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고구려)

성곽, 고대 도시, 고구려 수도, 역사적 장소,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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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29- 15:3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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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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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은 고구려 후기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동북아시아 최강의 요새였습니다. 초기에는 대성산성과 안학궁 체제였으나, 6세기 이후 나성(外城)을 갖춘 거대한 '장안성(長안城)' 체제로 발전하며 근대 이전 한국 성곽 건축의 전형을 제시했습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파상공세를 수차례 막아낸 승리의 기록부터, 신성과 연남산의 배신으로 성문이 열리던 비극적인 함락의 순간까지 고구려의 흥망성쇠가 이 성벽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고려의 서경, 조선의 평양으로 이어지며 한반도 북방을 지키는 핵심 거점으로서 그 위상을 유지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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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낙랑군 축출과 평양 점유]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평양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합니다. 이로써 한반도 내 중국 군현 세력이 일소되고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낙랑군의 중심지였던 평양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고구려는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단순한 부족 연맹체를 넘어 중앙집권적 국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경제적 기틀이 되었습니다.
평양은 이때부터 고구려의 제2의 중심지이자 남방 진출을 위한 전초 기지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343

[고국원왕의 평양 천도]

전연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자 고국원왕이 임시로 평양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이는 고구려 국왕이 공식적으로 평양에 머물기 시작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됩니다.

북방 전연과의 전쟁에서 입은 타격을 회복하고 왕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동황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현재의 평양 낙랑구역 일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시기 평양은 환도성을 대신하여 국가의 행정 기능을 일부 수행하며 수도로서의 가능성을 시험받았습니다.

371

[백제 근초고왕의 평양 공격]

백제의 근초고왕이 3만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고구려 역사상 국왕이 전장에서 전사한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평양성의 방어력이 백제의 강력한 공세를 막아내기에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국왕의 전사로 인해 고구려는 큰 충격에 빠졌으며 백제와의 오랜 적대 관계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소수림왕은 국가 체제를 정비하며 평양 지역의 방어 시설을 대대적으로 보강하게 됩니다.

392

[광개토대왕의 9사 창건]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창건하며 도시의 위상을 높이고 민심을 결집합니다. 이는 평양이 단순한 군사 기지를 넘어 불교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음을 의미합니다.

불교를 통해 백성들의 정신적 통합을 꾀하고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찰 건립과 함께 평양의 도시 구획이 정리되고 인구가 유입되면서 경제적 번영의 기초가 닦였습니다.
당시 평양은 고구려의 남방 지배를 상징하는 문화적 거점으로서 화려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427

[장수왕의 평양 천도 결행]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전격 이전하며 대륙 중심에서 한반도 중심으로 정책을 전환합니다. 이 사건은 고구려 전성기를 구가하게 만든 신의 한 수로 평가받습니다.

평양으로의 천도는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포석이었습니다.
대성산성과 안학궁을 중심으로 한 산성과 평지성의 결합된 수도 체제가 이때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약 240여 년 동안 평양은 고구려의 정궁이자 제국 통치의 심장부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475

[백제 한성 함락의 모태]

평양을 기지로 삼은 고구려군이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사살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합니다. 평양은 고구려 남진 정책의 거대한 병참 기지로서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장수왕은 평양에서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하여 백제의 수도를 단숨에 함락시키는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승리로 고구려는 아차산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한반도 중부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평양의 풍부한 물자와 인력은 고구려군이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552

[장안성 축조의 시작]

양원왕 시기에 현재의 평양 시내를 아우르는 거대한 평지성인 '장안성'을 새로 쌓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대성산성 체계에서 벗어나 도심 전체를 성벽으로 두르는 혁신적인 시도였습니다.

대외 관계의 변화와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더 넓고 견고한 방어 체계가 필요했습니다.
외성, 중성, 내성, 북성의 4개 구역으로 나뉘는 독특한 다중 성벽 구조가 계획되었습니다.
이 공사는 고구려의 국력을 총동원하여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초대형 국가 프로젝트였습니다.

559

[평양성 성벽 개축 기록]

평양성의 노후된 성벽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방어 시설을 보강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는 장안성 건설과 병행하여 기존 방어 체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북방 유목 민족과 남방 신라의 위협이 거세지던 시기에 수도 방어력을 극대화하려는 조치였습니다.
개축 과정에서 치(雉)와 옹성 등 선진적인 성곽 수비 시설들이 추가로 설치되었습니다.
고구려 장병들의 노고와 건설 기술이 집약되어 평양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거듭났습니다.

566

[성벽 각석 기록의 등재]

평양성 성벽 돌에 공사 책임자와 날짜를 새긴 '평양성 유경성벽 각석'이 기록됩니다. 이는 당시 고구려의 정교한 실명제 공사 시스템과 성곽 건설 기록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각석에는 '소형(小兄)' 직책의 인물이 공사를 감독했음이 명시되어 있어 관직 체계 연구에도 도움을 줍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여러 각석들은 평양성이 구간별로 엄격한 품질 관리 하에 지어졌음을 증명합니다.
이는 고구려가 국가 차원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수도 방어망을 구축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586

[평원왕의 장안성 천도]

오랜 건설 기간을 거쳐 완성된 장안성(새 평양성)으로 고구려 왕실이 공식 이전합니다. 평원왕은 이곳에서 수나라와의 거대한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대성산성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산과 강을 이용한 천혜의 평지성 요새로 거점을 옮긴 것입니다.
장안성은 평양 시가지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나성 구조로 동북아 도성 건축의 새로운 표준이 되었습니다.
이때 확립된 도성의 골격은 천년 후 조선 시대 평양성의 기초가 될 만큼 견고하고 합리적이었습니다.

598

[수 문제의 1차 침공 방어]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평양 근처에도 오지 못한 채 무너집니다. 평양성의 군사들은 장기전을 대비하며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술로 대응했습니다.

수나라 수군은 평양으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괴멸되었으며 육군은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자멸했습니다.
고구려는 평양의 강력한 방어망을 믿고 청야 전술을 구사하여 적의 예기를 꺾었습니다.
이 승리로 평양성은 중국 대륙의 통일 왕조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신성한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612

[수 양제의 대규모 수군 침공]

수나라 양제가 보낸 내호아의 수군이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 하구까지 진격합니다. 평양성 외곽에서 벌어진 치열한 교전 끝에 고구려군은 적을 유인하여 섬멸하는 승리를 거둡니다.

수나라 수군은 평양성 내성이 비어 있는 줄 알고 성급하게 입성하려다 매복에 걸려 패퇴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는 평양성의 복잡한 골목과 건물 구조를 방어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수군의 패배는 결국 별동대 30만 명의 보급을 끊어 살수대첩의 서막을 여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수나라 별동대의 평양 포위]

수나라 우중문과 우문술이 이끄는 30만 5천 명의 별동대가 평양성 동북쪽 30리 지점까지 육박합니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운명을 건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며 긴장감에 휩싸입니다.

을지문덕 장군이 적진에 들어가 항복하는 척하며 적의 피로도를 확인하는 기만 전술을 폈습니다.
평양성벽 위에서는 고구려군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적의 공성 시도를 무력화했습니다.
지친 적군에게 을지문덕이 보낸 오언시는 평양성의 승리를 예감하게 하는 역사적인 문장이 되었습니다.

[살수대첩과 평양의 환희]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던 수나라 별동대가 살수에서 궤멸당합니다. 평양성은 국가 절멸의 위기에서 벗어나 승리의 함성으로 가득 찼으며 수나라의 멸망을 촉발했습니다.

단 2,700명만이 살아 돌아갈 정도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 평양의 평화를 지켜냈습니다.
이후 수 양제는 세 차례 더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평양성의 문턱도 넘지 못한 채 반란으로 몰락했습니다.
평양성은 동아시아 패권 전쟁에서 고구려의 승리를 상징하는 영광스러운 요새가 되었습니다.

642

[연개소문의 평양 궁정 정변]

연개소문이 평양성에서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 정변으로 고구려는 대당 강경 노선으로 급격히 선회하게 되며 평양성은 군사 긴장 상태에 돌입합니다.

평양성 안에서 벌어진 피의 숙청은 고구려 지배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연개소문은 막리지에 올라 평양성을 요새화하고 당나라와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이후 평양은 고구려 저항의 중심지이자 연개소문의 철권 통치가 이루어지는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645

[당 태종의 1차 침공과 평양]

당 태종이 이끄는 수십만 대군이 요동 방어선을 뚫고 진격해오자 평양성은 비상사태를 선포합니다. 하지만 안시성의 영웅적인 항전 덕분에 평양성은 직접적인 공격을 면하게 됩니다.

연개소문은 평양성에서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요동 방어선을 지원하기 위한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안시성에서 당 태종이 패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양의 백성들은 큰 기쁨에 잠겼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 고구려는 수도 평양의 방어력을 재점검하고 장기적인 대치 국면에 들어갔습니다.

661

[소정방의 평양성 포위 공격]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끄는 대군이 바닷길을 건너와 평양성을 직접 포위합니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 벌어진 이 위기 속에서 평양은 고구려 저항의 최후 보루가 되었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평양성벽을 수차례 공략했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과 성벽의 견고함 앞에 고전했습니다.
연개소문은 성 밖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적의 보급로를 위협하고 사기를 꺾었습니다.
결국 기록적인 한파와 식량 부족으로 당나라 군대는 평양성 함락을 포기하고 퇴각했습니다.

662

[사수 전투의 대승]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당나라 방효태의 군대를 사수 근처에서 연개소문이 섬멸합니다. 평양성을 위협하던 마지막 적군이 사라지며 고구려는 다시 한번 수도를 수호해냈습니다.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이 모두 전사할 정도로 당나라 군대에는 궤멸적인 타격이었습니다.
평양성 안의 장병들은 성 밖으로 출격하여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승리는 평양성 방어 전쟁의 정점이었으나, 고구려의 국력이 바닥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666

[연개소문의 사후 권력 분점]

철권 통치자 연개소문이 평양성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발생합니다. 외세보다 무서운 내부 분열이 평양의 성벽 안에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맏아들 연남생과 동생들인 연남산, 연남건 사이의 불신이 심화되어 내전 수준으로 번졌습니다.
평양성의 지배층이 분열되자 고구려 전역의 지방 세력들도 동요하며 국가 결속력이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이는 향후 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667

[나당 연합군의 최종 공세]

당나라 이세적과 신라 김유신의 군대가 요동을 돌파하고 평양성을 향해 남하합니다. 평양성은 고구려 900년 역사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지을 포위망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당나라는 수십 년간의 실패를 거울삼아 철저하게 보급과 포위 전술을 준비했습니다.
평양성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으나 연남건을 중심으로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성들이 항복한 상태여서 평양성의 압박은 그 어느 때보다 거셌습니다.

668

[평양성 함락과 고구려 멸망]

고구려의 심장 평양성이 마침내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되며 고구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수도의 함락은 곧 제국의 종말을 의미하는 처절한 순간이었습니다.

승려 신성과 장군들의 배신으로 북문이 열리면서 연합군이 평양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보장왕과 연남산은 투항했으나 끝까지 저항하던 연남건은 체포되어 압송되었습니다.
불타는 평양성 너머로 고구려의 기상은 꺾였고, 수많은 유민들이 당나라로 끌려가는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안동도호부의 설치]

당나라가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냅니다. 점령군에 의해 통치되는 평양은 고구려인들에게 굴욕과 고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평양성의 주요 건물들은 당나라 관리들의 집무실과 숙소로 개조되어 사용되었습니다.
당나라는 이곳을 거점으로 신라와 유민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며 가혹한 통치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압제는 곧 고구려 유민들의 거센 부흥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670

[검모잠의 부흥 운동 전개]

고구려 장수 검모잠이 유민들을 모아 평양 근처에서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부흥 운동을 일으킵니다. 평양 성벽을 다시 고구려의 것으로 되찾으려는 눈물겨운 사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한성(재령)을 근거지로 삼아 평양 탈환을 노렸습니다.
신라의 지원을 받아 당나라 군대에 맞섰으나 내부 분열과 당나라의 대규모 반격으로 위기에 처했습니다.
비록 평양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으나 고구려인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676

[신라의 평양 지역 탈환]

나당 전쟁에서 승리한 신라가 평양 지역을 포함한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확보합니다. 당나라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쫓겨나면서 평양에서 외세의 직접적인 지배가 끝이 납니다.

평양성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신라의 북방 경계이자 주요 거점으로 관리되었습니다.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의 백성으로 편입되거나 북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삶을 찾았습니다.
오랜 전쟁의 불길이 꺼지고 평양성에는 잠시나마 정적이 찾아온 시기였습니다.

918

[고려 왕건의 평양 중시 정책]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평양을 고구려 계승의 상징으로 삼고 '서경(西京)'으로 승격시킵니다. 폐허가 되었던 평양성은 다시 고려의 북방 진출을 위한 기지로 부활합니다.

왕건은 직접 평양을 방문하여 성벽을 수축하고 주민들을 이주시켜 도시를 재건했습니다.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견제하고 영토를 넓히려는 의도였습니다.
이후 서경은 고려 왕조 내내 개경에 버금가는 제2의 수도로서 막강한 권위를 누리게 됩니다.

922

[서경 성벽의 대대적 수축]

태조 왕건의 명령으로 고구려 평양성의 옛 터를 따라 고려식 성벽이 견고하게 다시 쌓입니다. 고구려의 축성 기술 위에 고려의 기술이 더해져 북방 최강의 요새가 완성되었습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서경의 중심부인 내성과 외곽의 나성이 다시 제 모습을 갖추며 도시의 활기가 돌아왔습니다.
이 성벽은 훗날 서희의 외교 담판과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후방 거점이 되었습니다.

947

[정종의 서경 천도 시도]

고려 정종이 보수적인 개경 세력을 견제하고 북진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서경으로의 천도를 계획합니다. 서경 평양성은 다시 한번 일국의 수도가 될 기회를 맞이합니다.

왕식렴 등 서경 세력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궁궐 공사를 시작하는 등 박차를 가했습니다.
하지만 개경 귀족들의 거센 반대와 정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천도 계획은 무산되었습니다.
비록 실패했으나 평양성은 고구려의 적통을 잇는 장소로서의 정치적 가치를 다시금 입증했습니다.

1135

[묘청의 서경 반란과 대위국]

승려 묘청과 서경 세력이 '칭제건원'과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며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평양성을 근거지로 삼아 새로운 국가인 '대위국'을 선포했습니다.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자는 기치를 내걸고 평양성의 견고함을 믿고 중앙 정부에 저항했습니다.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이 평양성을 포위하고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공성전을 벌였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 내부의 문벌 귀족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고구려 계승 의식의 분출로 해석됩니다.

1136

[김부식의 서경 성 함락]

식량 부족과 내부 분열로 고립되었던 서경 평양성이 김부식의 관군에 의해 함락됩니다. 묘청의 꿈은 꺾였고 서경은 한동안 그 위상이 크게 위축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공성전 과정에서 성벽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평양성 특유의 방어력은 관군을 매우 힘들게 했습니다.
반란 진압 후 서경의 특수 행정 조직들이 해체되고 중앙의 직접적인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단재 신채호는 이 사건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1대 사건'으로 평가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1269

[최탄의 서경 반란과 원 귀속]

서경의 관리 최탄이 반란을 일으켜 평양을 포함한 북계 60여 성을 몽골(원나라)에 바치는 매국적 행위를 저지릅니다. 평양성은 잠시 고려의 품을 떠나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었습니다.

원나라는 이곳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고려의 북방을 직접 통제하는 기지로 삼았습니다.
고려 왕실은 평양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는 외교적 노력과 군사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민족의 성지였던 평양성이 타국의 지배를 받게 된 고통스러운 암흑기였습니다.

1290

[동녕부 반환과 고려 복귀]

충렬왕의 끈질긴 요구 끝에 원나라로부터 평양 지역을 돌려받고 서경의 지위를 회복합니다. 평양성은 다시 고려의 영토가 되어 북방 방어의 중추로 복귀했습니다.

동녕부가 요동으로 옮겨가면서 평양의 행정 체계가 다시 고려식으로 정비되었습니다.
오랜 외국 지배로 황폐해진 성내 시설들을 보수하고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습니다.
고려 말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평양성의 방어력을 다시금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388

[요동 정벌군과 위화도 회군]

이성계가 이끄는 요동 정벌군이 평양을 거쳐 의주로 향하던 중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합니다. 평양성은 고려 왕조가 저물고 조선이 탄생하는 역사의 거대한 현장을 지켜보았습니다.

당시 우왕은 평양성에 머물며 이성계의 군대를 독려했으나 회군 소식을 듣고 급히 개경으로 복귀했습니다.
평양성은 정벌군의 병참 기지 역할을 수행하며 막대한 군사 물자가 집결되었던 곳입니다.
이 사건 이후 평양은 조선 왕조의 창업 과정에서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주목받게 됩니다.

1592

[임진왜란 고니시의 평양 점령]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부대가 평양성을 함락시킵니다. 조선 선조는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했으며, 평양은 일본군의 북진 거점이 되었습니다.

대동강을 천혜의 해자로 가진 평양성의 지형적 이점이 일본군의 도하 작전에 무너졌습니다.
성내의 풍부한 식량과 자원이 일본군 손에 넘어가면서 전쟁은 더욱 장기화되는 양상을 띠었습니다.
일본군은 평양성을 보루 삼아 명나라 군대의 개입을 저지하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1593

[평양성 탈환 전투의 승리]

명나라 이여송의 대군과 조선군이 연합하여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탈환합니다. 임진왜란의 전세를 완전히 뒤바꾼 육상에서의 첫 번째 대승리였습니다.

불랑기포 등 명나라의 선진 화포가 평양성벽을 강타하여 일본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렸습니다.
조선 장병들과 의병들은 지형지물을 활용해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이 승리로 일본군은 한성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조선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624

[이괄의 난과 평양성 함락]

조선 인조 시기 영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괄의 군대가 평양성을 점령하고 한성으로 진격합니다. 정예 부대였던 북방 군단의 반란에 평양성은 힘없이 문을 열어주고 말았습니다.

반란군이 평양의 풍부한 군수 물자를 확보하면서 세력이 급격히 커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중앙 정부는 평양의 함락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고 한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북방 방어 체계에 심각한 구멍이 뚫렸음을 확인한 사건이었습니다.

1627

[정묘호란과 후금의 점령]

후금(청나라)의 기병대가 압록강을 건너 단숨에 평양성까지 쳐들어옵니다. 조선군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평양성을 내어주고 강화도로 피난했습니다.

후금군은 평양성을 점령하여 조선을 압박하는 인질로 삼고 가혹한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평양 시민들은 전쟁의 공포 속에 성을 떠나 산속으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정묘조약 체결 이후 후금군이 물러갔으나 평양성은 전쟁의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1866

[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의 무역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성 근처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립니다. 평양 관민들은 이에 맞서 배를 불태우고 침략을 저지했습니다.

박규수의 지휘 아래 평양 사람들은 화공 전술을 펼쳐 이양선을 격퇴하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이 서구 열강과 무력으로 충돌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평양성은 근대적인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민족주의의 산실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1894

[청일전쟁 평양 전투]

조선의 패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군이 평양성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입니다. 현대적인 무기로 무장한 양국 군대의 격돌로 평양성은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평양성의 옛 성벽에 의지해 방어전을 펼쳤으나 일본군의 기동력에 무너졌습니다.
전쟁터가 된 평양 시가지는 잿더미가 되었고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일본은 한반도 지배권을 굳히게 되었고 평양성은 근대 전쟁의 참혹함을 겪었습니다.

1950

[6.25 전쟁 국군 평양 탈환]

한국 전쟁 중 국군 제1사단이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수도를 탈환합니다. 낙동강에서부터 시작된 반격의 결실이자 민족 통일의 희망이 평양성벽 위에 울려 퍼졌습니다.

평양 시민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국군과 유엔군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잠시나마 평양은 자유의 품으로 돌아왔으며 북진 통일의 꿈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습니다.
하지만 곧 이어진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은 다시 눈물을 머금고 평양을 떠나야 했습니다.

1990

[안학궁 및 평양성 대규모 발굴]

고구려의 옛 궁궐 터인 안학궁과 평양성벽 일대에 대한 현대적인 고고학 발굴 조사가 진행됩니다. 묻혀있던 고구려의 찬란한 문물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장수왕 시절의 웅장한 궁궐 규모와 정교한 배수 시설 등이 확인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성벽 각석들이 추가로 발견되어 평양성 건설의 구체적인 과정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이 발굴 결과는 고구려 역사를 복원하고 민족의 긍지를 되찾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200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평양성을 포함한 '고구려 고분군 및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됩니다. 인류가 함께 보호해야 할 소중한 역사적 자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고구려 성곽의 독창성과 역사적 상징성이 국제 사회로부터 공인받은 쾌거였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지키는 데 중요한 국제적 명분이 되었습니다.
평양성은 이제 한민족의 성벽을 넘어 전 인류가 기억해야 할 위대한 유산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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