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로버트 맬서스
성직자, 인구통계학자, 정치경제학자, 고전경제학자,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5:15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는 영국의 성직자이자 인구통계학자, 정치경제학자로 고전경제학의 주요 학자였습니다. 대표 저서 《인구론》을 통해 인구는 기하급수적,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여 과잉인구로 인한 빈곤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정치경제학' 담당 교수로 최초의 전업 경제학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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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 출생]
영국 서리주 길드포드에서 대니얼 맬서스와 헨리에타 맬서스 사이에서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부유했으며, 아버지 대니얼은 데이비드 흄과 장 자크 루소와 친분이 있었습니다.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는 영국 서리주 길드포드에서 대니얼 맬서스와 헨리에타 맬서스 사이에서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부유했으며, 특히 아버지 대니얼은 당대 유명 사상가인 데이비드 흄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장 자크 루소와도 교류하며 넓은 인맥을 자랑했습니다.
[흄과 루소의 맬서스 가문 방문]
맬서스가 태어난 지 몇 주 뒤, 데이비드 흄과 장 자크 루소가 실제로 맬서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는 그의 가정환경이 당대 주요 지식인들과 밀접했음을 보여줍니다.
맬서스가 태어난 지 불과 몇 주 만에, 그의 아버지 대니얼과 친분이 있던 데이비드 흄과 장 자크 루소가 맬서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 일화는 맬서스가 성장할 환경이 당대 지성인들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시사합니다.
1784
[케임브리지 대학교 진학]
케임브리지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 진학하여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 독법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지만, 주된 연구 분야는 수학이었습니다.
워링턴에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지저스 칼리지로 진학했습니다. 대학에서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 독법 등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공부했으나, 특히 수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이어나갔습니다. 선천적으로 구개파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 대화에는 문제가 없었으며, 대학 시절에는 웅변대회를 휩쓸 만큼 능변가로 알려졌습니다.
1788
케임브리지 대학교 지저스 칼리지를 졸업하며 학부 과정을 마쳤습니다.
1791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며 학문적인 경력을 이어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1793
박사학위 취득 후 2년 뒤, 전임 교수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교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797
[성공회 성직자 서품]
성공회의 성직자로 서품되어 앨버리에서 부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직업 경력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성공회의 성직자로 서품되었으며, 앨버리에서 부제로 봉직하게 되었습니다. 학자이자 동시에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1798
[《인구론》 익명 발표]
재직 중이던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 《인구론》 초판을 익명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책은 인구와 식량 공급의 불균형 문제를 제기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앨버리에서 부제로 재임하던 중, 인류의 미래 사회 발전에 인구의 원리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소론인 그의 대표작 《인구론》 초판을 익명으로 출간했습니다. 이 저서는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식량의 산술급수적 증가 간의 불균형으로 인한 빈곤의 필연성을 주장하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801
[영국 최초의 인구 조사 원동력]
맬서스의 인구 이론은 영국 최초의 근대적 인구 조사가 실시되는 주요 원동력으로 작용하며, 사회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맬서스의 인구 이론은 당대 정치권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그의 주장은 1801년 영국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인구 조사가 실시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인구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804
종질인 헤리어트 에커설과 결혼하여 세 명의 자식을 보았습니다. 개인적인 삶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1805
[최초의 전업 경제학자]
동인도회사의 인재 양성 학교인 이스트 인디아 컴퍼니 칼리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곳에서 역사, 정치, 상업, 금융을 강의하며 '정치경제학' 담당 교수가 되어 최초의 전업 경제학자로 기록되었습니다.
동인도회사의 인재 양성 학교인 이스트 인디아 컴퍼니 칼리지로 자리를 옮겨 역사, 정치, 상업, 금융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쳤습니다. 특히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담당 교수가 됨으로써,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보다 한발 앞서 최초의 전업 경제학자라는 역사적 기록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1818
[영국 왕립 학회 회원 선출]
영국 왕립 학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업적과 명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었습니다.
영국 최고의 학술기관인 영국 왕립 학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성과와 사회적 기여를 인정받아 얻은 영예였습니다.
1820
[고드윈의 《인구에 대하여》 발표]
윌리엄 고드윈이 맬서스의 인구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 《인구에 대하여》를 저술했습니다. 맬서스의 주장은 당대에도 많은 비판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윌리엄 고드윈이 맬서스의 인구 이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저서 《인구에 대하여》를 발표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 로버트 오웬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인들도 맬서스의 이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1826
[《인구론》 6차 개정판 출간]
초판 발표 이후 계속된 개정을 거쳐 《인구론》의 6차 개정판을 출간했습니다. 각 개정판에는 새로운 자료와 당시의 인구 통계, 그리고 비판에 대한 그의 대응이 담겼습니다.
1798년 초판이 익명으로 출간된 이래 1826년까지 총 여섯 번의 개정판을 출간했습니다. 매 개정판마다 새로운 소재와 당시 세계 각국의 인구 통계, 그리고 자신의 이론에 대한 비판에 대한 대응 등을 담아 논문을 지속적으로 보강했습니다.
1834
[신구빈법 제정 및 영향]
영국에서 신구빈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은 맬서스의 주장을 반영하여 빈민 구제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구빈원에 수용된 부부를 분리 수용하게 했습니다.
영국에서 신구빈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은 맬서스의 인구 이론과 빈민 구제에 대한 그의 주장에 깊은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구빈원 수용 시 부부를 분리 수용하는 등의 조항을 담아 빈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빈곤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장인의 집에서 심장병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바스 대성당에 매장되었습니다.
1836
[다윈의 진화론에 결정적 영향]
찰스 다윈이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고, 진화의 기제가 '적자생존', 즉 자연도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 형성에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습니다.
찰스 다윈은 비글호 탐험 후 귀국하여 《인구론》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다윈은 종의 개체 간 생존 경쟁과 환경 적응이 진화의 핵심 원리인 '적자생존'과 '자연도태'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맬서스의 이론은 다윈의 진화론 형성에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하며 과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