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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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김창익
음악가, 드러머, 작곡가, 기업인 드러머 밴드 멤버
한국 록 음악의 전설적인 밴드 '산울림'의 든든한 리듬을 책임졌던 막내, 김창익. 그는 형들과 함께 무대를 누비며 한국 대중음악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전성기 이후 평범한 직장인과 캐나다의 사업가로서 새로운 삶을 개척했던 그는, 궂은일을 자처하며 직원을 배려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며 많은 이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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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58

[록의 전설, 그 막내의 탄생]

서울 흑석동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훗날 한국 록 음악계의 전설이 될 형제들과 함께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음악적 토양을 다져나갔습니다.
아버지 김재혁과 어머니 장은성 사이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큰형은 훗날 산울림의 리더가 되는 싱어송라이터 겸 배우 김창완, 둘째 형은 베이시스트이자 훗날 기업가로 활동하는 김창훈입니다.

1977

[공학도의 길을 걷다]

학업 성적이 뛰어났던 그는 명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 속에서도 묵묵히 기계공학도로서의 학업을 병행하며 바쁜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77학번으로 입학했습니다. 형제들 모두 명문대에 진학할 만큼 뛰어난 학업 성취도를 보였으며, 그 역시 본분을 다하는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가요계에 울려 퍼진 메아리]

마침내 삼형제로 구성된 록 밴드가 세상에 첫 선을 보였습니다. 독창적인 사운드와 파격적인 음악성으로 단숨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가요계의 판도를 바꿨습니다.
포크 록 밴드 '산울림'의 데뷔 앨범 1집이 발매되며 타이틀곡 '아니 벌써'로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는 밴드의 든든한 드러머로서 대한민국 그룹사운드 시대의 문을 여는 선구자적 역할을 완벽히 소화했습니다.

1978

[사이키델릭 록의 정점]

밴드의 음악적 실험정신이 극에 달한 정규 앨범을 발표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의 독특하고 역동적인 드럼 연주가 앨범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주도했습니다.
한국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반으로 꼽히는 산울림 3집 앨범이 발매되었습니다. 이 앨범은 산울림 1기 활동의 최고 정점을 장식하는 작품으로 이후 록 음악계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979

[작곡가로서의 첫걸음]

밴드의 네 번째 정규 앨범에 직접 작곡한 곡을 수록하며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재능을 처음으로 드러냈습니다. 단순한 연주자를 넘어 밴드의 창작에 직접적으로 기여하기 시작했습니다.
4집 앨범 수록곡인 '풋내기들의 합창'을 작곡하여 발표했습니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는 둘째 형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팬들과 기록은 그의 소중한 자작곡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섬세한 노랫말을 쓰다]

연이어 발표된 앨범에서는 작사가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보여주었습니다. 서정적인 단어들로 구성된 노랫말은 형제들의 멜로디와 어우러져 곡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산울림 5집 앨범 수록곡인 '백자'의 가사를 직접 썼습니다. 드러머석에서 묵묵히 리듬을 타던 그의 내면에 숨겨진 따뜻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80

[군악대에서의 음악적 도약]

둘째 형과 함께 동반 입대하여 육군 군악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 매일같이 악기를 다루며 그의 연주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일취월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함께 복무했던 형 김창훈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동생의 드럼 실력이 무섭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정작 형 본인은 실력이 정체되었다고 느껴, 동생이 군악대 대신 문선대로 갔어야 했다고 농담조로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동생들의 빈자리와 6집]

막내와 둘째가 군 복무로 자리를 비운 사이, 큰형이 외부 세션과 함께 밴드의 새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묵직한 드럼 소리가 빠진 앨범은 기존과 다른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산울림 6집이 발매되었으나, 군 복무 중이던 그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큰형 김창완은 '고장난 우주선'이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꾸려 동생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서정적 발라드 위주의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82

[형들과 함께 맞춘 하모니]

제대 후 다시 뭉친 밴드의 여덟 번째 앨범에서 형들과 함께 목소리를 맞춰 노래를 불렀습니다. 드럼 스틱을 잠시 내려놓고 보컬리스트로서 앨범에 온기를 불어넣은 뜻깊은 작업이었습니다.
산울림 8집 수록곡 '돌아오려무나'에 삼형제가 공동 가창으로 참여했습니다. 평소 묵묵히 연주에만 매진하던 그가 마이크를 잡고 형제들과 입을 맞췄다는 점에서 팬들에게 매우 특별한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1983

[다시 한번 빛난 창작열]

아홉 번째 정규 앨범에서 또다시 작사와 작곡을 도맡은 곡을 수록하며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증명했습니다. 이 앨범은 그가 전업 음악가로서 전력을 다한 산울림 1기 체제의 마지막 앨범이 되었습니다.
9집 앨범 수록곡인 '길엔 사람도 많네'를 작사하고 작곡했습니다. 저작권협회에는 큰형 명의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밴드 내에서 그의 탁월한 창작 기여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곡입니다.

[직장인으로의 새로운 출발]

전업 음악가의 길을 잠시 내려놓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평범한 회사원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무대를 떠나 직장 생활에 전념하면서 밴드의 활동 체제에도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대학 시절의 기계공학 전공을 살려 대우자동차에 정식으로 입사했습니다. 수많은 인기를 누리던 록 밴드의 멤버에서 성실한 기업인으로 변신한 그의 뚝심을 볼 수 있는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

1984

[큰형의 홀로서기]

회사 업무로 바빠진 그와 타 회사에 입사한 둘째 형으로 인해, 밴드는 사실상 큰형의 1인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화려한 연예계를 떠난 그는 묵묵히 직장인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이 시기 발매된 산울림 10집부터 12집까지는 큰형 김창완 홀로 앨범 작업을 주도하게 됩니다. 동생들은 각자의 생업 현장에서 치열한 삶을 개척해 나가며 잠시 음악 전면 활동에서 물러나 있었습니다.

1985

[늦깎이 학사모를 쓰다]

밴드 데뷔와 활발한 음악 활동, 그리고 군 복무 등으로 미뤄졌던 학업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대기업에 입사한 이후에도 틈틈이 남은 과정을 이수하며 끈기 있게 대학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학사 학위를 공식적으로 취득했습니다. 데뷔 연도인 1977년에 입학한 후 약 8년 만에 학사모를 쓰며, 자신이 맡은 바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우직함을 보여주었습니다.

1997

[14년 만에 다시 뭉친 삼형제]

오랜 시간 각자의 삶을 살던 삼형제가 마침내 밴드 이름 아래 다시 모여 정규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묵혀두었던 각자의 원숙해진 연주력이 시너지를 내며 올드 팬들의 향수를 강렬하게 자극했습니다.
산울림 13집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가 발매되며 3형제가 14년 만에 온전한 밴드로 재결합했습니다. 이는 음악을 잊지 않았던 그의 녹슬지 않은 기량을 증명하는 앨범이자 산울림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되었습니다.

[국가적 위기 속 새로운 결단]

오랜 기간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 삶의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국가적인 경제 위기와 맞물려 그는 타국으로의 이주라는 쉽지 않은 과감한 도전을 결심했습니다.
IMF 외환위기가 닥치던 무렵, 오랜 기간 성실히 근무했던 대우자동차를 최종적으로 퇴사했습니다. 이후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 가족의 더 나은 미래와 형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이민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1998

[밴쿠버에서의 제2의 인생]

가족들과 함께 낯선 이국땅으로 완전히 이주하며 새 삶의 터전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번듯한 대기업의 명함을 뒤로한 채 오직 자녀의 교육과 형제를 돕기 위해 내린 숭고한 결단이었습니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밴쿠버로 성공적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들의 영어 교육 목적이었으며, 동시에 둘째 형 김창훈의 사업체를 대신 운영해주기 위한 헌신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유통업체의 경영자가 되다]

형이 타국에 일구어 놓은 회사의 실질적인 운영자가 되어 사업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을 살뜰히 챙기고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으로 낯선 분야의 사업을 안정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밴쿠버에 위치한 한 식품 도매업체의 이사로 취임하여 본격적인 경영자로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미국 회사로 스카우트된 둘째 형의 빈자리를 완벽히 채우며 기계공학도 출신의 탁월한 사업 수완과 형제간의 끈끈한 우애를 증명했습니다.

2007

[꺼지지 않은 록 스피릿]

밴드 데뷔 30주년을 맞이하여 형제들과 다시 한번 의기투합해 새로운 정규 앨범 발매를 논의했습니다. 비록 타국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가슴속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한순간도 식지 않았습니다.
13집 발매 이후 10년이 흐른 시점, 형제들은 산울림 14집 앨범 준비를 위해 재결성을 공식적으로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음악 팬들이 전설의 화려한 귀환을 숨죽여 기다리던 가슴 벅찬 시기였습니다.

2008

[직원을 아낀 따뜻한 배려]

사업장 일대에 극심한 폭설이 내리자, 행여나 직원들이 다칠까 염려하여 본인이 직접 중장비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타지에서 동고동락하는 이들을 가족처럼 아끼는 그의 헌신적인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 행동이었습니다.
밴쿠버 현지에 전례 없는 눈이 쏟아져 야외 제설 및 물류 작업이 극도로 위험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직원들에게 궂은일을 시키지 않고 솔선수범하여 직접 경사진 빙판길에서 지게차를 몰기 시작했습니다.

[멈춰버린 심장, 영원한 안식]

빙판길에서 작업하던 중 끔찍한 미끄러짐 사고가 발생했고, 심각한 부상을 입어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허망한 이별에 가족은 물론 고국의 수많은 팬들이 비통함에 잠겼습니다.
현지 시간 오후 2시 30분경, 경사길에서 중심을 잃은 지게차에 깔리는 치명적인 불의의 사고를 당했습니다. 긴급히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과다 출혈로 인해 결국 향년 49세의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전설의 마침표와 추모가]

막내의 비극적인 비보를 접한 큰형은 더 이상 밴드의 존재 이유가 사라졌음을 눈물로 선언했습니다. 위대한 삼형제 밴드가 역사 속으로 퇴장하는 동시에 남은 이들은 음악으로 그를 영원히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창완은 동생의 장례 직후 "막내의 죽음과 함께 산울림도 끝났다"며 그룹의 공식 해체를 선언했습니다. 이후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여 동생을 향한 애끓는 그리움을 담은 EP 앨범 'The Happiest'를 발매하며 추모 공연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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