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장전 (영국)

법률, 역사, 헌법, 민주주의, 인권,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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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29- 1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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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장전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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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 성립된 영국 권리장전은 국왕의 절대권력을 제한하고 의회의 주권을 확립한 세계사적 사건입니다. 가톨릭 우대와 전제 정치를 펼치던 제임스 2세가 폐위되고, 명예혁명을 통해 즉위한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의회의 요구를 수용하며 탄생했습니다. 이 문서는 단순한 법을 넘어 근대 의회 민주주의와 권력 분립의 초석이 되었으며, 이후 미국의 권리장전과 프랑스 인권 선언, 그리고 현대의 세계 인권 선언에까지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이로써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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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5

[제임스 2세의 즉위]

찰스 2세가 서거하고 그의 동생인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즉위는 개신교 중심의 의회와 잠재적인 갈등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임스 2세는 즉위 초기부터 왕권신수설을 강하게 신봉하며 의회의 권한을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공고히 하며 종교적 관용을 명분으로 가톨릭 세력 확장을 시도했습니다.
이는 잉글랜드 국교회와 의회 세력에게 큰 정치적 위기감을 안겨주었으며 향후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의회의 첫 소집]

제임스 2세 즉위 후 첫 의회가 소집되어 국왕의 수입을 승인하고 통치를 논의합니다. 초기에는 국왕에게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나 정책적 이견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의회는 국왕에게 평생 동안의 관세와 소비세 수입을 부여하며 재정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가톨릭 장교들을 군대에 배치하기 시작하자 의회는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국왕과 의회 사이의 신뢰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몬머스의 반란 시작]

찰스 2세의 사생아인 몬머스 공작이 개신교 수호를 기치로 내걸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는 제임스 2세의 왕위 계승 부당성을 주장하며 군대를 조직해 진격했습니다.

몬머스는 스스로를 적법한 계승자라 주장하며 잉글랜드 서부 지역에서 지지자들을 규합했습니다.
이 반란은 제임스 2세의 통치 초기 가장 큰 군사적 위협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반란의 전개 과정은 잉글랜드 내부의 종교적, 정치적 분열상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세지무어 전투의 승리]

국왕군이 세지무어 전투에서 몬머스의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며 승기를 잡습니다. 이 승리로 제임스 2세는 자신의 군사적 권위를 확립하고 반대파를 압도하게 됩니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 본토에서 벌어진 마지막 주요 야전으로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반란군은 훈련된 국왕군의 화력과 전술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으며 몬머스는 전장에서 탈출했습니다.
국왕은 이 승리를 발판 삼아 상비군 체제를 강화하는 명분으로 활용하게 됩니다.

[몬머스 공작의 처형]

체포된 몬머스 공작이 런던 타워에서 참수형에 처해지며 반란은 완전히 종식됩니다. 국왕은 배반자에 대한 관용 없는 처분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과시했습니다.

몬머스의 처형은 매우 잔인하게 집행되어 목격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스튜어트 왕조 내의 개신교 대안 세력이 사라지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국왕의 잔혹함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역효과를 불러왔습니다.

[피의 재판의 시작]

제프리스 판사가 주도하는 특별 재판이 열려 반란 가담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 시작됩니다. 수백 명이 처형되고 수천 명이 노예로 팔려가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Bloody Assizes'라 불리는 이 재판은 영국 사법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사건 중 하나입니다.
법적 절차는 무시되었고 국왕의 의중을 반영한 보복성 판결이 남발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제임스 2세의 전제 정치에 대한 깊은 공포와 원한을 심어주었습니다.

[상비군 강화 정책]

국왕은 반란 진압 이후에도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규모를 확대하며 상비군 체제를 구축합니다. 이는 의회의 동의 없는 군사력 운용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제임스 2세는 상비군을 통해 의회와 국민을 압박하고 자신의 권력을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특히 가톨릭 장교들을 대거 기용하며 군대를 자신의 사조직화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의회는 이를 헌법적 전통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1686

[고든 대 헤일스 판결]

법원이 국왕에게 법률의 적용을 면제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판결을 내립니다. 이를 통해 국왕은 가톨릭 교도를 공직에 임명하는 데 법적 장애물을 제거하게 됩니다.

국왕은 사법부에 압력을 가해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판결은 국왕의 '정지권'과 '면제권'이 법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으나 대중의 불신은 극에 달했습니다.
사법권이 왕권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쏟아진 결정적인 판례입니다.

1687

[신앙 자유 선언 발표]

제임스 2세는 가톨릭과 비국교도를 탄압하던 모든 형벌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선언을 합니다. 이는 겉으로는 종교적 관용을 표방했으나 사실상 가톨릭 우대 정책이었습니다.

국왕은 의회의 입법권을 완전히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법률 집행을 중단시켰습니다.
이 선언은 국교회 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샀으며 의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종교적 관용이라는 명분이 정치적 전제주의를 가리는 수단으로 활용된 사례입니다.

1688

[제2차 신앙 자유 선언]

국왕은 더욱 강력한 내용을 담은 두 번째 신앙 자유 선언을 발표하며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입니다. 이는 의회와의 관계를 회복 불능의 상태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국왕은 자신의 명령이 절대적임을 강조하며 반대파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이 시기 국왕 주위에는 가톨릭 조언자들만 남게 되어 정세 판단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의회 세력은 이제 합법적인 수단으로는 국왕을 저지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선언문 낭독 명령]

국왕은 모든 교회의 목사들이 예배 시간에 신앙 자유 선언문을 의무적으로 낭독하도록 명령합니다. 이는 국교회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라고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국왕은 교회를 자신의 선전 도구로 활용하려 했으나 이는 성직자들의 집단적인 저항을 불렀습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국왕의 명령을 거부하며 종교적 자유와 법치를 호소했습니다.
이 명령은 국가와 교회의 갈등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실책이 되었습니다.

[7인 주교의 청원]

캔터베리 대주교를 포함한 7명의 주교가 국왕의 명령에 항의하며 선언문 낭독을 거부하는 청원서를 제출합니다. 그들은 국왕의 정지권이 불법적임을 명확히 지적했습니다.

주교들은 국왕에게 직접 찾아가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제임스 2세는 이를 반역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극도로 분노했습니다.
이 청원서는 국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으며 저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주교들의 런던 타워 수감]

국왕은 청원을 주도한 7명의 주교를 선동적인 비방죄로 기소하고 런던 타워에 가둡니다. 주교들이 배를 타고 타워로 향할 때 수많은 시민들이 강가에서 그들을 응원했습니다.

주교들의 수감은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국왕의 군대 안에서도 주교들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제임스 2세는 대중의 정서를 완전히 오판하고 강압적인 통치만을 고집했습니다.

[왕자의 탄생과 위기]

제임스 2세의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가 태어나며 가톨릭 왕조의 지속 가능성이 현실화됩니다. 이는 개신교 세력에게 영구적인 가톨릭 통치에 대한 공포를 안겨주었습니다.

왕자의 탄생 전까지는 개신교도인 딸 메리가 왕위를 이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왕위 계승자가 탄생하자 의회는 무력 개입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하게 됩니다.
일각에서는 왕자가 몰래 궁으로 들여보내진 가짜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민심이 흉흉했습니다.

[주교 재판의 시작]

7명의 주교에 대한 역사적인 재판이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시작됩니다. 이 재판은 단순히 개인의 유무죄를 다투는 것을 넘어 왕권의 한계를 시험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변호사들이 주교들을 변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섰습니다.
재판 과정은 연일 런던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배심원들은 국왕의 압박과 시민들의 기대 사이에서 고뇌하며 심리를 이어갔습니다.

[주교들의 무죄 판결]

배심원단이 7명의 주교에게 전원 무죄 판결을 내리자 런던 전역이 환호성에 휩싸입니다. 이는 국왕의 사법적 전횡에 대한 국민과 사법부의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무죄 판결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시민들은 축제를 열어 기쁨을 나눴습니다.
심지어 주교들을 감시하던 군인들조차 판결 소식에 환호를 보냈습니다.
제임스 2세는 이 판결로 인해 정치적 정당성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불멸의 7인이 보낸 초대장]

주교들의 무죄 판결이 난 당일, 7명의 유력 정치인들이 네덜란드의 윌리엄 오라녜 공에게 무력 개입을 요청합니다. 이 밀서는 명예혁명을 촉발한 결정적인 문서가 되었습니다.

초대장을 보낸 이들은 휘그당과 토리당을 아우르는 핵심 인물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윌리엄에게 잉글랜드의 자유와 개신교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는 국왕에 대한 명백한 반역이었으나 의회 세력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윌리엄의 선언문 발표]

윌리엄 오라녜 공이 잉글랜드 침공의 정당성을 알리는 공식 선언문을 발표합니다. 그는 잉글랜드의 법과 자유를 회복하고 자유로운 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선언문은 잉글랜드 전역에 배포되어 윌리엄을 침략자가 아닌 구원자로 각인시켰습니다.
그는 제임스 2세의 전제 정치를 비판하며 자신의 개입이 헌법 수호를 위함임을 강조했습니다.
이 문구들은 훗날 권리장전의 핵심 내용으로 그대로 반영되게 됩니다.

[국왕군의 연쇄 탈영]

제임스 2세의 휘하 장군들과 귀족들이 윌리엄의 진영으로 대거 전향하며 국왕군은 사실상 와해됩니다. 심지어 국왕의 딸인 앤 공주마저 부친을 버리고 윌리엄 편에 섰습니다.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을 비롯한 핵심 지휘관들이 윌리엄에게 합류했습니다.
군대의 무너진 사기는 제임스 2세가 싸울 의지를 잃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정권이 교체되는 '명예혁명'의 과정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윌리엄의 토베이 상륙]

윌리엄이 이끄는 네덜란드 함대가 잉글랜드 남서부 토베이에 성공적으로 상륙합니다. 이 소식은 제임스 2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본격적인 정권 교체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기상 조건의 도움으로 윌리엄의 함대는 영국 해군의 저지를 피해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상륙 후 윌리엄은 질서 정연하게 진격하며 현지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제임스 2세는 군대를 이끌고 대응하려 했으나 내부의 배신으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제임스 2세의 1차 도주]

패배를 직감한 국왕이 국새를 템스강에 던져버리고 프랑스로 탈출을 시도합니다. 이는 국왕이 스스로 통치권을 포기하고 정부를 해체했다는 법적 해석의 근거가 됩니다.

국새를 강에 던진 행위는 왕권의 상징적 파기를 의미하며 행정적 마비를 초래했습니다.
런던은 한동안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빠졌으나 귀족들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사건은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한 헌법적 정당성을 마련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윌리엄의 런던 입성]

윌리엄 오라녜 공이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런던에 입성하여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즉각적으로 질서 회복과 임시 의회 소집을 명령했습니다.

시민들은 오렌지색 리본을 달고 윌리엄을 환영하며 자유의 도래를 축하했습니다.
윌리엄은 자신을 정복자가 아닌 평화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신중하게 행동했습니다.
그의 입성은 스튜어트 왕조의 전제 정치가 끝났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국왕의 최종적인 망명]

윌리엄의 묵인 하에 제임스 2세가 다시 한번 시도한 끝에 프랑스로 망명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잉글랜드 내에서 전제 군주제의 불씨가 사실상 꺼지게 됩니다.

윌리엄은 제임스 2세가 순교자가 되어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주를 방조했습니다.
제임스 2세는 루이 14세의 보호 아래 복위를 꾀했으나 결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망명한 국왕은 헌법상 '왕위 이탈' 상태로 규정되어 폐위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1689

[컨벤션 의회의 개회]

정식 국왕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의 앞날을 결정하기 위한 임시 의회인 컨벤션 의회가 소집됩니다. 이 의회는 새로운 헌법적 질서를 수립하는 역사적 책무를 맡았습니다.

의원들은 제임스 2세의 퇴위 여부와 차기 왕위 계승 방안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사회 계약설에 근거하여 국왕이 국민과의 계약을 어겼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습니다.
이 의회는 정식 의회는 아니었으나 혁명적 상황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기구가 되었습니다.

[하원의 왕위 공석 결의]

하원은 제임스 2세가 헌법을 파괴하고 도주했으므로 왕위가 공석이 되었다고 결의합니다. 이는 세습 왕정을 부정하고 의회가 왕위를 결정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결의안은 국왕이 가톨릭의 조종을 받아 근본 법률을 위반했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는 왕권신수설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혁명적인 사상적 전환이었습니다.
하원의 이 결의는 새로운 국왕을 추대하기 위한 법적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상원의 공석 동의]

신중한 입장을 보이던 상원도 결국 왕위가 비어있다는 하원의 결의에 동의합니다. 이로써 양원 모두가 새로운 국왕을 세우는 데 합의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귀족들은 섭정 체제를 원했으나 윌리엄의 강력한 의지에 밀려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이 합의는 잉글랜드 헌정사에서 의회가 국왕의 자격을 심사한 유례없는 사건입니다.
이제 관심은 윌리엄과 메리 중 누가, 어떤 조건으로 왕이 될 것인가에 쏠렸습니다.

[권리 선언의 최종 확정]

의회는 새로운 국왕이 지켜야 할 조건과 국민의 권리를 담은 '권리 선언'을 완성합니다. 이는 국왕의 전횡을 막고 의회의 권위를 세우는 핵심 문서였습니다.

선언문은 제임스 2세의 위법 행위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이를 반복하지 말 것을 명시했습니다.
이 문서는 조건부 왕위 계승이라는 독특한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이후 정식 법률인 권리장전으로 발전하는 원안이 바로 이 선언입니다.

[왕위 제안과 권리 낭독]

의회 대표단이 윌리엄과 메리에게 왕위를 공식 제안하며 권리 선언문을 큰 소리로 낭독합니다. 이는 국왕이 권리를 승인해야만 왕위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의식이었습니다.

화이트홀 궁전에서 거행된 이 의식은 영국 민주주의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윌리엄과 메리는 의회의 제안을 수락하며 권리 선언의 내용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로써 군주 주권이 의회 주권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이정표가 세워졌습니다.

[윌리엄과 메리 공동 즉위]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잉글랜드의 공동 국왕으로 공식 즉위합니다. 이로써 명예혁명은 제도적인 마무리를 짓고 새로운 왕조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공동 왕위는 메리의 정통성과 윌리엄의 실질적 권력을 결합한 영리한 해결책이었습니다.
두 국왕은 동등한 권위를 가졌으나 실질적인 통치는 윌리엄이 주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국민들은 이들의 즉위를 환영하며 새로운 법치 시대의 도래를 기대했습니다.

[임시 의회의 정식화]

새 국왕은 컨벤션 의회를 정식 의회로 전환하는 법안에 서명합니다. 이로써 혁명 과정에서 선출된 의원들은 합법적인 입법권을 완전히 갖게 되었습니다.

국왕의 소집 없이 열렸던 의회의 정당성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한 법적 조치였습니다.
이제 의회는 권리 선언을 법률로 확정하는 입법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행정부(국왕)와 입법부(의회)의 새로운 협력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혁신적인 대관식 거행]

새로운 국왕 선서가 도입된 대관식이 거행됩니다. 국왕은 이제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국가를 다스릴 것을 신 앞에서 엄숙히 맹세했습니다.

과거의 선서가 국왕의 개인적 도덕성을 강조했다면, 새 선서는 법적 준수 의무를 강조했습니다.
'의회에서 가결된 법률과 관습에 따라' 통치하겠다는 문구가 최초로 삽입되었습니다.
이는 국왕이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한 의식이었습니다.

[권리장전의 법전화 완성]

의회는 권리 선언을 구체화한 정식 법률인 '권리장전'을 최종 가결하고 국왕의 재가를 받습니다. 영국 헌법을 지탱하는 가장 위대한 성문법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정식 명칭은 '신민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 계승을 정하는 법률'입니다.
이 법은 국왕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구체적인 조항들을 담았습니다.
이후 영국의 모든 법률과 정치는 이 권리장전의 정신을 바탕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법 집행 정지권의 폐지]

국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법률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제임스 2세가 남용했던 특권을 박탈한 조치였습니다.

권리장전 제1조는 법의 지배가 국왕의 의지보다 우선함을 분명히 했습니다.
국왕이 자신에게 불리한 법을 마음대로 무력화하던 관행이 법적으로 종식되었습니다.
입법부인 의회의 권위가 국왕의 특권보다 높음을 확인한 조항입니다.

[면제권의 엄격한 제한]

특정 개인에게 법률 적용을 면제해 주던 국왕의 '면제권'을 불법으로 규정합니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며 국왕이 이를 임의로 수정할 수 없음을 확립했습니다.

과거 국왕들은 가톨릭 교도들을 관직에 앉히기 위해 이 권한을 오남용했습니다.
이 조항으로 인해 법률의 예외 없는 집행이 보장되는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근대적인 평등권과 적법 절차 원칙의 초기 모델이 된 조항입니다.

[특별 교회 법원의 금지]

교회 문제를 다루기 위해 국왕이 설치했던 고등 위원회 등의 특별 법원을 불법으로 규정합니다. 모든 사법 절차는 기존의 정식 법원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종교적 탄압의 도구로 사용되던 비공식 재판소들을 완전히 철폐한 것입니다.
사법권의 독립과 단일성을 확보하여 국왕의 자의적 재판을 방지했습니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호하는 사법적 정의의 실현이었습니다.

[조세 법률주의의 확립]

의회의 동의 없이 국왕이 임의로 세금을 징수하는 행위를 전면 금지합니다. 국왕의 재정권이 의회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 결정적인 변화였습니다.

국왕이 독자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없게 되자 의회와 협의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민주주의 원칙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정부 예산에 대한 의회의 심의권이 확립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국민의 청원권 보장]

국민이 국왕에게 청원할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이를 이유로 처벌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국민의 목소리가 권력에 닿을 수 있는 통로를 법으로 보호했습니다.

7인 주교 사건처럼 정당한 의견 제시가 탄압받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입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는 근대적 기본권의 초기 형태가 법문화된 것입니다.
정치 권력에 대한 국민의 감시와 참여를 보장하는 중요한 조항입니다.

[평시 상비군 유지 금지]

의회의 동의 없이 평화 시기에 군대를 유지하는 것을 불법으로 선포합니다. 군사력이 국민을 탄압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국왕은 이제 매년 의회로부터 군대 유지를 위한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는 군사권에 대한 민간 통제(Civilian Control) 원칙을 확립한 선구적 사례입니다.
국가 안보와 민주주의의 균형을 맞추려는 의회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개신교도의 무장 권리]

개신교도 신민들이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위용 무기를 소지할 권리를 인정합니다. 이는 가톨릭 전제 정치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권리로 간주되었습니다.

국왕이 특정 종교인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탄압하는 것을 막기 위한 보호책입니다.
이 조항은 훗날 미국 헌법 수정 제2조(무기 소지권)의 직접적인 모델이 되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국가가 함부로 침해할 수 없음을 강조한 대목입니다.

[자유 선거의 원칙 확립]

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는 자유로워야 함을 명시합니다. 국왕이나 행정부가 후보자 추천이나 투표 과정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전제 조건을 법제화한 것입니다.
국왕의 입맛에 맞는 인물들로 의회를 채우려는 시도를 차단했습니다.
선거의 공정성과 독립성이 의회 주권의 핵심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의회 내 면책특권 보장]

의회 내에서의 발언이나 토론에 대해 외부 법정에서 책임을 묻거나 심문할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의원들이 보복의 두려움 없이 소신껏 발언할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의원들이 누리는 '면책특권'의 기원입니다.
국왕의 정책을 비판하는 의원들을 사법적으로 탄압하던 관행을 뿌리 뽑았습니다.
입법부의 독립적인 심의 권한을 보호하는 가장 강력한 법적 장치입니다.

[잔인한 형벌의 금지]

과도한 보석금 청구와 비정상적이고 잔인한 형벌의 부과를 금지합니다. 국가의 사법권이 개인의 인권을 유린하는 것을 막기 위한 현대적 인권의 핵심 조항입니다.

고문이나 가혹한 처벌을 법적으로 제한하여 인도주의적 법 원칙을 수립했습니다.
이 문구는 훗날 미국 권리장전 제8조에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인용되었습니다.
근대 형사 사법 체계에서 인권 보호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조항입니다.

[배심원 자격의 명시]

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원은 적법하게 선출되어야 하며, 특히 반역죄 재판의 배심원은 자유민이어야 함을 명시합니다. 재판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배심원 매수나 부적격자 선발을 통해 재판 결과를 조작하려는 시도를 막았습니다.
사법 행정에 일반 시민이 공정하게 참여하는 전통을 강화했습니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임을 재확인했습니다.

[유죄 전 몰수 금지]

정식 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 피고인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벌금을 부과하는 약속을 불법으로 규정합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재산권 보호 측면에서 강화했습니다.

권력자가 상대방의 경제적 기반을 먼저 무너뜨리고 재판하는 전횡을 방지했습니다.
사유 재산권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신성한 권리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법치주의가 경제적 자유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의회의 빈번한 소집 의무]

국정 논의와 법률 수정을 위해 의회가 빈번하게 소집되어야 함을 규정합니다. 국왕이 의회를 장기간 열지 않고 독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입니다.

제임스 2세와 찰스 1세처럼 의회를 무시하고 통치하는 행태를 원천 봉쇄했습니다.
이 조항 덕분에 영국 의회는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관례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의회가 명실상부한 국가 운영의 핵심 기관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톨릭 왕위 계승 금지]

가톨릭 신자이거나 가톨릭 신자와 결혼한 인물은 영국의 왕위를 계승할 수 없음을 법으로 못 박습니다. 이는 국가 안보와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극단적인 조치였습니다.

제임스 2세와 같은 가톨릭 군주에 의한 전제 정치 재발을 막으려는 의도였습니다.
영국 국교회를 수호하고 국가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한 헌법적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이 원칙은 현대까지도 영국 왕실의 계승 법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1690

[정당성 재확인 법안 통과]

컨벤션 의회가 수행한 모든 입법 활동의 효력을 영구히 승인하는 법안이 통과됩니다. 이는 혁명 초기 조치들의 법적 결함을 완벽히 보완하는 마무리 작업이었습니다.

국왕의 정식 소집 없이 열렸던 의회의 모든 결정을 사후 승인하여 법적 연속성을 확보했습니다.
이로써 권리장전은 어떠한 반대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법적 지위를 얻었습니다.
영국 헌정사가 평화롭고 논리적으로 완성되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701

[왕위 계승법의 제정]

권리장전의 원칙을 더욱 확장하여 사법권의 독립과 구체적인 계승 서열을 정한 왕위 계승법이 통과됩니다. 이는 권리장전과 함께 영국 헌법의 양대 기둥이 됩니다.

법관의 임기를 보장하고 국왕이 임의로 파면할 수 없도록 하여 사법 독립을 완성했습니다.
하노버 왕조로의 계승을 확정하여 영국의 정치적 안정을 꾀했습니다.
권리장전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입헌 군주제의 기틀을 더욱 단단히 다졌습니다.

1791

[미국 권리장전의 탄생]

영국의 권리장전 정신을 계승한 미국의 수정 헌법 10개 조항이 비준됩니다. 이는 영국의 법 전통이 인류 보편의 인권 문서로 진화한 역사적 순간입니다.

표현의 자유, 무기 소지권, 잔인한 형벌 금지 등 많은 조항이 1689년의 문구를 차용했습니다.
미국은 이를 성문 헌법의 핵심으로 삼아 국가 권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했습니다.
영국의 씨앗이 신대륙에서 더욱 강력한 민주주의의 꽃으로 피어난 결과입니다.

1948

[세계 인권 선언의 선포]

유엔이 채택한 세계 인권 선언의 철학적 기반에 영국의 권리장전이 깊이 관여하고 있음이 확인됩니다.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개인을 지키는 인류 공동의 약속이 수립되었습니다.

공정한 재판, 신체의 자유, 정치적 참여권 등은 1689년 영국 의회의 요구에서 시작된 것들입니다.
3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영국 민주주의의 유산이 전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되었습니다.
권리장전은 단순한 영국의 법이 아닌 인류 문명의 위대한 자산으로 평가받습니다.

2017

[밀러 판결과 권리장전]

영국 대법원이 브렉시트 절차에서 의회의 승인이 필수적임을 판결하며 권리장전을 주요 근거로 인용합니다. 300년 전의 법이 현대의 국가적 위기에서도 살아 움직임을 증명했습니다.

정부가 의회가 제정한 법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조약을 파기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인했습니다.
권리장전 제1조(법 집행 정지 금지)가 21세기에도 유효한 헌법적 구속력을 가짐을 보여주었습니다.
의회 주권이 영국의 변하지 않는 최상위 원칙임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 판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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