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티스트 라마르크
연표
1744
[생물학의 씨앗, 라마르크의 탄생]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의 바장탱 르 프티에서 소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습니다.
모계로는 프랑스 임시 국왕 로베르 1세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가족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의학 학교에서 의학을, 국립 식물원에서 식물학을 공부하며 학문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1778
[뷔퐁의 후원, 식물학자 데뷔]
유명한 뷔퐁 백작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 식물지》 3권을 출판하며 학계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 저서는 그에게 큰 호평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장자크 루소를 만나 함께 식물을 채집하기도 했으며, 쥐시외와 함께 식물학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1781
[유럽 여행과 식물 사전 출판]
독일과 헝가리 등 유럽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식물학 연구를 심화했습니다.
이후 그 경험을 바탕으로 중요한 저서인 《식물 사전》을 출판했습니다.
이 연구는 1781년부터 1782년까지 이어졌습니다.
1793
[혁명가, 무척추동물 교수되다]
공화제를 지지했던 그는 왕립 식물원의 개조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 결과, 파리 식물원의 무척추동물 담당 교수로 임명되어 생애 후반의 주요 연구 분야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무척추동물 연구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게 됩니다.
1801
[무척추동물 체계화 시작]
무척추동물 연구를 바탕으로 《무척추동물의 체계》를 출판하며, 생물의 분류와 구조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이 저서는 무척추동물 분류학 분야의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809
[세계 최초의 진화론 제시!]
세계 최초로 체계적인 진화 개념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저서 《동물 철학》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생물학에 혁신적인 시각을 제공하며 후대 진화론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또한 '생물학(biologie)'이라는 용어를 처음 고안하여 사용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그는 기린의 목으로 상징되는 용불용설과 획득형질 유전설을 제창했습니다. 고정설을 지지했던 조르주 퀴비에와 대립하며 혁신적인 사상을 펼쳤습니다.
1815
[고생물학의 문을 열다]
무려 7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 《무척추 동물지》를 출판했습니다.
이 작업으로 그는 고대 무척추 동물학의 창시자라는 중요한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연구는 1815년부터 1822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저서를 통해 무척추동물에 대한 심도 깊은 분류와 생태학적 통찰을 제시했습니다.
1829
[파리에서 삶을 마감하다]
84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평생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으며, 세 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여덟 명의 자녀 중 다섯만이 그보다 오래 생존하는 등 개인적인 고난도 겪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다윈주의와의 대립 속에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생물학 역사에 지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1830
[묘소, 혁명의 시대에 사라지다]
1830년 7월 혁명이라는 격변의 시기에 그의 묘소는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의 생애만큼이나 파란만장한 마지막 흔적이 되었습니다.
묘소는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잠정적 승인을 얻어 안치되었으나, 혁명 당시 소실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