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연표
1853
[빈센트 반 고흐 출생]
네덜란드 쥔더르트에서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년 전 사산된 형의 이름인 '빈센트 빌럼'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 테오도로스 반 고흐는 목사였고,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튀스는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빈센트'라는 이름은 미술상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진 가문의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1857
[동생 테오 출생]
빈센트에게 평생 정신적, 경제적 후원자가 될 동생 테오도뤼스 테오가 태어났습니다.
빈센트는 여러 형제자매 중 테오와만 지속적으로 교류했습니다.
테오는 빈센트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이자 친구였습니다.
1860
[쥔더르트 학교 입학]
200여 명의 아이들이 다니는 쥔더르트 마을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빈센트는 어린 시절부터 진지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습니다.
1861
1864
1866
[틸뷔르흐 중학교 전학]
제벤베르헌 학교를 졸업한 후 틸뷔르흐의 중학교로 보내졌습니다.
이곳에서 파리에서 성공한 예술가 콘스탄트 하위스만스에게 미술을 배웠습니다.
하위스만스는 기술보다 대상의 인상을 포착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으며, 어머니도 빈센트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권유했습니다.
1868
[학교 자퇴]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빈센트는 자신의 학창시절이 '엄숙하고 차갑고, 무균적'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1869
[구필 화랑 헤이그 취직]
큰아버지의 주선으로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 취직했습니다.
화랑에서 미술 교육을 받으며 상인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1873
[런던 지점 전근 및 사랑 실패]
런던 사우샘프턴가의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전근했습니다.
스무 살에 아버지보다 많은 돈을 벌 정도로 일에서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하숙집 딸 외제니 로이어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후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빈센트의 제수인 조 반 고흐 봉거는 이때가 빈센트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1875
[파리 전근 및 해고]
파리로 전근했으나, 미술상들이 미술품을 지나치게 상품화하는 것에 분개하여 결국 이듬해 해고되었습니다.
상인의 길과 맞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1876
[무급 교사 및 선교 시작]
영국으로 돌아가 램스게이트의 작은 기숙학교에서 무급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이후 선교단체에서 감리회 목사 조수로 일하며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설교도 진행했습니다.
빈센트는 이때도 적응하지 못하고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도르드레흐트 서점 취직]
집으로 돌아와 큰아버지 주선으로 도르드레흐트 서점에 취직했습니다.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낙서를 하거나 성경 구절을 번역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기독교에 몰두하며 수도승과 같은 경건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1877
[신학 입학 시험 준비]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족의 지원을 받아 암스테르담에서 이모부 요한네스 스트릭커의 지도 아래 신학 입학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1878
[선교사 파견]
신학 입학 시험에 실패하고 이모부의 집을 떠났습니다.
이후 브뤼셀 근교 라켄의 개신교 선교 학교 3개월 과정에 등록했지만, 전도사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벨기에 탄광지대 보리나주로 파견되었습니다.
1879
[보리나주 선교사 활동]
벨기에 보리나주 광산촌 쁘띠와스메스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활동했습니다.
가난한 신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하숙집을 노숙자에게 내어주고 작은 오두막으로 이사하여 짚을 침대 삼아 잠을 자는 등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선교 단체 시찰단은 빈센트의 생활 모습을 보고 성직자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며 해고했습니다. 빈센트는 브뤼셀까지 75km를 걸어 중재를 요청했고, 무급으로 선교를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880
[에텐으로 귀가]
부모님의 압력에 굴복하여 에텐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족은 빈센트의 정신 상태를 걱정했고, 아버지는 정신병원 입원을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화가의 길 시작]
다시 퀴엠으로 돌아가 10월까지 광부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이 시기부터 성직보다 미술에 더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동생 테오의 제안에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장면에 대한 관심이 그림으로 이어졌습니다.
[미술 아카데미 입학]
테오의 권유에 따라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해부학, 소묘, 원근법을 배웠습니다.
빈센트는 원래 학교 교육을 싫어했지만, 테오의 설득에 응했습니다.
1881
[코넬리아 보스 청혼 거절]
이모부의 딸이자 미망인이 된 코넬리아 키 보스스트릭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했으나, '아니, 안돼, 절대'라는 단호한 거절을 당했습니다.
[격렬한 청혼]
코넬리아를 만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떠났습니다.
이모부는 빈센트의 집요함에 역겨움을 표했고, 절망한 빈센트는 '불꽃 속에서 내 손을 유지할 수 있는 동안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며 램프에 왼손을 집어넣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이모부는 빈센트의 경제력을 지적하며 코넬리아의 선택을 존중해달라고 했습니다.
[마우베에게 수채화 학습]
헤이그로 돌아와 외사촌 안톤 마우베에게 수채화를 배웠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교회에 가지 않겠다며 아버지와 크게 다툰 후 다시 헤이그로 떠났습니다.
마우베는 빈센트가 갈망했던 성공한 예술가였습니다.
1882
[화실 설립 및 마우베 불화]
유화를 배우고 화실을 세웠으나, 한 달도 안 되어 마우베와 불화가 생겼습니다.
마우베는 석고상을 모델로 삼으려 했지만, 빈센트는 돈이 없어 거리에서 사람들을 즉석으로 불러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엔 호르니크와 동거]
다섯 살 딸을 가졌고 임신 중이던 알코올 중독자 매춘부 클라시나 마리아 '시엔' 호르니크와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마우베는 빈센트와 연락을 끊었습니다.
빈센트는 시엔에게 이미 죽은 아이가 두 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임질 발작 및 첫 유화]
임질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서 3주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후 테오에게 빌린 돈으로 첫 유화를 그렸고, 작품에 큰 만족감을 표현했습니다.
1883
빌럼은 훗날 빈센트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믿었지만, 만난 시기를 고려할 때 생부는 될 수 없었습니다.
[뉘넌 부모님께 합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노르트브라반트주 뉘넌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합류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림에만 몰두하며 직조공과 시골집에 대한 작품들을 완성했습니다.
1884
[마고 베흐만 결혼 실패]
이웃 마르호트 베흐만이 빈센트에게 구애하여 둘은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양가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자 마고는 독극물 음독자살을 시도했고, 빈센트가 급히 병원으로 데려가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수채화 여러 점과 유화 200점을 남겼으며, 주로 음침한 흙빛을 사용했습니다.
1885
[아버지 테오도로스 사망]
아버지 테오도로스가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습니다.
아버지 사망 이후 빈센트는 여러 정물화를 남겼습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 완성]
《감자 먹는 사람들》을 완성하고 수년간 작업한 농민 그림 여러 점을 파리의 테오에게 보냈습니다.
하지만 판매가 잘 되지 않아 테오와 갈등을 겪었고, 테오는 빈센트의 그림이 너무 어둡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그림은 소박한 식사를 하는 농부 가족의 모습을 통해 시골 사람들의 가혹한 삶을 묘사하고자 한, 이 시기 가장 야심차고 유명한 작품입니다. 빈센트는 이 작품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습니다.
[모델 소녀 임신 용의자]
빈센트의 그림 모델로 참여한 마을 농가 소녀 중 한 명이 혼외임신을 하자, 빈센트가 용의자로 지목되었습니다.
마을의 전임 성직자는 주민들에게 더 이상 빈센트의 그림 모델이 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안트베르펜 이사 및 채색 연구]
안트베르펜으로 이사하여 회화용품점 위의 집을 빌려 생활했습니다.
생활비는 빠듯했지만, 미술관에서 루벤스의 그림을 감상하며 채색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부둣가에서 일본의 우키요에 목판화를 구입하며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 시기 폭음을 시작했고, 이가 흔들릴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1886
[미술 아카데미 입학 마찰]
안트베르펜 왕립 미술 아카데미 고등부에 입학했으나, 파격적인 화풍과 정규 교육에 대한 반골 성향으로 인해 샤를 베를라, 프란츠 빙크, 외젠 시베르트 교수와 연달아 마찰을 빚었습니다.
특히 밀로의 비너스 수업 중 플랑드르 농부의 벌거벗은 상체를 그리려다 시베르트 교수의 캔버스 훼손에 격렬히 분노하며 학교를 떠났습니다.
이후 교수진은 빈센트를 포함한 17명의 학생들을 유급시켰습니다. 시베르트가 고흐를 추방했다는 이야기는 낭설입니다.
[과로 등으로 입원]
과로, 부실한 식사, 과한 흡연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습니다.
매독 치료도 함께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파리 이사 및 예술가 교류]
아카데미를 떠나 파리로 이사했습니다.
몽마르트르에 있는 동생 테오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페르낭 코르몽 화실에서 공부했습니다.
이곳에서 존 러셀,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앙크탱,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등 당대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예술 사조를 접했습니다.
줄리앙 탕기 미술용품점에서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점묘화와 신인상주의 작품을 접했으며, 일본 우키요에 목판화를 수백 점 수집해 작업실 벽을 장식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아파트 이사]
빈센트와 테오는 르삑 54번지에 더 큰 아파트를 얻어 이사했습니다.
빈센트는 파리에 살면서 친구와 지인들의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1887
[아니에르쉬르센 이사]
동생 테오와 갈등을 겪다가 화해했습니다.
이후 파리 북서쪽 교외 아니에르쉬르센으로 이사하여 폴 시냐크를 알게 되었고, 점묘법을 채택하기 시작했습니다.
들라리바렛 미술관에서 아돌프 몽티셀리의 초상화를 본 후 더 밝은 색채와 대담한 붓질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폴 고갱과 친구 됨]
파리에 막 도착한 폴 고갱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해 말 베르나르, 앙크탱, 툴루즈로트레크와 함께 몽마르트르에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곳에서 베르나르와 앙크탱은 처음으로 그림을 판매했고, 빈센트는 폴 고갱과 작품을 교환했습니다.
카미유 피사로,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등 유명 화가들도 전시회를 방문하여 예술과 사회에 대한 논의에 참여했습니다.
1888
[파리 떠나 아를 이주]
2년 동안 2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리며 열정적으로 작업한 파리를 떠났습니다.
출발 몇 시간 전, 동생 테오와 함께 쇠라의 화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습니다.
남부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며 눈부신 색채에 대한 희망을 품었습니다.
[왼쪽 귀 일부 절단]
아를의 사창가에서 일하는 라헬(본명 : 가브리엘 베를라티에)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네주는 기이한 행동을 했습니다.
이 사건은 빈센트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상징하는 유명한 일화가 되었습니다.
훗날 이 사건의 명칭을 딴 스페인 음악 그룹 '라 오레하 데 반 고흐'가 결성되기도 했습니다.
사창가 여성 라헬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피투성이가 된 고흐를 발견해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과다 출혈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그를 두고, 룸메이트였던 고갱은 동생 테오에게 전보를 치고는 황급히 아를을 떠났습니다. 아를 시립 병원(Hôtel-Dieu)으로 이송됨. 고갱은 고흐가 깨어나기 전에 떠났으며, 이후 두 사람은 영영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1889
[아를 주민들의 청원과 '노란 집' 폐쇄]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며 환각에 시달리자, 공포를 느낀 마을 주민들이 경찰에 청원서를 제출해 그를 강제 격리시켰습니다. 경찰은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노란 집'을 폐쇄했고, 고흐는 이웃들에게서 철저히 배척당했습니다.
약 30명의 주민이 서명한 청원서에는 고흐를 '위험한 광인'으로 규정하고 감금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김.
[생레미 정신병원 이송]
주민들의 냉대와 재발하는 발작 속에서 고흐는 스스로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정신 질환과 싸우면서도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걸작들을 탄생시켰습니다.
1890
[밀밭에서 총격 자살 시도]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밀밭에서 자신에게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미완성인 《나무 뿌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라부 여인숙에서 사망]
총격 후 이틀 만에 라부 여인숙에서 동생 테오 곁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사망 원인이 정말 자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1901
[사후 파리 전시회 성공]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이 전시된 이후, 그가 사망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비운의 화가는 사후에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87
[아이리스 세계 최고가 경신]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 소더비즈에서 무려 5,390만 미국 달러에 팔리며 당시 세계 최고가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의 작품이 얼마나 위대한 가치를 지니는지 세상에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1990
[가셰 박사 초상 세계 최고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가셰 박사의 초상》 (첫 번째 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당시 약 580억원)에 일본 수집가에게 팔리며, 다시 한번 새로운 세계 최고가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는 당시 낙찰가 7,500만 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었습니다.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4,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습니다.
2020
[《봄 뉘넌 목사관 정원》 도난]
뉘넌 시기 작품인 《봄 뉘넌의 목사관 정원》이 싱어 라런 미술관에서 도난당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빈센트 반 고흐 작품의 지속적인 가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예술품 도난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