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하비 오스월드
연표
1939
[리 하비 오스월드 출생]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나기 두 달 전 부친이 사망하여 독신 모친 슬하에서 자랐다.
리 하비 오스월드는 1939년 10월 18일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부친 로버트 E. 리 오스월드는 오스월드 출생 두 달 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모친 마게리트 클라베리 오스월드는 2명의 어린 아들과 3번째 자식(오스월드)을 임신한 채 독신 모친이 되었다.
1944
[모친의 재혼과 이주]
모친이 공학 기사 에드윈 A. 에크달과 재혼하며 텍사스주 포트워스로 이주했다. 에크달은 오스월드 형제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했다.
1944년 오스월드의 모친 마게리트 클라베리 오스월드는 공학 기사 에드윈 A. 에크달과 재혼하였다. 그녀와 자식들은 포트워스로 이주하였다. 에크달은 리 하비 오스월드 형제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했으며, 그는 리 하비 오스월드가 여태까지 알았던 단 하나의 부친이었다.
1945
1945년, 두 명의 연상 오스월드 형제는 사관학교로 보내졌다. 에크달은 비즈니스로 여러 곳을 돌아다녀 리 하비 오스월드를 홀로 그의 모친과 남겨두었다.
1952
[유스 하우스 입소]
학교 공무원들이 무단 결석으로 인해 오스월드를 뉴욕의 유스 하우스로 보냈다. 여기서 그는 사회적으로 부적응되어 정신 의학 간호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1952년, 학교 공무원들은 오스월드의 무단 결석 문제로 그를 뉴욕의 유스 하우스로 보냈다. 유스 하우스의 초기 사정 보고서에 따르면 오스월드는 물러나 사회적으로 부적응되어 집안에서 제대로 돌보아지지 않아 정신 의학의 간호가 필요한 상태였다.
1955
[해병대 입대 시도]
16세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해병대에 입대하려 했으나 나이 미달로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 기간 동안 해병대 안내서를 읽으며 입대를 준비했다.
16세의 나이에 오스월드는 학교를 그만두고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기를 원했으나 아직도 너무 어렸다. 그는 자신이 17세였다고 진술한 모친으로부터 잘못된 선서 진술서를 얻었으나 그것은 통과되지 않아 오스월드는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자신이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신의 형으로부터 받은 "해병대 안내서"를 신중하게 읽었다.
1956
[미국 해병대 입대]
17세의 나이에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3년간의 임무 기간을 계약했다. 샌디에이고에서 신병 훈련을 받고, 레이다 및 항공 감시 훈련을 받았다.
1956년 10월 24일, 17세의 나이에 오스월드는 해병대에 입대하는 데 결국 나이가 적당하였다. 그는 3년간 임무 기간을 위하여 계약을 맺어 신병 훈련소를 위하여 샌디에이고에 있는 세컨드 트레이닝 대부대로 배속되었고, 그러고나서 고등 보병 전투 훈련을 위하여 캠프펜들턴으로 보내졌다. 그는 또한 레이다, 항공 감시와 비행 전자 공학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1957
[일본 요코스카시 배속 및 군사 권력과의 마찰]
레이다 기사로서 일본 도쿄 근처 요코스카시로 배속되었다. 레이다와 라디오 정보로 항공을 지도하고 해외 항공 스카우팅을 담당했다. 군사 권력과 두 번의 위기를 겪고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오스월드는 레이다 기사로서 일하는 데 처음에 일본 도쿄 근처에 있는 요코스카시로 배속되었다. 그의 직업은 레이다와 라디오 정보에 의하여 자신들의 목표물들로 항공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들어오는 해외 항공을 위한 스카우팅을 위하여 책임이 있었다. 오스월드는 고독한 인물로 자신의 해병대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것으로 숙고되었다. 그는 또한 군사 권력과 위기를 맞기도 하여 두번이나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첫 사건에 오스월드는 .22 - 직경 권총을 매입하여 총과 가지고 노는 동안 자신의 왼쪽 팔에 상처를 입었다. 그는 등록되지 않은 무기를 가지면서 고소되었고 50 달러의 벌금과 20일간 중노동 선고는 물론 1등병에서 졸병으로 강등되었다. 두번째 사건은 비번의 기술 상사와 말싸움에서 자신이 신성 모독을 이용할 때 몇달후에 일어났다. 자신이 야마토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 오스월드는 상사에 잘못으로 술을 엎질렀다. 이 일은 오스월드가 상관에 무례한 짓을 한 동안 언쟁으로 이끌었다. 이 두번째 위반 행위로 그는 55 달러의 벌금을 물고, 군사 교도소에서 징역 28일을 선고받았다.
1959
오스월드는 자신의 모친을 돌보는 데 곤란 제대를 신청하여 3달 일찍이 자신의 군사 경력을 끝냈다.
[소련 망명 및 시민권 신청]
해병대를 떠난 후 유럽을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 소련 시민권을 신청했으나 거부되었다. 하지만 민스크에서 아파트와 라디오, 텔레비전 공장 직업을 받았다.
자신의 3년간 임무 기간을 끝낸 후, 오스월드는 활동하지 않은 예비로서 3년 더의 세월을 보내는 데 기대되었다. 그는 좋은 이유 없이 이 시간 동안 멀리 여행을 떠나면 안 되어 스위스에 있는 자유주의적 예술 대학으로 신청하였다. 그는 신청서에 거짓말을 하였고 받아졌다. 이 일은 여권을 위하여 신청하는 데 그를 허용하였다. 해병대를 떠난 오스월드는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결국적으로 모스크바에서 끝났다. 그는 공공적으로 반미 진술문을 만들고 소련 시민권을 신청하였다. 소련 정부는 오스월드를 신임하지 않았고, 그에게 시민권을 부인하였다. 하지만 그는 민스크에서 아파트와 벨라루스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공장에서 직업이 주어졌다.
1961
[미국 귀국 희망]
소련 생활이 자신의 공산주의 이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리처드 스나이더에게 연락하여 미국으로 귀국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1년 약간 동안 오스월드는 소련에서 생활이 자신의 공산주의 이상적인 목표들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961년 2월 그는 다시 리처드 스나이더에게 연락하여 미국으로 귀국하는 데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였다.
한달 후에 오스월드는 노동 조합 사교회에서 자신의 훗날의 부인 마리나 프루사코바를 만났다. 프루사코바는 민스크에서 자신 소유에 살던 19세의 약학 학생이었다.
그들이 만난지 1달 후에 오스월드는 혼인 신청하여 부부는 4월 30일에 결혼하였다.
1962
몇달 후에 젋은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왔다. 오스월드는 텍사스주 포트워스에 정착하였다.
1962년 2월 15일 그들의 딸 준 리 오스월드가 태어났다. 몇달 후에 젋은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왔다.
1963
1963년 3월 오스월드는 통신 판매로부터 망원경의 전망과 함께 이탈리아산 6.5-직경 만리허-카르카노 라이플총을 매입하는 데 잘못된 신분증명서를 이용하였다.
[뉴올리언스 이주 및 정치 활동]
저격 시도에 대한 조사를 피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뉴올리언스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친쿠바적 기구 '쿠바 위원회를 위한 페어플레이' 지점을 시작하며 정치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그러고나서 저격으로 들어가는 더욱 나가서의 조사들을 피하려고 자신의 가족을 뉴올리언스로 이주시켰다. 오스월드는 뉴올리언스에서 하일리 커피 회사를 위하여 일하였고, 다시 정치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와 쿠바 사이에 자유 무역과 향상된 외교 관계들을 위하여 주장한 친쿠바적 기구 "쿠바 위원회를 위한 페어플레이"(FPCC)의 뉴올리언스 지점을 시작하였다. 오스월드는 친쿠바주의자로서 공공적으로 자신을 설립하는 데 시도하였다.
[에드윈 A. 워커 장군 저격 시도]
매입한 라이플총으로 댈러스의 퇴직한 에드윈 A. 워커 장군을 쏘려고 시도했으나 목표물을 놓치고 도주했다.
한달 후 4월 10일 오스월드는 이 라이플총을 댈러스의 퇴직한 에드윈 A. 워커 장군을 쏘는 시도하는 데 이용하였다. 오스월드는 자신의 목표물을 놓쳤고, 눈에 띄지 않게 달아났다. 그는 그러고나서 저격으로 들어가는 더욱 나가서의 조사들을 피하려고 자신의 가족을 뉴올리언스로 이주시켰다.
9월 그는 멕시코시티로 홀로 여행을 떠나 쿠바와 소련 양국의 시민권을 신청하였다. 양국 정부가 그를 거부할 때 오스월드는 댈러스로 자신의 가족을 도로 이주시켰다.
[댈러스 재이주 및 텍사스 교과서 보관서 취업]
쿠바와 소련 시민권 신청이 거부되자 가족과 함께 댈러스로 돌아왔고, 텍사스 교과서 보관서에서 시간당 1.25달러를 받는 직업을 얻었다.
양국 정부가 그를 거부할 때 오스월드는 댈러스로 자신의 가족을 도로 이주시켰다. 텍사스주에 도착에 오스월드는 이름 "O. H. 리"의 이름을 가장하였다. 면식은 그를 텍사스 교과서 보관서에서 직업을 얻는 도움을 주어 한 시간당 $1.25를 벌었다.
며칠 후, 10월 20일 오스월드의 둘째 딸 오드리 마리나 레이첼 오스월드가 태어났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및 체포]
자신이 일하던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 창문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저격해 살해하고, 이후 검문을 시도한 경찰관 J. D. 티핏도 쏘아 죽인 후 체포되었다.
1963년 11월 22일, 오스월드는 자신의 라이플총을 종이에 싸고, 자신이 일하는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에 가져갔다. 그날 오후 존 F. 케네디 대통령 부부와 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 부부가 댈러스에서 카퍼레이드를 했고, 딜리 플라자를 경유, 오후 12시 30분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를 지나갔다. 이때 건물의 6층 창문으로부터 총탄이 날아와 케네디 대통령을 살해하고 코널리 주지사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 오스월드는 건물에서 달아나 자신의 저택을 향하여 나아갔다. 1시간 후, 댈러스의 경찰관 J. D. 티핏이 오스월드의 저택 근처에서 검문을 시도하였고, 오스월드는 그를 쏘아 죽였다. 그후, 어제 컵 텍사스 극장 근처로 달아나 2시 경에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암살 및 살인 혐의 기소]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경찰관 J. D. 티핏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경찰 심문에서 자신의 연루를 부인했다.
11월 23일 그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경찰관 티핏을 살인한 혐의로 함께 기소되었다. 감금되어 있는 동안 오스월드는 경찰의 심문을 받았고 암살 사건에서 자신의 연루를 부인하였다. 그는 이어진 날 자신도 살해되었기 때문에 완전하게 자신의 행동 혹은 자극을 전혀 설명할 수 없었다.
[잭 루비에게 암살]
경찰서에서 카운티 감옥으로 옮겨지던 중 나이트클럽 주인 잭 루비에게 총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케네디 암살의 동기나 배후에 대한 설명은 영원히 불분명하게 남았다.
11월 24일 지하 주차장을 통하여 경찰서로부터 카운티 감옥으로 옮겨지는 동안 오스월드는 나이트클럽의 주인 잭 루비에 의하여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루비는 1964년 2월 17일 제 1 급 모살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이틀 후에 그의 유죄 판결은 번복되었다. 새로운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루비는 1967년 1월 3일 암으로 사망하였다.
1991
할리우드 영화 감독 올리버 스톤은 그 주제에 다시 한번 토론을 발화한 《JFK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1992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인재 폭로 법령 통과]
케네디 암살 사건의 논쟁 결과로 미국 의회는 이 사건과 관련된 수천 건의 문서들을 공개하는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인재 폭로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 논쟁의 결과로서 미국 의회는 이 경우들로 관련된 수천의 문서들을 제외한 1992년의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인재 폭로 법령을 통과시켰다.
1999
[오스월드 관련 KGB 문서 공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오스월드에 대한 일부 KGB 문서를 미국에 넘겨주며 케네디 암살 사건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공개되었다.
1999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도 오스월드에 제외된 어떤 KGB 문서들을 미국에 주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