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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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시카고 외곽에서 우주비행사를 꿈꾸던 총명한 소녀는 미국 역사상 가장 입지전적이고 강력한 여성 정치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예일 로스쿨을 졸업한 전도유망한 변호사에서 아칸소주 영부인을 거쳐 백악관에 입성한 그녀는, 단순한 내조자를 넘어 국정 운영의 핵심 파트너로 활약하며 거센 논란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남편의 스캔들 속에서도 가정을 지켜낸 후 뉴욕주 상원의원과 국무장관을 역임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치적 입지를 굳게 다졌습니다. 비록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꿈의 문턱에서는 좌절했으나, 수많은 여성들에게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깨는 강력한 영감과 희망을 선사한 현대 정치사의 거목입니다.
연표
1947
[시카고에서의 탄생]
- 미국 중서부의 대도시에서 섬유 사업가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남. - 보수적인 가정환경 속에서도 남녀 성별의 한계에 갇히지 말고 능력을 키우라는 격려를 받으며 자람. - 학창 시절 우주비행사를 꿈꾸며 관련 기관에 편지를 보낼 정도로 주도적이고 당찬 성향을 보임.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에지워터 병원에서 휴 로댐과 도로시 하월 부부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시카고 근교의 파크 리지에서 성장했습니다. 우주 경쟁 시대에 영감을 받아 NASA에 여성 우주비행사가 될 수 있는지 묻는 편지를 보냈다가 거절당하는 일화를 남길 정도로 호기심과 성취욕이 뛰어난 소녀였습니다.
1965
[웰즐리 칼리지 입학]
- 고등학교를 최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한 후 명문 여자 대학인 웰즐리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함. - 입학 초기에는 공화당 학생 단체의 회장을 맡았으나 점차 인권과 반전 운동에 눈을 뜨며 이념적 변화를 겪음. - 체제 밖의 급진적 투쟁보다는 체제 내에서의 합리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성향을 정립함.메인 사우스 고등학교를 상위 5%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웰즐리 칼리지에 진학했습니다. 신입생 시절에는 '청년 공화당원'의 회장을 지내는 등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으나, 베트남 전쟁과 민권 운동의 소용돌이를 거치며 서서히 정치적 가치관이 민주당 성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968
[대학 총학생회장 당선]
- 탁월한 리더십을 인정받아 웰즐리 칼리지의 학생 자치정부 회장으로 선출됨. - 흑인 민권 운동 지도자의 암살 직후 학생 파업을 조직하고 흑인 학생과 교원 확충을 대학 측에 요구함. -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대학 내 평화와 질서를 성공적으로 유지하며 정치적 역량을 증명함.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로 전국적인 동요가 일어났을 때, 이틀간의 학생 파업을 조직하고 학교 당국과 흑인 학생들 간의 중재를 이끌어냈습니다. 다른 대학들이 격렬한 학생 시위로 몸살을 앓을 때 웰즐리가 상대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의 타협적이고 합리적인 리더십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1969
[최초의 학생 졸업 연설자]
- 학우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학교 역사상 최초로 학생 대표 졸업 연설의 주인공이 됨. - 연단에 올라 앞서 연설한 보수 성향 상원의원의 발언을 즉석에서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청중의 기립 박수를 이끌어냄. - 이 당찬 연설로 유력 주간지에 크게 보도되며 전국적인 언론의 주목을 받는 청년 인사로 떠오름.웰즐리 칼리지를 우등으로 졸업하며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개교 이래 최초로 학생 졸업 연설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에드워드 브룩 상원의원의 앞선 연설 내용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기성세대의 안일함을 지적했고, 무려 7분간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라이프(Life) 지에 특집 기사로 소개되었습니다.
1971
[빌 클린턴과의 운명적 만남]
- 명문 예일 로스쿨에 진학하여 학업에 매진하던 중 훗날 남편이자 정치적 동지가 될 청년을 만남. - 함께 진보 성향의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선거 캠프에서 활동하며 깊은 연인 관계로 발전함. - 서로의 탁월한 정치적 잠재력을 알아보며 공적, 사적 삶을 완벽하게 공유하는 파트너십을 형성함.예일 로스쿨 재학 중 동기인 빌 클린턴과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법률 사무소 인턴십을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그녀를 따라 빌 클린턴이 여름 계획을 전면 취소하고 합류할 정도로 깊은 사랑을 나눴으며, 이후 함께 텍사스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를 위해 선거 운동을 하는 등 정치적 행보를 함께하기 시작했습니다.
1973
[로스쿨 졸업 및 첫 학술 논문]
- 연인과 함께 있기 위해 일 년을 더 머문 끝에 마침내 예일 로스쿨에서 법무박사 학위를 취득함. - 졸업 직후 하버드 교육 평론지에 아동의 법적 권리에 관한 학술 논문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킴. - 아동과 소외 계층의 인권 보호를 필생의 사명으로 삼는 인권 변호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딤.빌 클린턴과 시간을 더 보내기 위해 졸업을 1년 미룬 끝에 예일 로스쿨을 졸업(JD)했습니다. 하버드 교육 평론지에 게재한 그녀의 첫 학술 논문 '법 아래의 아동(Children Under the Law)'은 아동을 단순히 무능력한 존재로 볼 것이 아니라 개별 사안에 따라 권리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학계에 널리 인용되었습니다.
1974
[워터게이트 탄핵 조사단 합류]
- 현직 대통령의 거대 정치 스캔들을 조사하는 하원 사법위원회 탄핵 조사단의 법률 고문으로 발탁됨. - 치밀한 법리 검토와 자료 분석을 통해 닉슨 대통령의 자진 사퇴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함. - 워싱턴 중앙 정치 무대에서 가장 전도유망하고 촉망받는 젊은 변호사로 급부상함.워싱턴 D.C.로 진출하여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조사하는 하원 사법위원회 소속 탄핵 조사단(impeachment inquiry staff)에 합류했습니다. 동료들은 그녀가 장차 훌륭한 연방 상원의원이나 대통령이 될 자질을 갖추었다며 그녀의 빛나는 미래를 점쳤습니다.
[아칸소주로의 거처 이전]
- 탄탄대로가 보장된 수도 워싱턴에서의 화려한 경력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결단을 내림. - 고향으로 돌아가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연인의 곁을 지키기 위해 아칸소주로 이주함. - 머리보다 가슴을 따른 이 결정은 그녀를 백악관으로 향하게 하는 가장 운명적인 선택이 됨.D.C. 변호사 시험에 낙방한 후, 연인인 빌 클린턴이 고향에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자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워싱턴을 떠나 아칸소주 페이엣빌로 이주했습니다. 그녀는 아칸소 대학교 로스쿨의 법률 구조 클리닉 첫 책임자이자 몇 안 되는 여성 교수진 중 한 명으로 합류하여 새로운 경력을 개척했습니다.
1975
[빌 클린턴과 결혼식 개최]
- 수차례의 청혼을 거절해 오던 끝에 마침내 사랑을 확인하고 연인과 백년가약을 맺음. - 자택 거실에서 조촐한 예식을 올리며 각자의 전문적인 삶을 존중하는 동반자가 되기로 맹세함. - 결혼 후에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처녀적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림.아칸소 페이엣빌의 자택에서 감리교식으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공적 정체성과 직업적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전통을 거부하고 '힐러리 로댐(Hillary Rodham)'이라는 이름을 고수하겠다고 선언하여 보수적인 양가 어머니들을 매우 놀라게 했습니다.
1977
[아칸소 아동가족권익연대 설립]
- 로펌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와중에도 소외된 약자를 위한 무료 변론과 옹호 활동을 멈추지 않음. -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과 함께 주 단위의 거대한 아동 보호 연대 조직을 창설함. - 제도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아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핵심적인 단체로 성장시킴.변호사 업무와 병행하여 아동 보호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고, 전국 단체인 아동보호기금(Children's Defense Fund)과 연계된 주 단위 연대 조직인 '아칸소 아동가족권익연대(Arkansas Advocates for Children and Families)'를 공동 설립하여 아동 인권 향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로즈 법률사무소 입사]
- 아칸소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로펌에 영입되어 본격적인 사내 변호사 경력을 시작함. - 지적 재산권 및 특허 침해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며 뛰어난 승률과 수완을 발휘함. - 높은 연봉을 받으며 집안의 실질적인 경제적 가장 역할을 도맡아 수행함.빌 클린턴이 아칸소주 법무장관에 당선되어 주도인 리틀록으로 이주한 직후, 막강한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자랑하는 '로즈 법률사무소(Rose Law Firm)'에 입사했습니다. 그녀는 지적 재산권 소송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으며, 남편이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까지 늘 남편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렸습니다.
1978
[법률서비스공사 첫 여성 의장]
- 현직 대통령의 눈에 띄어 가난한 이들에게 법률 지원을 제공하는 연방 기관의 이사로 발탁됨. - 뛰어난 행정 능력과 추진력을 인정받아 해당 기관 역사상 최초의 여성 이사회 의장에 오름. - 전국적인 법률 복지 예산을 대폭 확충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법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높임.과거 선거 캠프에서 인연을 맺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의 임명으로 법률서비스공사(Legal Services Corporation) 이사회에 합류했으며, 이듬해 중반 조직 내 최초의 여성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녀는 1980년대 초까지 재임하며 기관의 자금과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확대했습니다.
1979
[로펌 최초의 여성 파트너 승진]
- 입사 후 탁월한 소송 성과와 폭넓은 전문성을 인정받아 소속 로펌의 정식 파트너 변호사로 승격함. - 보수적인 남부 법조계의 유리천장을 깨고 로펌 역사상 여성이 최고위직에 오른 첫 번째 사례가 됨. - 명실상부한 지역 내 최고 수준의 변호사로서 확고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다짐.로즈 법률사무소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여성으로서는 조직 역사상 최초로 풀 파트너(full partner)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 시기에 그녀는 남편의 박봉을 보완하기 위해 가축 선물 거래 등에 투자해 막대한 단기 수익을 거두기도 했으며, 이는 훗날 화이트워터 부동산 투자와 함께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아칸소주 첫 영부인 등극]
- 남편이 주지사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아칸소주 역사상 최연소 영부인 자리에 오름. - 전통적인 내조에 머물지 않고 의료 자문위원회를 이끌며 낙후된 지역의 의료 시설 확충을 진두지휘함. - 정치적 동반자로서 국정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강렬한 '일하는 영부인'의 선례를 남김.빌 클린턴이 32세의 젊은 나이로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되면서 퍼스트레이디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농촌보건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아 빈곤 지역의 의료 시설을 확장할 수 있는 연방 자금을 성공적으로 유치하는 등 남편의 정책 결정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80
[외동딸 첼시 출산]
- 바쁜 공직 생활과 변호사 업무 속에서 부부의 유일한 혈육인 첫 딸을 무사히 품에 안음. - 엄마로서의 헌신적인 사랑과 엄격한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아이를 반듯하게 길러냄. - 불과 몇 달 후 남편이 재선에 실패하는 큰 시련을 겪으며 가족의 결속력을 더욱 단단히 다짐.빌 클린턴의 첫 주지사 임기 중에 부부의 유일한 자녀인 딸 첼시(Chelsea)를 순산했습니다. 첼시가 태어난 해 말, 남편 빌 클린턴은 주지사 재선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며 정치적 공백기를 맞이하게 되나, 이 시기는 가족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3
[교육표준위원회 위원장 임명]
- 남편이 주지사직을 탈환한 후 다시 영부인으로 복귀하여 교육 개혁의 총대를 멥. - 보수적인 교원 노조의 거센 반발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교사 평가제와 학급 규모 제한을 관철시킴. - 아칸소주의 낙후된 공교육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최고의 치적 중 하나로 평가받음.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로 화려하게 복귀한 후, 힐러리는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여론을 수용해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전면에 나섰습니다. 아칸소 교육표준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 그녀는 아칸소 교육 협회와 길고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교사 대상 의무 시험 도입과 주 표준 교육 과정을 확립하는 역사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93
[의료보험 개혁 태스크포스 수장]
- 새 행정부의 가장 핵심적인 국내 정책 과제인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의 청사진을 짜는 중책을 맡음. - 의회와 직접 소통하며 거대한 보건 의료 시스템을 전면 개조하려는 야심 찬 법안을 설계함. - 영부인이 행정부의 거대 정책을 주도하는 것에 대한 찬반 양론이 극렬하게 엇갈림.빌 클린턴 대통령은 아칸소 교육 개혁의 성공을 재현하기 위해 힐러리에게 '국가 의료보험 개혁 태스크포스(National Health Care Reform)'의 위원장직을 맡겼습니다. 그녀는 고용주가 직원의 건강 보험을 의무적으로 제공하도록 하는 방대한 개혁안을 기획했으나, 반대파들은 이를 '힐러리케어(Hillarycare)'라고 조롱하며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미국 제42대 영부인 취임]
- 남편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며 마침내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백악관의 안주인이 됨. - 동관에만 머물던 기존의 영부인들과 달리 백악관 서관(웨스트윙)에도 전용 집무실을 마련함. - 각료 인선부터 주요 국정 과제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례 없는 권력을 쥠.빌 클린턴이 제42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영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학원 이상의 학위와 독자적인 전문 경력을 가진 영부인이었으며, 역대 영부인 중 엘리너 루스벨트 이후 국정 운영에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개입한 '공동 통치자' 수준의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1994
[의료보험 개혁 법안의 좌초]
- 거대 보험사들과 공화당의 극렬한 반대 로비에 부딪혀 핵심 국정 과제가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함. - 여당이 양원을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표결조차 하지 못하고 법안이 공식적으로 폐기되는 수모를 겪음. - 정치적 경험 부족을 뼈저리게 반성하며 이후 국정 개입을 줄이고 전통적인 영부인 역할로 한발 물러섬.그녀가 심혈을 기울였던 보건 의료 개혁안은 의회 민주당 내부의 분열과 공화당의 맹렬한 네거티브 공세에 밀려 결국 표결조차 하지 못한 채 1994년 9월 완전히 폐기되었습니다. 이 실패의 여파로 그녀의 지지율은 급락했고, 뒤이은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습니다.
1997
[아동 건강 및 입양 지원법 주도]
- 전면적인 의료 개혁의 실패를 딛고 이번에는 초당적인 의원들과 협력하여 점진적인 정책 변화를 이끌어냄. - 부모의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빈곤층 아동들을 구제하기 위한 연방 지원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킴. - 입양 절차를 간소화하고 안전한 위탁 가정을 장려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며 영부인으로서의 최대 업적을 달성함.전면적인 의료 개혁 실패 이후,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등과 긴밀히 협력하여 '주 아동 건강보험 프로그램(SCHIP)'의 의회 통과를 막후에서 이끌어냈습니다. 또한 1997년 제정된 '입양 및 안전한 가족법(Adoption and Safe Families Act)'을 강력히 추진하여 위탁 가정의 아이들이 더 빠르고 안전하게 입양될 수 있는 획기적인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1998
[클린턴-르윈스키 스캔들 직면]
- 남편과 젊은 백악관 인턴 간의 충격적인 불륜 스캔들이 폭로되며 전 세계적인 조롱과 충격에 휩싸임. - 초반에는 이를 우파의 거대한 정치적 음모라며 강하게 남편을 방어했으나 결국 모든 진실을 마주하게 됨. - 극심한 개인적 굴욕과 배신감 속에서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겠다는 대인배적인 입장을 밝혀 놀라운 지지율을 얻음.빌 클린턴 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부적절한 관계가 세상에 폭로되면서 결혼 생활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녀는 개인적인 참담함 속에서도 대중 앞에서 남편과의 결혼을 유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재확인했으며, 이로 인해 미국 국민들의 엄청난 동정과 지지를 받아 영부인 시절 최고인 70%대 후반의 긍정적인 평가를 기록했습니다.
1999
[위탁가정 독립 지원법 통과]
- 위탁 보호 기간이 종료되어 거리에 나앉게 될 위기에 처한 청소년들을 위한 보호 장치 마련에 힘을 쏟음. - 이들의 자립을 돕는 연방 지원금을 두 배로 늘리는 핵심 법안의 의회 통과를 배후에서 강력히 지원함. - 정치적 풍파 속에서도 소외된 아동 청소년 복지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을 다시 한번 입증함.위탁 가정에서 보호를 받다가 법적 성인이 되어 갑작스럽게 독립해야 하는 청소년(aging out)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탁 가정 독립 지원법(Foster Care Independence Act)'의 통과를 주도했습니다. 이 법안을 통해 자립을 준비하는 위탁 청소년을 위한 연방 정부의 재정 지원 규모가 기존보다 두 배 이상 크게 확충되었습니다.
2000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 당선]
- 남편의 퇴임을 앞두고 현직 영부인 신분으로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장을 내미는 초유의 결단을 내림. - 선거 기간 내내 철새 정치인이라는 외부의 비판을 딛고 뚝심 있는 지역 밀착 유세로 민심을 파고듦. - 마침내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하며 뉴욕주 최초의 여성 상원의원이자 단독 정치인으로 완벽하게 독립함.은퇴를 선언한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 상원의원의 지역구인 뉴욕주에 출마하여 공화당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영부인이 선출직 공직에 출마하여 승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그녀는 단순한 '대통령의 아내'를 넘어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자적인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도약했습니다.
2001
[연방 상원의원 공식 취임]
- 남편의 대통령 임기가 아직 열흘 남짓 남은 시점에 새 의회의 개원과 함께 상원의원으로서 공식 선서를 함. - 상원 내 주요 위원회에 소속되어 입법 활동을 시작하며 새로운 의회 권력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음. - 화려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뒤로하고 초선의원으로서 겸손하게 실무에 집중하는 전략을 취함.빌 클린턴의 임기가 채 끝나기 전인 1월 초, 제107대 미국 의회의 개원과 동시에 뉴욕주를 대표하는 민주당 연방 상원의원으로 공식 취임했습니다. 상원 민주당 운영위원회 등 핵심 부서에서 활동하며 특유의 꼼꼼한 정책 이해도를 바탕으로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펼쳐 당내 입지를 굳건히 다졌습니다.
2008
[첫 대통령 경선 도전 및 패배]
- 압도적인 대세론을 형성하며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향한 역사적인 출사표를 던짐. - 선거 초반 철벽같은 지지율을 자랑했으나, '변화'를 기치로 내건 젊은 정치 신인의 돌풍에 점차 밀리기 시작함. - 엎치락뒤치락하는 피 말리는 경선 끝에 결국 아깝게 패배를 선언하고 승자에게 깨끗이 양보함.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에 출마하여 초반 압도적인 1위 주자로 꼽혔으나, 오바마 열풍에 밀려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당원 후보 지명전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경선 과정에서 수천만 표의 대중 득표를 기록하며 미국 정당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여성 대통령 경선 후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2009
[제67대 미국 국무장관 취임]
- 경선 라이벌이었던 신임 대통령의 대승적인 합류 요청을 수락하고 의원직을 전격 사퇴함. - 미국의 외교와 안보를 총괄하는 수장으로 부임하여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함. - '스마트 파워'를 앞세운 새로운 외교 기조를 바탕으로 실추된 미국의 국제적 동맹 관계 복원에 나섬.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으로 전격 발탁되어 연방 상원의원직을 사임하고 공식 취임했습니다. 치열하게 다투었던 정적 간의 '팀 오브 라이벌(Team of Rivals)' 통합 인사로 큰 화제를 모았으며, 군사력과 외교적 협상력을 결합한 '스마트 파워' 전략을 아시아 태평양 지역 등에 광범위하게 적용했습니다.
2011
[리비아 군사 개입 주도]
- 아랍의 봄 시위가 발발하자 무자비한 유혈 진압을 자행하는 중동의 독재 정권을 규탄함. - 국제 사회의 연대를 끌어내 독재자를 축출하기 위한 서방의 다국적 군사 작전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관철시킴. - 정권 붕괴 후 리비아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며 훗날 뼈아픈 실책이라는 비판을 감수하게 됨.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의 가혹한 시위대 탄압에 맞서, 아랍 연맹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미국이 주도하는 NATO의 리비아 군사 개입(2011년 군사 개입)을 행정부 내에서 가장 강력하게 옹호했습니다. 작전은 카다피 축출로 이어졌으나, 이후 권력 공백으로 인한 끔찍한 내전이 벌어지며 그녀의 핵심 외교 결정 중 가장 논쟁적인 사안이 되었습니다.
2012
[벵가지 영사관 피습 사건]
- 무장 테러 세력이 해외 영사관을 기습 공격하여 현직 미국 대사 등 4명이 참혹하게 살해당함. - 정보 실패와 보안 부실을 둘러싸고 의회 청문회에 불려가 야당의 맹렬한 집중 포화를 맞음. - 사태의 책임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에게 강력하게 맞섬.리비아 벵가지 주재 미국 외교 공관이 이슬람 무장 세력에 의해 습격을 받아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대사 등 4명의 미국인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공화당 측은 국무부가 보안 요청을 무시하고 사태를 은폐하려 했다며 그녀를 강하게 비판했고, 그녀는 여러 차례의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부서의 수장으로서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습니다.
2013
[국무장관직 명예로운 퇴임]
- 4년간 전 세계를 누비며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를 방문한 국무장관이라는 화려한 기록을 남기고 물러남. - 고강도 일정으로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고 개인적인 휴식기를 가지며 집필과 강연 활동에 몰두함. - 퇴임 직후부터 다음 대선 후보 1순위로 거론되며 차기 행보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킴.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종료와 함께 존 케리에게 국무장관직을 넘겨주고 자연스럽게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지구 40바퀴에 달하는 거리를 비행하며 112개국을 방문하는 강행군을 펼쳤으며, 퇴임 이후 회고록 『힘든 선택들(Hard Choices)』 출간과 클린턴 재단 업무에 매진했습니다.
2016
[민주당 대통령 후보 공식 지명]
- 개인 이메일 서버 사용 논란 등 치명적인 스캔들을 극복하고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섬. - 진보 성향의 강력한 당내 도전자와 벌인 치열한 접전 끝에 과반의 대의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함. - 미국 주요 정당 240년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되는 기념비적인 금자탑을 쌓음.사설 이메일 서버 논란 등 수많은 정치적 악재와 버니 샌더스 의원의 거센 당내 돌풍을 잠재우고 2016년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했습니다. 전당대회에서 당의 공식 대선 후보로 지명되며, 미국 양대 정당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후보직을 쟁취한 여성이 되는 역사적인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대선 패배 및 승복 연설]
- 선거 당일 전국 득표수에서는 앞섰으나 경합주를 내주며 선거인단 확보에 실패해 백악관 입성이 좌절됨. - 언론과 여론조사의 압도적인 당선 예측을 빗나간 충격적인 패배로 전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킴. - 유리천장을 깨지 못한 아쉬움을 삼키며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감동적인 메시지를 남김.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와의 본선 맞대결에서 전국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는 약 300만 표 가까이 더 많은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경합주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며 선거인단 확보에서 밀려 최종 낙선했습니다. 선거 이듬날 패배를 공식 인정하는 승복 연설을 통해 젊은 여성과 소녀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2020
[퀸즈 대학교 벨파스트 총장 취임]
- 북아일랜드 평화 정착에 헌신했던 과거의 공로를 인정받아 현지 명문 대학의 명예로운 수장으로 추대됨. - 영부인 시절부터 맺어온 북아일랜드와의 특별한 인연을 학술 및 국제 교류를 통해 이어나감. - 미국을 넘어 국제 사회의 존경받는 원로로서 교육과 평화 구축을 지원하는 행보를 계속함.과거 남편의 임기 중 북아일랜드 평화 협정(벨파스트 협정) 타결에 기여하고 지속적으로 교류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북아일랜드의 퀸즈 대학교 벨파스트(Queen's University Belfast)의 제11대 총장(Chancellor)으로 공식 취임하며 대학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2023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임용]
- 뉴욕의 명문 사학에서 국제 및 공공정책을 가르치는 실무 교수로 강단에 서며 후학 양성에 돌입함. - 반세기에 걸친 방대한 국정 운영과 글로벌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정책 전문가들을 직접 지도함. -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리더들을 키워내는 일에 헌신하며 새로운 삶의 장을 엶.뉴욕에 위치한 아이비리그 명문 컬럼비아 대학교의 국제공공정책대학원(SIPA)의 실무 교수(Professor of Practice)로 합류했습니다.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고 대학 내 글로벌 정책 이니셔티브에 참여하며, 세계 무대에서 쌓은 풍부한 외교 및 정치 경험을 차세대 리더들에게 전수하는 교육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