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왕자는 신라를 삼키기로 했다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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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리즈는 역사적 팩트를 웹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된 정사 기반)
📢 등장 인물: 김유신, 김춘추, 보희(김유신의 첫째 누이), 문희(김유신의 둘째 누이)

이곳은 김유신의 본가.
나른한 오후 햇살이 드는 안채 마루.
보희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부채질을 해대고 있었다.
“어우. 남사스러워서 원. 내가 살다 살다 그런 해괴망측한 꿈은 처음 꾼다.”
맞은편에서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문희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슨 꿈인데 그래?”
“글쎄. 내가 서형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볼일을 보는데….”
보희가 주위를 슬쩍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어찌나 콸콸 쏟아지든지 서라벌 시내가 온통 물바다가 되지 뭐니? 아이고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어떻게 그런 꿈을….”
보희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찰나.
찰랑.
문희가 든 잔 속의 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형산 꼭대기에서… 서라벌을 잠기게 했다고?’
문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거… 그냥 개꿈이 아니야.’
자신의 기운으로 온 나라를 뒤덮는다는 것.
한 나라의 국모가 되어 천하를 품을 태몽이자 길몽이었다.
문희의 시선이 언니의 옷자락으로 향했다.
소심하고 걱정 많은 언니는 이 꿈을 감당할 그릇이 못 된다.
그렇다면.
“언니.”
“응?”
“그 꿈 나한테 팔아.”
“뭐? 꿈을 사겠다고?”
“응. 그냥은 안 가져갈게.”
문희가 입고 있던 비단 치마를 가리켰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은 치마는 그녀가 가장 아끼는 옷이었다.
“이거 줄게. 어때?”
보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찝찝한 꿈을 넘기고 귀한 비단 치마를 얻는다니 밑질 것 없는 장사였다.
“그래, 너 가져가.”
“고마워.”
문희는 치마를 벗어 건네고 허공을 향해 마치 무형의 무언가를 쓸어 담는 시늉을 했다.
옷깃을 여미는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 이 운명은 내 꺼야.’
***
그날 저녁.
김유신은 집으로 돌아와 김춘추를 사랑채로 안내했다.
바지가 찢어져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김춘추의 얼굴에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사랑채에서 나온 김유신은 안채 문을 열며 나직이 불렀다.
“보희야, 손님이 오셨다. 바느질 채비를 좀 해다오.”
하지만 방 안에서는 곤란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어머 오라버니! 지금 제 몰골이 말이 아니에요. 거기다 낯선 사내 앞에서 밤에…….”
김유신은 미간을 좁혔다.
밥상을 차려줘도 숟가락을 들지 못하는 소심함이라니.
그가 짧게 혀를 차고 있을 때.
드르륵.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분 냄새가 끼쳐 왔다.
문희였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곱게 바른 연지.
마치 귀한 손님이 올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사람처럼 준비된 모습이었다.
“언니가 몸이 안 좋은가 봐요.”
문희가 김유신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차분했지만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제가 모실게요. 귀한 손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죠.”
김유신은 잠시 말을 멈추고 문희를 응시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눈치챈 거다.
지금 사랑채에 있는 사내가 불청객이 아니라 자신들이 잡아야 할 동아줄이라는 것을.
김유신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부탁한다, 문희야”
짧은 대답.
하지만 그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염려 마세요.”
문희가 바느질함을 챙겨 들고 사랑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여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김유신은 직감했다.
오늘 밤 저 문이 닫히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고.
***

사랑채 안.
김춘추는 찢어진 옷자락을 부여잡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찬 바람이 들어와 맨살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김유신랑은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그때 문이 스르르 열렸다.
“실례합니다 공자님.”
달빛을 등지고 들어선 한 여인.
단아한 곡선의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옷자락이 고와 보였다.
“오라버니께서 급한 전갈을 받으셔서 나가셨어요. 옷은 제가 기워드릴게요.”
“아…….”
김춘추는 당황하여 입술을 달싹였다.
처음 보는 여인에게 그것도 이렇게 민망한 부위가 찢어진 옷을 맡겨야 하다니.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저 그냥 제가 대충 묶어서 가도 되는데…….”
“움직이지 마세요.”
문희가 김춘추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앉았다.
훅 하고 끼쳐 오는 향긋한 분 냄새.
김춘추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헤맸다.
“바늘에 찔려요.”
문희의 하얀 손이 김춘추의 허벅지 안쪽 찢어진 옷자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바느질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살이 닿을 수밖에 없는 상황.
사각 사각.
고요한 방 안에는 바늘이 천을 통과하는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문희가 고개를 숙이자 가녀린 목덜미가 김춘추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옷감 너머로 따스한 체온이 전해졌다.
움찔.
문희의 손등이 김춘추의 맨살을 스쳤다.
“흡….”
김춘추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문희의 손이 멈췄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춘추를 올려다보았다.
“불편하세요?”
그녀의 눈동자가 호롱불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순간 김춘추는 숨 쉬는 것도 잊었다.
왕따 취급을 받던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고도 은밀한 시선.
“아니오….”
춘추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문희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한 뼘 더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는 이제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웠다.
문희가 나직이 속삭였다.
“소문과는 다르시네요.”
“……?”
“소문엔 공자님이 유약하고 소심한 분이라 들었습니다.”
문희의 시선이 춘추의 떨리는 눈동자에 닿았다가 천천히 입술로 내려왔다.
“제 눈엔… 이리도 듬직한 사내이신걸요.”
쿵. 춘추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하던 자신을 듬직하다고 말해주는 여인.
그 한마디가 뜨겁게 김춘추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공자님.”
“……듣고 있소.”
“바느질은 진작 끝났는데….”
문희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그녀는 수줍은 얼굴로 대담한 고백을 했다.
“이상하게 물러나기 싫어요.”
김춘추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상황을 피해야 한다는 이성은 이미 녹아 없어진 지 오래였다.
김춘추의 손이 홀린 듯 움직였다.
떨리는 손끝이 조심스럽게 문희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문 밖 그림자 너머 김유신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 만족스러워하며 등을 돌렸다.
남녀의 정이 통했으니 일이 수월하게 풀릴 터.
김유신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유난히 붉은 밤이었다.
🔍팩트 체크
1. 언니의 꿈을 비단 치마로 산 동생 (매몽 설화)
기록: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 편
내용: 어느 날 언니 보희가 서형산(선도산)에서 오줌을 누는데, 그 양이 어찌나 많은지 서라벌 장안이 온통 물에 잠기는 꿈을 꿉니다.
거래: 보희는 이를 부끄러워했으나, 동생 문희는 이것이 길몽임을 직감하고 비단 치마를 주어 그 꿈을 샀습니다. 이는 훗날 문희가 왕비가 될 운명을 샀음을 암시합니다.
2. 고의로 옷을 찢고 동생을 투입하다
기록: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삼국유사
내용: 김유신은 김춘추와 축국(공차기)을 하다가 일부러(고의로)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찢었습니다. 그리고 "집이 가까우니 꿰매주겠다"며 그를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선수 교체: 유신은 처음에 언니 보희에게 바느질을 시키려 했으나, 보희는 부끄러워하며 거절했습니다. 결국 동생 문희가 나서서 옷을 기워주었고, 이를 계기로 눈이 맞았습니다.
더 자세한 김유신의 일대기가 궁금하다면 여기서 확인해보세요.
뜨거웠던 그날 밤, 신라의 역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으로 <망국의 왕자는 신라를 삼키기로 했다> 시즌 1의 막을 내립니다.
지금까지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