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환국

조선 역사, 정치 사건, 영조 시대, 환국, 붕당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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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29- 16: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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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환국은 조선 영조 3년(1727년)에 단행된 대규모 정권 교체 사건으로,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운영을 막고 소론을 중용하여 국왕 주도의 탕평 정국을 실현하고자 한 중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영조는 즉위 초 을사처분을 통해 노론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노론이 권력을 독점하며 소론을 완전히 말살하려 들자 이를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이에 영조는 하루아침에 노론 대신들을 축출하고 소론 온건파를 대거 기용함으로써 붕당 간의 균형을 맞추고 국왕의 통치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후기 당쟁의 과열을 억제하고 영조 대 전성기를 이끄는 탕평책의 실질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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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

[영조의 즉위와 탕평 의지]

경종의 뒤를 이어 영조가 즉위하며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탕평책을 통치 이념으로 선포했습니다. 국왕은 어느 한쪽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인사를 약속하며 조정의 화합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였습니다.

영조는 즉위 교서에서 붕당을 만드는 자는 소인이고 붕당이 없는 자는 군자라며 당쟁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당시 조정은 경종 대의 신임사화를 두고 노론과 소론이 서로를 역적으로 몰아세우는 극한의 대립 국면에 있었습니다.
국왕의 탕평 선언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상대 당파를 완전히 멸절시키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김일경과 목호룡의 처단]

신임사화를 주도했던 소론 강경파 김일경과 밀고자 목호룡이 영조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했던 인물들을 제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주도하려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소론의 기세는 크게 꺾이고 노론의 복수심은 불타올랐습니다.

김일경은 영조가 연잉군 시절 세제 자리에 오르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며 대립했던 소론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목호룡은 노론 사대신이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고변을 통해 신임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이들의 처형은 경종 시대의 정국을 부정하고 영조 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정치적 조치였습니다.

1725

[노론 독주 체제의 형성]

을사처분 이후 노론이 조정의 요직을 독점하며 소론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이어갔습니다. 영조는 당초 균형 있는 인사를 원했으나 노론의 강력한 압박에 밀려 소론 인물들을 제거하는 데 동의해야 했습니다. 이는 국왕이 꿈꾸던 탕평 정국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습니다.

노론은 신임사화의 원한을 갚기 위해 소론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왕을 끊임없이 압박했습니다.
조정 내에서 소론의 목소리는 사라졌으며 모든 정책 결정은 노론의 의도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조는 노론이 국왕의 권위까지 넘보며 당파적 이익만을 앞세우는 모습에 조금씩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민진원의 영수 부상]

노론의 영수인 민진원이 좌의정에 오르며 정국의 실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현왕후의 오빠라는 가문적 배경과 노론 내의 확고한 지위를 바탕으로 국왕에게도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민진원의 부상은 노론 정권의 공고화를 상징했습니다.

민진원은 소론에 대한 일말의 자비도 허용하지 않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며 정국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영조의 탕평 정책이 역적과 충신을 구분하지 않는 실책이라며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민진원의 지나치게 강한 권력은 오히려 영조가 노론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을사처분의 단행]

영조가 신임사화 때 죽음을 당한 노론 사대신의 관작을 복구하고 명예를 회복시키는 을사처분을 내렸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소론 정권이 붕괴하고 노론이 다시 정국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국왕은 일단 노론의 손을 들어주며 정국의 안정을 꾀했습니다.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 사대신은 충신으로 추앙받으며 사후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반면 신임사화에 관여했던 소론 인물들은 대거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을사처분은 영조 즉위 초반 노론의 압도적인 우위를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사건이었습니다.

1726

[소론 유봉휘의 유배]

소론의 원로인 유봉휘가 노론의 집요한 탄핵 끝에 유배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경종 대에 영조의 세제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전력이 있어 노론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영조는 어쩔 수 없이 유봉휘의 처벌을 승인하며 노론의 기세를 살려주었습니다.

유봉휘는 소론 내에서도 온건한 인물로 꼽혔으나 노론에게는 제거해야 할 정적일 뿐이었습니다.
유배 길에 오른 유봉휘는 훗날 정미환국이 일어나기 직전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노론이 조정에서 소론의 씨를 말리려 한다는 위기감을 소론 진영에 심어주었습니다.

[노론의 신임사화 복수 심화]

노론이 신임사화의 가해자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가혹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왕을 괴롭혔습니다. 영조는 이미 처벌이 충분하다며 거부했으나 노론은 상소문을 쏟아내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국왕은 이러한 노론의 고집이 탕평 정국을 방해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노론은 죽은 소론 인물들의 무덤을 파헤치거나 남은 가족들까지 처벌해야 한다는 과격한 요구를 했습니다.
영조는 이러한 행위가 인륜에 어긋나며 국정의 안정을 해친다고 판단하여 여러 차례 제동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노론 대신들은 국왕의 명령보다 당파의 의리를 우선시하며 명령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영조의 노론 독주 경계]

영조가 노론의 영수 민진원을 파직하며 그들의 독주에 처음으로 경고를 보냈습니다. 이는 국왕이 특정 붕당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신호였습니다. 하지만 노론은 이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하며 금세 전열을 가다듬었습니다.

영조는 민진원이 지나치게 당파적인 이익만을 앞세워 조정을 분열시킨다고 꾸짖었습니다.
잠시 민진원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노론의 기세를 꺾고 소론에게 숨통을 틔워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노론의 뿌리는 깊었으며 민진원은 곧 다시 복귀하여 소론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습니다.

1727

[소론 온건파 탕평 내각 구성]

이광좌를 중심으로 한 소론 온건파와 일부 노론 온건파가 참여하는 탕평 내각이 구성되었습니다. 영조는 특정 당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양측의 온건파를 조화시키려 했습니다. 이를 통해 극단적인 당쟁을 억제하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꾀했습니다.

내각은 신임사화의 처벌 수위를 낮추고 화합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론과 소론의 뿌리 깊은 불신은 해결해야 할 난제로 남아있었습니다.
영조는 탕평 내각을 통해 자신의 친정 체제를 강화하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 데 집중했습니다.

[노론 강경파의 대거 유배]

환국 이후 정국을 어지럽혔던 노론 강경파 인물들이 줄줄이 유배지로 보내졌습니다. 영조는 이들이 남아 있는 한 조화로운 정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조정에서 노론의 기세는 완전히 꺾이고 소론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배된 인물들은 신임사화의 복수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빈자리는 소론뿐만 아니라 당파색이 옅은 실무 관료들로 채워지기도 했습니다.
영조는 유배 처분을 통해 노론에게 국왕의 뜻에 거스르면 누구든 처벌받을 수 있음을 각인시켰습니다.

[신임사화 처분의 재조정]

소론 정권이 들어서면서 신임사화 당시 처벌받았던 소론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노론 사대신의 공적은 인정하되 그들을 죽게 한 소론의 행위를 반역으로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는 양측의 명분을 절충하려는 영조의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습니다.

영조는 노론도 옳고 소론도 옳다는 식의 '쌍시쌍비' 논리를 펼쳐 갈등을 봉합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절충안은 양측 강경파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미환국 이후 정국은 이전의 살벌한 피바람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탕평비 건립의 기반 마련]

영조는 정미환국을 통해 탕평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하고 이를 영구히 기념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훗날 세워질 탕평비의 정신이 이 시기에 확립되었습니다.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이 국가의 근간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영조는 성균관 입구에 탕평의 의미를 담은 글을 새겨 유생들에게 교육하게 했습니다.
정미환국을 통해 소론을 끌어들인 것은 탕평이 말뿐인 구호가 아님을 보여준 증거였습니다.
국왕은 신하들이 당파의 이익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도록 끊임없이 훈계했습니다.

[정미환국 이후 민심의 안정]

조정의 당쟁이 잦아들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졌던 민심도 차츰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백성들은 정치적 숙청보다 민생 대책에 집중하는 정부의 모습을 환영했습니다. 영조는 환국 이후 대동법 확대 등 민생 정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끊임없는 환국과 숙청은 지방 관아의 행정력 약화와 백성들의 고통을 초래했습니다.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한 이후 당분간 대규모 옥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안정된 정치 기반 위에서 영조는 균역법 등 후대의 위대한 업적들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정미환국의 전격 단행]

영조가 노론 대신들을 일거에 파직하고 소론을 대거 등용하는 전격적인 환국 전교를 내렸습니다. 조정의 핵심 권력이 하룻밤 사이에 노론에서 소론으로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당쟁사에서 가장 극적인 정권 교체 중 하나로 꼽힙니다.

영조는 노론의 강경한 태도가 왕권을 위협하고 탕평을 저해한다고 판단하여 전격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사전 예고 없이 진행된 인사는 노론 세력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습니다.
이로써 영조 즉위 이후 지속되던 노론의 전성시대는 3년 만에 종언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노론 영수 민진원의 파직]

환국의 시작과 함께 노론의 실권자였던 민진원이 모든 관직에서 파직되어 문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영조는 그가 조정을 시끄럽게 만들고 당파를 조성한 주범이라고 지목했습니다. 민진원의 몰락은 노론 정권의 붕괴를 상징했습니다.

영조는 민진원이 국왕의 화합 권고를 무시하고 오직 복수만을 일삼았다고 강력히 질타했습니다.
민진원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낙향해야 했으며 그의 추종자들도 줄줄이 파직되었습니다.
그의 빈자리는 곧 소론의 온건파 인물들로 채워지며 정국의 분위기가 급변했습니다.

[정호의 관직 박탈과 축출]

노론의 또 다른 영수인 영의정 정호가 관직을 잃고 조정에서 축출되었습니다. 그는 노론 내에서도 가장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소론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습니다. 정호의 실각으로 소론은 마침내 복수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정호는 신임사화의 가해자들을 처단하지 않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영조는 정호의 고집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며 그를 즉각 파직하고 도성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노론 사대신의 명예 회복을 주도했던 정호의 실각은 노론 강경파의 몰락을 의미했습니다.

[소론 영수 이광좌의 복귀]

환국과 동시에 소론의 영수였던 이광좌가 영의정에 임명되며 화려하게 정계로 복귀했습니다. 그는 을사처분 이후 은거하며 노론의 공격을 견뎌왔던 인물이었습니다. 이광좌의 복귀는 소론 정권의 재출범을 대내외에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광좌는 소론 온건파를 이끄는 인물로 영조의 탕평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뜻을 밝혔습니다.
영조는 이광좌를 통해 노론과 소론의 갈등을 중재하고 안정적인 정국을 운영하려 했습니다.
소론 당원들은 이광좌의 영의정 취임을 열렬히 환영하며 정권 탈환의 기쁨을 나눴습니다.

[조태구의 사후 명예 회복]

노론에 의해 역적으로 몰렸던 소론의 거두 조태구가 사후에 관작이 복구되고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경종 대에 노론과 맞섰던 소론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의 복권은 정미환국이 단순한 인사 교체를 넘어 가치관의 전환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조태구는 세제 시절의 영조를 압박했다는 이유로 노론으로부터 극심한 증오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환국 이후 조태구에 대한 처벌이 지나쳤음을 인정하고 그의 직첩을 돌려주었습니다.
이는 소론 가문의 자부심을 되살려주고 그들을 탕평 정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유화책이었습니다.

[유봉휘의 복권과 추모]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던 유봉휘가 정미환국을 통해 정식으로 복권되었습니다. 영조는 유봉휘가 끝내 국왕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며 신원을 명했습니다. 이는 소론 온건파들에게 보내는 국왕의 사과이자 신뢰의 표시였습니다.

유봉휘의 복권은 그를 탄핵했던 노론 세력에 대한 정면 비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다시 명문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했고 후손들은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론은 유봉휘의 복권을 통해 그간의 설움을 씻어내고 새로운 정권의 중심에 섰습니다.

[영조의 친정 체제 강화]

환국 이후 영조는 대신들에게 의존하던 습관을 버리고 국정 전반을 직접 챙기는 친정 체제를 굳건히 했습니다. 특정 붕당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정국을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왕권은 즉위 이후 가장 강력한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국왕은 매일같이 대신들과 토론하며 정책의 타당성을 직접 검토했습니다.
붕당의 영수들이 마음대로 인사를 결정하던 관행을 타파하고 국왕이 인사권을 독점했습니다.
정미환국은 영조가 진정한 일인 만기(一人萬機)의 통치자로 거듭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728

[무신란의 발생과 정치적 영향]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만족하지 못한 소론 강경파와 남인 세력이 무신란을 일으켰습니다. 정미환국은 결과적으로 이인좌의 난이라는 비극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영조는 이를 진압하며 탕평의 필요성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반란군은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소론 강경파의 복수를 외쳤습니다.
정미환국으로 온건파가 집권하자 소외된 강경파들이 무력 행동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무신란 이후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다시 섞어 쓰는 더욱 정교한 탕평책을 구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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