 유대교에서 프로이센 합동복음교회로 개종하며 독일식 이름 '하인리히'로 개명했다.
마르크스는 혈통적으로 유대계였으며, 외조부는 네덜란드의 랍비였고, 친가는 1723년 이래 대대로 트리어 랍비 집안이었다. 부친 하인리히는 집안 최초로 세속 교육을 받아 율사가 되었고, 유대교에서 프로이센 합동복음교회로 개종하고 이름도 '헤르셸'을 버리고 '하인리히'로 개명했다. 그의 모친 헨리에테는 네덜란드 굴지의 전기공학회사 필립스를 창업하게 되는 부유한 사업가문 출신이었다.
1824
[루터교 세례]
카를을 포함한 7남매가 루터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모친 헨리에테는 이듬해인 1825년 11월에 세례를 받았다.
마르크스 집안에서 성인으로 무사히 자라난 아이는 카를, 조피, 헤르만, 헨리에테, 루이제, 에밀리, 카롤리네 이렇게 2남 5녀였다. 이들 7남매는 1824년 8월 루터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모친 헨리에테는 1825년 11월에 세례를 받았다. 마르크스는 집에서 아버지에게 공부를 배우다가 1830년 트리어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1836
[예니와의 운명적 약혼]
트리어에서 여름과 가을을 보낸 뒤 학업과 인생설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였던 교육받은 남작영애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약혼했다.
예니는 마르크스와 약혼하기 위해 선약을 파혼했고, 두 사람의 종교적, 사회적 출신성분 차이로 구설수에 올랐다.
마르크스는 오히려 예니의 아버지 루트비히 폰 베스트팔렌 남작을 구워삶아 친구가 되었고, 이후 박사논문을 예비장인에게 헌정했다. 약혼하고 7년 뒤인 1843년 6월 19일, 마르크스와 예니는 크로이츠나흐의 개신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841
[철학박사 학위 취득]
박사학위논문 <역사법학파 철학선언>을 완성, 신학이 철학에게 지혜의 상석을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이 베를린 대학교의 보수적 교수들 사이에서 논쟁적이었기에, 좀 더 진보적인 분위기의 예나 대학교에 다시 제출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르크스와 브루노 바우어는 모두 무신론자였기에, 1841년 3월 《무신론기록원》이라는 제목의 학술지를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1843
[언론 폐간과 파리 망명]
러시아 군주제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기사가 게재되어 러시아 황제의 요구로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라인신문』이 폐간되었다.
같은 해 6월 19일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고, 10월 프랑스 파리로 이사가 급진좌파 언론 《독불연지》의 공편자로 취직하며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쾰른으로 이사하여 『라인신문』에 급진 논설을 기고했으나, 신문은 프로이센 당국의 검열에 걸려들었다. 마르크스는 '경찰이 우리 신문에 코를 박고 킁킁대서, 무엇이든 반기독교, 반프로이센적인 냄새를 맡게 되면 신문을 아예 낼 수가 없다네'라고 탄식했다.
1844
[마르크스주의 골격 완성]
독일의 헤겔 변증법,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영국의 고전경제학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골조를 마련했다.
이는 파리 체류기에 연구한 결과로, 새로운 경제학 이론을 명료히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마르크스는 바노가 38번지에 살던 시절(1843년 10월-1845년 1월), 정치경제학(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제임스 밀 등), 프랑스 사회주의(생시몽 백작, 푸리에 등), 프랑스 역사를 파고들었다. 그 중 정치경제학 연구는 마르크스가 이후 여생을 바쳐 추구한 목표가 되었고, 그 결실이 생애 말년에 3권짜리 대표작 《자본론》으로 맺어지게 된다.
[엥겔스와의 운명적 만남]
파리 '카페 드 라 레장스'에서 평생의 물주이자 동지가 될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처음 만났다.
엥겔스는 자신의 저서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상황》을 통해 노동계급이 역사의 최종 혁명 주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둘은 곧 브루노 바우어를 비판하는 《성가족》을 합작 출간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자신이 최근 출간한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상황》을 보여주며, 노동계급이 역사의 최종혁명의 주체이자 수단이 될 것이라고 논했다. 곧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로 마음이 맞아 마르크스의 옛 친구인 브루노 바우어를 공격하는 데 합작했고, 그 결과물은 1845년 《성가족》으로 출간되었다.
1845
[프랑스 추방, 브뤼셀 망명]
프로이센의 요청으로 프랑스 정부가 《전진!》을 폐간시키고 마르크스를 프랑스에서 추방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연구를 계속하려는 희망을 품고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현재 정치 시사에 관한 글은 쓰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브뤼셀에는 유럽 각지에서 망명온 다른 사회주의자들(모제스 헤스, 카를 하인첸, 요제프 바이데마이어 등)이 많았는데, 마르크스는 그들과 어울렸다. 같은 해 4월, 엥겔스가 독일 바르멘에서 브뤼셀로 마르크스를 따라왔고, 의인동맹 간부단도 브뤼셀을 새 본부로 삼으려 했다.
[《독일 이데올로기》 저술]
엥겔스와 합작하여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했다.
이 저작은 역사적 유물론 개념에 관한 그의 최고의 저작으로 여겨지며, 오로지 유물적인 것이 역사를 유일하게 추동하는 힘이라는 철학을 완성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 등 청년 헤겔학파, 그리고 그룬 같은 관념론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한 다른 사회주의자들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한다. 이 책은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형태로 쓰여졌지만 검열을 피할 수 없었고, 마르크스 생전에는 출간되지 못했으며 1932년에야 초판이 출간되었다.
[〈포이어바흐 테제〉 발표]
파리에서 브뤼셀로 옮기면서 11개 명제로 구성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작성했다.
이는 역사적 유물론 완성을 위해 포이어바흐 유물론과의 단절을 추구한 결과였다.
특히 마지막 제11명제에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오기만 했으나, 진정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유물론과 관념론 전반, 즉 자기 이외의 모두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물론 철학은 관조적이며, 관념론 철학은 실천을 이론으로 축소시킨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현실세계보다 추상적 실재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비판받아야 한다.
1847
[공산주의자동맹 창설]
마르크스의 주장에 설득된 의인동맹 맹원들은 비밀결사적 지하활동을 중단하고 공개적인 '정당'으로 변모했다.
새 명칭은 '공산주의자동맹'이었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동맹의 강령과 조직 원리 작성에 참여했다.
마르크스는 의인동맹이 노동계급혁명을 불러올 수 있는 대규모 운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단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즉 의인동맹이 지금까지 유지해 오던 비밀결사적 지하활동이 중단되고, 공개적인 '정당'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1848
[1848년 유럽 대혁명]
유럽 전역이 혁명적 시위, 반란, 폭력적 대격동에 휩싸였다.
프랑스 2월 혁명으로 입헌군주국이 무너지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마르크스는 아버지 유산의 3분의 1을 벨기에 노동자들의 무기 조달에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르크스는 이런 혁명 활동들에 호의적이었다. 아버지의 유산 5천 프랑 중 3분의 1을 벨기에에서 혁명을 시도하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조달하는 데 썼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진위는 의심되고 있다. 그러나 벨기에 법무부는 마르크스가 반란모의를 했다고 기소, 체포하려 했다.
[세계 최초 <공산당 선언>]
엥겔스와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으로서 〈공산당 선언〉을 공저했다.
이 선언은 공산주의자동맹이 더 이상 비밀결사가 아님을 천명하며,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를 제시했다.
〈공산당 선언〉은 부르주아(부유한 자본가 계급)와 프롤레타리아(산업 노동자 계급)의 이해가 서로 충돌하기에 상호 계급간의 적대가 발생함을 분석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동맹이 당대의 다른 사회주의 단체, 자유주의 정당들과 달리 진짜 노동자의 이해를 위해 행동하는 단체임을 논했다.
[쾰른에서 재차 추방]
혁명으로 수립되었던 프로이센 민주주의 의회가 붕괴하고 반혁명 정책이 실시되자, 마르크스도 숙청 대상이 되었다.
《신라인신문》은 폐간되었고, 마르크스는 추방령을 받아 파리로 돌아갔다.
파리 역시 반혁명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마르크스는 파리에 잠시 머무르면서 공산주의자동맹 본부를 파리로 옮기고 파리에 살던 독일인 사회주의자들을 규합해 독일노동자동호회를 설립했다. 하지만 파리는 반혁명이 기승을 부리고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마르크스를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추방했다.
1849
[런던으로 최종 망명]
독일, 벨기에, 프랑스 모두에서 머무를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런던 망명을 선택했다.
런던은 이후 마르크스가 여생을 보내는 거점이 되었으며, 공산주의자동맹 본부도 런던으로 이동했다.
아내 예니가 곧 넷째 아이를 낳을 판이었는데, 독일도, 벨기에도, 프랑스도 머무를 수 없게 된 마르크스는 마침내 1849년 8월 런던 망명을 선택했다. 그는 1849년 6월 초 런던에 도착했고, 이후 런던을 거점으로 삼아 여생을 보냈다.
1852
[언론 특파원 활동 시작]
런던 망명 초기 극심한 빈곤을 겪으며 엥겔스의 용돈에 의존하던 마르크스는 10년간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주 수입원을 마련했다.
영어가 유창해지기 전까지는 기사를 독일어로 써서 번역을 맡겼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은 1841년 호러스 그릴리가 창간한 신문으로, 진보적 부르주아 언론인, 출판인들이 편집주간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는 1852년부터 1862년까지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으로 일했고, 이것이 그동안 주 수입원이 되었다. 이 신문은 발행부수가 50,000 부로 그 회전율이 당대 미국에서 최대 수준이었다.
1857
[세계 최초 글로벌 경제위기]
미국에서 발생하여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친 세계 최초의 '글로벌 경제위기'인 1857년 공황을 경험했다.
이 공황은 그전까지의 경제 이론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며,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 및 역사 진보 이론 재정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혁명을 경험하면서 그 경험을 자신들의 경제이론 및 역사진보이론에 반영시켰다. 1852년 미국 불황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혁명활동에 대한 낙관론을 주었으나, 1857년 공황은 미국에서 일어난 공황이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친 최초의 '글로벌 경제위기'였다.
1859
[《정치경제학 비판》 출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출간했다.
마르크스의 저서 중 경제학에 집중한 첫 저서로, 훗날 완성될 《자본론》의 예고편 격이었다.
데이비드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수용, 확장했으며, 초판이 빠르게 매진될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마르크스는 1857년까지 자본, 부동산, 임노동, 국가, 무역, 세계시장에 관한 800 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썼다. 다만 이 원고는 1939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으로 출간되기 전까지는 미공개로 남아 있었다.
1864
[제1인터내셔널 핵심 참여]
국제노동자협회(소위 제1인터내셔널)에 참여하여 초기 총평의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바쿠닌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자들과 내부 투쟁을 벌여 승리했지만, 이후 제1인터내셔널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제1인터내셔널 존속기간 중 벌어진 가장 중요한 정치사적 사건은 1871년 파리 코뮌이었다. 파리 시민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고 두 달 간 도시를 점거했고, 정부군은 이를 유혈 진압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을 써서 코뮌 측을 옹호했다.
1867
[《자본론 제1권》 출간]
수십 년간의 연구 끝에 마침내 3권짜리 평생 역작 《자본론》 중 제1권이 출간되었다.
자본주의의 생산과정을 분석하고 토머스 호지스킨의 영향을 받은 노동가치설을 정교하게 제시했다.
잉여가치와 노동 착취의 개념을 설명하며 산업 자본주의의 붕괴를 예측했다.
독일어판 초판은 빠르게 매진되었다.
《잉여가치론》은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등 앞선 정치경제이론가들에 대해 논하는 내용인데, 때론 이것이 《자본론》 제4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역사상 최초로 경제사상사를 종합적으로 다룬 논고이기도 했다.
1872
[《자본론》 러시아어판 출간]
《자본론 제1권》 독일어판 초판이 매진되자, 러시아어판 요청에 따라 3,000부가 출판되었다.
이는 그의 사상이 러시아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1871년 가을에 《자본론 제1권》 독일어판 초판은 매진되었으며 바로 2판 인쇄에 들어갔다. 러시아어판 출판은 마르크스의 사상이 유럽을 넘어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75
[〈고타 강령 비판〉 저술]
독일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이 통일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고자 라살의 국가사회주의와 합작하려는 경향에 반대하는 서한인 〈고타 강령 비판〉을 썼다.
이 문건에서 '능력 있는 사람으로부터,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라는 유명한 말이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이 서한에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이 통일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고자 페르디난트 라살의 국가사회주의와 합작하려 하는 경향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1883
[카를 마르크스 영면]
1881년 12월 아내 예니가 죽은 후 카타르염과 기관지염, 흉막염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향년 63세의 무국적자로 런던에서 사망했다.
1883년 3월 17일 장례식이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동편 불가지론자-무신론자 묘역에서 아홉 명에서 열한 명의 참석자들과 함께 치러졌다.
엥겔스는 추모사에서 "3월 14일 오후 3시 15분 전, 산 자들 중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사상하기를 그만두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르크스 석묘에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리고 〈포이어바흐 테제〉의 마지막 문장인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오기만 했으나, 진정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가 새겨져 있다.
1917
[마르크스 이론의 실천적 변용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태동]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이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러시아 혁명의 실천적 동력으로 채택되며 후대 계승 이념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르크스가 19세기에 제시한 자본주의 분석과 혁명적 가르침은 사후에 레닌에 의해 국가를 실제로 통치하기 위한 사상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체계화된 이념으로 명명되었으며, 마르크스의 사상이 학문적 영역을 넘어 20세기 지구촌의 절반을 통치하는 실질적인 근간 사상가로서 자리매김하게 된 역사적 지점입니다.
[마르크스 사상의 실전 국가 설립 근거 제공]
마르크스의 저술과 이론이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세력에게 새로운 국가 설립과 권력 획득의 핵심적인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마르크스 사후 그의 이론적 유산은 러시아에서 제정 체제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사상적 무기로 작용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유 재산 폐지 등 마르크스가 주창한 핵심 강령들이 혁명 정부의 공식 정책이 됨으로써, 그의 사상은 전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국가 통치 철학으로 격상되었습니다.
1938
[마르크스주의의 스탈린식 체계화 및 교조화]
카를 마르크스가 정립한 계급 투쟁과 유물론이 스탈린에 의해 소련의 유일무이한 국가 통치 교리로 정착되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스탈린 치하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명칭 아래 고정 불변의 진리로 규정되었습니다. 이는 마르크스의 사후 이론적 유산이 스탈린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지탱하는 강력한 사상적 뿌리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