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환국

조선 역사, 정치적 변동, 국왕의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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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29- 16:5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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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 정치적 변동, 국왕의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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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발생한 갑술환국은 숙종의 강력한 왕권 강화 의지와 변덕스러운 정국 운영이 정점에 달했던 조선 후기 최대의 정치적 격변입니다.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 정권의 독주에 피로감을 느낀 숙종은 서인의 폐비 복위 운동을 계기로 정권을 통째로 서인에게 넘기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인의 영수 민암이 처형되고 인현왕후가 극적으로 복위되었으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장희빈은 다시 빈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남인 세력이 중앙 정계에서 영구적으로 밀려나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어 치열하게 대립하는 조선 후기 붕당 정치의 새로운 막을 올린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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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

[기사환국과 남인의 집권]

숙종이 후궁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반대한 서인 세력을 대거 축출하고 남인을 등용했습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중진들이 실각하면서 정권의 주도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이는 훗날 갑술환국이 일어나게 되는 정치적 원인인 남인 독주 체제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서인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원자 책봉이 시기상조라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숙종은 이를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서인의 거두였던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산림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남인은 이 기회를 통해 조정의 요직을 독점하며 강력한 정권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현왕후의 폐위와 축출]

숙종은 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여 서민으로 강등시키고 궁 밖으로 내쫓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깊어지면서 왕실 내의 세력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결과였습니다. 인현왕후의 폐위는 서인들에게 남인 정권에 대항할 명분을 제공하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인현왕후는 폐위되는 날 가마 대신 일반 서민들이 타는 교자를 타고 쓸쓸히 궁을 떠나 안국동 사가로 물러났습니다.
도성 백성들 사이에서는 폐비 민씨의 덕망을 기리고 장희빈을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서인 세력은 이때부터 인현왕후의 복위를 목표로 결속하며 반전을 꾀하는 비밀 조직적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의 사사]

유배 중이던 송시열이 정읍에서 국왕이 내린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며 서인 세력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남인 정권의 강력한 압박으로 집행된 이 처결은 당파 간의 감정의 골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만들었습니다. 송시열의 죽음은 서인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송시열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예를 지킬 것을 당부하며 의연한 자세로 사약을 마셨습니다.
남인들은 그의 학문적 권위까지 부정하며 서인의 뿌리를 뽑으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서인의 결속력을 높이는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훗날 갑술환국 이후 송시열의 명예가 복구되면서 그는 다시 서인의 성인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1690

[장희빈의 왕비 책봉]

후궁이었던 희빈 장씨가 폐비 민씨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정식 왕비로 책봉되는 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중인 역관 가문 출신의 여인이 국모의 자리에 오르는 파격적인 신분 상승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로써 남인 세력은 왕비의 외척으로서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는 금군별장이 되어 군사권까지 장악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남인들은 장씨의 왕비 책봉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인 세력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더욱 높였습니다.
그러나 장희빈의 지나친 투기와 장씨 일가의 오만함은 숙종이 서서히 실망감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1693

[숙빈 최씨에 대한 총애 시작]

무수리 출신이었던 최씨가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후궁으로 발탁되면서 궁궐 내부의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최씨는 폐비 민씨의 안녕을 빌던 인물로 서인 세력과 심리적 유대감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등장은 장희빈의 독주를 견제하는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습니다.

최씨는 인현왕후의 탄신일에 그녀를 위해 기도하다가 숙종을 만났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숙종은 소박하고 겸손한 최씨에게 깊은 신뢰를 보냈으며, 이는 장희빈에 대한 총애가 식어가던 시점과 맞물렸습니다.
숙빈 최씨는 서인 인사들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궁 내부의 소식을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1694

[김춘택의 폐비 복위 운동]

서인 강경파인 김춘택을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인현왕후의 복위를 위한 여론 형성과 자금 모집에 착수했습니다. 이들은 민간에 인현왕후의 덕망을 알리는 글을 퍼뜨리며 남인 정권의 부당함을 공격했습니다. 목숨을 건 서인들의 조직적인 반격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김춘택은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손자로 서인의 재기를 위해 자신의 가산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숙종의 마음이 장희빈에게서 떠났음을 간파하고 복위 상소를 올릴 시기를 치밀하게 조율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남인 세력에게 큰 위협이 되었으며 남인들은 이를 역모로 몰아 소탕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남인의 서인 소탕 계획 수립]

서인들의 복위 운동을 감지한 남인의 영수 민암 등이 이들을 대역죄로 몰아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민암은 서인들이 왕실을 비방하고 역모를 꾀하고 있다며 숙종에게 강력한 처벌을 요청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정권을 방어하기 위한 남인들의 최후의 승부수였습니다.

민암은 의금부와 포도청을 동원하여 복위 운동 가담자들을 즉각 체포할 수 있는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당시 조정의 대다수 관직을 남인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이번에도 승리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숙종은 남인들의 과격한 탄압이 자신의 왕권을 오히려 제약한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함이완의 남인 역모 고발]

남인 세력과 내통하던 함이완이 오히려 민암 등이 서인을 모함하여 거짓 옥사를 꾸미고 있다고 숙종에게 전격 고발했습니다. 남인들이 숙빈 최씨를 해치려 한다는 충격적인 보고는 숙종의 분노를 유발하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 고발로 인해 사건의 주도권은 남인에서 국왕에게로 넘어갔습니다.

함이완은 원래 남인 편이었으나 정세의 변화를 읽고 서인 김춘택 측과 공모하여 선제 고발을 감행했습니다.
그는 민암이 국왕의 여자인 최씨를 위협하고 조정을 혼란에 빠뜨리려 한다고 폭로했습니다.
숙종은 이 보고를 받고 즉각 민암 등 남인 대신들을 소환하여 진상을 문초하기 시작했습니다.

[숙종의 한밤중 환국 선포]

숙종이 깊은 밤 비망기를 내려 남인 대신들을 전원 파직하고 서인들을 대거 복귀시키는 전격적인 정권 교체를 명령했습니다. 남인들의 보고서를 기각하고 그들을 오히려 간신으로 규정하며 정국의 중심을 서인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예상을 뒤엎은 국왕의 기습적인 결정에 남인 정권은 단 하룻밤 만에 와해되었습니다.

숙종은 "민암 등이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당파 싸움에만 몰두했다"며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대궐 문이 굳게 닫히고 도성 내 남인 핵심 인사들의 자택이 가택 수색되었습니다.
조선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정권 교체로 기록되는 갑술환국의 정점이었습니다.

[민암의 체포와 하옥]

남인 정권의 실권자였던 우의정 민암이 환국 선포 직후 의금부 도사들에 의해 전격 체포되어 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서인 탄압을 주도한 혐의와 국왕의 뜻을 어지럽힌 죄목으로 엄중한 문초를 받게 되었습니다. 정승의 지위에서 대역죄인으로 전락한 민암의 몰락은 남인 세력의 종말을 상징했습니다.

민암은 체포되는 순간까지도 숙종의 변심을 믿지 못하고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의 하옥 소식에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서인 지지자들은 정의가 회복되었다며 환호했습니다.
숙종은 민암에 대해 관용 없는 처벌을 예고하며 남인 세력에 대한 철저한 숙청 의지를 보였습니다.

[남구만의 영의정 발탁]

서인의 온건파 영수인 남구만이 정계로 화려하게 복귀하며 조선의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임명되었습니다. 남구만은 환국 이후의 혼란스러운 조정을 안정시키고 행정 체계를 재정비하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이는 서인 중에서도 합리적인 성향의 소론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음을 의미했습니다.

남구만은 유배지에서 돌아오자마자 숙종을 알현하고 민생 안정과 당쟁 종식을 건의했습니다.
좌의정에는 유상운, 우의정에는 윤지완 등 소론 인사들이 대거 배치되어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소론 중심의 인사는 훗날 강경파 노론과의 갈등을 야기하는 불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남인 핵심 인사들의 대거 유배]

목내선, 김덕원 등 남인 정권에서 요직을 거쳤던 대신들이 전원 파직되고 도성 밖 먼 곳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정계의 핵심 인력들이 한꺼번에 축출되면서 남인은 정치적 재기가 불가능한 수준의 타격을 입었습니다. 서인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며 조정의 색깔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유배 길에 오른 남인 관료들은 성난 군중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씁쓸하게 퇴장했습니다.
숙종은 남인들의 가산 일부를 몰수하고 그들의 관작을 모두 삭탈하는 강경한 조치를 이어갔습니다.
이로써 조선 조정에서 남인의 목소리는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서인 관료들의 복직과 신원]

기사환국 당시 억울하게 관직을 잃고 유배를 떠났던 서인 관료 수백 명이 사면되고 원래의 관직을 되찾았습니다. 죽은 인사들의 경우 관작이 복구되고 후손들이 등용되는 등 대대적인 명예 회복 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서인 정권의 정당성이 국가 차원에서 공인된 시기였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중앙 행정 기관인 육조와 승정원의 실무진들이 대거 교체되었습니다.
복귀한 서인들은 남인들에 대한 강력한 보복 수사를 촉구하며 세를 과시했습니다.
조정은 이제 다시 서인들만의 리그로 재편되어 당파 간의 복수전이 전개될 조짐을 보였습니다.

[인현왕후의 감고당 이주]

안국동 사가에 머물던 폐비 민씨가 궁궐 입구의 별궁인 감고당으로 거처를 옮기며 공식적인 복위 절차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숙종은 그녀를 다시 왕비의 예로 대우하라는 전교를 내려 복위 의사를 대내외에 분명히 했습니다. 민씨를 지지하던 백성들은 가마 주위에 모여들어 눈물로 환영했습니다.

숙종은 감고당으로 내관을 보내 음식을 하사하고 그녀의 건강을 직접 챙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장희빈 일가는 이 이주 소식에 경악하며 필사적인 방해 공작을 폈으나 대세를 꺾지 못했습니다.
감고당 앞은 그녀의 복위를 축하하는 유생들의 상소와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장희재의 제주도 유배 집행]

장희빈의 오빠이자 군사 권력의 핵심이었던 장희재가 포박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인들을 죽이려 모의하고 궁중 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받았습니다. 장씨 가문의 세도가 완전히 꺾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장희재는 압송되는 과정에서 분노한 도성 백성들에게 돌팔매질과 욕설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는 제주도 유배지에서도 끝내 목숨을 보존하려 했으나 훗날 무고의 옥 때 압송되어 처형됩니다.
오빠의 몰락 소식을 접한 중전 장씨는 궁 내부에서 극심한 고립감과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남인 영수 민암의 처형]

남인 정권을 이끌며 서인 탄압에 앞장섰던 민암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업고 국정을 어지럽힌 죄에 대한 준엄한 응징이었습니다. 민암의 죽음으로 갑술환국의 유혈 숙청은 일단락되었으며 남인은 권력의 중심에서 영구히 축출되었습니다.

민암은 형장에서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행위가 국왕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처형 소식에 서인 지지자들은 '하늘의 도리가 바로 섰다'며 대대적인 축하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이후 남인들은 지방의 야인으로 남게 되었으며 조선의 권력 중심축은 완전히 서인으로 이동했습니다.

[송시열의 관작 복구와 추증]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 지 5년 만에 송시열의 명예가 공식적으로 회복되고 영의정 직함이 추증되었습니다. 숙종은 그의 충심을 인정하는 글을 내리고 그의 위패를 서원에 모시도록 허락했습니다. 서인의 학문적 정통성과 정치적 승리가 선언된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숙종은 송시열에게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저작물을 국가 차원에서 간행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억울함이 풀린 것을 기리며 전국에 추모비를 세우고 학풍을 계승했습니다.
송시열의 복권은 남인 정권이 행한 모든 처결이 잘못되었음을 공식화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인현왕후의 중전 공식 복위]

폐위되었던 인현왕후 민씨가 정식으로 중전의 자리에 복귀하여 화려하게 대궐로 들어왔습니다. 숙종은 직접 궁 밖까지 마중을 나가 그녀를 맞이하며 지난날의 과오를 씻어냈습니다. 무너졌던 왕실의 기강이 바로 서고 서인 정권의 정당성이 확립된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인현왕후의 환궁 날 도성의 길거리는 그녀를 보려는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녀는 예전보다 더욱 공고해진 지위와 백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내명부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숙종은 그녀의 복위를 축하하는 의미로 대사면령을 내리고 전국에 경사를 선포했습니다.

[장희빈의 빈 신분 강등]

인현왕후의 복위와 동시에 중전이었던 장씨는 다시 후궁의 신분인 '희빈'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녀의 처소는 중궁전에서 취선당으로 옮겨졌으며 모든 왕비의 권한을 박탈당했습니다. 화려했던 권력의 꿈이 물거품이 된 장희빈의 처절한 몰락이었습니다.

장희빈은 강등 명령에 거세게 항의하며 숙종의 처소 앞에서 통곡했으나 마음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아들인 세자는 다행히 지위를 유지했으나 어머니의 실세로 인해 불안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장희빈은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등 비극적인 행보를 걷게 됩니다.

[노론과 소론의 갈등 점화]

공동의 적이었던 남인이 축출되자 서인 내부에서 남인 처벌 수위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온건한 처벌을 주장하는 소론과 남인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노론의 대립은 정국을 다시 안갯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훗날 조선 정치를 마비시킨 당쟁의 제2막이 열린 셈이었습니다.

소론 영의정 남구만은 불필요한 살상을 피하려 했으나 노론의 김춘택 등은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숙종은 이 두 세력의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왕권을 더욱 공고히 다지는 정치를 펼쳤습니다.
이 갈등은 세자(경종)의 보호 문제와 결부되어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연잉군(영조)의 탄생]

환국의 일등 공신 중 하나인 숙빈 최씨가 숙종의 차남인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출산했습니다. 이 왕자의 탄생은 서인 세력에게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대신할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습니다. 왕실의 후계 구도를 둘러싼 갈등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숙종은 연잉군의 탄생을 크게 기뻐하며 숙빈 최씨의 지위를 더욱 높여주었습니다.
서인 강경파는 연잉군을 장차 세자로 옹립하려는 은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경종과 영조로 이어지는 치열한 왕위 계승 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1695

[장희재 처벌 논쟁의 심화]

유배 중인 장희재를 즉각 처형해야 한다는 노론의 상소가 빗발쳤으나 소론과 숙종은 세자의 체면을 고려해 이를 반려했습니다. 이 문제는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운명을 건 한판 대결로 확산되었습니다. 당파 간의 원한이 깊어지면서 조정은 매일같이 격렬한 토론과 정쟁에 휩싸였습니다.

노론은 장희재를 살려두는 것이 장차 큰 화근이 될 것이라며 숙종을 압박했습니다.
반면 소론은 세자의 어머니인 장희빈의 오빠를 죽이는 것은 불효를 조장하는 것이라 맞섰습니다.
숙종은 이 논쟁을 통해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며 자신의 결정권을 강화했습니다.

1696

[남인 세력의 중앙 정계 퇴출]

갑술환국 이후 2년이 지난 시점에서 남인은 중앙 권력 구조에서 완벽하게 배제되어 소수파로 전락했습니다. 대부분의 남인 가문은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거나 야인으로 지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정치는 이제 서인 내부의 노론과 소론 간의 대결로 압축되었습니다.

남인들은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학문적 정통성을 지키려 노력했으나 정치적 힘은 상실했습니다.
이후 정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남인은 정권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야당 세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들은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돌파구를 찾는 긍정적 효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1701

[인현왕후 민씨의 승하]

복위 후 지병으로 고생하던 인현왕후가 35세의 나이로 창경궁 경춘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갑술환국으로 이룬 서인 중심 정국의 안정을 흔드는 큰 슬픔이었습니다. 인현왕후를 기리는 백성들의 통곡은 온 나라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도 장희빈의 음모를 경계하라는 유언을 숙종에게 남겼습니다.
숙종은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며 국장 절차를 가장 예우에 맞게 진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녀의 승하는 곧바로 장희빈에 대한 마지막 심판인 '무고의 옥'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무고의 옥 발생]

장희빈이 취선당 서쪽 구석에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게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었습니다. 숙빈 최씨의 고발로 시작된 이 옥사는 장희빈의 최후를 결정짓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숙종은 분노하여 장씨 일가와 가담자들을 대대적으로 국문했습니다.

조사 결과 신당에서 인현왕후를 형상화한 인형과 흉물들이 발견되어 증거로 제출되었습니다.
장희빈 측은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했으나 나인들의 자백으로 인해 범행이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원한을 넘어 왕실을 뒤흔든 대역죄로 간주되었습니다.

[장희빈의 사사와 비극적 종말]

숙종은 세자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국법을 바로세운다는 명분으로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습니다. 한때 국모의 자리에 올랐던 여인이 저주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로써 갑술환국 이후 지속되었던 장씨 가문과의 악연이 피의 결말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장희빈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숙종은 냉정히 거절했습니다.
그녀의 처형과 함께 오빠 장희재도 압송되어 처형되었으며 장씨 가문은 멸문지화에 가까운 화를 입었습니다.
장희빈의 죽음은 조선 후기 왕실 잔혹사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후궁의 왕비 승격 금지령]

장희빈의 사례와 같은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 숙종은 앞으로 후궁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법으로 영원히 금지했습니다. 이는 여인들의 암투가 정쟁으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려는 고육책이었습니다. 조선 왕실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중요한 제도적 결단이었습니다.

이 법령으로 인해 훗날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도 더 이상의 신분 상승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숙종은 권력에 눈먼 후궁들이 세자를 위협하거나 왕실을 어지럽히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이 금령은 조선 말기까지 지켜지며 왕실 계승과 부인들의 지위 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720

[숙종의 승하와 환국 시대 종료]

46년의 긴 통치 기간 동안 세 번의 환국을 주도하며 왕권을 강화했던 숙종이 승하했습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변덕스럽고 강력했던 환국 정치의 시대도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숙종은 환국을 통해 신하들의 힘을 억누르고 절대적인 왕권을 확립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잦은 정권 교체로 인해 신하들 간의 원한과 살육이 반복되는 비극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세자였던 경종이 즉위하며 다시 한번 정국의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1721

[신임사화와 서인 내부의 혈전]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주도권을 잡고 노론을 역모로 몰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신임사화가 일어났습니다. 갑술환국 때 잉태된 서인 내부의 노소론 갈등이 피의 보복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노론의 핵심 4대신이 처형되는 등 조정은 다시 한번 피바람에 휩싸였습니다.

경종의 대리청정 문제와 연잉군(영조)의 세제 책봉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폭발한 결과였습니다.
수많은 노론 인사들이 사약을 받거나 유배를 떠나며 정권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파 싸움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 되었습니다.

1724

[영조의 즉위와 탕평책의 서막]

경종이 승하하고 연잉군이었던 영조가 조선의 제21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갑술환국 이후 이어진 극단적인 당쟁의 폐해를 지적하며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선포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환국의 정치를 끝내려는 위대한 도전의 시작이었습니다.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았으나 즉위 후에는 소론도 포용하려 노력하며 세력 균형을 꾀했습니다.
그는 당쟁이 국가의 근간을 해친다고 판단하여 서원을 철폐하는 등 강력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갑술환국으로 뿌리내린 당파 간의 깊은 원한을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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