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

과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노벨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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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8- 01: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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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
과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노벨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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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출신 프랑스 과학자 방사능 분야의 선구자. * **여성 최초 노벨상 수상** 유일하게 물리학상 화학상 모두 수상한 2관왕. * 남편 피에르 퀴리와 라듐 폴로늄 발견으로 과학사에 큰 획. * 평생 연구에 헌신했으나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한 비극적인 삶. * 사후 **여성 최초 팡테옹 안장** 등 인류에게 영감을 준 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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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사건만
최신순

1867

[바르샤바에서 탄생]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가난한 교육자의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로, 훗날 세계적인 과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될 그녀의 위대한 여정이 시작된 순간입니다.

1877

[어린 시절의 비극]

10세 무렵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잃고, 아버지의 실직, 큰 언니의 요절 등 혼란하고 슬픈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러시아의 지배 아래 폴란드 전통 학습이 억압받는 등 힘든 청소년기를 겪었습니다.

1884

[유학을 향한 열망]

17세 무렵부터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비를 모았습니다.

당시 폴란드와 독일에서는 여성이 대학교에 갈 수 없었기에, 성 차별 없는 프랑스 파리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시골 농가에서 야학을 운영하며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1891

[파리 소르본 입학]

마침내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 언니 부부의 돌봄을 받으며 학업에 매진했습니다.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며 최상위 성적으로 졸업,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입증했습니다.

1895

[피에르 퀴리와 결혼]

뛰어난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며 그의 성을 따랐습니다.

피에르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학업을 적극 지원한 든든한 동반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등 소박하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1896

[방사능 연구 시작]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찾던 중, 앙리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염의 '베크렐선'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우라늄 외에도 자연계에 이러한 현상을 보이는 물질이 더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연구에 뛰어들었습니다.

1897

[장녀 이렌 졸리오퀴리 출생]

첫째 딸 이렌(Irène)이 태어났다. 이렌의 출생에도 불구하고 마리의 과학 연구는 중단되지 않았다. 이렌은 훗날 부모의 뒤를 이어 과학자가 되어,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며 퀴리 가문의 과학적 유산을 계승하게 된다.

마리는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했던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가정생활과 고된 연구를 병행하며, 여성도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다. 이러한 그녀의 삶은 후대 여성 과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1898

[폴로늄과 라듐 발견]

피에르 퀴리와 공동 연구를 통해 '피치블렌드'에서 우라늄보다 400배 강한 새로운 원소, '폴로늄'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조국 폴란드를 기리는 이름입니다.

이후 우라늄보다 250만 배 강한 '라듐'도 발견하며 **세계 최초**로 방사능 물질의 존재를 밝혀냈습니다.

퀴리 부부는 방사능 물질에서 나오는 빛을 '방사선'이라 명명하며 과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1902년에는 8톤의 폐우라늄 광석에서 0.1g의 순수한 염화라듐을 얻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1903

[최초 여성 노벨상 수상]

라듐 연구의 공로를 인정받아 남편 피에르 퀴리, 앙리 베크렐과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과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수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처음에 피에르와 베크렐만을 후보로 추천하며 마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이에 피에르가 "마리의 공로 없이는 상을 받을 수 없다"고 강력히 항의하여 공동 수상이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과학계에 만연했던 뿌리 깊은 성차별을 보여주는 동시에, 남편 피에르가 단순한 연구 동료를 넘어 그녀의 권리를 위해 싸운 진정한 동반자였음을 증명하는 일화다.

1904

[차녀 이브 퀴리 출생]

둘째 딸 이브(Ève)가 태어났다. 이브는 언니 이렌과 달리 과학자가 아닌 작가이자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었다. 그녀는 훗날 어머니의 전기인 《마담 퀴리》를 집필하여 마리 퀴리의 인간적인 면모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이브의 남편인 헨리 라부이스(Henry Labouisse)는 유니세프(UNICEF) 총재로 활동하며 196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로써 퀴리 가문은 물리학, 화학, 평화상에 걸쳐 총 5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유일무이한 '노벨상 명가'의 역사를 완성하게 된다.

1906

[남편 피에르의 사망]

사랑하는 남편 피에르 퀴리가 출근길에 음주 마부가 몰던 마차에 치여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큰 슬픔 속에서도 그녀는 연구와 교육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피에르의 죽음은 마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녀는 일기장에 "당신 없는 삶은 잔혹해요. 고통으로 심장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아요"라며 비통한 심경을 기록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녀에게 연금을 제안했지만, 마리는 이를 거절하고 남편이 맡았던 소르본 대학의 교수직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는 슬픔을 연구에 대한 책임감으로 승화시키려는 그녀의 강인한 성격을 보여준다.


[소르본 최초 여성 교수]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소르본 대학교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교수**라는 기념비적인 기록입니다.

미리 강의 내용을 철저히 준비하는 꼼꼼함을 보여주며 남편의 유산을 이어나갔습니다.

1910

[금속 라듐 분리 성공]

염화라듐을 전기분해하여 순수한 금속 라듐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라듐의 성질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폴 랑주뱅과의 관계 시작]

남편 사후 수년간의 깊은 슬픔에서 벗어나, 마리는 피에르의 제자였던 동료 물리학자 폴 랑주뱅(Paul Langevin)과 사랑에 빠졌다. 랑주뱅은 뛰어난 과학자였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던 유부남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훗날 그녀의 삶을 뒤흔들 거대한 스캔들의 불씨가 되었다.

폴 랑주뱅은 피에르 퀴리의 가장 뛰어난 제자 중 한 명으로, 퀴리 부부와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마리와 랑주뱅은 지적인 교감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깊이 끌렸고, 1910년경부터 연인 관계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는 랑주뱅과의 관계에서 지적 동반자이자 사랑하는 연인을 다시 찾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1911

[아인슈타인의 편지]

마리 퀴리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스캔들이 극에 달해 그녀가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받고 있을 때 아인슈타인이 “업적으로 당당하라, 잡소리에 신경 쓰지 말라”며 직접 편지를 보냈습니다. 퀴리의 업적과 인격에 대한 신뢰, 그리고 과학자로서의 명예를 지키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존경하는 퀴리 여사,
사람들의 비열한 소문에는 신경 쓰지 마시고, 아무 상관도 하지 마십시오.
자신만의 세계에 담대하게 전념하셨으면 합니다.
과학에서 당신이 성취한 업적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대중이 당신을 비난하면 그냥 무시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스톡홀름에서 곧 뵙기를 기대합니다.
친애하는 마음을 담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퀴리-랑주뱅 스캔들' 폭로]

두 번째 노벨상 수상을 앞둔 시점, 랑주뱅의 아내가 두 사람이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훔쳐 언론에 폭로했다. 극우 성향의 신문 《르 주르날(Le Journal)》이 이 사실을 보도하며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프랑스 사회는 "폴란드 출신 이방인이 프랑스 가정을 파괴한다"며 그녀를 맹렬히 비난했다. 

언론의 공격은 단순한 불륜 비판을 넘어, 외국인에 대한 혐오(제노포비아)와 여성에 대한 혐오(미소지니)가 결합된 형태였다. 언론은 유부남인 랑주뱅보다 과부가 된 이민자 여성인 마리에게 비난의 화살을 집중시켰다. 그녀는 순식간에 위대한 과학자에서 부도덕한 '외국인 요부'로 전락했으며, 분노한 군중이 그녀의 집으로 몰려와 돌을 던지는 등 신변의 위협까지 받았다. 

[명예를 건 결투 사건]

스캔들을 둘러싼 언론의 비방이 격화되자, 결투 사건까지 벌어졌다. 마리를 옹호하던 기자 피에르 모르티에와 스캔들을 폭로한 기자 귀스타브 테리가 검으로 결투를 벌였고, 모르티에가 팔에 부상을 입었다. 며칠 후, 폴 랑주뱅 자신도 테리에게 "비겁자"라고 모욕당한 것에 분노하여 권총 결투를 신청했으나, 양측 모두 발포하지 않아 무승부로 끝났다.

이 결투들은 스캔들이 당시 프랑스 사회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특히 랑주뱅과 테리의 결투에서 테리는 "프랑스의 위대한 지성을 내 손으로 없앨 수 없다"며 총을 쏘지 않았고, 랑주뱅 역시 "나는 암살자가 아니다"라며 총을 거두었다. 이는 마리 퀴리를 둘러싼 개인적 감정과 사회적 명예, 그리고 과학자로서의 공적인 가치가 복잡하게 얽혀있었음을 드러낸다.

[두 번째 노벨상 수상]

스캔들이 절정에 달하자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마리에게 시상식에 불참할 것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마리는 "상은 나의 과학적 업적에 대한 것이며, 사생활과는 무관하다"고 답하며 스톡홀름으로 향했다. 그녀는 라듐과 폴로늄 발견 및 순수 라듐 분리의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단독 수상하며, 역사상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인물이 되었다.

1923

[건강 급격한 악화]

56세가 되던 해부터 고질적인 근육통, 난청, 백내장, 빈혈 등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었습니다.

평생 방사성 물질을 연구하며 보호장구 없이 노출된 영향이었습니다.

1934

[방사능 피폭으로 사망]

과도한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골수암, 백혈병 등으로 쇠약해져 6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평생을 과학에 바친 그녀의 희생은 라듐의 위험성을 일깨우는 비극적인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연구노트는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방사선을 방출하며 프랑스 국립도서관 지하에 차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녀의 연구 열정과 인류에게 미친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995

1995.04 사후 61년

[팡테옹에 안장된 영예]

사후 61년 만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여성 최초로 국립묘지 팡테옹에 안장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유해가 이장되는 과정에서 그녀의 유해에서 상당량의 방사선이 방출되는 것이 발견되어 납으로 특수 제작된 차단 관에 안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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