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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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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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 한국 현대사, 인권 운동 + 카테고리

1980년 신군부의 폭력 진압에 맞선 광주 시민의 민주화 항쟁. 수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초석이 됨. 2011년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세계적 가치 인정. 매년 국가기념일로 지정 민주화 정신을 기리고 계승함.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79

[박정희 대통령 암살]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며 유신 체제가 막을 내렸다.

이는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나,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졌다.

[12·12 군사 반란 발생]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며 실세로 떠올랐다.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좌절되고 군부 통치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1980

[신군부, 집권 시나리오]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신군부가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이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등 민주화 역행 조치를 골자로 했다.

[광주 대규모 시위 발생]

광주에서 대학생 3만여 명이 도청 앞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서울역에서도 10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하는 시위가 발생, 신군부의 정치 관여에 대한 반발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울역 시위 도중 청년 한 명이 버스를 탈취하여 전경에 돌진, 경찰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신군부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의결되었다.

이는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위한 중대한 조치였으며, 5.18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주요 정치인 대거 체포]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과 재야 인사 수천 명을 체포, 감금했다.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를 선포하여 정치활동 금지, 언론 검열 강화, 대학 휴교령을 내리며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날 전북대학교에서는 계엄군의 진압 중 학생 이세종(21세)이 학생회관 옥상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새벽 2시, 제7공수부대가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를 점령하며 군사적 통제를 강화했다.

[5.18 민주화 운동 시작]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들에게 돌을 던지며 항의 시위를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진압,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극적인 서막이 올랐다.

[공수부대 무차별 폭력]

금남로 유동 삼거리에서 계엄군 공수부대가 시위대로 추정되는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현장 체포하는 강경 진압을 펼쳤다.

광주 공용터미널에서는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가 잔혹하게 구타당했다.

김경철 씨는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졌으며 팔과 어깨,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광주 시민 시위 동참]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을 목격한 광주 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중장년층부터 10대 청소년까지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며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김경철 청각장애인 사망]

전날 계엄군의 무차별 폭행으로 중상을 입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가 병원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는 5.18 민주화 운동의 두 번째 민간인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11공수여단 착검 진압]

11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에 도착했으며, 착검한 상태로 시내에 진입하여 시민들에게 무차별 대검 폭행을 가했다.

학생, 시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폭력에 자상자가 속출했다.

일부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에 방화하며 저항의지를 불태웠다.

[최초 실탄 사격 발생]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했다.

이는 5.18 민주화 운동 중 계엄군에 의한 최초의 실탄 사격 사건으로 기록되어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택시·버스 경적 시위]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 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를 벌였다.

이 차량들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으며 시민들의 분노와 적극적인 저항을 표출했다.

[광주 MBC 건물 방화]

신군부의 통제 아래 광주 민주화 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 MBC 건물에 시위대가 방화했다.

이는 언론의 거짓 보도에 대한 시민들의 극심한 분노와 저항을 상징하는 행동이었다.

[광주역 집단 발포]

밤 11시,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최초로 집단 발포를 감행했다.

이로 인해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씨가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다.

[시민군 무장 시작]

오전 10시,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으로 몰려가 군용 트럭과 장갑차 등 260여 대의 차량을 탈취하며 무장을 시작했다.

이는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결단이었다.

[전남도청 집단 발포]

오후 1시경,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 간의 협상이 결렬된 직후 공수부대의 무차별 집단 발포가 시작되었다.

주요 빌딩 옥상에서 조준 사격이 가해지며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시민군 조직화 및 무장]

집단 발포 이후,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나주와 화순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기를 확보하며 시민군을 결성했다.

[계엄군 광주 완전 봉쇄]

오후 7시 30분, 계엄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는 '광주외곽봉쇄작전'이 펼쳐졌다.

광주 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도시를 완전히 고립시켰다.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보안사의 지시에 따라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광주 시위를 '광주사태'로 규정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왜곡하며 무력 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광주 시민 자치 시작]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고립된 상황에서 시민군은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며 시민들이 자치 질서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로 불리며 높은 시민 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 공백 속에서도 큰 사건사고나 약탈이 발생하지 않았다. 공직자들도 양곡 방출 등 행정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주남마을 미니버스 학살]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지나가던 미니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17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잔혹한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광주 외곽 봉쇄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 중 하나다.

[송암동 오인 총격전]

송암동에서 11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간 2차례의 오인 총격전이 발생하여 계엄군 13명이 사망했다.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이 주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을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시민군, 최후 항전 준비]

시민군은 계엄군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공식 발표하고,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안전을 위해 귀가 조치하며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이는 광주 시민들의 비극적인 결단과 희생정신을 보여준다.

[상무충정작전 개시]

새벽 2시,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되며 광주시 재진입이 감행되었다.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며 시민군과의 최후 교전이 벌어졌다.

광주시내에는 한 여성의 애절한 목소리로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가두방송이 울려 퍼졌다.

[5.18 민주화운동 진압]

새벽 5시 10분,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하며 진압 작전을 종료했다.

이로써 10일간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 채 막을 내렸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었으나, 결국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988

[5.18 '민주화운동' 규정]

노태우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5.18 광주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규정했다.

이는 사건에 대한 재평가와 명예 회복의 중요한 첫걸음이 되었다.

1993

[문민정부, 5.18 계승 선언]

김영삼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며 5.18의 역사적 의미를 공식 인정하고 재평가를 가시화했다.

1995

[5.18 특별법 제정]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희생자 보상 및 묘역 성역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5.18의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중요한 법적 기반이 되었다.

1997

[대법원, 신군부 처벌]

대한민국 대법원이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인사들을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처벌하며 5.18 민주화 운동 진압 책임이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같은 해 '5.18민주화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징역형은 사면됐으나 추징금은 현재까지 내지 않고 있다.

2011

[세계기록유산 등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만장일치로 정식 등재되었다.

이는 5.18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한민국 최초의 기록물 등재 사례 중 하나이다.

유네스코는 5·18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이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와 냉전 체제를 깨트리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2024

[한강 노벨 문학상 수상]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루고 있어,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고통을 전 세계에 다시 한번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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