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명성황후는 격동의 구한말,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정비이자 황후였다. 탁월한 정치적 수완으로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이끌었으나, 민씨 척족을 중용하며 세도정치 비판을 받았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국내외 혼란 속에서 청,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의 세력 균형을 이용해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려 노력했다. 개화 정책에도 관여하며 격변하는 시대에 대응했으나, 최종적으로 일본의 압력과 친일 세력의 음모로 1895년 을미사변 때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사후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황후로 추봉되며 비극적인 조선의 마지막 국모로 기억된다.
연표
1851
[명성황후 민씨 탄생]
민치록의 딸로 경기도 여주목 근동면 섬락리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자영이었으며, 9세 때 아버지를 여읜 뒤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명성태황후 민씨는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 섬락리 사저(현재의 여주시 능현동 250-1)에서 민유중의 6대손이자 사도시 첨정이었던 민치록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자영이었다. 아버지 민치록의 전 부인 오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한산 이씨에게는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1858
[아버지 민치록 사망]
아버지 민치록이 사망했으며, 어른처럼 침착하게 습렴하는 모습을 지켜보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후 어머니와 함께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생활했다.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웁게 했다. 김동인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도 명성황후는 아버지 민치록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 때 간호를 한 효녀로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1866
[금혼령 선포 및 왕비 간택]
신정왕후 조씨의 명으로 12세에서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에게 금혼령이 내려졌다. 이어서 초간택이 진행되었고, 여러 후보를 거쳐 최종적으로 민자영이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1866년 어린 민자영은 왕비 간택에 참여하게 된다. 1866년 2월 15일(음력 1월 1일) 신정왕후 조씨가 조선에 있는 12세 ~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다. 그리고 4월 9일(음력 2월 25일) 초간택을 행하였고,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더불어 재간택에 들어갔다. 왕비로 정해진 때는 4월 20일(음력 3월 6일)의 삼간택에 뽑힐 때였다.
[고종과의 친영 및 왕비 책봉]
고종의 왕비로 간택된 민자영은 남편 고종이 운현궁에서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례를 통해 왕비로 입궐했다. 이를 계기로 그녀의 아버지 민치록은 여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1866년 5월 5일(음력 3월 21일) 남편이 될 고종이 운현궁에서 명성황후를 데리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親迎)을 거행했다. 아버지 민치록은 왕의 장인에게 추증하는 예에 따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해주오씨는 해령부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생모 감고당 한산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 이어 민치록에게는 예전에 따라 여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1868
[고종의 서자 완화군 탄생]
고종의 후궁 귀인 이씨가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완화군과 귀인 이씨를 총애하여 왕비인 민씨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명성황후가 입궁할 무렵엔,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그러다 1868년 4월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과 그를 낳은 귀인 이씨를 총애하였다.
1871
[첫 왕자 탄생과 요절]
명성황후가 왕자를 낳았으나, 왕자는 항문 폐색으로 5일 만에 사망했다. 왕자의 죽음을 두고 민씨는 흥선대원군이 왕자에게 달여준 약을 의심하며 대원군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총애를 받아 1871년 12월 15일(음력 11월 4일)에 아이를 낳았으나, 왕자는 항문 폐색으로 인해 5일 만에 12월 19일(음력 11월 8일)에 죽어버렸다. 왕자의 죽음을 두고 민씨는 흥선대원군이 왕자에게 달여준 약에 산삼을 많이 넣은 일을 의심했다.
1873
[최익현 상소로 대원군 견제]
유림의 거두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비판하며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지원하며 대원군 견제에 나섰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집권에 공을 세웠음에도 축출당했던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와도 입을 모았고,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그의 형 흥인군과도 입을 모았다. 또한 서원 철폐 과정에서 등을 돌리게 된 유학자 세력과도 교류하여 최익현 등을 포섭해 왔다. 최익현은 1873년 10월 임금이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해임당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익현의 뒤를 지원하였고 최익현은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으로 올랐으며,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섭정 종료 및 고종 친정 시작]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호조참판으로 다시 등용시켰고, 최익현은 다시 흥선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고종과의 논의 끝에 대원군의 운현궁 출입 전용 문이 폐쇄되며 11년간의 섭정이 종료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어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다시 호조참판으로 올려주었으며,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흥선 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과의 논의 끝에, 1873년 11월엔 운현궁에서 궁궐로 출입하는 대원군의 전용 문을 폐쇄하였다. 이로써 대원군의 11년간의 간섭은 종결되었다. 대원군은 양주 시둔면 곧은골(直谷)로 물러났으나, 은퇴 이후에도 대원군은 끊임없이 복귀를 꿈꾸었고 명성황후 및 민씨 일족과 수시로 갈등하였다.
[장녀 공주 탄생 및 사망]
왕비 민씨는 첫째 딸인 공주를 출산했으나, 공주 역시 그 해 11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1873년 3월 11일(음력 2월 13일) 명성황후는 장녀인 공주를 출산했다. 그러나 공주 역시 1873년 11월 18일(음력 9월 28일)에 요절했다.
1874
[차남 순종(이척) 탄생]
명성황후는 둘째 아들 이척(훗날 순종)을 낳았다. 이척은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되며 명성황후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874년 2월에는 둘째 아들 이척(李坧, 훗날의 순종)을 낳았으며, 이듬해 2월 이척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민승호 일가 폭탄 테러 사망]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부인 등 일가족 3명이 폭탄 테러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면서 명성황후는 대원군에 대한 보복심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1874년 12월 17일(음력 11월 28일) 폭탄 테러로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부인 등 일가족 3명이 폭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일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애달파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보복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일본과 급진 개화파를 매우 경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875
[이척(순종) 왕세자 책봉]
명성황후의 차남 이척이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명성황후의 권력 기반을 더욱 굳건히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1874년 2월에 둘째 아들 이척(李坧, 훗날의 순종)을 낳았으며, 이듬해인 1875년 3월 24일(음력 2월 18일) 이척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75년 5월 10일(음력 4월 5일) 명성황후는 셋째 아들인 대군을 낳았으나, 1875년 5월 23일(음력 4월 18일)에 사망했다.
1876
[강화도 조약 체결 및 개화 정책 추진]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하며 문호를 개방했다. 명성황후는 이 조약을 통해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박규수 등 개화사상가를 등용했다.
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배제한 명성황후는 개화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대외적으로도 개방이론을 포용하여 쇄국을 버리고 1876년 2월 27일 병자 수호 조약(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며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먼저 노론 계열이지만 개화사상가인 박규수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고,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했다.
1878
[4남 대군 탄생 및 사망]
명성황후의 넷째 아들인 대군이 태어났으나, 두 번째 왕자와 마찬가지로 오래 살지 못하고 두 달여 만에 사망했다.
1878년 3월 22일(음력 2월 18일) 명성황후의 넷째 아들인 대군이 탄생했으나, 1878년 7월 4일(음력 6월 5일)에 사망했다.
1881
[이재선 역모 사건 발각]
1881년 11월 4일(음력 9월 13일) 경기도 향시 기간을 틈타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려던 이재선 및 대원군 측근들의 역모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고변으로 인해 발각되어 이재선, 안기영 등 주동자들이 옥에 갇히고 사형당했다.
1882
[청군 개입과 명성황후의 복귀]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했다. 명성황후는 청군의 보호 하에 다시 입궁하며 외교적으로 친청 정책으로 기울어졌다.
일본은 중국(청)의 군대 파병에 대한 "일본인 보호"의 명목으로, 도주했던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지휘 아래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중국인 제독 오장경은 7월 일본군이 퇴각한 틈을 타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했고, 그날 밤엔 한성을 장악했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는 청군의 보호 하에 입궁했다. 이 일 이후 명성황후는 급진 개화파 등을 정권에서 점차 배제시키며 외교적으론 친청 정책으로 기울어졌다.
[민씨를 왕세자빈으로 간택]
명성황후는 친척 민태호의 딸을 왕세자빈으로 간택했다. 이는 민씨 척족의 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1882년 3월 8일(음력 2월 19일) 명성황후는 친척 민태호(民台鎬)의 딸인 민씨를 왕세자빈으로 간택했다.
[임오군란 발생과 명성황후 피신]
구식 군인들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민씨 일가와 일본 공사관이 피습당했다. 명성황후는 궁궐을 벗어나 장호원으로 피신했으며, 흥선대원군은 군인들의 추대로 재집권했다.
1882년 7월 25일(음력 6월 10일) 별기군과 구식군 간의 처우 차별과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어 있었던 군대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명성황후는 대전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長湖院) 민응식의 집으로 은신했으며, 궁에 남은 흥인군 이최응과 민겸호는 군인들에게 피습당했다. 한양에서는 정권을 위임받은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찾아내지 못하자 "황후가 죽었다"라고 발표하고 국상 절차를 밟았다.
1884
[갑신정변 발생]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이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민씨 척족 세력이 피습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우궁으로 옮겨져 일본군의 호위를 받게 되었다.
임오군란이 가라앉은 이후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은 민영익 등을 필두로 한 친청 세력에 의한 개화파에 대한 공공연한 탄압에 위협과 불안을 느끼며 난과 거사를 꿈꾼다. 이에 민태호와 민영목 등은 결국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의 표적이 되어,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의 군인 난입 때에 피습당한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우궁으로 옮겨졌으며, 그들의 주위에 일본 군인 1개 중대가 보초로 둘러진다.
[청군 진압과 개화파 도피]
갑신정변이 발발한 다음 날, 청군이 개입하여 정변을 진압했다. 김옥균 등 개화파는 일본으로 도피했고,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청군의 진영으로 이탈하며 청나라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그 해 고종은 12월 5일(음력 10월 18일) 청나라 공사 원세개와 6백 명의 군인들의 면회 요구를 받았고, 김옥균은 이를 저지하려하여 그들간에 말씨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날 오후에는 중국 군인들이 배로 늘어났고, 일본인 군인들은 혼란 와중에 민심의 표적이 되어 공격받았다. 일본인 군인 2백 명은 일단 후퇴하였으며, 정부군 8백 명도 열세로 인해 패배했다. 이런 때에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홍영식, 박영교, 몇 명의 사관생도의 호위를 받으며 이탈하여 청군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김옥균은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변수, 유혁로와 함께 다케조에 공사의 뒤를 따라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일본으로 도피했다.
1885
[러시아 밀약 시도 발각]
조선 정부 고문 묄렌도르프가 러시아 공사와 밀약을 맺으려던 시도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좌절되었다. 이는 러시아를 통한 일본 견제 시도의 첫 번째 실패였다.
명성황후는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의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매개로 러시아 공사와 접촉하여 밀약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밀약은 먼저 중국에 발각되어, 1885년 2월엔 묄렌도르프에게 영장이 발부되고 대원군은 원세개를 대동하여 귀국되었다.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령]
영국 함대가 남해의 거문도를 점령하여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이 심화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한 영국의 견제였다.
1885년 3월에는 거문도가 영국 함대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1887년엔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러시아와의 합의 끝에 철수했다.
1887
[영국군의 거문도 철수]
러시아와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합의 끝에 영국 함대가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이로써 거문도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1885년 3월에는 거문도가 영국 함대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1887년엔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러시아와의 합의 끝에 철수했다.
1892
[운현궁 폭탄 테러 시도]
흥선대원군이 거주하던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폭탄들은 점화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고, 배후에 대한 음모론이 제기되며 명성황후와 대원군 간의 갈등이 재점화되었다.
1892년 봄엔, 운현궁으로부터 화약이 터지고 또 화약이 여러 건물에 장치된 것이 발견됐다. 다행히 이 폭탄들은 점화되지 않은 채로 발견됐다. 명성황후는 이 일에 대한 음모론의 표적이 되어, 그 전날, 명성황후의 양오빠인 민승호에게 대원군이 폭약을 보내 일가를 죽게 만든 일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을 꿈꾸지 않았겠느냐는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세간의 소문을 빌어 명성황후가 운현궁 테러의 배후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1893
[동학 농민군 보은 집회]
동학 농민군 2만여 명이 충청도 보은에서 집회를 열고 지방관들의 폭정 규탄과 민생고 해결, 외세 축출 등을 요구했다. 이는 동학농민운동의 전조가 되었다.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은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을 중심으로 재기했다. 1893년 5월 15일(음력 3월 30일) 충청도 보은 집회에서는 농민들이 2만여명 모여 농민을 괴롭히는 지방관들의 퇴출과 민생고를 탕감하고, 오랑캐들을 몰아낼 것 등을 요구하였다.
1894
[개화당 제거 음모와 대원군의 암살 모의]
명성황후는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흥선대원군의 정보망에 발각되었다. 대원군은 일본 공사와 협의하여 명성황후 암살을 모의하는 데 동의했다.
1894년 가을, 명성황후는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이때, 흥선대원군의 정보망에 발각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일본공사와 협의하며 일본에게 약간의 도움을 부탁하였다. 명성황후 즉, 그녀가 죽음을 맞게 되는 음모가 꾸며지는 때였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제거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으리라는 일본 공사 오카모토의 언약을 받았다.
[고부 농민 운동 발생]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부패에 항거하는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명성황후는 이를 단순한 비적 활동으로 인식하고, 흥선대원군과의 연계 가능성을 경계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1894년 1월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패를 규탄하는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명성황후는 온건 개화파 및 친척 척신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이 동학 농민군을 동비(東匪. 동학의 불한당들.)로 보고한 것을 그대로 믿고 지냈다. 한편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대원군과 동학농민군 공모 첩보]
주일본 러시아 공사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에게 흥선대원군이 동학농민군과 공모하여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다는 첩보를 비밀리에 전달했다.
1894년 2월 21일,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칼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비밀 정보를 보냈다. 그 내용은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주성 점령과 청일 양국군 파병 요청]
전주성이 동학 농민군에게 점령되자,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파병하며 청일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같은 해 4월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 의해 점령되고 흥선대원군이 반군을 지원하여 고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성황후는 지원을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군인들이 청나라에 의해 파병되자 이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빌미로 파병하였다.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 접견]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를 편전에서 접견했으며, 이 시기에 일본군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빌미로 청나라와의 협력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1894년 6월 26일(음력 5월 23일)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를 편전에 나아가 접견했다. 농민군과 관군은 조선에 일본군과 청군이 당도하자 전주화약을 맺고 휴전했다. 그러나 조선에 온 이들 외세는 주둔하며 군대를 증파했다.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빌미로 일본은 청나라와의 협력을 제의했으나, 청나라는 이를 거절했다.
[일본군 경복궁 점령과 대원군 재집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민씨 일가를 퇴출시켰다. 흥선대원군이 다시 궁으로 돌아오고, 일본은 김홍집을 총리대신에 앉혀 군국기무처를 설치, 갑오경장을 단행하며 조선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1894년 7월 24일(음력 6월 21일) 경복궁이 일본군 혼성여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에 민씨 일가는 일본이 궁궐에 보낸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와 휘하의 군인들에 의해 퇴출당하고 대원군은 또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됐으며, 일본은 김홍집을 총리 대신에 앉히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개혁을 단행했다. 이로써 민씨 일가의 세도는 무너졌다.
[조일동맹조약 체결 및 청일전쟁 시작]
조일동맹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개혁과 갑오경장을 통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을 공격하며 청일전쟁을 시작했다.
1894년 8월 22일(음력 7월 22일) 조일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선의 내정 개혁과 갑오경장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군을 먼저 공격한 뒤에야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으며, 7월 ~ 9월 사이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1895
[문석봉 등 의병 봉기]
문석봉 등이 김해와 보은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당들을 토벌하자고 외쳤으나, 공주부에서 보낸 군인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는 명성황후 암살에 대한 민중의 분노 표출이었다.
1895년 10월 문석봉은 김해로부터 나와 충청북도 보은 등지에서 많은 이들을 모아놓고 의병을 일으켜 적당들을 토벌하자고 외쳤다. 이에 이곳과 인접한 읍의 유생, 선비들이 두건과 도포를 입고 나아갔지만 얼마 뒤 공주부에서 보낸 군인들에 의해 모두 잡혔다.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미수 및 도피]
박영효가 명성황후의 권력과 능력을 두려워하여 암살을 계획했으나, 유길준의 밀고로 발각되어 일본으로 도피했다. 이 사건은 명성황후에 대한 암살 시도가 노골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7월 왕후를 암살할 계획이 박영효에 의해 꾸며진다. 박영효는 왕후의 능력과 권모를 두려워해 왕후가 암살되어 화근을 뿌리 뽑아야 된다고 여겨, 1895년 7월로 날짜를 정하고 일본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유길준을 박영효는 제 조력자로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이에 유길준은 매우 놀라워하며 명성황후 암살 계획을 바로 임금에게 알렸다. 유길준의 밀고를 박영효는 알아채어 양복으로 바꿔 입고 변장하며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성을 빠져 나와 한강 자락의 용산에서 증기선 을 타고 달아났다. 그의 일당인 이규완, 신응희 등도 따라 달아났다.
[우금치 전투 패배로 동학농민운동 종료]
대일 농민 전쟁을 감행했던 동학 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며 봉기가 마지막을 맞았다. 녹두장군 전봉준도 이 전투 이후 순창에서 체포되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자 동학농민군이 다시금 모여 대일 농민 전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농민군의 1895년 1월 22일(음력 1894년 12월 27일)의 패배로 봉기는 우금치 전투를 끝으로 마지막을 맞으며, 녹두장군으로도 불리는 전봉준도 순창에서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녹두장군으로도 불리는 전봉준도 순창에서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29일) 처형되었다.
[박정양 내각 수립 및 일본 견제 시도]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자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몰아내려 했다. 박정양을 내각총리대신에 임명하며 김홍집 내각을 퇴출시켰다.
일본은 대원군을 퇴진시키는 한편 의정부의 명칭을 내각으로 바꾸고 물러나있던 김홍집을 7월에 다시 총리대신으로 앞세워 연립 내각을 구성했고, 내정의 내각엔 일본인 고문관을 두어 내정 간섭을 강화했다. 이에 명성황후는 프랑스, 러시아, 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은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라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정세를 이용하여,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몰아내려 했다. 명성황후는 1895년 6월 1일(음력 5월 8일) 박정양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김홍집 내각을 퇴출했다.
[일본 공사의 명성황후 암살 모의]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와 스기무라 후카시, 오카모토 류노스케 등 일본 인사들이 명성황후 암살을 모의했다. 그들은 대외적으로 조선인 군인들의 반란으로 위장할 계획을 세웠다.
1895년 9월 3일(음력 8월에) 명성황후는 죽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음모가 일본 공사 겸 예비역 일본 제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와 9월 3일(음력 8월 15일)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 로닌 두목 오카모토 류노스케 등과 함께 꾸미어졌는데, 명성황후의 죽음은 일본인 군인들과 로닌들이 맡고, 대외적으로는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들의 반란이었다고 발표하는 것이 골자였다.
[흥선대원군의 명성황후 제거 맹세 서명]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된 맹세에 자필로 서명했다. 이는 명성황후 암살 계획에 대한 그의 협력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1895년 9월 4일(음력 8월 16일) 대원군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된 맹세에 자필로 서명했다. 그 내용은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정사를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언약을 받아 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은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필로 각서에 서명했다.
[을미사변, 명성황후 암살]
새벽, 일본인 낭인들과 협력한 조선인 병사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이 사건은 을미사변으로 불리며 국제적인 비난을 야기했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에 명성황후 암살 작전이 결행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로닌과 일본 군인, 명성황후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 300명가량을 모아 경복궁으로 나아갔다. 대원군은 먼저 명성황후가 죽음을 맞아 마땅하다는 주장의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경복궁에서 이들을 마주친 홍계훈 경비 대장이 살해당했으며, 명성황후는 궁녀복으로 갈아입고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로 은신했으나 낭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검에 베여 살해당했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석유가 뿌려진 다음 불태워졌다. 당시 명성황후의 나이는 43세였다.
[명성황후 직위 강등 및 복위]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명성황후의 직위가 폐인으로 강등되었으나, 고종의 명으로 다음 날 빈으로 복위되었다.
명성황후의 직위는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1895년 10월 10일(음력 8월 22일) 죽음 이틀 뒤 폐인으로 강등했으나, 바로 다음 날인 10월 11일(음력 8월 23일) 그녀의 직위는 고종의 명으로 "빈"으로 올라갔다.
[명성황후 직위 왕후로 복작]
국모 시해의 만행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일본이 비난을 받게 되자, 일본은 형식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명성황후의 지위는 암살 이전의 왕후로 완전히 복작되었다.
국모에게 저질러진 이런 만행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10월에는 형식적인 조사를 했으며, 명성황후의 지위도 완전히 복원되어 암살 이전 생전 마지막 작호인 왕후로 복작됐다. 이는 1895년 11월 26일(음력 10월 10일)의 일이다.
1896
[명성황후 생존 의혹 외교 문서 보고]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후고 라돌린이 독일제국 총리에게 보낸 비밀문서에서,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한국의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했다고 보고했다. 이는 명성황후의 생존 의혹을 제기하는 외교 문서로,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2013년 7월 1일, 1896년 2월 6일 당시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후고 라돌린이 독일제국 총리 실링스퓌르스트 호엔로에 앞으로 보낸 비밀문서의 내용이 공개되었다. 한 내용은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한국의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왕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아주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였다. 정상수 교수는 "독일과 영국 등 당시 조선과 관계를 맺던 나라들의 외교문서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명성황후의 시해를 당연시할 게 아니라 새로운 사료 발굴로 진실을 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1897
[명성황후 시호 및 능호 결정 (미반포)]
명성황후에게 문성이라는 시호와 홍릉이라는 능호가 결정되었으나, 반포되지 않아 정식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이후 시호 논의 끝에 명성으로 개칭된다.
1897년 2월 7일(음력 1월 6일) 문성이란 시호가 능호는 홍릉으로 정해졌으나 반포를 하지 않아 문성이라는 시호는 정식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문성 시호가 명성으로 개칭]
이전 결정된 문성 시호가 정조의 시호와 같다는 논의 끝에 명성으로 개칭되었다. 이 시호는 이후 황후 추봉 시 '명성황후'로 이어진다.
1897년 4월 3일(음력 3월 2일) 시호의 문성(文成)이 정조의 시호와 같다 하여 여러 논의 끝에 명성으로 시호가 개칭됐다.
[고종 황제 즉위 및 명성황후 추봉]
고종이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성황후 역시 황후로 추봉되었다. 이로써 국장으로 다시 장례가 치러지고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같은 해 8월,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10월에는 대한제국정을 발표하고 황제에 올랐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의 지위도 올라가 같은 해 10월 12일 고종의 황제 즉위에 따라 그녀 역시 황후에 책봉되어 명성황후가 되었으며, 장례도 국장으로 다시 치러져 지금의 청량리동에 안치되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이장됐다.
1919
[명성황후, 명성태황후로 추존]
고종이 붕어한 뒤 태황제 시호가 올려지자, 명성황후에게도 '태' 자가 부여되어 '명성태황후'로 추존되었다. 이는 황제와 황후에게만 부여되는 후호였다.
1919년 고종이 붕어한 뒤, 고종에게 태황제(太皇帝)라는 시호가 올려지자 그 정후인 명성황후에게도 ‘태’(太) 자라는 황제와 황후에게만 부여되는 후호(后號)가 올려져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