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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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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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 일기, 국보, 세계기록유산, 전쟁 기록 + 카테고리

• 조선 최고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간 직접 기록한 생생한 전쟁 일지. • 국보 제76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인류의 귀중한 기록유산. • 전쟁의 참혹함과 이순신의 고뇌 그리고 당시 시대상이 오롯이 담겨 있어 역사 연구에 필수적인 사료. • 전장 한복판에서 피어난 문학적 통찰과 감동이 대중의 흥미를 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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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592

[난중일기 집필 시작]

조선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시작과 함께 전장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꼼꼼히 기록하며 훗날 '난중일기'라 불리게 될 일지의 첫 장을 열었습니다.

그의 생생한 기록은 훗날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귀중한 사료가 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 총 2,539일간의 군중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대한 기록입니다.

[유성룡의 병법서에 감탄하다]

이순신 장군은 오랜 친구 류성룡(당시 좌의정)으로부터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선물 받고 "수륙전과 화공법에 대한 전술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는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라며 극찬했습니다.

이는 전쟁을 앞둔 이순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1593

[원균에 대한 비판 시작]

난중일기 곳곳에 등장하는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날카로운 비판이 시작됩니다.

진도 지휘선이 왜적에 포위된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한 경상수사 원균의 부하들을 비난하며, 원균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갈등은 훗날 조선 수군의 운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이순신은 원균에 대해 "음험하고 흉악한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의논에서 원 수사가 하는 말은 매번 모순이다. 참 가소롭다" 등의 비난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죽은 왜적의 수급을 거두려 적진을 드나드는 군관에 대한 원균의 태도, 거짓 장계를 올리거나 탈영병을 숨겨주는 행태, 명나라 불화살 독점 시도, 전투 약속을 어기는 무책임한 행동 등을 일일이 기록하며 원균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냈습니다.

[진주성 함락에 바다 위에서 통한의 밤을 보내다]

진주성 함락 소식에 이순신 장군은 큰 충격과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는 일기에 "이 날 밤은 바다의 달이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색을 이루었고,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었다.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고 적어 처절한 고뇌를 드러냈습니다.

이는 역사 속 가장 비극적인 순간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7월 2일 김득룡으로부터 진주성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도 애써 부정했으나, 7월 6일 광양으로부터의 보고로 함락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후 7월 9일에는 광양과 순천까지 왜병에게 함락되었다는 비보가 이어졌습니다. '칼의 노래' 작가 김훈은 이 문장을 "죽이는 문장"이라 극찬하며 이순신의 객관적이면서도 강력한 문체에 감탄했습니다.

1594

[권율에 대한 실망감 표출]

이순신 장군은 전윤으로부터 "수군을 거창으로 잡아왔는데 원수 권율이 방해한다"는 전언을 듣고 "예전부터 남의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랬으니 한탄해 뭐하겠는가"라고 적으며 권율에 대한 강한 비판과 실망감을 드러냈습니다.

1594년 6월에는 권율의 서출 처남이 사적인 감정으로 광양현감을 무고하고 문책하는 일에 대해 이순신은 "사사로이 행한 것이 이리 심하니 통탄을 비길 데 없다"고 평했습니다. 을미년(1595년) 일기에서도 권율의 초안을 보고 "근거도 없이 망령되게 고한 말이 몹시 많으니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라며, 원수의 임무를 맡아 행하는 게 괴이하다고 평했습니다.

[류몽인 비판과 진회 언급]

암행어사 류몽인이 탐관오리들을 비호하고 포상을 요청한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 장군은 "나라의 위급한 난리를 생각도 않고 남쪽 지방의 억울하다는 변명만 믿고 있다"며, 중국 송나라의 간신 진회에 비유하는 등 강도 높게 비난했습니다.

정의를 중시했던 이순신의 면모가 드러납니다.

1595

[김응서에 대한 격렬한 비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사사로이 교섭하여 탄핵받던 김응서에 대해 이순신 장군은 "김응서라는 자는 어떤 자인데 스스로 개선하고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쓸개가 있는 자라면 자결이라도 할 것이다"라고 일기에 적으며 강한 불만을 표했습니다.

이는 훗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직을 내놓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1597

[칠천량 해전의 비극과 조선 수군의 궤멸]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거제 앞바다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에게 청천벽력 같았을 것입니다.

이는 조선 수군 역사상 가장 뼈아픈 패배로 기록됩니다.

[명량해전의 압도적 승리와 적장 마다시의 최후]

단 12척의 배로 울돌목에서 300여 척의 일본 함대와 맞서 31척을 격파하며 압도적인 대승을 거둔 명량해전의 감격적인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항왜 준사의 증언으로 적장 마다시(구루시마 미치후사 추정)의 시신을 확인하고, 사기를 꺾기 위해 그 시신을 토막 내어 적 앞에 보인 섬뜩한 전술까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날의 일기는 난중일기 중 가장 긴 분량을 자랑합니다.

1598

[난중일기 마지막 기록]

조국의 운명을 건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하기 이틀 전,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으로 난중일기를 채워 넣었습니다.

7년에 걸친 그의 피와 땀, 고뇌와 승리가 담긴 기록은 여기서 끝이 나지만, 그의 불멸의 정신은 영원히 역사에 남게 됩니다.

1788

[정조대왕, 이충무공전서 편찬 명하다]

정조대왕은 "우리 나라를 재건하게 한 큰 은혜를 길이 생각하고 충무공 이순신의 공업을 표창하고자 한다"며, 이순신의 사적을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고 활자로 인쇄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 작업으로 난중일기는 초서에서 정자체로 정리됩니다.

1795

['난중일기' 공식 명칭 탄생]

조선 정조 19년에 왕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서 이순신의 전쟁 일지에 '난중일기'라는 제목이 처음으로 붙여졌습니다.

이전에는 연도별로 '임진일기', '계사일기' 등으로 불렸습니다.

이 명칭은 오늘날까지 이순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35

['난중일기초' 최초 간행]

경성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이순신 친필 원본과 정조대에 정리된 전서본의 내용을 합쳐 '난중일기초'를 간행했습니다.

이는 후대 연구자들이 '난중일기'를 연구하는 데 가장 대표적인 전범으로 평가받는 완벽에 가까운 편집본으로, 그 가치가 높습니다.

1953

[최초의 한국어 번역본 공개]

동아일보 기자 출신 언론인 설의식이 수도문화사에서 '이순신 수록 난중일기'를 간행하며, '난중일기'의 가장 오래된 한국어 번역본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는 일반 대중이 이순신의 기록을 접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1962

[난중일기,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다]

이순신의 전쟁 기록 '난중일기'는 서간첩, 임진장초와 함께 대한민국 국보 제76호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은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967

[난중일기 도난 사건 발생]

현충사에 보관 중이던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도난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국가적 보물인 난중일기의 도난은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빠른 회수를 위한 노력이 집중되었습니다.

1968

[도난 난중일기 10일 만에 극적 회수]

1967년 12월 31일 도난당했던 난중일기가 사건 발생 10일 만에 부산에서 극적으로 회수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난중일기 원본의 열람이 금지되고 영인본이 제작되어 전국에 배포되는 등 보존 대책이 강화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영인본 5백 부가 제작되어 전국 공공도서관 및 박물관으로 보내졌으며, 원본은 열람 자체가 금지되었습니다.

2004

[난중일기, 디지털 시대에 재탄생하다]

문화재에 대한 디지털 정보화 사업의 일환으로 '난중일기' 원문과 원본 사진이 국가기록유산에 게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일반 대중이 보다 쉽게 '난중일기' 원본을 접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2005

['난중일기 완역본',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다]

난중일기 원문 해독을 맡았던 노승석 연구자가 기존 번역본의 오류 10여 곳을 수정하고, 자신이 발견한 오류를 반영한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을 출간했습니다.

이는 '난중일기' 연구의 정확성을 높이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2010

[국보 명칭, 이순신 난중일기로 변경]

대한민국 국보 제76호의 명칭이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에서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로 공식 변경되었습니다.

이는 문화재 명칭의 현대적이고 명확한 표현을 위한 조치였습니다.

2013

[난중일기, 세계기록유산 등재 쾌거]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광주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는 '난중일기'가 한국을 넘어 인류 전체의 소중한 기록유산임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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